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분노하는 마음 말씀으로 지키기
본문: 야고보서 1:19-20 외
설교자: 조정의
몸이 아플 때, 우리는 병원을 찾는다. 이런저런 증상을 말하면 의사는 합리적인 추정을 하고 그 증상을 완화하는 약을 처방한다. 처방이 별로 효과가 없으면 병의 진짜 원인을 찾기 위해 여러 검사를 시행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몸을 병들게 한 원인을 바르게 진단하고 치료하는 것이 몸을 건강하게 지키는 방법이다.
마음이 아플 땐, 어떻게 해야 할까? 마음을 병들게 한 원인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사람의 생각은 깊은 물과 같지만, 슬기로운 사람은 그것을 길어 낸다”(잠 20:5, 새번역). 깊은 물과 같은 마음속 생각을 길어 낼 지혜가 우리에겐 없다. 그러나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한다(히 4:12). 그래서 우리는 “모든 지킬만한 것 중에 더욱 지키라”고 명령하신 “생명의 근원” 곧 우리 마음을 하나님 말씀으로 바르게 진단하고 치료할 수 있다.
1. 분노하는 마음 말씀으로 진단하기
‘한 번도 화내는 것을 본 적이 없다’라고 칭찬받는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분노가 폭언과 폭력으로 표출되는 것을 본 적이 없는 것뿐이지 사실상 마음에 분을 품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없다. 성경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명령하는데(엡 4:26), 여기서 우리는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과, 오래 “분을 품”으면 죄로 표출될 위험이 커진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렇다면 분을 품는다는 것은 무얼까?
성경적 상담학의 대가인 데이비드 폴리슨은 분노에 관한 훌륭한 책을 저술했는데, <악한 분노, 선한 분노>라는 그 책에서 폴리슨은 분노가 짜증, 다툼, 원한, 폭력, 숨겨진 분노, 독선적 분노 등의 유형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런 분노의 반응들을 하나로 묶는 분노의 본질에 관하여 이렇게 설명했다: “분노의 핵심은 중요하다고 여기는 바로 그 일이 잘못되었을 때,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행동을 취하는 것이다”(79p). 폴리슨은 분노가 표출되는 과정을 세 단계로 구분했는데, 1) 인지: “어떤 일이 잘못되었다.”, 2) 판단: 거기에 반대 입장을 취하고 불쾌해함, 3) 행동: 짜증, 다툼, 폭력 등으로 표출. 그러므로 분을 품는 것은 사실에 관한 인지와 그에 대한 부정적 판단을 갖는 것이고, 분을 내는 것은 그것을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이라고 구분할 수 있다.
요나는 이스라엘을 침략한 적국 앗수르를 미워했다. 그들이 아무리 회개했다고 해도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인식했다. 그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반대 입장을 취했고, “매우 싫어하”여(욘 4:1),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욘 4:3)라고 불평과 짜증으로 분노를 터뜨렸다(행동). 요나의 분노는 분명 악한 분노였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하는 것 자체도 문제였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밀어내고 자신이 재판장 자리에 앉으려는 교만이 더 큰 문제였다: “네가…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욘 4:9).
죄를 알지도 못하신 예수님의 분노는 우리의 악한 분노와 무엇이 다를까? 유월절에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 가축을 팔고 돈을 바꾸는 사람들을 보셨다. 예수님은 이것이 잘못된 일이라고 인식하셨다. 그들이 성전을 더럽히는 것에 반대 입장을 취하시고 불쾌하게 여기셨다. 그래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그들을 내쫓으셨다(행동):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요 2:16). 제자들은 예수님의 분노를 보고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요 2:17, 시 69:9)라는 성경 말씀을 떠올렸다. 그들이 볼 때, 예수님의 분노는 확실히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는 열심이라는 판단 근거와 동기에서 나왔다.
‘아무리 그 판단이 옳다고 해도 그렇게 행동할 권리가 예수님께 있었나?’ 그것이 유대인들의 질문이었다: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요 2:18). 예수님은 이 성전을 허물고 사흘 만에 성전된 자기 육체를 일으키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곧 성전이다. 하나님은 이제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하여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을 만나주실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심판을 다 맡기셨다고 말한다(요 5:22). 예수님은 그들에게 공의로운 분노를 쏟으실 권리가 있으셨다. 성경엔 종종 하나님이 그 권위를 위임하셔서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집행하게 한 종들이 나온다. 베드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성령을 속였을 때, 그 자리에서 징벌을 내렸는데, 이런 경우가 위임받은 권위로 공의로운 분노의 심판을 내린 것으로 볼 수 있다(행 5:1-11).
