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불친절이라는 죄의 습관 끊기
본문: 여러 본문
설교자: 조정의
친절의 뜻은 “대하는 태도가 매우 정겹고 고분고분함. 또는 그런 태도”고, 불친절은 “친절하지 아니함”이다. 결국 사람을 대하는 마음가짐(태도) 그리고 그 마음가짐이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친절함과 불친절함을 느끼는 척도가 된다. 그런데, 태생적으로 정겹거나 고분고분하지 않은 사람도 있다. 그들은 불친절하다는 오해를 많이 받는다. 애덤 맥휴는 <내향적인 그리스도인을 위한 교회 사용 설명서>라는 책에서 그 문제를 다루면서,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성도는 믿음이 좋고 사랑이 많다고 칭찬받지만, 소극적이고 내향적인 성도는 믿음이 부족하고 사랑이 없다는 비판을 받기 쉽다고 지적했다(IVP, 2022).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친절이란 무엇일까? 성경은 우리에게 “서로 친절하게 하”라고 명령한다(엡 4:32). 무엇이 친절이며 친절하지 않은 것은 왜 죄인가?
1. 불친절이 죄인 이유
성경이 요구하는 “친절”(크레스토스)의 정확한 의미는 ‘자비’에 가깝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 7번 정도 나오는 데, 누가복음에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신 하나님을 가리킬 때(눅 6:35), 로마서에서는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말할 때(롬 2:4) 각각 사용되었고, 에베소서 본문에서도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는 것과 함께 “친절”할 것을 명령하면서,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하신 것을 그대로 본받으라고 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친절은 단순히 인사를 잘하거나 적극적이고 활달한 성격을 띠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친절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자비로 상대를 대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외향적 그리스도인 모두 친절해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들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은혜와 자비를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개인의 성향을 불친절함으로 오해해서도 안 되지만, 반대로 그것을 불친절함의 핑계로 삼아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불친절은 명백히 죄기 때문이다. 왜?
① 먼저, 불친절은 “서로 친절하게 하”라는 명령에 불복종하는 죄다(엡 4:32). 우리는 성경의 명령을 일종의 권면이나 조언 등으로 격하시키려는 유혹에 속수무책으로 넘어지며 죄를 쉽게 허용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예수님이 주신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이다(요 13:34). 주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은 자비로운 사랑이므로, 우리는 마땅히 서로에게 친절해야 한다. 요컨대, 불친절은 그리스도가 주신 계명을 거역하는 죄면서, 그리스도를 충분히 사랑하지 않는 증거다.
② 불친절은 우리가 받은 은혜와 자비를 배반하는 죄다. 앞서 친절의 성경적 정의를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자비로 상대를 대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불친절은 내가 받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자비를 상대방에게 베풀지 않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8장에서 이것이 얼마나 배은망덕한 죄인지를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종의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 주인은 종에게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라고 꾸짖으며(33절), 그를 “악한 종”이라고 불렀다(32절). 불친절은 악한 일이다. 우리가 받은 친절을 배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긍휼히 여기는 자”에게 “긍휼히 여김을 받”는 복이 있고(마 5:7),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라고 경고한다(약 2:13). 하나님께 받은 긍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에 따라 축복과 심판이 임한다.
2. 불친절에 얽매는 과정
그러면 우리는 왜 불친절이라는 죄에 얽매는 걸까? 우리는 이미 어떤 상황에서든지 우리가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되기 때문이고, 결국 그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는다는 사실을 다루었다(약 1:14-5). 그러므로 불친절이란 죄가 태어난 건, 우리 안에서 욕심이 크게 자랐기 때문이다.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인 욕심이(자기애) 우리를 사로잡아 그 욕심대로 행하는 것이 백번 옳다는 거짓으로 미혹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불친절이라는 죄를 지으면서도 그것이 죄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철석같이 믿는다.
마르다는 예수님과 그 일행을 자기 집으로 영접하여 대접하려 했다(눅 10:38-42). 그런데 그녀의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 듣기를 택했다. 마르다는 처음부터 자기 동생에게 불친절한 마음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녀가 준비하는 동안 동생이 주님 말씀 듣도록 기쁨으로 배려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준비하는 것이 많아서 마음이 분주해졌고, 그에 따른 염려와 근심에 빠졌을 때, 그녀는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고 있다고 불평했다. 왜 그냥 ‘말씀 듣는 중에 미안한데, 좀 도와줄래?’라고 친절하게 말하지 못했을까? 예수님을 잘 대접하고 싶은 그녀의 욕심이 커지면서, 시간 내에 많은 것을 잘할 수 없을 것 같아 걱정과 근심이 깊어졌고, 그러면서 자기 혼자 준비하고 있는 처지가 불쌍하게만 여겨진 것이다. 그러자 동생은 은혜와 배려의 대상이 아니라 정죄와 원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 대상에게 불친절하게 굴어도 된다고 마르다는 굳게 믿고 불평했을 것이다.
