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많이 사함 받은 사람(들)
본문: 누가복음 7:36-50
설교자: 최종혁
지난 몇 시간 동안 우리는 예수님을 만났지만 진정한 구원에는 이르지 못했던 사람들을 살펴봤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었다. 그래서 삶의 최우선순위에 예수님을 두기를 거절했다. 때로 그것은 재물이었다. 때로 그것은 삶의 평안이었다. 때로 그것은 시간이었다. 때로 그것은 자기의 의로움이었다.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지 않으면 진정한 구원에는 이르지 못한다. 세상에서 행복할 수 있고 평안할 수는 있다. 남들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도 있다.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며 살 수도 있다. 하지만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지는 못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이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 이런 말씀은 나의 결단 혹은 어떤 행위로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지는 않다. 예수님을 가장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결단과 행위로 드러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 결단과 행위는 마음의 중심에 자리 잡은 사랑의 결과다. 그리고 이것이 단지 ‘종교인’인 사람과 참된 ‘신앙인’을 구별한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두 부류의 사람이 어떻게 다른지를 잘 보여준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통해서도 그 차이를 말씀해 주셨지만, 오늘 본문은 비유가 아닌 현실이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을 가장 사랑할 수 있는지를 배우게 될 것이다. 답부터 말하자면, 내가 많이 사함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인정할수록, 예수님을 더 사랑할 수 있게 된다.
먼저 사건이 벌어진 배경은 이렇다.
눅 7:36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어떤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식사 초대한 상황이다. 뒤에 나오지만 이 바리새인의 이름은 “시몬”이다(40절).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기록된 비슷한 사건에도 같은 이름(나병환자 시몬)이 등장하기 때문에 동일한 사건으로 보는 경우도 있지만, 여러모로 다른 사건이다. 특히 시기적으로 해당 사건은 십자가 직전에 있었던 일이고, 오늘 본문은 그렇지 않다. 두 사건에 등장하는 이름이 같은 것은 단지 ‘시몬’이라는 이름이 흔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도 시몬이 둘이나 있었다. 베드로의 원래 이름이 시몬이었고 “셀롯이라는 시몬”도 있었다(눅 6:15). 예수님의 형제 중에도 시몬이 있었다(마 13:55). 구레네 사람 시몬(눅 23:26), 마술사 시몬(행 8:9), 무두장이 시몬(행 9:43) 등 신약 성경만 봐도 많은 시몬들이 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시몬은 바리새인 시몬이다.
뒤에 벌어진 상황을 보면 바리새인 시몬이 예수님에 대해서 우호적인 마음으로 식사 초대를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최대한 좋게 본다면, 시몬은 예수님에 대한 약간의 호기심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예수님과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좀 더 알고자 예수님을 초대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예수님을 손님으로서도 제대로 존중하지 않았던 것을 보면(44-46절), 오히려 예수님을 공적으로 무시하면서 예수님의 권위를 깎아 내리려고 이런 자리를 마련한 것이 아닌가 싶다.
특히 바로 앞선 말씀의 맥락이 시몬의 의도가 선하지 않았을 것임을 지지한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전령으로 왔었던 세례 요한을 거절했다(29-30절). 백성들은 요한이 베풀었던 죄 사함을 위한 세례를 받았지만,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그렇게 하지 않아서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다. 금욕적인 삶을 살았던 요한에 대해서 이들은 귀신들렸다고 비난했고, 그렇지 않았던 예수님에 대해서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비난했다. 누구의 말에도 이들은 자신을 돌아보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들은 회개하지 않았고, 오히려 회개를 촉구하는 요한과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았다. 이런 맥락에서 바리새인 시몬이 죄를 지은 한 여자와 함께 등장하기 때문에, 이들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바리새인과 회개한 죄인의 전형으로 제시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시몬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예수님은 그의 초대에 응하셨다. 시몬이 만든 함정에 빠지신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통해 시몬의 영적인 상태를 드러내셨고, 죄 사함의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모든 사람들에게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다.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식사 모습인 옆으로 기댄 모습이다. 이런 식사는 짧게 끝나지 않는다. 식사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먹으면서 대화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이 상황이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랍비를 초대하여 신학적인 대화를 나누면서 배우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바리새인 시몬은 그런 목적보다는 예수님을 책잡고 싶은 목적이 더 컸을 것이다. 이렇게 긴장감으로 얼어 붙은 분위기가 한 여자의 등장으로 요동친다.
