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불만족이라는 죄의 습관 끊기
본문: 여러 본문
설교자: 조정의
불만(족)의 사전적 정의는 “마음에 흡족하지 않음”이고, 불평은 “마음에 들지 아니하여 못마땅하게 여김 또는 못마땅한 것을 말이나 행동으로 드러냄”이다. 그러니까 불만(족)은 채워지지 않아 상한 마음을 가리키고, 불평은 그것에 관한 판단(‘못마땅하다’)과 반응(“말이나 행동”)을 말한다. 민수기 21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길로 말미암아 마음이 상하는데, 만족스럽지 않은 출애굽 여정에 관하여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다가 불뱀의 심판을 받았다. 그런데 만일 이스라엘이 마음이 상하기만 했다면,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지는 않았다면, 그것도 죄가 될까? 다시 말해, 불만(족) 자체는 죄라고 말하기 어렵지 않을까? 뭔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충분히 채워지지 않음을 느끼는 게 그리 큰 문제가 될까?
1. 불만족이 죄인 이유
① 하나님이 태초에 창조하신 세상엔 불만족이 없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 하나님 마음엔 모든 것이 심히(온전히) 흡족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마귀의 미혹을 받고 사람의 마음에 처음으로 불만이 생겼다. 에덴동산은 여전히 심히 좋았지만, 금하신 열매를 먹지 못한 사람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확실히 불만족은 죄의 결과다.
② 불만족이 죄가 된 근본적인 원인은 만족하지 않은 것 자체가 아니라 만족의 대상을 바꾼 데 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행한 두 가지 악에 관하여 “생수의 근원인 나를 버린 것”과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을 “판 것”이라고 하셨다(렘 2:13). 영혼의 목마름을 흡족하게 해줄 생수를 버리고 항상 갈증을 일으킬 다른 것들을 찾은 것이 악의 본질이라고 하신 것이다. 바울도 유사한 표현으로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꾼 것이 죄의 근원이라고 했다(롬 1:23).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동산에서 사람이 불만족의 죄에 빠진 것도 그들을 영원히 만족시키시는 하나님을 버리고 그분이 금하신 나무 열매를, 그들을 만족시키는 먹음직스럽고 보암직하며 탐스러운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③ 죄에서 해방된 그리스도인에게 그리스도가 약속하신 것을 생각할 때, 불만족은 죄가 틀림없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예수님은 영원한 만족을 약속하셨다. 생수의 근원을 버린 죄인을 구원하시고 그들 안에서 친히 영원한 생수가 되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바울은 실제로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했는데, 그가 스스로 만족할 수 있었던 “일체의 비결”은 자신이 아니라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발견한 것이었다(빌 4:11-13).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 안에서 영원히 만족하도록 구원하셨다. 그래서 불만족은 복음을 거스르는 죄다. 다시금 터진 웅덩이를 찾는.
결국 불만족은 1) 타락 이전엔 없었던, 2) 만족의 대상을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로 바꾸는 죄로, 3) 신자는 그들 안에 계신 영생의 주로 인해 모든 것에 만족하는 일체의 비결을 배울 수 있다.
2. 불만족에 얽매는 과정
그러면, 매일 비슷한 음식을 먹을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다른 음식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우리는 그것을 무조건 죄로 여겨야 할까? 아니다. 부족함을 느끼는 것과 그 부족함 때문에 불만을 품는 것은 다르다. 부족함을 느낄 때, ’다른 음식도 먹고 싶긴 하지만, 지금 허락된 환경을 수용하고 신실하게 공급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자’라고 반응할 수도 있다. 그런데 죄는 불만이라는 우리의 욕구를 쉽게 이용하여 우리를 미혹한다. ‘먹고 싶다’, ‘갖고 싶다’, ‘누리고 싶다’ 등의 욕구는 결핍에 따른 자연스러운 반응일 수 있지만, 죄는 그 욕구를 키우고 우리를 자기애로 고립시켜, 1) 나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을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속이고, 2) 그것만 있으면 나는 온전히 만족할 것이라고 믿게 한다.
민수기 11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음식 때문에 불만을 품었다. 그들은 고기, 생선, 오이, 참외, 부추, 파, 마늘 등을 먹고 싶었다. 날마다 만나가 기적처럼 내렸지만, 그들은 그것만 먹어서 기운이 없다고 불평했다(민 11:4-6). 성경은 그들이 “탐욕을 품”었다고 진단한다. 강력한 욕구다. 그 강력한 불만족 때문에 그들은 울기까지 했다(민 11:10). 하나님은 불만 가득한 백성에게 “너희가 너희 중에 계시는 여호와를 멸시하고 그 앞에서 울며 이르기를 ‘우리가 어찌하여 애굽에서 나왔던가’ 함이라”라고 책망하셨다(민 11:20). 그들은 자기애에 사로잡혔다. 그들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았고, 자신들의 처지만 불쌍하게 보였다. 애굽에서 나온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통곡하며 후회할 실수처럼 여겨졌다. 하나님은 그들을 노예의 삶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우상숭배에서 떠나 살아계신 참 하나님만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셨는데, 그들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그 순간 그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은 고기였고, 그것만 있으면 온전히 만족할 수 있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그렇게 죄에 얽매였다.