그러나 우리의 분노는 선할 때보다 악할 때가 훨씬 많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동기에서 비롯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고, 판단 기준이 성경 말씀과 일치하기보다는 지극히 주관적일 때가 많다. 그리고 유일하신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권리를 찬탈하여 내가 직접 심판하는 자리에 앉아 행동할 때가 너무도 많다. 성경은 분노하는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약 4:12). 우리는 율법의 준행자일 뿐이다. 그러나 분노하는 마음은 우리를 재판관 자리로 기어 오르게 한다. 자기 판단이 무조건 옳고, 반대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무조건 맞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하나님이 판단하시고 행동하시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하나님의 판단 앞에 나를 돌아보지 않는다. 하나님이 나에게 요구하신 사랑의 율법을 따르지 않는다. 데이비드 폴리슨이 바르게 진단 한 것처럼, 분노는 전체적인 반항이다.
2. 분노하는 마음 말씀으로 처방하기
그러면 분노하는 마음을 어떻게 말씀으로 처방할 수 있을까? 먼저, 우리의 분노가 절대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는 명백한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19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20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약 1:19-20). 본문은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하나님 말씀인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분노를 조절하라고 명령하신다. 왜? 조절하지 못한 분노(악한 분노)는 절대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분노가 잘못된 것을 대상으로 하고, 그것을 바로잡으려는 의로움을 추구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면, 사실 우리의 판단과 그에 따른 행동은 자기 의를 이루기 위한 발악에 불과하다.
둘째, 듣기는 속히, 말하기는 더디 하라. 본문이 말하는 듣기와 말하기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 다시 말해 하나님의 판단 기준인 성경 말씀에 관한 태도와 관련이 있다. 분노를 조절하고 통제하는 것은 단순히 행동을 억제하는 수준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차원의 순종을 요구한다. 바로 인식과 판단을 바꾸는 것이다. 우리는 사실 관계를 바르게 인식하기 위하여 충분한 시간을 들이지 않는다.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위하여 모든 상황과 사연을 충분히 들여다보지 않는다. 성경은 교회에 세워질 일꾼에게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않을 것을 요구하는데(딛 1:7), 그만큼 하나님 말씀으로 자기 고집을 꺾고, 충분한 시간과 과정을 거쳐 말씀 안에서 바른 인식과 판단을 가지고 성도와 교회를 사랑으로 세워야 하기 때문이다.
내 마음에 분노가 차오를 때(서서히 혹은 급격하게), 우리는 충분한 시간을 가져야 한다. 하고 싶은 말이 마음을 가득 채우고 폭발하여 쏟아내고 싶을 때, 그것을 “더디 하”고, 그 대신 하나님 말씀 듣기를 서둘러야 한다. 하나님 말씀은 지금 상황을 어떻게 인식하고 판단하게 하는가? 성경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라고 명령한다(롬 12:3). 혹시 내가 마음에 품은 생각과 판단은 하나님이 나누어주신 믿음의 분량을 넘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과 판단은 아닌가?
셋째,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롬 12:19). 성경은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라고 명령한다(롬 12:18). 이것이 하나님의 분명하신 뜻이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없을 때도 있다. 상대방이 일방적으로 원수처럼 나에게 악을 행할 때, 분노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지는 때다. 그런데 그때도 성경은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라고 명령한다(롬 12:19). 직접 분노하지 말고 분노하시는 분께 맡기라는 것이다. 나아가 성경은 원수에게 이렇게까지 하라고 요구한다: “20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0-21). 우리의 분노는 악을 악으로 갚는 것으로 나타날 때가 너무도 많다. 누군가가 나를 비방하면, 나도 그를 비방하고 싶고, 무시하면 똑같이 무시하고 싶다. 그것을 백번 옳다고 여긴다. 그러나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일은 무엇인가?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롬 5:10). 아들에게 대신 진노를 쏟으시고, 원수인 우리에게 화목의 손을 내미셨다. 선으로 악을 이기신 것이다.
나를 분노하게 만든 이가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아냐고 물을 수도 있다. 내가 들은 말, 받은 상처를 몰라서 그렇다고. 예수님은 3조:500만원이라고 하신다. 우리가 하나님께 진 빚, 그분께 한 잘못 그리고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진 빚, 한 잘못의 격차다(60만배).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8:35). 복음의 용서와 사랑을 맛보는 자는 성도를 용서하고 사랑한다. 성도의 잘못이 명백하고 그것이 자신을 괴롭게 만들며 절대로 동의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분노가 아니라 사랑으로 그 잘못을 바로잡아 주려고 애쓴다. 선으로 악을 이겨라. 억울하고 원통한 모든 것에 대한 판결과 심판을 오직 하나님께 맡겨라. 율법의 준행자로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따라 행하여 하나님의 의를 이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