제목: 십자가,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1)
본문: 여러 본문
설교자: 최종혁
지난 시간에는 십자가의 중요성(중심성)을 살펴봤다. 십자가는 유대인에게는 하나님의 저주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거리끼는 것이었다. 이방인에게는 흉악한 범죄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미련한 것이었다. 하지만 십자가는 구원 받는 믿음의 핵심이었다. 십자가가 하나님의 구원하는 능력이며 지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 믿음의 핵심이 되었고, 따라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중심에 두고 복음을 전했다. 교회가 하는 모든 일의 중심에는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사실이 있었다.
그럼, 이 모든 일은 어쩌다 보니까 이렇게 된 것일까? 의도하지 않았고 원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되셨고, 교회는 어떻게든 그것에 의미부여를 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만약에 그랬다면, 십자가는 잘해봐야 비폭력 평화주의의 신기한 사례정도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십자가는 의도된 것이고, 예수님께서 원하셨던 것이다. 십자가 전에 예수님께서 계셨던 다락방과 겟세마네에서 있었던 일들을 중심으로 이 사실을 살펴보자.
반드시 되어야할 일
제자들과의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하시면서 예수님은 “고난을 받기 전에” 제자들과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다고 말씀하셨다(눅 22:15). 그리고 떡과 잔을 그들과 나누시면서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다(눅 22:19). 떡에 대해서는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고 말씀하셨고(눅 22:19), 잔에 대해서는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고 하셨다(눅 22:20). 즉, 떡과 잔은 고난 받고 죽으실 예수님의 실제 몸에 대한 상징이었고, 예수님은 그것을 통하여 자신을, 특별히 그 죽음을 기념하라고 하신 것이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하다. 누군가 희생을 해야 여러 사람이 살 수 있는 선택의 순간에 주인공이 희생을 자처하면서, “오늘같이 밝은 달이 뜨는 날에 한번씩 나를 기억해달라”는 식의 유언을 남기고 적진에 뛰어들거나 하는 그런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그럴 때는 항상 그들이 함께 했던 과거의 추억이 슬로우 모션으로 지나간다.
하지만 예수님은 단지 그런 면에서 “나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즉, 과거에 예수님와 함께 했던 날들을 추억하고, 그분의 죽음을 안타까워 하면서 한번씩 기억해 줄 것을 의도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일어나지 말았어야할 안타까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미 이런 일이 있어야할 것을 알고 계셨고, 그 사실을 알리셨을 뿐이다.
사실 이 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고백했을 때, 예수님은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그분의 교회를 세우실 것을 말씀하셨고, 그리고 바로 이어 이 말씀을 하셨다.
마 16: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이전에도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암시적으로, 간접적으로, 비유적으로 말씀하셨던 적이 있지만(예, 요 3: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씀하신 것은 이때부터가 시작이었고, 복음서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은 세 차례에 걸쳐서 자신이 고난을 당하고 죽을 것과 부활하실 것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다.
이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죽임을 당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전에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즉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당할 것을 말씀하셨다. 이들이 예수님이 죽임을 당하는 일에 있어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될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것도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단순히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신 것이 아니었다. 분위기를 보니 이제 이런 일이 벌어지겠구나하는 예상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말씀을 잘 보면 “살아나야 할 것을”이라고 되어 있다.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헬라어 ‘데이’가 사용되었다. 영어의 ‘must’이고, 우리말로는 ‘반드시 -해야 한다’는 의미다.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의 필연성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셔야만 했다. 이것이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할 일이 아니라면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고난을 피하고 생명을 보존하고 싶으면,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으면 되었다. 분위기가 좋지 않으면, 좀 괜찮아질 때까지 조용히 있으면 시골에서 지내셨어도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가셔야했다.