모든 죄가 그렇듯, 불만도 여러 죄와 함께 작용한다. 배우자가 없어서(결핍) 불만이 생기기도 하지만, 다른 배우자와 비교하면서 시기와 질투가 일어나고 불만을 품기도 한다. 불만이 터져 나와 불평과 원망을 낳기도 하고, 불만을 가져온 대상(하나님 또는 사람)을 향한 분노가 일어나기도 한다. ‘이 사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 결정을 하지 않았더라면’이란 깊은 후회를 일으키고, 불만의 갈증을 어떻게든 무엇으로든 채우려고 투쟁하게 만든다. 불만은 이렇게 복잡하고 다양한 증상을 보이지만, 불만에 얽매는 과정은 같다. 당신은 1)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2) 그것만 있으면 온전히 만족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자기 욕심에 끌려 불만족의 죄를 낳는 것이다.
지독한 이기심과 자기애에 빠진 결과다.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가장 잘 알고 계신다는 믿음은 찾아볼 수 없다. 당장 내가 원하는 것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하나님 안에서 언제나 만족할 수 있는 비결을 오랜 신앙 안에서도 배우지 못한다. 광야 같은 세상은 결핍과 부족이 가득하고,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 때, 원하는 만큼 항상 주시지는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불만을 달고 살기 쉽다. 부족함을 느낄 때마다 마음이 상하고 욕심에 이끌려 자기애에 사로잡혀 습관적으로 죄를 짓기가 너무 쉽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삶과 얼마나 동떨어진 모습인가!
3. 불만족이라는 죄의 습관 끊기
바울이 그에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자족의 일체 비결을 배운 신약의 모범이라면, 구약의 모범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한 다윗이다(시 23:1). 두 사람의 특징은 만족의 대상을 어떤 사람이나 환경이 아니라 자기 삶을 돌보시는 전능하신 목자, 하나님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인생이 평온했는가? 부족함을 느낄 상황을 많이 겪지 않았는가? 아니다. 오히려 보통 사람보다 훨씬 거칠고 험한 광야의 삶을 살았다. 그런데 그들은 광야의 시험을 통과하고 만족의 비결을 배운 것이다. 우리도 하나님이 가르치시는 광야에 산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 두신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법을 가르치시기 위함이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3).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부족함을 허락하셨다(“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매일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음식에 철저히 의존하게 하셨다(“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 그 이유는 무엇인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 말씀을 믿게 하시려고, 그래서 인생의 만족을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찾게 하시려는 것이다. 예수님이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서 시험받으실 때(마 4:1-11), 마귀는 계속해서 예수님을 불만으로 이끌려고 미혹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 말씀을 신뢰하여 아버지가 주신 모든 것에 만족하셨다. 그렇게 불만의 죄를 이기셨다. 우린 반드시 이 비결을 배워야 한다.
“물에 빠진 사람 건져 놓으니 보따리 내놓으라 한다”라는 속담이 있다. ‘지옥불에 빠진 죄인 건져 놓으니 이것저것 내놓으라 한다’라고 불만에 빠진 그리스도인을 다그칠 수도 있겠다. 그만큼 우리가 받은 크고 놀라운 구원의 은혜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질만큼 불만이 우리 눈과 귀를 막아버린다. 그런데 하나님 안에서 만족하라는 요구는 구원이라는 큰 은혜를 주었으니, 나머지 불만사항은 그냥 제발 감수하라는 강요가 아니다. 우리가 느끼는 결핍과 부족함 마저도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은혜의 도구라는 것을 믿음의 눈으로 보라는 요구이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주신” 하나님이 당신에게 허락하신 것이라면, 분명히 그 안에 선한 계획이 있지 않겠는가? 그것을 믿으라는 거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다(히 11:1). 중요한 건 당신이 그 믿음의 대상을 누구로, 무엇으로 삼느냐는 것이다. 당신이 간절히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이 보기를 원하고 얻기를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이 믿음으로 붙드는 대상이 하나님이 한 분이어야 한다. 당신이 간절히 바라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상이어야 한다(히 11:6). 불만은 당신이 믿음의 대상을 바꾸었다는 증거이고, 당신이 바라는 것이 하나님이 아니라는 실상을 보여준다. 어거스틴은 “우리 영혼은 주님 안에서 쉼을 얻을 때까지 평안을 모릅니다”라고 고백했다(참회록, 15-6pp). 이렇게 바꿔 말할 수 있다. ‘우리 영혼은 주님 안에서 만족을 얻을 때까지 만족할 줄 모릅니다’. 반드시 만족의 비결을 배우기 원한다. 주님으로 인해 안식하고 오직 주님 안에서 만족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속에서 솟아나는 영생의 주가 계신데, 어떻게 불만이 있을 수 있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