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

본문: 고린도전서 16장 1-12절

설교자: 조정의

고린도전서에서 사도 바울은 “~에 관하여는”이라는 표현으로 고린도 교회를 가르치고 권면할 새로운 주제를 소개해 왔다. 1-4절까지 다룬 내용은 1절에 기록된 것처럼 “성도를 위하는 연보”다. “연보”는 오늘날 “헌금”과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는데, 국어대사전에서는 첫째, “자기의 재물을 내어 다른 사람을 도와줌”, 둘째, “주일이나 축일에 하나님에게 돈을 바침”이라고 정의한다. 두 가지 뜻이 본문에서 말하는 “연보”의 의미에 다 담겨있다. 5-12절까지는 바울과 그의 동역자인 디모데, 아볼로가 각각 고린도 교회를 어떻게 도울 것인지 계획한 사역에 관하여 밝힌다. 어쩌면 지나치게 개인적인 정보로 여기기 쉬운 이 대목에서 우리는 문제 많던 고린도 교회를 사도가 얼마나 사랑하고 동역자들과 함께 얼마나 열정적으로 돌보기를 원했는지 그 진심을 들여다볼 수 있다. 

연보에 관한 가르침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의 원칙을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사역에 관한 계획을 통하여 우리는 복음을 맡은 일꾼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배울 수 있다. 말씀을 통하여 우리 모두 복음의 동역자로 거듭나 주의 일에 힘쓰기 원한다.

1. 연보에 관하여(1-4절)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부탁한 연보는 정기적으로 하나님께 드린 헌금이 아니라 특별한 구제 목적으로 모금한 돈이었다. 3절에서 그는 “너희의 은혜(연보)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라고 하는데, 이 특별 구제 대상이 예루살렘에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뿐만 아니라 마게도냐와 아가야의 여러 교회, 나아가 1절에 언급한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이 특별 연보를 령했다: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롬 15:25-6). 

예루살렘은 오순절을 맞아 몰려든 수많은 순례자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듣고 수천 명이 회심하면서, 막대한 자원이 필요했다. 성도들이 재산을 팔고 자기 물건을 통용했지만(행 2:44-45), 그 자원은 무한하지 않았다. 스데반의 순교로 교회에 박해가 시작되면서 재산을 잃고 일자리를 얻지 못하며 감옥에 갇히는 성도가 늘어나서(행 8:1-3) 더 많은 자원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쓰기 몇 년 전엔 예루살렘에 심한 흉년이 들었는데(행 11:28) 아직도 어려운 상황을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이방 지역의 여러 교회에 연보를 긴히 부탁했던 것이다.

연보를 부탁한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할 때, 바울은 이렇게 권면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 6:10). 연보는 기회였다. 믿음의 가정들에게 착한 일을 행할 기회. 또한, 바울은 이 연보가 유대인에게 진 복음의 빚을 갚는 것이라고 했다: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롬 15:27). 결국, 연보는 복음의 빚진 자들이 복음의 은혜를 내려주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신의 것을 내어주는 것이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고후 8:1-5).

몇 가지 연보의 원칙은 다음과 같다(2절):

1) 정기적으로: “매주 첫날에.” 초대 교회는 주간의 첫날(주일)에 모였다(행 20:7). 헌금은 성도가 함께 모여 예배하는 날, 정기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 되어야 한다.

2) 모두가: “너희 각 사람이.” 부자나 여유로운 사람만 헌금하는 게 아니다. 마게도냐 교회는 “극심한 가난” 중에서 연보했다. 모두가 복음의 빚진 자가 아닌가? 모두가 복음의 은혜를 풍성히 받지 않는가?

3) 형편에 따라: “수입에 따라.” 부자라고 다 후한 게 아니다. 인색할 수 있다. 가난한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바울은 두 번째 편지에서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라고 권면했다(고후 9:7).

4) 주께 드리는 것: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바울은 구제 헌금이 미리 준비되길 기대했다. 자신이 고린도 교회 갔을 때, 급하게 마련하지 않길 바랐다. 바울이라는 사람을 의식하거나 의무감에 딸려 나온 헌금이 아니라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면서 그분이 은혜로 성도를 돌보시는 일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헌금하기를 바랐다.