눅 9:51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예수님은 굳은 결심을 하시면서까지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셨다.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셔야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믿었던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당황스러운 상황이었을 것이다. 자기 민족의 구원자라 생각했던 예수님이 지금 민족의 지도자들의 손에 죽게 될 것을 말씀하시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처음 이 말씀을 하셨을 때 베드로는 절대로 그런 일이 있지 않을 것이라며 예수님을 책망하기도 했었다(마 15:22). 그런데, 그런 베드로를 예수님은 더욱 엄하게 책망하셨다.
마 16: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이 순간 베드로는 마치 언제나 하나님의 일을 반역하는 사탄과 같았다. 물론, 베드로가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모두 알면서 의도적으로 예수님의 죽임 당하심을 반대했던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두번째 수난 예고를 하셨을 때의 상황을 누가는 이렇게 기록했다.
눅 9:44–45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리라 하시되 45그들이 이 말씀을 알지 못하니 이는 그들로 깨닫지 못하게 숨긴 바 되었음이라 또 그들은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베드로 뿐 아니라 제자들 모두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제대로 들은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표면적인 의미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왜일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은 그들이 고백한 것처럼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그들 민족의 구원자가 될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가져올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방 나라들을 굴복시키고, 이스라엘을 그 통치의 중심에 둘 왕이신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 후에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은 예수님에 대해서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눅 24:21)라면서, 이런 기대를 가지고 있었음을 표현했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도 제자들은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행 1:6)라고 물었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메시야의 오심은 이런 의미에서의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의미했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히려 자기 민족의 지도자들에 의해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니,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었던 제자들에게 있어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었던 것이다. 이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면, 유대인의 지도자들과 힘을 합하여 로마에 대항하여 싸워 승리할 것이라고 하셔야 말이 됐다. 만약 그들이 지금까지 보았던 것처럼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서 거절한다면, 예수님은 그들부터 먼저 굴복시키고 나라를 회복하신다고 하셔야 말이 됐다. 어떤 시나리오가 됐든 메시야가 고난을 당하여 죽임을 당한다는 내용이 들어가면 안되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을 하시니 제자들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 그동안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능력도 제자들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설령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유대인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대적하여 죽이려고 한다고 해도, 예수님은 충분히 그들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제자들은 알고 있었다.
예수님께 음식이 부족한 것이 문제될 수 없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수천 명을 먹이시는 모습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아프고 병든 것이 문제가 될 것도 아니었다. 예수님은 수 많은 병자를 고치셨고, 심지어 죽은 자도 살리셨다. 사람을 파멸로 이끌었던 귀신들도 예수님 앞에서는 아무런 힘을 쓸 수 없었고, 그분의 명령에 따라야만 했다. 심지어 거센 파도와 바람도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잠잠해졌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상황이라면, 힘이 없는 것도 아니고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 상황이 그렇게 되게 내버려두실 이유를 제자들은 찾지 못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런 일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고 강하게 말했던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마치 스스로 메시야인 것을 부정하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반대로 예수님은 그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며,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누가가 기록한 세번째 예수님의 수난 예고에는 왜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언급이 있다.
눅 18:31–34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32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33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34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여전히 제자들은 깨닫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제자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메시야의 고난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구약 성경에 기록되어 있었고, 따라서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도 마찬가지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눅 24:25–27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메시야의 고난은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면서 이번에 예수님은 실제로 어떤 말씀들이 있었는지를 자세하게 설명해 주셨다. 이 말씀이 성경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이 참 안타깝지만,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말씀들은 많이 있다. 예수님은 창세기 3:15의 “여자의 후손”에 대한 약속에서 시작하셨을 것이다.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메시야에 대한 첫 약속인 이 말씀에서도 하나님은 뱀(사탄)이 메시야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을 말씀하셨다. 이후에 하나님은 메시야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올 것이고, 유다 지파, 다윗의 자손으로 올 것도 말씀해 주셨다. 다니엘 9:25은 메시야가 올 시기에 대해서 말하고(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내린 후 69 이레가 지난 후), 미가 5:2은 장소에 대해서 말한다(베들레헴). 동정녀의 몸을 통해 태어나게 될 것도 성경은 예언했다(사 7:14).
