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

본문: 히브리서 10:19-25

설교자: 조정의

‘죽을 것 같아도 교회 와서 죽어라’라는 과격한 말이 있을 정도로 집회 참석을 중요하게 여겼던 때가 있다. 그러나 지금은 교회 학교는 옵션, 수요 예배는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거르고, 주일예배 하나만 되도록 빠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이 현실처럼 보인다. 이제 곧 구역 모임도 새롭게 시작하려고 하는데, ‘왜 모여야 하는지’ 그 이유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다. 성경은 ‘어떤 집회는 필수고 어떤 집회는 선택인지’에 관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집회든 모이기를 힘써야 하는 이유’에 관해선 분명히 가르친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 소망으로 하나님을 굳게 붙잡는 자, 사랑으로 성도들을 돌아보는 자는 모이기를 힘쓴다.

1.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모이기를 힘쓴다(19-22절)

히브리서 기자는 계속해서 유대교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하여 붙들고 있던 옛 제사 제도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더 나은 길을 내셨다고 강조했다. 예수님이 더 나은 제사장이고, 예수님이 더 나은 성전이며, 예수님이 우리를 정결하게 하는 더 나은 제물이라는 것을 극심한 박해를 피해 배교하려는 이들에게 설득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것을 이렇게 권면한다(19-22절): “19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21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22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유대교가 하나님께 바치는 양의 피는 성소에 들어갈 충분한 담력을 주지 못했다. 성소 휘장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은 대제사장에게만 한시적으로 허락된 일이었고, 그도 자신을 위한 제사가 필요한 죄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의 피는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담력을 주기에 충분하다. 예수께서 육체의 죽음으로 휘장을 열어 놓으시고 우리로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게 하신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 역할을 하시는 대제사장으로서 우리 몸과 마음을 정결한 제물로 하나님께 바치게 하신다.

그러면, 본문의 첫 번째 권면인 “하나님께 나아가자”가 모이는 것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성경은 교회를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부른다(건물이 아닌 사람, 고전 3:16):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2). 우리가 모이는 이유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하기 위함이고, 하나님은 다른 어느 곳이 아니라 우리의 모임 중에 계신다. 또한 우리가 모일 때, 우리의 몸과 마음을 거룩하게 하셔서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게 하시는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신다(“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하리라”, 요 14:23).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시지만(시 139편), 특별히 하나님이 거하시기로 정하신, 하나님 백성이 모인 그곳에서 당신을 더 분명히 드러내신다. 당신의 백성을 특별히 만나주신다.

말씀과 찬양과 기도와 교제를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분이 이루신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고, 그 이름을 힘입어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간다. 모이기를 힘쓰는 가장 크고 궁극적인 이유와 동기는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사모하는 마음, 그 길을 죽음으로 내신 주께 진정으로 감사하는 마음이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시 27:4). 믿음으로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기를 간절히 바라는 자는 여호와의 집,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한다(딤전 3:15). 그래서 모이기를 힘쓴다.

2. 소망으로 하나님을 굳게 잡는 자는 모이기를 힘쓴다(23절)

그러면 왜 그리스도인의 마음이 변하는 걸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모이기를 힘썼던 자들이 왜, 무엇을 위하여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나오지 않는 것일까? 이어지는 권면이 그 이유를 말해준다: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23절).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으라는 권면의 이면에는 우리가 그 소망을 굳게 잡지 않으면 다른 것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있다는 경고가 깔려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할 수 있다.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을(요 10:10) 믿고 따르는 삶이 오히려 형통한 삶을 포기하는 것만 같고 그렇게까지 풍성한 삶을 얻을 것 같지 않기 때문에 계속해서 이 소망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 맞는지 점점 의심스러운 것이다. 히브리서 독자들이 그랬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길에 정말 소망이 있는지 확신을 잃고 있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다(신실하시다)라고 분명히 선포한다.

세상은 우리에게 온갖 거짓 소망을 속삭인다. 마귀가 사람을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한 나무 열매로 미혹했던 것처럼(창 3:6). 명백하게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하고 그분을 따르는 길에서 돌아설 것을 요구하면서도, 조금만 타협하면 지혜롭게 하나님도 따르고 원하는 것도 얻을 수 있다고 속이려 든다. 집회는 한 번으로 충분하니 나머지 시간은 너 자신을 위해 써라!

