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시작할 때 확신한 것을 끝까지 잡으라

본문: 히브리서 3:7-19

설교자: 최종혁

유다서 말씀에 약간의 혼란을 느낄 수 있다. 기본적으로 유다서 말씀은 “사랑하는 자들”과 “이 사람들”을 구분한다. “사랑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고, 하나님 안에서 사랑을 얻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이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이들은 멸망을 향해 가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육에 속한 자고 성령이 없는 자다.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으로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다. “사랑하는 자들”과 “이 사람들”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도 없어 보인다. 따라서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권면은 이 사람들을 대항해서 싸우라는 외적인 싸움에 대한 말씀으로만 들린다. 하지만 이 두 그룹이 만나는 지점이 있다. 거기서 혼란이 생긴다.

유다서 말씀이 편지로서 교회에 전달된 상황을 생각해 보자. 어느 주일 아침, 예배를 위해 모인 교회 앞에 교회의 장로가 손이 편지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 편지는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이자 예루살렘의 영향력 있는 지도자인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가 쓴 편지였다. 모두를 경청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유다는 성도에게 위로와 확신을 주는 인사로 편지를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자신이 이 편지를 왜 보내는지를 밝힌다. 믿음의 도를 위해 힘써 싸우라고 권면해야할 강한 필요를 느꼈다는 것이었다. 그들 가운데 가만히 들어온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유다는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그 특징을 여러 방면으로 묘사하여 그들의 실체를 드러낸다. 짧은 편지였지만, 그 내용을 듣고 있었던 거짓 교사들에게는 그 편지를 읽는 시간이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 자리에서 도망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계속 듣고 있기도 힘든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거짓 교사들, 즉 거짓을 퍼뜨리고 있는 사람들만 그랬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의 특징이 나열될 때, 불편함을 느끼는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적극적으로 거짓을 가르치고 있지 않지만, 거짓에 미혹되고 있는 사람들, 이미 미혹된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방탕한 삶의 핑계로 삼기도 하고, 삶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기 보다 내 생각대로 행할 때가 많고, 감사와 예배보다 원망과 불평하는 모습에 머물면서 괜찮다고 생각하는 거짓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다. 각자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고민이 되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그러면 나도 멸망을 향해 가는 것인가 하는 더 심각한 고민을 하기도 했을 것이다.

즉, 유다서의 “사랑하는 자들”과 “이 사람들”은 이론적으로는 명확히 구분되지만, 현실에서는 그 둘이 만나는 지점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현실’은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신분적으로 두 그룹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만, 상태적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그래서 때로는 정말 구원 받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시간이 지나고 나서는 그렇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그래서 유다서 말씀은 배교에 대한 말씀이기도 하고, 성도의 견인에 대한 말씀이기도 하다. 결국, 시작할 때 확신한 것을 끝까지 지키는 것에 대한 말씀인 것이다. 삶의 올바른 방향에 대한 말씀이다. 먼저는 나와 다른 사람을 올바르게 분별해야 한다. 하지만 그 분별의 결과는 정죄가 되어서는 안된다. 거기서 출발해서 올바른 방향으로 가야 한다. 그것이 참된 성도의 특징이다.