불친절이란 죄는 또 다른 의미에서 굉장히 이기적인데, 누구에게 친절할 것인지를 자신이 결정하고, 차별적으로 친절을 베풀면서, 그런데도 나는 말씀대로 친절하게 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예수님은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라고 선별적인 사랑을 책망하셨다(마 5:46). 또한 “서로 친절하게 하”라는 명령은 모두에게 주어졌고, 특별히 불쌍히 여기고 용서해야 할 대상을 반드시 포함한다(엡 4:32).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차별 없는 자비로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친절에도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약 2:4). 성경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한다(약 2:9). 내적 친밀감을 더 느끼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더 편하게 대할 수 있는 관계가 있기 마련이지만, 친절은 모두에게 공평해야 한다. 주님께서 그것을 원하신다.
불만족처럼 불친절도 습관이 되기 쉽다. 결국 ‘불친절한 사람’ 그래서 불편한 사람이 된다. 특별히 무언가를 논의하거나 동역할 때, 실족하거나 인내할 것을 각오해야 하는, 솔직과 소신이라고 말하지만, 무례하고 고집스러운 사람으로 비친다. 만일 당신에게 이와 유사한 (친절하신 주님과 동떨어진) 모습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불친절이란 죄의 습관을 반드시 끊어내야 한다. 어떻게?
3. 불친절이라는 죄의 습관 끊기
인터넷에서 ‘무심한 사람의 무례함’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짧은 영상을 본 적이 있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습관적으로 무례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큰 상처를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생각해야 한다고, 늘 필터링을 거쳐서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영상 속 사람들이 대화를 나눈 것이 많은 관심을 받았다.
불친절이라는 죄의 습관을 끊는 방법도 이와 유사하다. 우리는 본성이 빚어낸 습관이 아니라 복음이 새롭게 변화시킨 마음으로 항상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은혜의 복음이라는 필터링을 거쳐서 사람을 대해야 한다. 만 달란트 빚진 자는 주인에게 엄청난 빚을 탕감받은 은혜를 자기에게 빚진 친구를 대할 때 생각해야 했다. 마르다는 마리아와 예수님을 원망하기 전에 예수님이 자기 집에 친히 들어와 말씀과 교제를 나누시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기억해야 했다. 에베소서 말씀에서도 “서로 친절하게 하”라는 명령 이후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 즉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을 주목하라고 했다(4:32). 주께 받은 친절로 풍성하게 채워져서 친절을 베풀라는 것이다.
성경은 이렇게 복음의 능력을 따라 사는 삶을 다른 말로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이라고 말하는데,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게 된다(갈 5:16). 성령을 따라 행할 때, 우리는 분냄과 분열의 죄를 끊고 자비(친절)의 열매를 맺는다(갈 5:22). 친절이 성령의 열매라는 사실은 친절을 맺기 위하여 성령(말씀) 충만이 요구되고 간절한 기도가 필요하다는 걸 말해준다.
마지막으로 죄를 눈감아주거나 잘못을 덮고 넘어가는 것은 결코 친절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해 주시지만, 우리를 죄에서 돌이키게 하시고 회개로 이끄신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가장 친절한 분이셨지만, 사마리아 여인에게 남편을 불러오라고 말씀하셨고(요 4:16), 간음 중에 잡힌 여인에게는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라고 경고하셨다(요 8:11). 그들을 죄에서 해방하시려고 친절을 베푸신 것이다. 성경은 형제자매가 실족했을 때, “그러한 자를 바로잡”되 “온유한 심령”으로 하라고 했다(갈 6:1). 친절은 잘못을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바로잡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상대방을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는 것,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자비로 대하신 것처럼, 그렇게 상대방을 자비로 대하는 게 바로 친절이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자기중심적이다. 좁은 시장길을 운전할 땐, 차를 주의하지 않는 보행자를 비판하다가, 내려서 걸을 땐, 곧바로 시장길에 차를 몰고 온 운전자를 비판한다. 얼마나 자기중심적으로 변하기가 쉬운가? 죄는 그런 우리 자기애를 이용한다. 자신의 원함과 바람을 크게 키우고 불만족, 불친절 등의 죄를 낳는다. 예수님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라고 말씀하셨다(눅 6:31). 황금률로 알려진 이 원칙은 친절에도 적용된다. 자신을 함부로 대하기를 기뻐하는 자가 어디 있는가? 무례하게 말하거나 냉담하게 지나가는 것에 상처받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러니까 상대방에게도 내가 대접받고 싶은 친절을 베풀라. 성경은 우리에게 “서로 친절하게 하”라고 명령한다. 그리스도인은 이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자원이 풍부하다. 주 예수께 가장 극진한 친절의 대접을 받았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