또한, 바울은 성도들의 연보를 매우 귀하게 다루었고, 그것이 원래 목적에 따라 예루살렘에 전달되도록 신중하게 준비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가 인정한 사람을 통하여 직접 전달하고자 했고, 바울이 직접 편지를 주어 공식적으로 예루살렘 교회가 전달받게 하려고 했다(3절). 나아가 만일 바울이 함께 갈 수 있다면 그렇게 하려고 했다(4절). 왜? “거액의 연보”(고후 8:20)를 조심스럽게 운반하고 전달해야 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성도들이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예물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섬기는 은혜의 방편이었기 때문이다. 헌금은 단순히 교회의 필요를 위해 모금하는 회비가 아니다. 성도라면 응당 내야 하는 세금이 아니다. 헌금은 복음의 은혜에 빚진 우리가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하는 감사의 제물이고, 하나님께서 궁핍한 형제자매를 은혜로 도우시는 일에 참여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맺는 열매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요일 3:17).

당신의 헌금 생활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형제자매를 향한 사랑의 잣대다. 말과 혀가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당신의 헌금 생활이 증명한다.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신다(고후 9:7).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자에게 하늘 문을 열고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주신다고 말씀하셨다(말 3:10). 

2. 사역에 관하여(5-12절) 

바울(5-9절), 디모데(10-11절), 아볼로(12절)는 각각 고린도 교회를 방문할 사역 계획을 세웠다.

1) 먼저, 바울마게도냐를 지난 후에 고린도 교회(너희)에 들를 계획이었다(5절). 9월 중순 이후 추워서 항해가 불가능할 때, 그들과 함께 머물며 겨울을 지낼 바람을 가졌다(6절). 바울은 고린도에서 1년 6개월 정도 사역을 하면서 교회가 세워지는 일에 헌신했는데, 이후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면서 고린도 성도들과 충분한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이 마음에 늘 남았다(고후 11:28,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그래서 이번에는 지나는 길에 그들을 잠깐 보기를 원하지 않고 얼마 동안 그들과 함께 머물면서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세워주기를 간절히 바랐다(7절). 그러나 바울이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머물려고 하는 이유가 있었는데(8절), 그의 말에 따르면 광대하고 유효한 문이 열렸기 때문이다(9절). 에베소 교회와 두란노 서원을 통하여 아시아에 사는 모든 유대인과 헬라인에게 복음이 선포되고 있었다(행 19:9). 복음의 문이 활짝 열렸고 수많은 영혼이 반응하고 있었으며 구원 얻는 역사가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쉽게 그곳을 떠날 수 없었다. 

사역의 풍성한 열매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박해도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바울은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라”라는 말도 했다(9절). 바울은 다른 편지에서 그가 아시아에서 당한 고난을 이렇게 묘사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 1:8-9). 하나님만 의지하고 바울은 에베소 사역을 감당했고, 또 고린도 교회를 돌아보기를 원했다: “만일 주께서 허락하시면”(7절).

바울은 성도들에게 복음 사역에 동참하기를 간곡히 요청하는데, “너희가 나를 내가 갈 곳으로 보내어 주게 하려 함이라”(6절)라는 말에 그 뜻이 잘 담겨있다. ‘보내주다’(프로펨포)의 의미는 전문용어로 ‘복음의 일꾼을 지원하고 돕는 것’을 뜻한다. 그들의 음식, 경비, 안전을 돕고 동행자를 지원하는 것을 말한다. 바울처럼 주와 복음을 위하여 일한 일꾼이 또 있을까?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정말 많은 영혼을 거듭나게 하시고 교회를 세우셨다. 그런데 바울 혼자 그 일을 한 것이 절대로 아니다. 그를 ‘보내어 준’ 성도들이 함께 도와서 한 일이다. 지금도 우리는 복음의 일꾼을 도와 하나님이 하시는 은혜롭고 놀라운 일들에 적극 참여할 수 있다. 

2) 디모데는 바울이 에베소에 머물고자 했기 때문에 바울 대신 고린도 교회에 파송될 계획이었다. 10절에서 바울은 “디모데가 이르거든”이라고 그 현실적 계획을 밝혔다. 그는 바울의 편지를 전달하고 편지에 기록된 복음의 가르침대로 고린도 교회가 겪는 수많은 문제를 교정하고 회복시킬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디모데는 바울보다 연소하고 또 사도의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바울의 사도권을 무시하고 게바와 아볼로 편에 선 편당이 있는 고린도 교회가 디모데를 어떻게 대할지, 그의 권면을 과연 겸허히 들을지 의심과 염려가 될만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권면한다: “너희는 조심하여 그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이는 그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를 멸시하지 말고 평안히 보내어 내게로 오게 하라 나는 그가 형제들과 함께 오기를 기다리노라”(10-11절).