이것이 구원 받은 자의 삶을 보는 올바른 관점이다. 그런데, 이것이 누군가에게는 혼란스러운 말처럼 들린다. 구원 받았으면 받은거지, 그걸 왜 지켜야하느냐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렇다. 한번 확신했으면 된거고, 그 이후의 삶은 열심히 살면 좋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서 구원 받지 않았다고 말하면 안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렇다. 연약한 사람도 있는건데, 그걸 가지고 구원을 받았느니 안받았느니 하는 것은 너무 한 것 아니냐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그렇다. 심지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경우, 이렇게 구원을 지켜야 한다는 말은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 무언가를 더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게 느껴질만한 요소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또한 그런 생각이 모두 틀린 생각이라고 할 수도 없다. 하지만, 성경이 우리에게 믿음을 지킬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도 사실임을 알아야 한다. 나에게 모호하고 애매하게 느껴지는 이런 부분에 있어 성경이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바라보는지 알고, 나도 그렇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성경 어디에서도 너희가 구원은 받았으니 천국에는 가겠지만, 이렇게 사는 것이 좋지는 않다는 식으로 구원 이후의 삶을 묘사하지 않는다. 구원과 그 이후의 삶이 분리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구원의 확신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그 확신의 근거를 구원 받은 때를 아는 것이나, 구원 받은 말씀을 아는 것에서 찾지 않는다. 침례 받은 것도 마찬가지다. 너희가 침례를 받았으니 구원 받은 것은 확신할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오해하지는 말라. 구원 받은 사람이 그런 것을 아는 것이 문제가 있다는 것이 아니다. 구원과 관련된 경험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도 아니다. 다만, 성경은 그런 것들로 구원을 확신하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 교회 안에서 성장하여 구원 받은 사람은 그런 특별한 날이나 말씀을 알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확신의 객관적 근거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있다. 아버지 하나님의 주권과 사랑, 아들 하나님의 영원하고 완전한 대속,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보증이 우리가 구원을 확신할 수 있는 객관적 근거다.

하지만 주관적인 근거는 우리에게 있다. 바로 믿음의 열매, 순종이다. 구원 받은 사람이 확신에 있어 흔들리기도 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주관적 요소가 확신에는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참된 믿음을 가진 자는 이런 열매 맺기를 사모하여 실제로 열매를 맺는다는 점이다. 애초에 그것이 구원의 의미이기 때문에 그렇다. 구원과 그 이후의 삶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삶에 큰 의욕이나 열정이 없는 사람을 가리켜 ‘태어났으니까 사는 것 같은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구원 받은 자들은 태어났으니까 사는게 아니라 살기 위해 태어났다.

고후 5: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2: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구원은 ‘거듭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생을 누리는 것’이다. 순종으로 영생을 누리려고 하지 않는 사람을 ‘그래도 거듭나긴 한 사람’이라고 성경은 말하지 않는다. 구원과 그 이후의 삶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애초에 구원의 목적이 그 삶에 있다. 구원에 합당한 삶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일 뿐 아니라 목적이다. 그런 삶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릴 구원하셨다. 그래서 구원에 합당한 삶은 그렇게 살 수 있으면 좋겠다는 권면이나 제안이 아니라 언제나 명령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

이것이 우리가 ‘애매하다’고 느끼는 영역에 대한 성경의 관점이다. 따라서 믿음을 지키는 삶, 열매 맺는 삶, 순종에 대해 말하는 것은 믿음에 무엇을 더하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 받은 믿음 자체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히브리서가 이런 면에 있어 매우 중요한 서신이라 할 수 있다. 히브리서는 매우 실제적인 서신이다. 저자는 설교자로서 교회 안에서 실제로 드러나는 문제적 현상을 설교하듯이 기록했다.

이 문제적 현상은 지금까지 우리가 말했던 영적인 ‘애매함’이다. 이 ‘애매함’은 다른 표현으로 바꿀 수도 있다. ‘미지근함’, ‘나약함’, ‘그저그럼’, ‘어정쩡함’, ‘중간에 머무름’, ‘결단하지 않음’, ‘돌아섬’ 등이 그런 표현이다. 구원과 그 이후의 삶을 분리하고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들이다. 구원의 확신은 시작에만 있으면 되고, 그것을 붙잡으려는 노력은 부차적인 것이라고 생각한 결과인 것이다. 그러면서

그래서, 과거를 보면 구원 받은 사람 같은데, 지금을 보면 아닌 것 같은 사람들이 있다. 지금은 그래도 구원 받은 사람인가 싶은데, 나중에는 아닐 것 같은 사람들도 있다. 저주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삶의 방향이 그렇기 때문이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할 것은 성경은 이런 애매한 상태를 정상적인 상태로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모습에서 벗어나라고 한다. 빛 가운데 있는 자는 빛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특히 히브리서 말씀은 그런 면에서 우리의 현재를 바라보게 하고 우리가 가야할 방향을 바라보게 한다. 어쩌면 인정하기 힘들겠지만 스스로 거듭나지 않았음을 알게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가야할 방향은 거듭나는 것이다. 어쩌면 자신이 미지근한 상태에 머물러 있음을 알게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가야할 방향은 뜨거운 상태다. 지금 내가 세상과 그리스도 사이에서 저울질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면, 거기서 그리스도께서 한걸음씩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결국 어디에 있든 더욱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라는 것,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께로 나아가라고 말하고 있다. 내가 어디에 있든 그렇게 해야 한다.

