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미움이라는 죄의 습관 끊기
본문: 여러 본문
설교자: 조정의
“미움”을 정의하는 것은 쉽지 않다. “미움”이라는 명사의 사전적 정의는 “미워하는 일이나 미워하는 마음”이고, 동사인 “미워하다”의 정의는 “밉게 여기거나 밉게 여기는 생각을 직접 행동으로 드러내다”라서, 사실상 “미움”을 여러 번 반복하는 데 그치는 설명의 한계를 드러낸다. 그러나 미움이라는 감정은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모두에게 친숙하다. 약간의 서운함과 섭섭함 정도로 그치는 미움부터 미움의 대상을 세상에서 아주 없애고 싶은 강렬한 수준까지 우리는 살면서 크고 작은 미움을 셀 수 없이 경험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미움을 죄라고 믿지 않는다. 자연스러운 현상처럼,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을 두드러기 정도로 가볍게 여긴다. 그런데 성경은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라고 분명히 말한다(요일 3:15). 그래서 많은 신자가 ‘나는 미워하는 게 아니라 단지 상처받은 거고, 마음이 힘든 것뿐이다’라고 말하면서 미워하는 죄를 쉽게 인정하지도, 회개하지도 않는다.
1. 미움이 죄인 이유
그러나 미움은 분명히 죄다(요일 4:20). 나는 미움을 인간관계에 한정하여 이야기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럴 때, 미움을 이렇게 정의하기를 원한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상대를 바라보지 않는 마음과 그 마음에 따른 행동.” 이렇게 정의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성경은 하나님도 미워하신다고 말한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 곧 그의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예닐곱 가지이니”(잠 6:16),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시 5:5),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롬 1:30). 그래서 어떤 사람은 하나님도 미워하시기 때문에 자신도 미워하는 게 문제없다고 핑계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입법자와 재판관으로서 죄를 미워하시는 것이고(약 4:12), 그 죄에서 돌이키지 않는 죄인을 의롭게 판결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본심은 선지자 에스겔을 통하여 밝히신 것과 같다: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겔 18:23). 그래서 미움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상대를 바라보지 않는 마음과 그 마음에 따른 행동”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유익한 데, 이는 죄와 죄에서 돌이키지 않는 행위를 미워하면서도, 그 대상이 죗값을 톡톡히 치르는 것을 원치 않고, 오히려 돌이켜 회복과 은혜를 누리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하나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거짓도 미움도 없다(롬 12:9).
그래서 미워하지 않는 것은 상대방이 저지른 회개하지 않는 죄까지 모두 덮어 놓고 너그럽게 품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라고 요청했다(시 97:10). 진짜 사랑하면, 그 사람이 죄를 회개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렇게 하도록 온유함과 인내를 가지고 겸손히 돕는다(갈 6:1-2). 야고보는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것이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는” 사랑이라고 말했다(약 5:20; 벧전 4:8).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그렇게 나타났고, 그와 다른 마음을 품는 것이 바로 미움의 죄다.
2. 미움에 얽매는 과정
모든 죄는 우리를 사로잡을 때, 자기애를 철저히 이용한다(“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 약 1:14). 그래서 실상은 자기 욕심에 따라 죄를 낳은 것뿐인데,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라고 말한 요나처럼 자신의 판단과 행위가 무조건 옳다고 믿게 만든다(욘 4:9). 미움이라는 죄도 같은 전략을 쓴다. 미움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상대를 바라보지 않는 마음과 그 마음에 따른 행동”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유익한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미움이라는 죄에 얽맬 때, 하나님의 관점이 아니라 오롯이 자기 관점을 가지고 상대를 바라보고 대한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고발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나에게 그렇게 할 수 있어?’, ‘어떻게 나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지?’, ‘내가 그동안 어떻게 했는데’, ‘하나님도 분명히 알고 계실 텐데, 내 본심을 어떻게 그렇게 왜곡할 수 있지?’ 이런 마음의 소리는 우리가 취한 관점이 누구의 관점인지를 보여준다.
모세는 고라 자손의 반역을 겪었다(민 16장). 그는 불순종하고 우상숭배하는 백성을 버리시겠다는 하나님 뜻을 돌이키고자 그렇게 하시려거든 자신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달라고 간절히 중보했던 자였다(출 32:32). 아침부터 밤까지 내내 백성의 고충을 듣고 섬기며, 자신이 낳은 자식처럼 백성을 품고 약속의 땅까지 인도한 일꾼이었다(민 11:12). 그런데 고라 자손은 모세에게 ‘너는 교만하여 백성들 머리 위에 오르려고 한다’라고 비방했다. 만일 모세가 자기애에 사로잡혀 미움이라는 죄를 낳았다면, 어떻게 반응했을까? 그는 자기연민에 빠져 스스로 죽기를 구하거나 소명을 버리고 도망칠 수 있었다. 혹은 반역자들을 멀리하면서 하나님이 속히 그들에게 합당한 심판을 내리시기를 은근히 또는 노골적으로 바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모세는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함이 더한 사람으로 평가받는다(민 12:3). 그는 겸손히 엎드렸다. 그리고 그들을 죄에서 돌이키도록 진심으로 권했다.
