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본문: 고린도전서 15장 12-19절

설교자: 조정의

기독교의 진리는 총체적 진리다(total truth). 각각의 교리가 따로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를 부정하거나 왜곡하면, 나머지에 분명히 영향을 미친다. 우종학 교수는 ‘2014 제3회 기독교 변증 콘퍼런스’에서 “지구의 나이가 수백억 년이든 1만 년이든, 진화가 일어나든 말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백성에겐 사실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6일 창조를 부정하면,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거짓말쟁이가 된다(출 31:17). 진화의 과정엔 반드시 죽음이 전제되어야 하므로, 죽음은(심지어 살인도) 죄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이 설계하신 선하신 계획이 된다.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지 않으셨고 인간으로 진화한 수많은 개체 중 하나가 아담이라는 대표성을 갖는다. 옛 아담의 역사성이 이렇게 혼탁해지면 새 아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성도 의심에 휩싸인다. 죽음이 선하다면, 그리스도는 왜 십자가에서 사망을 정복하셨는가? 십자가로 이루신 구원은 무엇으로부터 구원인가? 기독교는 어떤 영생을 기대하는가? 이처럼 “날”이라는 개념 하나만 부정해도 기독교는 전부를 잃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하고 순수하기 때문이다(시 18:30). 틈과 흠이 생기면 완전과 순수는 그걸로 끝이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중 어떤 사람들은 죽은 자의 부활을 부정했다(12절). 그들은 부활을 부정하는 것이 나머지 기독교 진리에 아무 지장을 주지 않을 거라고 믿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바울은 실제로 그것이 복음에 미치는 해악이 얼마나 큰지 본문을 통해 논증한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똑똑히 보라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사도가 전수한 복음 안에서 부활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지 알 수 있고, 또한 실제로 부활이 교회에 어떤 변화를 일으켜야 하는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부활을 믿든 믿지 않든 큰 문제가 되지 않는 삶을 산다면, 그것이 가장 큰 문제다. 당신은 부활을 진실로 믿는가?

1.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12-13절)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12절). 고린도 교회가 사도로부터 전수받은 복음의 핵심엔 부활이 있었다.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역사적 사실은(4절) 부활의 증인인 게바, 열두 제자, 오백여 형제, 야고보, 그리고 이 편지를 쓴 바울을 통해 확실히 입증되었다(5-8절). 하지만, 영은 거룩하고 육은 부정하다는 이원론 사상과 함께 자라난 고린도인들은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굳게 지키지 못하고 헛된 이교도 사상을 섞어 죽은 자의 부활을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유대인은 족장시대부터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을 기대했었다(욥 19:26). 하지만 세속적인 삶의 방식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라는 태도를 취하게 했다(32절, 딤후 2:18). 여튼 그들은 죽은 자의 부활이 없는 것처럼 믿고 살았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매우 진지한 논박을 시작한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13절). 그리스도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20절). 첫 열매가 없으면 두 번째 열매도 없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으면 신자의 부활도 없는 것이 당연하다. 아담의 범죄가 모든 사람에게 사망을 가져다준 것처럼, 그리스도의 부활이 모든 사람에게 부활의 소망을 가져다주었다(21절). 무엇이든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은 믿음으로 그분과 연합한 신자의 것이 된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롬 6:5). 그러므로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들이 믿음으로 연합한 그리스도도 부활하지 못하셨다는 결론에 이른다(엡 2:6-7). 주께서 부활하신 것이 사실이라면, 믿음으로 그분과 연합한 자들도 반드시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아날 것이기 때문이다. 논박은 계속된다.

2.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14-15a절)

14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14-15a절).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다면, 그 후폭풍으로 연달아 무너지는 진리가 있다: 1) 사도들이 전파한 복음(내용)이 헛것이 된다, 2) 그 복음에 둔 성도들의 믿음헛것이 된다, 3) 사도들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된다. 하나님이 하시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거짓 증언하는 신성모독자가 되는 것이다(신 18:20-22). 이 세 가지 논리적 결론은 억지가 아니라 지극히 당연한 결과다.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결과적으로 이런 문제까지 생기는 것이다.

사도들이 전파한 복음의 핵심이자 절정은 그리스도의 부활이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2, 36). 그런데 만일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지 못하신 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이 전파한 복음은 거짓말에 헛소리가 된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않으셨는데, 그렇게 하셨다고 거짓 증언하는 자, 하나님의 완전하고 순수한 말씀을 더럽히는 신성모독자가 된다. 증인도 거짓 증인이고 그들의 증언도 거짓이라면, 거기에 둔 믿음은 과연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가 믿는 복음의 내용에서 부활만 빼도 죄 사함 구원은 이루어지지 않을까? 그럴 수 없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부활을 빼도,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의 죄를 대신 속량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 죄가 실제로 모두 속량 되었는지 확신할 수 없다. 예수님도 자기 죄 때문에 사망에 이른 수많은 죄인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것으로 우리가 굳게 확신할 수 있는 두 가지 사실은, 우리의 죄가 깨끗이 해결되었다는 것과 부활하여 영원히 살아계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영원히 의로운 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으면 우리 믿음은 완전히 헛것이 된다.