특히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리스도의 위대하심을 강조하면서 그리스도를 선택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말한다. 마치 보물을 보여주면서 그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를 설명하고 있는 상인과도 같다. 사실 그보다 훨씬 더 간절하고 절박한 심정으로 이 말씀들을 기록했을 것이다. 그의 입장에서 독자들은 지금은 교회 안에 있지만 언제든 나갈 것 같은 사람들이었다. 구원 받은 것 같아 보이지만 결국은 천국에서 보지 못할 것 같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가 모든 것을 팔아서라도 반드시 사야할 귀한 보물이 아닌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들 자신은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목자의 입장에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들에게 잘하고 있다고, 이렇게만 하면 된다고 말해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경고한다. 오늘 살펴볼 말씀은 히브리서에 등장하는 두번째 경고의 일부다. 첫번째 경고는 2:1-4에 있는데,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하여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두번째 경고는 3:7-4:13까지 이어지는데,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고 약속하신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말한다. 3:7에서 4:13의 말씀은 하나의 강해 설교라고 할 수 있다. 오늘은 앞부분인 3:7-19의 말씀을 통해 지금 우리 모두에게 주는 교훈을 살펴보자.

이 설교에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완고하게 반응하는 것이 지금 영적으로 애매한 상태에 있는 교인들의 가장 큰 문제로 보고 그 사실을 반복해서 강조한다(3:8, 13, 15; 4:7). 이것이 큰 문제인 이유는 그것이 믿지 않는 사람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과거 광야의 이스라엘에게서 같은 모습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가지고 같은 경고의 말씀을 기록한 시편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 시편 말씀을 본문으로 삼아 지금 애매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성도들을 경고한다.

본문: 기억해야 할 과거(7-11절)

3:7–11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8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9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10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에게 노하여 이르기를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11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였느니라

여기 인용된 말씀은 시편 95편으로 익명의 시편이다. 하지만 히브리서 저자는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라고 하여, 이 시편이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며, 지금의 우리에게 말하고 있음을 분명히 한다.

시편 95편의 전체적인 주제는 모여서 함께 예배하자는 것이지만. 후반부는 거기에는 순종의 삶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시편 기자는 광야의 이스라엘을 절대 따르지 말아야할 본보기로 제시했고, 그 내용을 히브리서의 저자가 인용하여 동일하게 광야의 이스라엘을 교회가 절대 따르지 말아야 할 본보기로 제시하고 있다.

시편 95편은 출애굽기 17장에 기록된 므리바 사건을 먼저 회상한다(히브리서는 8절 이후). 므리바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마실 물이 없다고 불평했고, 결국 하나님께서 반석에서 물을 내셔서 그들은 마실 수 있게 되었다. 그 사건에 대한 모세의 평가는 이러했다.

17:7 그가 그 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단순히 물이 없어서 불평했던 것 같지만, 실제로 그들은 그들을 먹이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시험했다는 것이다. 출애굽 사건은 정말로 놀라운 사건이었다. 상상하기도 힘든 하나님의 임재와 개입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체험했다. 출애굽의 과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누구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심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행하셨던 그 놀라운 일들을 보고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이 없을 때 여전히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하며 하나님을 의심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로 인해서 기뻐하기도 하고 찬양하기도 했지만, 실상 하나님에 대한 근본적인 믿음이 그들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그럼, 그 후로는 그들이 달라졌을까? 반석에서 물이 나왔지만, 그들은 달라지지 않았다. 기적은 기적일 뿐, 그들은 그 기적을 통해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했고, 하나님을 믿지 못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앞두고 그 땅에 들어가기를 거부했다. 정탐꾼들의 보고를 듣고 그들은 그 땅의 백성들을 두려워했고 절대로 그들을 이길 수 없으리라 확신했다. 밤새 울고 통곡하면서 차라리 애굽에서 죽거나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겠다고 원망했다.