특히 메시야의 고난과 관련하여 반드시 포함되었을 두 말씀이 있다면 시편 22편과 이사야 53장일 것이다.
시편 22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난과 그 후의 영광에 대한 예언적 말씀이다.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1절의 시작(“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을 그대로 인용해서 말씀하기도 하셨고, “다 이루었다”(요 19:30)고 하신 말씀은 시편 22편의 마지막 말씀인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그것이 성취되었다)”와 의미 상 거의 동일하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시편 22편을 다 암송하여 말씀하셨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진위는 알 수 없지만, 이 시편 22편이 메시아의 십자가 고난에 대해서 말하고, 예수님께서 실제로 이 말씀을 십자가 위에서 마음에 두셨음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시편 22편은 메시야가 사람들의 조롱을 당할 것을 예언했다(6-8절). 메시야는 하나님을 의지하지만, 그로 인해서 사람들의 조롱을 당할 것이다. 특히 시편 22편은 메시야가 경험하게 되는 육체적인 고통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메시야는 뼈가 어그러지는 고통을 당할 것이고(14절), 극심한 갈증을 겪게 될 것이다(15절). 16절에는 “수족을 찔렀나이다”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는 십자가에 대한 분명한 묘사다. 뼈를 셀 수 있다는 것은(17절) 옷이 벗겨진 상태를 의미하고, 그 옷을 사람들이 제비를 뽑아 나눠가질 것도 예언되어 있다(18절).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모두 성취된 예언들이다.
이사야 53장도 메시야의 고난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하는 구약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사실 52:13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은 특별한 자신의 “종”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이 종은 타인들보다 상한 모습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지극히 높여서 존귀하게 하여 나라들을 놀라게 하실 것을 말한다. 뒷부분이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메시야의 모습인데, 하나님은 그 전에 메시야가 고난을 받을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53:1-3은 메시야의 고난은 결국 사람들이 그를 메시야로서 거절했기 때문임을 말한다.
사 53:1–3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2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메시야를 통해 복음이 선포되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만, 사람들은 그 말을 믿지 않고 그를 귀하게 여기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를 거절한 사람들에 의해 고난을 받게 된다.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사람들은 이런 고난이 그의 죄로 인한 결과라고 생각할 것이다.
사 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하지만 9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는 아무런 죄가 없이 이런 고난을 당할 것이고, 7절은 그런 억울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묵묵히 그 모든 고난을 당할 것도 예언했다. 메시야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고난당할 것이 분명히 예언되어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예언되었다는 의미는 단지 그런 일들이 일어날 것을 성경이 기록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 모든 일들을 계획하셨고 이루실 것이라는 의미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메시야의 고난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표현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일은 반드시 성취되어야 한다. 이 사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향해 더 가까이 가시면서 계속해서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또한 그 과정에서 함께 드러나는 사실은 십자가는 예수님이 선택하신 길이며, 우리를 위한 길이라는 사실이다.
다락방에서
이제 다시 십자가를 앞두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식사를 하셨던 다락방으로 돌아가보자. 요한은 그 장면을 이렇게 시작했다.
요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 13:3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예수님은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알고 계셨다. 막연하게 이제 죽겠구나 정도를 아셨던 것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를 예수님은 모두 알고 계셨다. 유다가 배신할 것, 제자들이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떠날 것, 특히 베드로가 3번 예수님을 부인할 것도 예수님은 모두 알고 계셨다.
마 26:20–25 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 21그들이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22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나는 아니지요 23대답하여 이르시되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24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25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마 26:31–35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32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33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34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35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아시면서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고, 그들의 발을 씻기셨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고, 그들을 위로하셨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아시면서 기꺼이 십자가의 길을 택하셨다. 어떤 일은 이렇게 힘든 줄 알았으면 시작도 안했겠다는 생각이 든다. 모르고 할 수는 있어도, 알면 못하는 그런 일이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해 보면 정말 그렇다. 모르고 그런 일을 당한 것이라면 그나마 이해는 되는데, 모든 것을 알면서 그 길을 선택했다는 것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신 것이다.
