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마지막 날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본문: 고린도전서 15장 50-58절

설교자: 조정의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전 7:2).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웠던 왕 솔로몬이 모든 사람에게 한 조언이다. 사람은 자신이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또 믿는다. 그러나 그걸 계속 마음에 두고 사는 사람은 별로 없다. 바쁜 일상에 치이고 여러 문제에 시달리면서 까맣게 잊어버린다. 그러다가 어느 날 죽음이 갑자기 찾아오거나, 의사를 통해 시한부 판정이 내려지면, 그때서야 비로소 진지하게 자기 인생의 끝과 알 수 없는 운명에 관하여 심히 두려워 떤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그들의 끝에 관하여 감추지 않으시고 그 희망찬 미래를 밝히 알려주셨다. 그래서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과 같이 두려워하거나 낙심하거나 슬퍼하지 않게 하셨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소유한 부활의 소망이 무엇인지, 또 그것을 마음에 두고 사는 사람의 마땅한 삶은 어떤 것인지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자. 또한, 부활의 소망이 없는 이들에게는 소망을 찾는 은혜의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1. 부활은 반드시 필요하다(50절)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했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50절). 요지는 그리스도인에게 부활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썩지 아니하는 영적인 하나님 나라를 세세토록 다스리기 위해서다: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50절). 신은 늙어서 흙으로 돌아가고, 액은 순환을 멈춘다. 한 마디로 우리는 시간이 갈수록 썩는 몸을 가지고 산다(고후 4:16). 그런데 그런 우리에게 어떻게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이어받으라고 하시는가?(벧전 1:4). 우리가 어떻게 이 몸으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이어받을 수 있겠는가?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몸을 주시지 않는다면! 부활은 그래서 반드시 필요하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 하나님 나라를 주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그에 합당한 새로운 몸도 주시는 것이다(엡 1:3).

2. 부활은 이렇게 일어난다(51-53절)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어떻게 새로운 몸이 입혀지게 될까? 이것은 본래 비밀(무스테리온)이다. 하나님께서 감추어두신 그 비밀을 사도 바울은 계시로 받았고, 그것을 지금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말해주려고 한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51절). 사도는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지만 그것을 자세히 밝히진 않았다. 하지만, 죽음을 두려워하고 그 이후에 소망이 없는 것처럼 낙심하는 고린도 성도들을 위하여 그가 들은 비밀을 풀어놓는다: “51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52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53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51-3절).

자는 것’은 ‘죽음’의 또 다른 표현이다. 바울은 특별히 그리스도인의 죽음을 ‘잠잔다’라고 표현한다(고전 11:30; 15:18, 20). 죽음은 그 과정이 고통스러울 수도 있고 그 후에 무엇이 있을지 몰라서 매우 두려운 일인데, 그리스도인에게는 눈을 잠깐 감고 뜨면 새로운 날이 펼쳐지는 잠처럼 아주 간명한 일이라서 그렇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잠잘 것이 아니라고 했다. 마지막 나팔 소리가 날 때, 여전히 살아있는 성도가 있을 거란 말이다. 우리 시대 그리스도께서 오신다면, 우리가 그렇다.

나팔은 구약 성도들에게 중요한 절기나 시점을 알릴 때 불었던 도구인데(레 23:24; 민 10: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집결한 시내 산에 친히 강림하실 때도 하늘에서 나팔 소리가 매우 크게 울렸다(출 19:16). 마지막 나팔은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때, 울릴 것이다. 그리고 그때, 아직 죽지 않은 그리스도인들과 이미 죽은 그리스도인들은 각각 새로운 몸을 입게 될 것이다: “16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①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그 후에 ②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6-17). 

새로운 몸을 입는 것에 관하여 몇 가지 중요한 내용이 있다. 첫째, 순식간에 일어난다: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순식간에’로 번역된 헬라어의 뜻은 ‘눈 깜짝할 사이’이다. ‘홀연히”라는 단어(아토모스)에서는 ‘원자’라는 단어가 파생되었다.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작은 크기의 단위이다. 둘 다 아주 짧은 시간을 가리킨다. 하나님 나팔 소리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나 산 자나 모두 찰나의 시간에 새로운 몸을 입게 될 것이다. 