이 역시 단순한 불평이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멸시하고 거역한 것이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민 14:9)면서 백성들을 책망하고 격려했지만, 그들은 오히려 여호수아와 갈렙을 돌로 쳐서 죽이려고 했다. 여전히 하나님에 대한 근본적인 믿음이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는 것이 그들의 최종 결론이었다. 이에 따라, 하나님은 직접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14: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나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그리고 이 믿음 없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심판을 선고하셨다.

14:22–23 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서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 23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심지어 이 후에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이어진 40여년의 광야 생활은 같은 죄와 심판의 반복이었다.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었고 하나님의 길을 알지 못했다. 따르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안식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이것이 광야의 이스라엘의 역사다.

이 역사를 회상하며 시편 95편의 저자는 당시의 독자들에게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라고 강력하게 경고했었던 것이다(시 95:7-8; 히 3:7-8).

하나님께서 충분히 말씀하지 않으셨던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충분히 보여주시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는 무언가가 더 필요했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을 증거는 그야말로 차고 넘쳤다. 문제는 굳은 마음, 마음의 완악함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싶지 않았다.

아마 성경에서 마음의 완악함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바로일 것이다. 출애굽의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셨던 이적과 심판을 목도하면서 바로는 계속해서 그 마음을 완악하게 했었다. 절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려는 마음이 그 안에 가득했다. 그래서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은 인정하게 되었지만, 그 하나님을 믿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바로를 보았던 이스라엘도 동일한 실수를 반복했던 것이다. 사실 실수라고 말할 수 없다. 마음의 완악함은 의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음의 완악함, 완고함, 단단함을 버리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셨고 말씀하셨고 보여주셨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안에서 싹을 틔우고 자라고 열매를 맺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멸망했다.

이스라엘은 바로(애굽)을 보고 경고를 받지 못했고 동일하게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 동일한 결과를 맞이했다. 시편 기자는 바로 그 사실에 주목해서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고 경고했던 것이고, 히브리서의 저자도 이제 동일한 사실에 주목하여 같은 경고의 말씀을 그의 독자들에게 전한다. 그리고 그 말씀은 동일하게 200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에게도 전해져서 우리의 믿음과 삶에 대한 경종이 된다.

경고: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12-19절)

권면: 조심하고 피차 권면하라(12-14절)

3:12–14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13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14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이 권면의 내용은 앞의 맥락에서 이해하기 전혀 어렵지 않다. 이스라엘 백성은 시작할 때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하지 잡지 않았다. 하나님은 확실하게 그들에게 말씀하시고 보여주셨다. 그들도 처음에는 그런 하나님을 믿었다. 하지만 그 믿음을 끝까지 견고히 잡지 않았다. 하나님을 시험했고, 의심했다. 반복되는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과 심판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상태에서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광야에서의 방황은 그들의 영적 상태와도 같았다. 그들은 약속의 땅으로 향한 것이 아니라 방황했다. 그렇게 결국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들의 마음은 완고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완고한 마음은 믿지 않는 악한 마음이 되어 하나님에게서 떨어졌던 것이다(12절).

이 전철을 따르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최악의 본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기를 그만두지는 않았다. 그런데 결국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광야에서의 힘든 과정은 다 겪었다. 그런데 최종적으로 그 결과를 누리지는 못했던 것이다.

교회 안에 있는 성도라 불리는 누군가도 같은 경험을 하게 될 수 있다. 교회에 잘 나오고 여러가지 교회의 사역에도 참여하고 나름 구원 받은 사람처럼 살지만, 결국 믿음을 끝까지 견고히 잡지 않아서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지 못할 수 있는 것이다. 받은 구원을 잃어 버린다는 말은 아니다.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이 그렇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에 따르면 밭에서 함께 자라지만 최후에 가라지로 발견되는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독자들에게 크게 두 개의 권면을 한다.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는 것을 조심하고,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피차 권면하라는 것이다. 전자는 개인적인 측면에, 후자는 공동체적인 측면이 강조된 명령이다.