실제로 예수님은 선택을 할 수 있으셨다. 요한복음 13:3은 예수님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을 아셨다고 말한다. 요한복음 3:35도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라고 말한다. 모든 것에 대한 권세를 예수님이 가지고 계셨던 것이다. 특히 십자가 죽음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 10: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할 일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예수님의 자발적인 선택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 선택권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에 마지 못해서, 정말로 하기 싫은 일을 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에 기꺼이 이 일을 선택하셨다. 모르고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알고 선택하셨다.
그래서 이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함께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이다.
눅 22:15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예수님은 오히려 이 때를 기다리셨다. 배반, 치욕, 억울함, 조롱, 고통이 이어질 것을 알았지만, 그 모든 것의 이유를 선포하는 때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물론, 예수님은 여전히 제자들이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셨다. 이해를 기대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알려주기를 원하셨을 뿐이다. 제자들은 나중에 그 의미를 알게 될 것이었다.
눅 22:19–20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0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몇 가지 사실들에 주목해 보자.
첫째로, 예수님은 자신이 죽을 것을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자기 몸을 준다고 하셨고, 피를 붓는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분명 죽음에 대한 표현이다. 예수님께서 “기념하라”고 하신 것도 예수님과의 즐거웠던 추억 같은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몸과 피로 상징되는 죽음이었다.
둘째로, 예수님은 타인을 위하여 죽을 것을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죽음은 자신을 위한 죽음이 아닌 타인을 위한 희생의 죽음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를 위하여”라는 표현을 반복해서 사용하셨다. 예수님 자신이 이 죽음의 이유가 아니었던 것이다. 예수님 자신에게 이 죽음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그것을 알고 계셨다. 이 죽음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었고, 예수님은 기꺼이 그들을 위해 죽으셨다.
셋째로, 예수님은 죽음을 통해 새 언약을 세우셨다. 새 언약은 대표적으로 예레미야와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된 언약이다(렘 31장; 겔 36장). 특별히 새 언약에서 하나님은 마음을 새롭게 하실 것과 완전한 죄 사함을 약속하셨다.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님께서 하실 일이었고, 완전한 죄 사함이 바로 예수님께서 죽음을 통해 이루실 일이었다.
마 26: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예수님의 피는 언약을 인치는 언약의 피이기도 했고, 또한 죄를 사하는 희생의 피이기도 했던 것이다.
넷째로, 예수님은 유월절의 만찬(떡과 잔)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명하셨다. 그동안 유월절의 만찬은 하나님의 오래된 구원(출애굽)과 언약을 기억하게 하는 시간이었다. 그 때 죽는 것은 오직 유월절 양 뿐이었다. 유월절 양의 죽음으로 한 가족이 구원을 얻게 되었던 것이 유월절이 기억하는 희생이었다.
이제 예수님은 그것을 바꾸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오랜 시간을 지켜온 유월절이 예수님의 이 말씀으로 끝났고, 이제 오랜 시간 지켜가야 할 주의 만찬이 시작되었다. 이것의 교회의 예식이 되었다. 그리고 이 예식을 통해 기념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 특별히 죽임 당하신 예수님이시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명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해주고 싶으셨던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였다. 십자가의 길에는 상상하지 못할 고통이 있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통해 무엇을 이루게 될 것인지를 바라보고 계셨다. 예수님은 자신의 고통이 아니라 인류의 고통을 바라보셨고 그들의 구원을 바라셨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바로 이 사실에 주목하여 이렇게 말했다.
히 2:10–12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11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12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12절 말씀은 예수님의 고난을 예언했던 시편 22:22에서 인용되었다. 예수님은 그 고난을 통해 많은 이를 구원하여 하나님께로 이끌어 그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할 것을 바라보시고, 기꺼이 십자가를 향하셨다는 것이다. 이사야 53장도 메시야의 고난의 목적을 분명히 말한다.