모세는 하나님의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자기애와 싸워 이긴 것이다. 자기 관점으로 백성을 보고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으로 백성을 사랑했다. 이것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마음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달리셨을 때, 이렇게 간구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자기 손에 못을 박고, 온갖 조롱과 비방을 쏟아붓는 이들을 예수님은 아버지의 관점으로 보셨다. 아버지는 그들이 멸망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돌이켜 구원을 얻는 것을 간절히 원하시지 않는가? 그래서 예수님도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품고 그들을 미워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신 것이다.
우리는 왜 미움이라는 죄에 쉽게 얽매는가? 그냥 떨쳐내고 버리고 싶은 미움이 왜 들러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것인가? 계속해서 나의 관점을 붙들기 때문이다. 자기애에 사로잡혀 있어서 그렇다. 예수님처럼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내어드려야만(마 26:39), 우리는 아버지의 뜻대로 상대를 바라보고 대할 수 있다. 그것이 우리, 구원받은 주의 종의 마땅한 삶의 태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롬 14:8-10; 갈 2:20).
3. 미움이라는 죄의 습관 끊기
미움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목적이라면, 미움이라는 죄의 습관 끊기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질 것이 분명하다. 받은 상처와 고통의 크기만큼이나 미움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흉터만 남고 통증은 없어도 그 상처를 남긴 이에 대한 미움은 생생할 수 있다. 그래서 미움은 단칼에 끊어서 없애는 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끊임없이 용서하는 것으로 사라지는 죄라고 하는 것이 옳다. 사실 모든 죄가 그렇다. 옛 습성은 버리고 새 사람으로 덧입는 과정의 수많은 반복을 요구한다(엡 4:17-24). 미움도 그렇다. 성경은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미운 이에게 우리가 하는 것)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대체할 행위들)라고 명령한다(엡 4:31-2).
미움 대신 우리가 계속해서 취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시고 대하시는 관점과 마음과 행위를 본받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친절을 베푸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신다. 우리 죄를 그냥 넘어가거나 묻어두는 식이 아니라 독생자를 대신 내어주셔서 그 죗값을 치르시고 우리를 실제로 죄에서 돌이켜 거룩하게 살아가도록 적극적으로 도우신다. 미움이 우리를 사로잡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그 마음을 배워야 한다. 친절해야 한다. 불쌍히 여겨야 한다. 용서해야 한다. 참고로, 참된 용서는 담아두거나 잊어버리는 게 아니다. 상대방에게도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고, 다른 이에게 꺼내지 않으며, 둘 사이에 화목의 문제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늘 힘쓰는 것이다.
그런데, 사과하지 않는 죄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 용서가 반드시 참된 화목을 이루어내야 한다면, 구하지 않는 용서를 해줄 수는 없다. 하지만, 친절하게 대하고 불쌍히 여기는 것까지는 할 수 있다. 하나님도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지 않는가?(벧후 3:9). 그러나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자를 그냥 죄 없는 셈 치고 용서해 주지는 않으신다. 우리가 회개하기 전에(“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롬 5:8), 하나님은 우릴 불쌍히 여기셨다. 그 마음을 가지라.
미움의 또 다른 특징은 편을 만든다는 것이다. 내 편에 서서 내가 받은 상처를 위로해 주는 사람은, 나에게 상처 준 대상을 나와 함께 미워하기가 쉽다. 상처는 일방적이기보다 서로 주고받는 것이라서 양쪽에 편이 늘어나면, 결국 커다란 분열과 분쟁을 가져오기 마련이다. 그렇게 가정이나 교회가 무너진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므로 미움이라는 죄의 습관을 끊어내려 할 때, 내 편에서 함께 미워해 주는 이에게 고마워하거나 그들을 의지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미안해해야 한다. 나로 인해 미움이라는 죄에 빠진 것이 아닌가! 또한, 예수님은 사람을 의지하지 않으시려고 의도적으로 애쓰셨다(요 2:24). 그리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 아버지 하나님께 “부탁”하셨다(벧전 2:23). 그러니 오직 하나님만 기다리고 하나님의 때를 바라고 공감하는 이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권면해야 한다: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사 30:18).
미움이라는 죄는 우리 눈을 가린다.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를 보지 않고 듣지 못하도록.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요일 2:11). 오직 빛이신 하나님만이 우리 눈을 밝히시고 사랑이신 하나님만이 우리 마음에 뿌리박힌 미움을 몰아내신다.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자.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용서와 친절, 사랑과 불쌍히 여기심을 기억하자. 그리고 우리가 받은 대로 미움의 대상에게 갚자.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가 아니라 도리어 선으로 복으로(벧전 3:9).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복 주실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