둘째, 순서가 있다. 순식간이지만 그래도 순서가 있다. 먼저는 죽은 자들(잠자는 자들), 그다음엔 “살아 남은 자들”이다. 새로운 몸을 입는 과정을 각각 다르게 표현하는 것에 주목하라. 죽은 자들은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난다고 했고, “살아 남은 자들”은 “변화되리라”라고 했다. 죽은 자는 썩지 않을 새 몸을 입고 다시 살아나는 것이고(부활), 살아 남은 자들은 죽음을 통과하지 않고 새로운 몸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자는 자들로 인하여 슬픔에 젖어 있던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먼저 그들을 살리신다는 비밀은 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살전 4:18).

셋째, 새로운 몸을 덧입는다. 53절에서는 썩을 것썩지 아니할 것을, 죽을 것죽지 아니함을 것이라고 했다. 썩다가 죽게 될 지금의 몸을 벗고, 썩지 않고 죽지 않는 새로운 몸을 입게 될 것이란 말이다.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2절과 4절에서 새로운 몸을 “덧입기를(같은 어원) 간절히 사모”한다고 했다. ‘덧입는다’라는 말은 옛 몸을 입은 채로 새로운 몸을 입는다는 의미로 들린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 표현은 우리가 입을 새 몸이 지금의 몸과 여러 면에서 유사하고 동시에 다르다는 사실을 알려준다(42-44절).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속한 이”로서 새로운 몸을 입으신 것처럼, 우리도 그런 몸으로 덧입을 것이다.

3. 부활은 약속을 성취한다(54-57절)

그리스도인의 부활은 분명 감추어진 비밀이었지만, 하나님은 이미 구약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 비밀을 예언하셨다. 그래서 바울은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이라고 바로 앞의 구절을 그대로 반복하여 말하면서,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라고 확신 있게 말한다(54절). 바울이 인용한 말씀은 이사야 25장 8절인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모든 눈물을 씻기고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면서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라고 약속하신 예언이다. 그 예언은 지금껏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마지막 나팔이 불 때, 사망이 더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을 위협하지 못할 때, 온전히 성취될 것이다. 바울은 그때 하나님께서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실 것이라고 했다(고후 5:4).

바울은 또 다른 구약 예언을 인용하는데, 바로 호세아 13장 14절이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이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55절). 선지자 호세아 또한 간음한 백성을 끝까지 신실하게 돌보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의지가 잘 드러나는 메시지를 선포했는데,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스올(죽음)의 권세에서 속량하시고 사망에서 구속할 것을 약속하셨다. 그러면서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스올아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라고 꾸짖으셨다. 사망도 죽음도 하나님께 속한 백성에게 손댈 수 없도록 반드시 사랑하는 백성을 지키시겠다고 약속하신 아름다운 장면이다. 그것이 바로 마지막 나팔에 이루어질 것이다. 

그런데, 사망은 왜 우리에게 치명적인 독을 는가? 왜 우리를 죽음과 멸망에 집어넣고 승리를 외치는가? 바울은 첨언처럼 이렇게 덧붙여 답한다: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56절). 사망은 모든 사람에게 치명적인 독을 쏜다. 죽음에 이르게 하고 죽여서 영원한 심판에 던지는 무서운 정복자다. 예외가 없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에 의 삯인 사망을 맞이하고 힘없이 정복당하는 것이다(롬 6:23).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로 율법을 주셔서 가 무엇인지 알게 하셨다(롬 7:7). 그런데 죄인은 율법을 보고 죄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의 정욕대로 율법을 범하여 사망을 부르는 열매를 맺는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 맺게 하였더니…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롬 7:5, 8). 그래서 죄인은 스스로 사망을 피할 수 없다. 하나님이 주신 기록된 율법이나 마음에 새겨진 양심을 가졌지만, 그 요구를 이루려고 하지 않고(그럴 수도 없지만), 반항하여 더 많은 죄를 실컷 짓다가 사망이 쏘는 독에 정복당하고 율법이 정한 바대로 영원한 심판을 받는 것이다. 그래서 죄인은 죽음을 절대로 이길 수 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로 믿고 따르는 자들은 죽음을 이길 수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57절).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셨다(벧전 3:18). 그분이 우리에게 요구된 율법의 모든 요구를 대신 이루셨다(롬 8:4). 주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셔서 사망을 이기시고 우리에게 똑같은 승리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요 11:25-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그래서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시인하며 따르는 자들은 사망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망을 이기기 때문이다. 사망이 당신을 정복하기 전에 사망을 이기시고 당신에게 승리와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어라.