1. 조심하라(12절)

첫째 권면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는 것을 조심하라고 한다(12절). 그랬을 때 결국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지기 때문이다. 불신이 가져오는 최악의 결과다.

의심과 불신은 정말 한끗 차이다. 믿기 위해서 의심하는 것과 믿지 않고 싶어서 불신하는 것은 어느 순간을 놓고 보면 차이를 감지하기 힘들다. 때로는 작은 의심으로 시작한 것이 불신으로 발전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성경이 정말 그러한지 확인하는 자세는 정말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 의심하는 것은 올바른 방향이 아니다.

정탐꾼들의 보고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을 생각해 보자. 그들은 그 상황에서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었다. 그럼, 어떻게 하면 그 상황에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들이 믿고 경험했던 하나님을 기억하면 됐었다. 가나안의 백성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강한 애굽의 군대를 하나님은 무력하게 만드신 분이시다. 그 하나님은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었고, 아브라함의 자손이 이방 나라에서 객이 되었다가 때가 되면 다시 돌아올 것도 이미 말씀하셨다. 그리고 실제로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객이 되었다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지금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을 앞에 두고 있는 상황이다. 하나님께서 그 오래된 약속도 기억하고 지키셨고, 그 과정에서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행하실 수 있는 능력도 나타내셨다. 이 모든 사실을 기억한다면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렇게 했다. 그래서 그들이 백성에게 했던 말은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였다(민 14:9). 그 땅의 백성들이 얼마나 강한지는 문제가 아니었다. 성이 얼마나 높고 튼튼한지도 문제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킬 수 있는지 없는지도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을 거역하려는 사람들의 ‘악한 마음’ 뿐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같은 상황에서 믿지 아니하려는 악한 마음을 품은 자들이 훨씬 많았다. 그들에게 과거의 하나님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믿지 않으려는 마음이 먼저 있었기 때문이다. 믿지 않으려고 하면 그럴만한 이유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힘을 다 써서 지금은 힘이 없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나님이 거기서는 대단했을지 모르지만 이 산지에서는 힘을 못쓸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때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했지만 지금도 그러리라는 보장이 어디있느냐고 주장할 수도 있다. 믿지 않으려면 얼마든지 믿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악한 마음이다.

요한복음을 보면 사람들이 계속해서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고 의혹을 품는 것을 볼 수 있다. 때로는 이들이 예수님을 ‘믿었다’는 표현도 사용되는데, 뒤에 보면 그것이 단지 피상적인 믿음으로 드러나는 것도 볼 수 있다. 그러던 중에 사람들이 예수님께 대놓고 말한다.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요 10:24).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이러했다.

10:2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믿을만한 증거가 없어서가 아니라, 믿지 않으려는 마음이 그들에게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악한 마음이다. 그런 마음을 품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믿을만 하면 하나님을 믿어 주는 것이 아니다. 믿지 않아서 손해보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나다. 믿을 수 있게 해달라고, 믿음 없는 것을 도와달라고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

2. 피차 권면하라(13절)

그런데 이 악한 마음은 완고하게 된 마음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13절). 그동안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과 행하셨던 모든 역사들이 이들의 마음에 담겨있지 않다. 마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네 가지 땅의 비유에서 사람들이 밟아서 딱딱해진 땅과 같다. 씨가 뿌리를 내릴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 마음에 심기우지 못했다. 그들의 마음이 완고했기 때문이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 원인을 “죄의 유혹”으로 말한다. 마음이 완고한 것 자체가 죄이고 그것이 다른 수많은 죄의 결과를 낳지만, 동시에 그런 죄들이 더욱 마음을 완고하게 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죄를 즐길수록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기는 더욱 힘들어 진다. 점점 더 마음이 완고해져 가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죄는 사람의 마음을 계속 더 완고하게 만든다.