눅 7:37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이 여자는 이름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영화나 드라마 등에서 이 여자를 막달라 마리아로 묘사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 누가복음에서는 바로 뒤인 8장 2절에서 마리아가 처음 언급되기 때문이다. 만약 여기 등장한 여자가 막달라 마리아였다면 여기서 이름이 언급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참고로 예수님께 향유를 부었던 또 다른 사람은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로서 막달라 마리아와는 다른 인물이다.
여기 등장한 여자에게 중요한 것은 이름이 아니라,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느냐다. 그녀는 이렇게 소개되었다.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 문자적으로는 “보라, 그 동네에 한 여자가 있었는데 그는 죄인이었다”로 번역할 수 있다. 39절에서 바리새인 시몬도 이 여자에 대해서 “죄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예수님도 이 여자가 “많은 죄”를 지은 것을 부인하지 않으셨다(47절). 이 여자는 “죄인”이라고 불릴만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죄인”이란 표현은 어떤 죄를 지어서 감옥에 갔다온 사람을 지칭하는 표현은 아니다. 그 사람이 하는 일이 죄악된 일일 때 사용된 표현이다. 남자의 경우는 세리, 강도, 도둑과 같은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했고, 여자의 경우는 매춘 행위를 하는 사람들을 그렇게 불렀다. 따라서, 이 여자도 그런 의미에서의 죄인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이 여자가 어떤 일을 하는지 알고 있었고, 모두가 이 여자를 죄인이라고 정죄하며 멸시했을 것이다. 그런 여자가 어쩌면 가장 오지 말아야할 장소에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긴장감이 팽팽한 분위기 속에 나타났다.
당시 문화적 관례에 따르면 이런 식사 자리에 다른 사람들이 오는 것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의미 있는 대화가 오고 가기 때문에 그 대화를 듣기 위해서 오는 사람들도 있었고, 특히 가난한 사람들이 음식을 얻기 위해서 오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죄인인 여자의 등장은 일상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주목을 끌만한 상황이다. 마치 지금 이 자리에 술 냄새를 심하게 풍기는 사람이 앞 자리로 걸어들어오고 있는 상황과 비슷했을 것이다. 모두의 이목을 끌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녀가 왜 왔는지 의아하게 생각하며 주목했을 것이다. 그녀 손에 들린 향유를 담은 값비싼 옥합도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눅 7:38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상황을 그려보면, 이 여자는 식사를 방해할 의도는 없었던 것 같다. 단지 예수님께서 이 곳에 계시다는 것을 알고 용기를 내어 찾아온 것 뿐이다. 그래서 최대한 방해가 되지 않게 뒤쪽으로 돌아서 예수님 가까이 갔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자. 이 여자는 오늘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까, 아니면 이전에 만난 적이 있을까?