4. 부활은 일상을 바꿔준다(58절)

부활의 소망은 마지막 나팔이 울릴 때, 우리 몸을 새롭게 변화시키고,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만났을 때, 우리의 마음을 담대하게 만들어 준다. 그뿐만 아니라 부활의 소망은 우리의 일상도 급진적으로 바꾼다. “그러므로”로 시작하는 마지막 구절은 15장에서 바울이 전개한 부활에 관한 모든 가르침의 결론이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을 줄 앎이라”(58절). 마지막 권면에 앞서 바울은 권면의 대상인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친밀하게 부른다. 그의 가르침과 권면 모두가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들이 진리 안에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소망 가운데 복음의 능력으로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 분명하다(요삼 1:4). 부활에 관한 진리는 신자의 삶을 어떻게 바꾸는가? 크게 두 측면에서 실질적인 변화를 준다.

첫째, 주를 견고하게 붙든다. “견실하다’와 ‘흔들리지 않는다’는 각각 긍정과 부정의 표현이고, 굳건히 앉아서 꿈쩍도 하지 않는 모습을 묘사한다.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삶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 것, 뒤돌아보거나 곁눈질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가 하신 약속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굳게 믿는 것을 말한다. 삶에 폭풍 같은 시험이나 탐스러운 유혹이 있을지라도, 절대 흔들리지 않는다. 모든 만물이 사망에 정복당하지만, 사망을 이기신 분은 오직 주님이시다. 우리가 주님을 떠나 무엇 또는 누구를 섬기겠는가? 의지하겠는가? 생명이신 주님만을 굳게 붙잡자.

둘째, 주를 더욱 섬기게 한다. 항상, 더욱,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1)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반드시 보상하시기 때문, 2)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알 수 없기 때문. 부활 이후에 영원한 삶이 주어진다면, 그리고 그 영원한 삶에 우리가 얻게 될 상급이 유한한 이 땅에서 우리가 어떻게 주를 위하여 살았는지에 오롯이 달려 있다면, 우리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매 순간 주의 일에 힘쓸 것이다.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은 우리에게 이 땅에서 얼마의 시간이 주어졌는지다. 그래서 우리는 ‘나중에 주를 위해 살면 되지’, ‘지금은 나를 위해서 좀 살고 주님을 위해서는 조금만 힘을 써야지’라고 절대로 말할 수 없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라고 주께서 부르실 때, 후회가 남지 않도록 매일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자(눅 12:20). 그것만이 남는다(고전 3:13-15).


찰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에 나오는 스크루지 영감은 지독한 구두쇠로 불쌍한 최후를 맞이할 자신의 미래를 보고 나서 완전히 달라진 삶을 산다. 우리도 종종 우리의 인생이 어떻게 끝날는지 미리 본다. 우리는 나아가 죽음 이후에 영생과 영벌이 있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서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것이 우리의 현재를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우리에겐 소망이 없다. 현재 주를 위해 살지 못하게 가로막는 장애물이 있다면, 그것이 시험이든, 유혹이든, 사람이든, 환경이든 삶과 죽음의 잣대로 바라보라. 영원한 심판이 예비된 우리를 죄와 사망과 율법의 요구에서 건져내신 그리스도는 지금 우리가 처한 모든 상황에서도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그리고 그렇게 주를 믿고 그분을 위하여 살기 위한 모든 일에 반드시 영원한 상급을 주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