나를 괴롭게 하는 어떤 사람 때문에 항상 마음이 힘들었는데, 한번 제대로 화를 폭발시키면 그 후로는 그 사람 때문에 괴로울 일이 없어질 수 있다. 그러면 그 후로 비슷한 상황을 만나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나님 말씀에 따라서 온유하게 성내지 않는 것으로 그 사람을 대하겠는가, 아니면 분노하겠는가? 분노하기가 더 쉬워진다. 여러모로 그게 좋기 때문이다.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들어오기 어려워진 것이다.

다른 영역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 얘기하는게 재밌어서 자꾸 하다보면 그것을 금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싶지도 않게 된다. 음란물을 계속 보는 사람은 그에 대한 말씀을 듣고 싶지 않다. 거짓말로 돈을 벌고 있는 사람은 거짓말에 대한 말씀을 듣고 싶지 않다. 결국 그렇게 점점 마음이 완고해져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에 들어올 자리가 없고 그런 기회조차도 막게 된다. 죄는 단순히 반복되지 않는다. 반복되는 죄는 점점 죄를 익숙하게 여기게 하고 죄를 가볍게 보게 만든다. 그렇게 내 마음을 점점 더 완고하게 만든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죄에서 빠져나오기는 더욱 힘들어진다.

이렇게 되지 않도록 하라고 주어진 명령은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라”는 것이다(13절). 여기 주목할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오늘, 매일 그렇게 하라고 하는 부분이다. 죄의 유혹이 항상 있다는 것을 안다면 이 부분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에도 동의가 될 것이다. 세상은 우리를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결국 그만큼 세상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고 생각해야 한다. 내일은 달라질거야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물론 달라지긴 할거다. 그것이 긍정적인 변화가 아닌 것이 문제다. 그러니 지금 해야 한다. 지금 죄에서 벗어나려고 해야 한다. 내일은 더 힘들다. 지금 기도 해야 한다. 지금 성경을 펴야 한다. 오늘, 매일을 그렇게 해야 한다.

또 하나 이 명령에서 중요한 것은 “피차”라는 부분이다. 각자가 자기 마음을 조심해야하지만 서로가 또한 격려하며 도와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혼자서 하기 힘든 일을 같이 하면 할 수 있다. 죄 짓는 것도 혼자는 힘든데 남이 하면 나도 할 수 있는 면이 있다. 이래도 되나 싶다가 교회의 누군가가 그렇게 하는 모습을 보면 힘(용기)을 얻는 것이다. 사실은 그 반대의 일이 우리 사이에 일어나야 한다. 서로가 죄에서 멀어질 수 있도록 좋은 본이 되어야 하고, 좋은 교제가 있어야 한다. 서로의 삶을 나눌 때, ‘아, 저 사람도 저렇게 죄를 짓는구나’라고 하면서 서로 안심하는 것이 아니라 ‘아, 저 사람도 저렇게 죄와 싸우고 있구나’라고 하면서 서로에게 자극을 줘야 한다.

만약 누군가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해져가고 있는 것이 보인다면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당장에는 대면하는 것이 어렵고 그 사람도 그런 말을 듣는 것이 싫을 것이다. 하지만 야고보가 한 이 말을 기억하라.

5:19–20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20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

나의 한 마디가 한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수도 있다. 그러니 나의 죄를 외면하지 않는 것처럼 서로의 죄를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누군가가 미혹되어 진리를 떠나서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있다면, 그 마음을 완고하게 하고 있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포기하기 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서로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사랑의 책임이다.

마음의 완고함은 고집 세고 자기 주장이 강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이야기로 듣지 않고 남의 이야기로만 듣는 것이 완고함이다. 하지만 히브리서의 저자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 중에 누가”(12절)라고 말하고 “누구든지”(13절)라고 말한다. 누구든 이런 완고함으로 불신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이어지는 말씀도 이 사실을 반복되는 질문을 통해 강조한다.