사 53:11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예수님은 그 앞에 어떤 고통이 있을지 아셨지만, 아버지의 뜻에 따라, 우리를 위하여, 이 고난의 길을 기꺼이 선택하셨다.
겟세마네에서
다락방에서 나온 예수님과 제자들은 감람 산의 겟세마네로 향했다. 요한에 따르면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익숙한 장소였고, 예수님을 팔 유다도 잘 알고 있는 장소였다(요 18:1-2). 따라서, 유다의 배신을 알고 계셨던 예수님은 다른 곳으로 가실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이 일이 이루어져야 함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당황스러운 것은 그런 예수님이 그 사실로 인해서 매우 고통스러워 하셨다는 것이다. 뭔가 담담하게 앞으로의 일들을 마주하실 것 같은데 예수님은 고민하고 슬퍼하셨다(마 26:37).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에게는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말씀하셨다(마 26:38). 모든 것을 아시고 선택하신 이 십자가를 앞두고 이제 와서 뭔가 후회하시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갑자기 겁을 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예수님의 고민과 슬픔은 그런 후회나 두려움은 아니었다. 예수님은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아버지께 기도하셨다(마 26:39).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잔”이라는 표현이다. 잔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심판에 대한 상징으로 구약에서 자주 사용되었다.
시 75:8 여호와의 손에 잔이 있어 술 거품이 일어나는도다 속에 섞은 것이 가득한 그 잔을 하나님이 쏟아 내시나니 실로 그 찌꺼기까지도 땅의 모든 악인이 기울여 마시리로다
사람들의 조롱, 제자들의 배반, 십자가의 육체적 고통 등도 분명 고통이었지만, 예수님께 있어 가장 크고 두려운 고통, 정말로 피하고 싶었던 고통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 그 자체였다.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지시고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셔야 했다. 단 한 번도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의 멀어짐도 경험한 적이 없으신 예수님이셨다. 그런데, 이제 몇 시간 후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시 22:1)라고 소리치시게 되실 것이었다. 그 부르짖음에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으실 것이었다.
존 맥아더, “그 어떤 신자도 그렇게 죽지 않습니다. 하지만 모든 불신자는 그렇게 죽습니다. 모든 신자는 천국을 맛보며 죽습니다. 모든 불신자는 지옥을 맛보며 죽습니다. 예수님은 지옥을 맛보며 죽으셨습니다. 위로도, 은혜도, 자비도 없이 불신자처럼, 불신자와 똑같은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이런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이 예수님께서 가장 피하고 싶었던 고통이었다.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진 죄인으로서 진노의 하나님을 마주하는 고통이었다. 인류 역사 상 가장 모순되는 일이 십자가 위에서 펼쳐질 것이었다. 역사 상 유일한 상황이다. 하나님의 뜻에 따르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상황이 되었다. 이런 일은 십자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만이 이런 모순을 만들어냈다. 왜 이런 모순이 생겼을까?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은 우리가 심판을 받지 않고 구원을 받기 위한 유일한 길이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은 우리가 심판을 받는 것이 순리다.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참고 기다리셨다. 모순은 거기서 시작된 것이다. 그 상황에서 우리를 구원하기위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따른 메시야가 우리를 대신하여 심판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이 모순되는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셨다(눅 22:44).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기도하셨다(막 14:36).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기도하셨다(눅 22:42).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셨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결국 아버지 하나님의 뜻은 십자가였고, 예수님은 그 잔을 받아드셨다. 그리고 그 때, 예수님을 잡으려는 자들이 그곳에 도착했고, 그 밤에 모든 일들이 정신 없이 진행되었다.
방금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은 십자가를 원하지 않으셨다(마 26:39, 42, 44). 그렇다면, 원하지 않는 십자가를 피할 수(능력)는 없었을까?