이 여자가 했던 행동이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보면, 삭개오의 경우처럼 단지 예수님을 보고 싶어서 이렇게 했던 것은 아니다. 아마도 이 사건 전에 그는 예수님을 만났고, 그때 죄 사함의 은혜를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감사를 표현하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 온 것이다. 아마 다른 향유 사건처럼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을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향유를 사용하는 좀 더 일반적인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발 곁에 선 여자는 쏟아져 나오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이 눈물이 자신의 죄에 대한 후회의 눈물인지, 아니면 예수님의 용서에 대한 기쁨의 눈물인지 알 수 없다. 아마도 그 둘 다였을 것이다. 자신 같은 죄인을 찾아와 죄 사함의 은혜를 베푸신 예수님을 보니 눈물이 먼저 쏟아졌던 것이다. 그리고 그 눈물은 예수님의 발에 떨어졌다. 일부러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적시려고 했다기 보다는 자연스럽게 그녀가 서 있던 곳이 예수님의 발 옆이었기 때문에 발을 적셨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녀는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더러운 발을 보게 되었을 것이다. 원래라면 주인이 제공한 물로 씻어서 깨끗해야 할 예수님의 발은 먼지로 더러워져 있었고, 거기에 자신이 흘린 눈물로 인해서 마치 구정물을 밟은 것처럼 얼룩덜룩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선택한 것은 예수님의 발을 씻는 것이었다. 계속 흐르는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신의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았다. 당시 공공장소에서 여자가 머리를 푸는 것은 수치로 여겨지던 일이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자신의 수치보다 예수님의 수치가 더 중요했다. 그렇게 자신의 눈물을 씻을 물로 삼고 머리털을 수건으로 삼아 예수님의 발을 씻기고 그녀는 그 발에 입을 맞췄다. 마치 주인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종처럼 그렇게 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발에 자신이 가져온 향유를 부었다. 초대한 주인이었던 시몬에 의해 수치를 당했던 예수님께 최고의 예우를 갖추었던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이 장면을 지켜봤다. 시몬도 매우 흥미롭게 이 여인의 행동을 지켜봤을 것이다. 아마 처음에는 화가 났을 것이다. ‘거룩한’ 자신의 집에 죄인인 여자가 아무렇지 않게 들어왔다는 것 자체에 그는 분노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여자가 예수님께 가서 예수님께 아주 친밀하게 대하는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미소를 지었을 것 같다. 드디어 예수님을 책잡을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는 이 모습을 통해 예수님도 성적으로 부도덕한 자라고 비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 앞에서는 깨끗한 척하더니 매춘하는 여자와 어울리고 다녔다는 식으로 몰아세울 수도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시몬을 비롯해서 누구도 예수님을 향해 그렇게 말하지는 못했다. 이들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능력은 부인하지 못하고 그 능력이 귀신의 왕에게서 온 것이라고 주장했었던 것처럼, 이들은 예수님의 거룩한 삶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대신 시몬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눅 7:39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그가 볼 때 이 상황은 완벽하게 예수님이 참된 하나님의 선지자가 아니라는 증거였다. 만약에 하나님의 선지자라면 이 죄인인 여자가 자신을 그렇게 만지게 그냥 두었을리가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여자가 하는대로 하게 가만히 있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이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몰랐다는 말인데, 그 역시 예수님이 참된 선지자가 아니라는 증거라고 시몬은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 자신의 논리가 완벽하다는 생각을 하고, 사람들 앞에서 드러낼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때 예수님께서 먼저 말씀하셨다.
눅 7:4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그가 이르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시몬이 입을 열기 전에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먼저 말씀하셨다. 시몬 입장에서는 선수를 빼앗겼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시몬은 사람들 앞에서 정중한 사람이어야 했기 때문이다(“선생님 말씀하소서”). 당시의 좋은 선생들처럼 예수님은 간단한 비유를 드시고, 쉬운 질문을 하나 하신다.
눅 7:41–42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42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데나리온은 하루 일당이다. 따라서 한 사람은 500일의 봉급에 해당되는 돈을 빚졌고, 한 사람은 50일의 봉급에 해당되는 돈을 빚졌다. 빚진 돈의 양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두 사람 다 갚을 돈은 없었다. 둘 다 적지 않은 돈이기 때문에 이해가 되는 상황이다. 이에 빚 주는 사람은 두 사람의 빚을 모두 탕감해 주었다.
여기 사용된 “탕감해 주다”는 동사는 기본적으로 은혜를 베푸는 것, 관대하게 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죄를 지은 경우는 용서한다는 의미가 되고, 이렇게 빚과 관련해서는 탕감한다는 의미가 된다. 즉, 이 비유에서 빌린 사람들은 모두 빚을 갚지 못했고 그에 합당한 형벌을 받아야 했지만, 빌려준 사람이 그들에게 은혜를 베푼 것이다. 예수님은 둘 중에 누가 빚을 탕감해 준 사람을 더 사랑하겠느냐고 물으셨다.