성경은 교회를 가리켜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라고 말한다(엡 4:4). 우리가 모이기를 힘쓰는 이유는 세상이 약속하는 헛된 것들에 우리 믿음이 흔들리고 움직일 때, 같은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이들과 함께 다시 우리 믿음을 하나님이 약속하신 소망에 두기 위해서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알게 하시기를 간구한다고 했다(엡 1:18-9). 하나님은 부르심의 소망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풍성한 기업을 약속하는지 같은 소망을 가진 성도 안에서 더욱 분명히 알게 하신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경우도 있지만, 어쩌면 모이기를 폐하는 습관을 들인 것 자체가 우리의 소망이 흔들리고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도 있다. 모이기를 힘쓰지 않고 있다면, 스스로에게 질문할 필요가 있다. 나는 왜, 무엇을 위해서 성도가 함께 하나님이 약속하신 소망을 분명히 알게 되는 자리에 가지 않는가? 내가 간절히 바라는 소망이 정말로 하나님 안에 있는가? 나는 진실로 하나님이 신실하게 그분의 약속대로 영생을 주실 것을 믿고 바라고 있는가? 주께 소망을 둔 자는 모이기를 힘쓴다.

3. 사랑으로 성도들을 돌아보는 자는 모이기를 힘쓴다(24-5절)

마지막 권면은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는 것이다(24절). ‘돌아보라’라는 것은 다른 성도의 마음속에서 하나님과 성도에 대한 사랑을 불러일으키라는 뜻이다(휘저어 침전된 것을 끌어올리다). 우리는 문자나 전화로도 이런 일을 할 수 있지만, 가장 효과가 큰 것은 대면하여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어서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라고 말했다(25절). 

주가 오실 날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실제로 우리는 그날이 가까움을 보고 있다. 그러니까 갈수록 우리는 덜 모이려는 것이 아니라 더 모이려고 해야 한다. 그리고 그 목적은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한 삶을 살도록, 성도와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도록 계속해서 서로를 권하기 위하여 우리는 모이기를 힘쓴다. 이 말을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보자. 

우리는 얼마나 자기 유익을 위하여서 모임을 선택하는가? 돌봄 받고 싶어서, 내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들어줄 사람이 필요해서), 누군가가 나를 사랑하고 나에게 선을 베풀기를 바라서. 이런 유익을 바라는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접근 방법이 틀렸다. 성경에 나오는 “서로” 명령어는 언제나 남이 아니라 내가 먼저 적극적으로 순종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하기 위하여 모이기를 힘써야 한다. 누군가를 돌아보기 위하여 모이기를 힘써야 한다. 고린도 교회의 집회가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웠던 이유는 그들이 서로를 섬기러 모인 것이 아니라 자기 유익을 위하여 모였기 때문이었다(고전 11:17).

정리하면, 1)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모이기를 힘쓴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시 84:1). 주가 계신 곳에 우리 마음이 있기 때문에. 참으로 사모하는 주님께 믿음으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감사해서. 몸과 마음이 쇠약해질 정도로 하나님 뵙기를 갈망하기 때문에 모이는 것이다.

2) 소망으로 하나님을 굳게 잡는 자는 모이기를 힘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시 42:2). 세상과 마귀는 묻는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그래서 때로는 주야로 눈물을 쏟는 삶을 산다. 내 영혼이 낙심하고 불안할 때가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 소망을 두”기 위하여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갈망하는 것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을 믿기 때문에(믿기 위하여).

3) 사랑으로 성도들을 돌아보는 자는 모이기를 힘쓴다.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할지어다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이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시온의 주민은 그들의 왕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할지어다”(시 149:1-2).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 백성으로 택하시고 구원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스리시는 왕이시다. 그래서 우리는 새 노래로 성도들과 함께 우리 왕, 구원자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분이 기뻐하시는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백성이 되기로 결단한다(딛 2:14).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도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자고 격려한다. 그래서 모이기를 힘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