많은 사람이 이 구절을 보고 디모데가 두려움이 많은 성정을 가졌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심각한 분열을 겪고 있는 교회를 중재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두려운 일이다. 양측으로부터 비방을 받기 쉽고, 아무리 사랑으로 진리를 말해도 거부당할 위험이 크다. 바울은 이 권면으로 디모데의 말을 멸시하지 말고,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으로 겸손히 듣고 따르라고 권면한 것이다(“주의 일을 힘쓰는 자”, 10절). 디모데의 권면으로 그들이 화목을 이루어 그 소식을 전해줄 고린도 교회 형제들과 디모데가 평안히 돌아오기를 간절히 원했다(11절). 주의 일에 힘쓰는 자를 돕는 방법은 첫째, 그들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고(“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에 암시, 10절). 둘째, 그들의 권면을 듣는 것이다. 물론 그들도 실수할 수 있고 또 잘못된 조언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주의 일에 사심 없이 힘쓰는 일꾼이라면,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권면한다면, 그것을 멸시하거나 듣지 않는 것은 곧 주님의 권면을 멸시하고 듣지 않는 것이다.

3) 아볼로가 언급되는 것은 한편 놀랍다. 그의 이름으로 교회가 갈라진 것이 아닌가?(고전 3:4-5). 하지만, 고린도 교회에 있어서 아볼로는 굉장히 중요한 인물이었는데, 바울이 복음의 씨를 심었다면, 아볼로가 물을 주는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고전 3:6). 바울이 1년 반 동안 개척하고 떠난 교회를 아볼로가 맡아서 돌본 것이고, 쉽게 비유하면 바울이 낳은 교회를 아볼로가 길렀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낳은 것도 자라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시다. 하여튼, 고린도 교회로서는 아볼로가 와서 격려해 주고 혼란스러운 교회를 안정시켜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충분히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형제 아볼로에 대하여는 그에게 형제들과 함께 너희에게 가라고 내가 많이 권하였으되”라고 설명한다(12절). 그들은 바울과 아볼로를 경쟁 구도에 두었지만, 정작 바울과 아볼로는 형제지간처럼 친밀했다. 그리고 바울은 아볼로와 고린도 교회를 되도록 떨어뜨리려고 애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러 번 교회를 찾아갈 것을 권했다. 그러나 아볼로가 원하지 않았다: “지금은 갈 뜻이 전혀 없으나 기회가 있으면 가리라”(12절). 이 짧은 표현에서 아볼로가 고린도 교회 방문을 원치 않는 것이 아니라 기회가 있으면 갈 것이라는 진심이 드러나고 또 지금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갈 계획이 없다는 사실이 명료해진다. 바울은 이렇게 아볼로를 원하는 고린도 성도의 요청에 지혜롭게 답하고 또 그들의 필요를 채울 것을 약속했다.


아빠, 엄마가 처음이라 실수하는 것처럼, 복음을 위하여 사는 일꾼들도 실수한다. 외부의 핍박과 내부의 갈등은 때로 살 소망이 끊어진 것 같은 절망을 가져온다. 그럴 때, 바울과 그의 신실한 동역자는 이런 마음을 품었다: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 1:9).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겠다고 결단한 것이다. 그리고 그때 그들을 진정으로 위로한 것은 하나님께 자신을 힘에 지나도록 드리고자 했던 성도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성도를 돕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는 일에 동참하기를 기뻐했던 성도들이다(고후 8:5). 똑같은 사람으로서 두려움도 많고 실수도 많은 일꾼들이, 여러 갈등과 문제 속으로 들어와 용기내어 담대히 건네는 조언과 권면에, 그들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겸손히 순종하고 따르는 성도들, 그들의 필요를 돌보고 좋은 것을 나누며 그들을 통해 하나님이 하시는 복음 사역에 동역하기를 원하는 성도들, 그들이 모두 함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를 만들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