두 사람의 경험은 동일하다. 빚을 졌고, 갚을 것이 없었고, 탕감을 받았다. 유일한 차이는 빚의 양이다. 한 사람은 500 데나리온 빚진 것을 탕감 받았고, 다른 사람은 50 데나리온 빚진 것을 탕감 받았다. 예수님은 이 차이가 탕감 받은 사람이 탕감 해준 사람을 사랑(혹은 감사)하는데 어떤 영향을 주느냐고 물으신 것이다.
쉬운 질문이다. 바리새인 시몬도 바로 답을 알았다. 하지만 그는 혹시 이 질문에 어떤 함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내 생각에는 …” 이라고 첨언하여 답한다.
눅 7:43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질문 자체에는 아무런 함정이 없었다. 예수님은 당연한 원리를 물으신 것 뿐이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알고 있는 원리다. 많이 탕감을 받은 사람이 더 감사하게 생각한다. 예수님은 이 원리로 지금 그가 보고 있는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를 설명하신다.
눅 7:44–46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45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46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잘못 들으면 예수님께서 여기서 제대로 대접 받지 못했던 어떤 서운함을 표현하고 계신 것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그렇지는 않다. 예수님은 차이를 말씀하고 계실 뿐이다. 시몬과 여자의 행동의 차이는 궁극적으로 그들의 영적인 상태의 차이에서 기인했다. 그들의 영적인 상태가 예수님에 대한 태도와 행동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났음을 예수님은 대조를 통해 강조하시는 것 뿐이다. 물론, 이것은 시몬에 대한 책망이기도 하다. 그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데 이르도록 예수님은 이 상황을 사용하고 계신다.
먼저 예수님은 발 곁에 있는 여자를 돌아보셨다(44절). 시몬을 비롯한 모든 사람이 자연스럽게 이 여자를 주목했을 것이다. 그 상태에서 예수님은 시몬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의 행동과 그의 행동을 비교해 보게 하신 것이다. 그가 정말로 무엇을 봤어야 했는지를 말씀해 주신 것이다.
시몬은 예수님을 초대했으면서 예수님께서 집에 들어올 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이는 먼 길을 온 손님에게 욕실도 사용하지 못하게 한 것과 같다. 그는 입맞추지도 않았다. 가장 기본적인 인사도 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는 감람유도 붓지 않았다. 더운 날 집에 온 손님에게 시원한 물 한 잔 내주지 않은 것과 비슷하다.
시몬은 예수님을 손님으로서 합당하게 대접하지 않았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것들은 사실 ‘기본적인 것’들이다. 손님을 초대했으면 당연히 해야할 것들인 것이다. 그런데, 시몬은 그것조차 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 함께 했던 사람들은 시몬의 그런 행동을 통해 그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는 예수님을 존중하는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예수님을 부끄럽게 만드려고 했다.
하지만, 이 여자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자기 눈물로 물을 대신하고, 머리카락으로 수건을 대신했다. 예수님의 발에 입 맞추는 것으로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표현했다. 값싼 감람유가 아닌 자신이 가진 것 중 가장 좋은 것일 향유를 예수님께 부었다.
예수님은 이것이 무엇이 의미하는지를 이렇게 말씀하셨다.
눅 7: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여자의 행동의 의미했던 것은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다는 사실이었다.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는 지금 일어난 일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일에 대한 서술이다. “(그의 사랑함이 많은 것을 보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진 것이 분명하도다”는 의미로 하신 말씀이다. 47절 끝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이 이 의미를 더 분명하게 한다. 예수님은 이 여자가 지금 한 일 때문에 많은 죄가 용서 받았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 아니다. 사함이 먼저고 사랑이 뒤따른다. 앞의 비유에서도 탕감이 먼저였다.
이 여자가 언제 사함을 받았는지는 성경이 말하지 않기 때문에 특정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이 사건 전이라는 것 뿐이다. 우리는 언제인지 모르는 어느 때 이 여자는 예수님을 만났다. 그리고 그 만남은 이 여자의 삶을 영원히 바꾸어 놓았다.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사마리아 여자나 나무 위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여리고의 삭개오처럼, 이 여자도 단순히 예수님을 만나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났고 죄 사함의 은혜를 경험했던 것이다. 자신이 어떤 죄인인지를 깨달았고, 예수님이 그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메시아임을 알고 믿었다.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지금 이 곳에서 그 감사를 표현했던 것이다.