예수님은 유다가 배신할 것을 미리 아셨다(마 26:21). 그렇다면 유다를 먼저 쫓아낼 수 있으셨다. 애초에 제자를 삼지 않는 것도 당연히 가능했을 것이다. 유다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숨을 수도 있으셨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체포하러 온 자들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었다.
마 26: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열두 군단은 문자 그대로 계산하면 7만 2천의 천사를 의미한다. 이들은 예수님이 명령만 하시면 그 자리의 모든 군인들을 전멸시킬 수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총을 겨누고 있는 저격수들처럼 명령이 떨어지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55절을 보면 예수님은 애초에 이런 상황을 만들지 않으셨을 수도 있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공적인 자리에서 붙잡기를 두려워했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 산 속이 아니라 오히려 성전으로 피했어도 될 일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원하지 않는 일이 벌어질 것을 알고 계셨고, 그런 상황을 막을 수 있는 지혜와 힘이 예수님께 있었다. 예수님은 피할 수 있으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체포되신 것일까? 무슨 다른 약점이 잡혔을까? 인질이 있었을까? 아니다. 베드로에게 하신 이 말씀을 들어보라.
요 18:11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시기로 선택하신 것이다. 그것이 아버지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뜻에 순종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반복해서 비슷한 표현으로 강조되었다.
마 26:24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마 26: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마 26:56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예수님은 어쩌다보니 십자가에서 죽게 되신 것이 아니었다. 어쩔 수가 없어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죄로 인해 하나님에서 멀어져서 멸망을 향해 가고 있는 사람들도 사랑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모든 권세를 스스로 내려놓으시고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 십자가는 그런 면에서 의도된 것이었고, 예수님께서 원하신 것이었다. 사람이 볼 때 어리석어 보이고 힘 없어 보이지만, 어리석고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랑하셔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택하셨다. 그렇게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나타내셨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를 위한 십자가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 말이 우리가 십자가의 중심이고, 우리가 십자가의 궁극적인 목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처음부터 계속 강조했던 것처럼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이었고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신다. 십자가도 마찬가지다.
사 53:10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원하사”는 즐거워하다, 기꺼이하다의 의미다.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이다. 필요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했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을까 말까다.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죽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기를 기뻐하셨다고 말한다.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기본적으로 10절 자체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상함’ 자체를 기뻐하셨다기 보다는 그것을 통한 결과를 기뻐하셨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많은 사람을 구원할 것을 아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기뻐하셨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존 파이퍼 목사는 추가적인 통찰을 제시한다. 바로 예수님께서 스스로 상함 받기를 선택하셨다는 면에 주목한 것이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받은 모든 권세를 가지시고서도 십자가를 선택하셨다. 십자가 직전까지 아버지 하나님께 이것이 정말로 아버지의 뜻인지 물으셨지만, 결국 아버지의 뜻인 십자가를 기꺼이 선택하셨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위해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질만큼 아버지를 사랑하신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그 사랑의 깊이가 예수님의 상함을 통해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곧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었다.
요 17: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존 파이퍼, “아들이 자원하여 죄에 대한 배상의 고난을 스스로 짊어지셨을 때, 갈보리로 가는 길의 모든 발걸음은 온 우주에 이 메시지를 메아리치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무한한 가치가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나를 구원한 것만으로 그 목적을 다한 것이 아니다. 십자가가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사실은 십자가를 생각할 때 우리의 시선이 나에서 끝나면 안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내가 구원 받아서 좋다는 생각으로 끝나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분이신지, 얼마나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신지를 드러냈다. 예수님의 한없이 낮아지심은 하나님의 하나님이 높으심을 드러낸 것이다. 그래서 에베소서 1장에서 바울은 우리의 구원에 있어 하나님의 택하심과 예수님의 구속하심, 그리고 성령님의 인치심을 모두 언급한 후에 이렇게 마무리했다.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4).
예수님께서 그 십자가의 상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셨던 것처럼, 그 십자가로 구원을 받은 우리도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