이유: 누구든 완고하게 될 수 있다. 그리고 …(15-19절)

3:15–19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 16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 17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 18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19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결국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진노하시고 누구를 심판하셨는가! 믿지 않은 자들이다. 순종하지 않던 자들이다. 범죄한 자들이다. 모세를 따라 나왔던 모든 사람들이 그 대상이었다. 이것이 광야 이스라엘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것이 영적인 여정에서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애굽에서 나온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았다. 애굽에서 나온 것이 곧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애굽에서 나온 것은 시작이었고 가나안 땅까지 들어가려면 긴 여정을 거쳐야 했다. 그리고 그 여정은 그들의 믿음에 대한 시험이었다. 결국 그들은 믿지 않아서 들어가지 못했다(19절). 그들의 믿음 없음은 어떻게 드러났는가? 그들의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드러났다(18절).

이 연관 관계를 잘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은 믿음 있는 자들의 순종이 부족하다고 해서 그들을 심판하셨던 것이 아니다. 그들의 순종치 않음이 그들의 믿음 없음을 드러냈다. 처음에 강조한 것처럼, 믿음과 순종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마음을 완고하게 했던 이 사람들, 그래서 광야에서 심판 받은 이 사람들은, 믿지 않아서 심판을 받았다.

14절의 표현을 가져오면 이들은 시작할 때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지 않았다. 그것이 믿음 없음의 증거였다. 안타깝지만, 이것은 우리 중 누군가의 이야기가 될 수 있고, 어쩌면 나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반복해서 강조한다. 시작할 때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라. 애매하게 중간에 서서 가만히 있지 말고 자신을 돌아 보고 점검하라. 마음을 완고하게 만드는 죄에서 벗어나라.

과거를 생각하면서 괜찮다고 안위하면 안된다. 그냥 교회에 잘 나오고 있는 것으로 충분치 않다.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닌 것으로 충분치 않다. 천국으로 향하는 행렬에 내가 동참하기로 한 적이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의 나를 봐야 한다. 내가 그 길을 걷고 있는지 봐야 한다. 지금 나는 예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계속 멀어지고 있는지를 봐야 한다. 지금 내가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 죄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를 봐야 한다.

구원의 확신은 바로 여기서 온다. 단지 ‘시작’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시작할 때 확신한 것을 견고하게 잡을 때 확신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이 결국 그리스도아 함께 참여할 것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참된 믿음은 시작할 때 확신할 것을 끝까지 견고하게 붙잡는다. 그 믿음의 증거를 매일 나타낸다.

도전

이스라엘의 실패는 누구의 이야기도 될 수 있지만, 사실 우리 누구의 이야기도 되서는 안되는 끔찍한 이야기다. 그만큼 안타까운 일이 없다. 이 교회 안에서 함께 교제하던 누군가를 천국에서 볼 수 없다면, 얼마나 안타깝겠는가. 지옥에서 함께 만난다면 어떻겠는가. 그런 일이 우리 중에 절대 있어서는 안된다. ‘함께라면 지옥이라도 좋아’는 우리 사이에서 절대로 할 수 없는 말이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그러니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만약 아직까지 교회 안에 있으면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지 않고 자신을 주님께 드리지 않았다면, 지금 이 음성을 듣기 바란다. 완고한 마음을 하나님께서 부드럽게 하신다. 그런 하나님께 구하고, 결단하라. 그만큼 가치 있는 일이 없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한 사람에게도 같은 말을 해주고 싶다. 지금 어디에 있든, 내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돌아보기 바란다. 만약 지금 가지고 있는 구원의 확신의 근거가 현재에 있지 않고 과거에만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 의미하는지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 어쩌면 과거의 구원 받은 경험이라는 것이 그저 구원 받은 것 같은 경험일 수도 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마음의 방향, 삶의 방향에 대한 이야기다.

지금 내 마음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어디를 향하고 싶은지 점검해 보라. 그리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위에 자신을 굳게 세울 수 있기를 바란다. 참된 믿음의 증거를 매일 나타내야 한다. 삶의 어떤 작은 영역이라도 거짓과 불신이 틈타지 못하게 하고, 내 마음이 완고해지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이스라엘과는 다르게, 우리가 시작할 때 확신한 것을 끝까지 잡아서, 이 광야 같은 세상을 지나 모두 함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안식 가운데 들어가 영원한 즐거움을 함께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