이 여자가 했던 행동은 일반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감사를 표현하는 것 자체는 일반적이고 당연하다. 우리는 이 사실을 예수님께 고침을 받았던 10명의 나병환자 이야기에서 확인했었다. 감사하는 사람이 진정한 구원을 얻은 자다. 그런데, 이 여자의 행동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 이 여자는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하지 않을 일을 했다. 어떤 면에서 보면 과하게도 보인다. 예수님의 발을 씻어 드리려고 했던 것이라면 수건을 허리에 두르고 대야에 물을 받아서 했어도 되었을 것이다. 그게 더 발을 깨끗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여자는 굳이 자기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았다. 사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처음부터 그렇게 하려고 계획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상황 속에서 자신의 마음이 가는대로 행한 것이었고, 그 마음에 있던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감사가 그렇게 표현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모습은 우리 눈에 과한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의무감이 아닌 사랑이 동기가 된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많이 사랑한 이유를 예수님은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기 때문이라고 하셨다(47절). 그녀는 많이 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많이 사랑했다.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한다. 사함을 받은 일이 없는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다.
바리새인 시몬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 전혀 사랑하지 않았다. 그가 발 씻을 물을 주지 않은 것은 그렇게 하고 싶었는데 물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냥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 뿐이다. 예수님께 입맞추지 않은 것,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않은 것, 모두 같은 이유다.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하고 싶지 않아서 하지 않은 것이다. 그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가 사함을 받은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사함을 받을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그는 어떤 사람을 보면서 사함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을 보면서는 저런 사람은 사함을 받으면 안된다는 생각도 했을 것이다. 바로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죄인인 여자가 바리새인인 시몬이 보기에 그런 사람이었다. 이런 죄인은 절대 하나님께 용서 받지 말아야 하고, 그 죄에 대한 형벌을 그대로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은 그런 사람과 같지 않다는 사실에 감사했을 것이다. 사함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감사는 감사가 아니었고 그저 자기 자랑일 뿐이었다.
반대로 사람들에게 이런 멸시를 받으며 살았던 죄인인 여자는 자신의 죄에 대해 깊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의 죄를 용서하셨을 때, 그녀는 그 용서의 크기를 알았고 예수님께 그만큼 사랑을 표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많이 사함 받았음을 알았기에 많이 사랑했던 것이다.
이런 모습은 오늘날 구원 받은 사람들에게서도 동일하게 보여진다. 믿는 부모님 아래서 잘 성장하여 구원을 받은 사람들과 세상에서 죄악된 삶을 즐기다가 구원 받은 사람들이 보이는 모습이 다르다. 교회 안에서 자란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보이는 분명한 변화를 부러워 한다. 그들이 누린 죄악된 삶을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삶을 살았었기 때문에 사랑의 결과로서 분명히 보여지는 변화가 있다는 것을 부러워 하는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큰 방황 없이 자란 사람들에게도 분명한 변화는 찾아온다. 구원 받은 직후가 아니라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자신의 죄악된 모습을 더 보게 되고, 그로인해 자신이 받은 용서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개인적인 경험이다. 내가 정말 죄인이구나 하는 생각을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더 하게 된다. 그리고 그 사실이 더 감사하게 만들고 더 사랑하게 한다.
그래서 결국 중요한 것은 실제로 죄를 얼마나 지었느냐가 아니라 내가 지은 죄를 어떻게 보느냐다. 실제로 죄를 얼마나 지었는지만 중요하다면, 우리는 지금부터 더 사랑하기 위해서 열심히 더 죄를 지어야 할 것이다. 더 큰 죄를 지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나를 어떤 죄인으로 보는지다.