3.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15b-19절)

15절 하반절부터 앞선 논박이 반복된다: “15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16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17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약간의 논점 차이가 있는데, 전반부는 죽은 자의 부활을 부정할 때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결과를 밝히기 위한 논박이었다면, 후반부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목적을 밝히기 위한 논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믿음이 헛것이 되지 않게 하시려고, 그리고 우리가 죄 가운데 여전히 머물지 않게 하시려고 다시 살아나셨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두 가지 사실이 바로 이거다(롬 4:25).

그러면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잠자는 자나 살아있는 자 모두에게—실제로 어떤 능력을 줄까? 먼저,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17절)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라고 말했다(18절). 여기서 ‘망하’는 것은 영원한 심판과 저주 아래 있는 사망을 뜻한다. 그리스도가 부활하지 않으셨다는 것은 그들의 죄가 완전히 사해졌는지 불확실하다는 말이고, 그들이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증언할 그리스도가 영영 죽음에서 깨어나지 못하셨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여전히 죄 가운데 있다가 죽음에 이른 자에게 무슨 소망이 있겠는가? 반대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죽은 자에게도 소망이 있다. 그들은 온전히 죄 사함을 받고 의롭게 된 자로서 다시 살아나 그리스도와 함께 영생을 누릴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영원한 원수인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을 완전히 바꾼다. 우리는 썩지 않고 죽지 않는 신령한 몸을 입고 사망을 마침내 정복할 것이다. 이렇게 담대히 외치며: “사망이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53-54절).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자는 어떤가?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19절).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자나 그리스도 밖에서 살아가는 자나 똑같이 구원의 은혜를 얻지 못하고 사망하여 영벌을 받게 될 것이니 똑같이 불쌍한 자여야 한다. 그런데 왜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라고 했을까?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자는 부활의 소망 때문에 죄를 짓지 않고 의를 행하며 살아가기 위해 투쟁하기 때문이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왜 그런 영적 전쟁을 치르면서 이 세상의 삶을 허비해야 하는가?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라고 외치며 자기를 사랑하고 쾌락과 재물을 즐기며 죽음을 맞이하는 게 그나마 덜 불쌍하지 않은가? 

바울은 부활에 관한 가르침을 끝내며 이렇게 부활의 소망 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격려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58절). 죽은 자의 부활이 참이기 때문에 이 세상의 삶을 넘어 영원한 나라의 삶을 바라며 살아가는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은 것이다. 주께서 다시 살아나신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불쌍한 자가 아니라 더욱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될 수 있다. 부활은 성도의 참된 위로가 되고(살전 4:18), 부활은 잠자는 그리스도인을 깨워 정신을 차리게 하고(살전 5:6), 부활은 죄에 맞서 싸우게 하며(고전 15:34), 부활은 부지런히 선을 행하는 자녀로서 이 세상의 삶을 전투적으로 살게 한다(고전 15:58). 부활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베푸신 큰 능력이다. 바울은 교회가 이를 알게 되기를 구했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에게 베푸신 지극히 크신 하나님의 능력이 어떻게 예수님 안에 나타났는가?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엡 1:18-20). 

바울은 아덴에서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과 만나 쟁론했다(행 17:16-18). 그들은 바울의 가르침이 이상하면서도 새롭다고 생각했다. 그가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었다(18절). 스토아 철학자는 눈에 보이는 것과 이성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만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이었다. 에피쿠로스 철학자는 쾌락이 인생의 목적이며 죽으면 영혼이 소멸한다고 믿었다. 복음은 그들의 취약점을 파고들었다. 부활은 사람의 영혼이 단지 보이는 것과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에 제한되지 않는다는 사실, 영원을 사모하는 것은 헛된 것이 아니라 참 진실에 가까워지는 것이라는  진실을 가르쳐 주었다. 사람의 인생은 쾌락을 추구하며 살다가 소멸하는 것 이상의 가치를 갖는다는 확신을 바울이 전한 부활의 복음이 분명히 약속했다. 그런데 어쩌다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이교도 무신론자와 똑같은 신념을 갖게 되었을까?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을 믿으면서도 어떻게 그들 자신의 부활은 믿든지 믿지 않든지 크게 상관없는 삶을 살게 된 것일까? 

냉정하게 평가하면 우리도 고린도 교회 어떤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노골적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하는 이들은 없다. 하지만,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 뿐인 것처럼 살아가는 이들은 적지 않다. 사도 바울은 여러 번 눈물을 흘리며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고 있다고 탄식했다(빌 3:18). 그리고 그런 사람의 대표적인 특징이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고 했다(빌 3:19).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지가 가장 중요한 일이 돼서는 안 된다. 건강, 좋은 학교와 직장, 결혼과 육아가 가장 먼저 구할 기도 제목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세상 사람과 똑같은 것을 구하고 똑같은 것을 위하여 살면서 보험처럼 나중에 죽으면 부활하여 좋은 곳에 갈 것을 기대하고 있다면(아니면 말고) 부활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와 무슨 차이가 있는가?

부활은 죄와 날마다 싸우는 당신의 삶에 능력이 되어야 한다. 도저히 용서가 안 되거나 사랑하기 힘든 대상을 대하는 당신의 태도를 바꾸는 힘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가 되는 것에 관한 두려움을 부활이 내어쫓아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보내거나 온갖 질병과 싸울 때, 부활은 당신에게 실질적인 위로가 되어야 한다. 부활은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능력이다. 그 능력으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살아가자. 죄와 싸우고 선을 부지런히 행하며 살아가자. 고난과 시험을 참고 영광의 면류관을 바라보며 살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