바울은 자신에 대해서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라고 표현했다. 객관적으로 바울이 죄인 중에서 가장 나쁜 죄인일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바울은 누구보다 열심히 그리스도의 교회를 핍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직접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사람은 어떨까? 예수님을 정신나간 사람 취급했었던 가족들은 어떨까? 객관적으로 누가 가장 큰 죄인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어떤 죄인으로 생각하는지가 중요하다.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생각했던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항상 그를 강권하신다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않고 그리스도를 사랑했다. 많이 사함 받은 사람이 많이 사랑한 것이다. 사랑함이 용서 받음의 증거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수님께 사랑을 표현한 이 여인에게 말씀하셨다.
눅 7:48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바리새인 시몬은 여자가 예수님께 한 행동을 보면서도 여전히 여자를 심판 받을 죄인으로서 정죄했지만, 예수님은 그 행동이 더 이상 그녀가 심판 받을 죄인이 아니라 용서 받은 죄임임을 보여주었다고 선포하신 것이다.
그러자 사람들은 속으로 수군거렸다.
눅 7:49 함께 앉아 있는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이들은 예수님께서 의도하셨던데까지 왔다. 이들은 이 질문에 객관적이고 정직하게 답해야 했다.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이 눈을 뜬 것을 본 사람들도 동일한 질문을 마주했었다(요 9장). 그 놀라운 일을 행한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그들은 주어진 증거에 기반하여 정직하게 답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는 죄인”이라는 전제를 이미 가지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았다. 그들은 답을 찾을 수 없었고, 예수님을 만났지만 죄 사함의 은혜는 누리지 못했다. 하지만 맹인이었던 자는 달랐다. 그는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임을 알게 되었고 믿게 되었다. 그는 죄 사함의 은혜를 누리게 되었다.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에 대한 정답은 “이는 하나님이시다”다. 하나님 만이 죄를 사할 권세가 있으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모든 죄는 하나님께 대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죄 사함도 하나님 만이 하실 수 있다. 예수님이 바로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끝으로 예수님은 여자에게 하는 말로서 그 자리의 모든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신다.
눅 7:50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참된 구원에 이르는 길, 참된 평안에 이르는 길은 오직 믿음이다. 이 여자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고, 사랑으로 그 믿음을 보였다. 바리새인 시몬을 비롯한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더 경건한 삶이 아니었다. 더 많은 구제나 자선이 필요하지 않았다. 더 많이 더 길게 기도해야 하지 않았다. 더 꾸준히 헌금해야 하지 않았다. 바로 그들 앞에 계신 예수님을 그들의 죄를 사하시는 구원자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는 믿음만이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큰 죄인임을 인정해야 했다. 자신이 많이 사함 받아야 하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그 죄를 사하시는 구원자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도전
이 시점에서 우리가 자신에게 던져야할 질문은 하나다. 나는 구원자 예수님을 만났는가?
단지 2천여년 전에 이 땅에 예수라는 사람이 살았다는 사실을 아냐고 묻는 것이 아니다. 그 예수가 인류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인정하느냐고 묻는 것이 아니다. 그 예수님이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시며,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 죄에 대한 값을 대신 치르시고 부활로 우리를 의롭다고 선포하신 구원자 그리스도이심을 믿느냐고 묻는 것이다. 이 땅에 살았던 존재가 아니라 지금도 살아계시고 다시 오실 왕이심을 믿느냐고 묻는 것이다. 이 예수님이 당신의 구원자이며 왕이시냐고 묻는 것이다.
누군가는 이 질문에 아무런 관심이 없을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이 질문에 그렇다고 답하지만, 실제로는 아닐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들이 이 질문에 그렇다고 답하고 실제로도 그렇기를 바란다.
실제로 그런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많이 사함 받은 사람은 많이 사랑한다. 적게 사함 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사실, 적게 사함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함 받은 사람이 아닐 것이다. 내 죄가 하나님 앞에서 작다고 생각하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제대로 보고 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말 구원 받은 사람이라면 모두가 많이 사함 받은 사람이다. 그렇게 자신을 보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 마음에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가득차고, 그것이 그 삶에서 드러난다.
그래서 구원과 관련해서 우리가 자신에게 던질 최후의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예수님을 사랑하는가.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가 아니라,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많이 사함 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 많이 사함 받은 자들로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