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두 마음 말씀으로 지키기
본문: 약 4:1-10
설교자: 조정의
문어발식으로 다수의 여성과 연애를 한 한 남성이 그렇게 하는 이유에 관하여 묻자, ’내 마음은 한 여성만 품기엔 너무 크고 넓다’라고 답했다. 기가 막힌 답변이다. 물론, 서로 배타적이지 않은 대상은 얼마든지 마음에 함께 품을 수 있다(배우자, 자녀, 손자녀, 성도…). 그러나 이성 교제 대상처럼 서로 배타적인 대상은 그럴 수 없다. 둘 중 하나만 마음에 품어야 한다. 이런 경우 두 마음을 품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에서 볼 때도 매우 나쁜 일이다.
성경도 두 마음을 품은 자를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역대상 12장에서 다윗의 군사 목록을 지파별로 소개할 때, 스블론의 싸움 잘 하는 오만 명의 군대를 가리켜 “두 마음을 품지 아니하고”라고 설명한다. 군대는 오직 자국을 위해 싸워야 한다. 자국과 적국 모두를 위하여 싸우는 군대는 아군에게 오히려 치명적인 해를 끼친다. 다윗은 시편 12편에서 경건하고 충실한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악인들이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한다고 고발했다(2절).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는 척하면서 사실은 원수같이 말하는 것이다. 반대로 시편 119편을 쓴 기자는 하나님의 진리를 사모하는 자로서 “내가 두 마음 품는 자들을 미워하고 주의 법을 사랑하나이다”라고 노래했다(113절). 주의 법을 사랑하면 같은 마음으로 진리를 말해야지, 다른 마음을 품고 거짓을 말할 수는 없다고 고백한 것이다. 선지자 호세아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그들이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벌을 받을 것이라”라고 예언했다(호 10:2). 그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주상을 세우고 우상을 위한 제단을 세웠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것을 깨뜨리고 허무시겠다고 하셨다. 두 마음을 미워하시기 때문이다.
신약 성경엔 야고보서에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가 나온다(1:8). 믿음으로 구하면서 동시에 의심하는 자를 가리키는데, 이렇게 신뢰와 불신 모두를 마음에 품고 있는 자에게 하나님은 아무것도 주지 않으실 것이라고 경고하셨다(7절). 두 마음은 이렇게 구약과 신약 모두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마음이다. 왜 이것이 잘못된 것인지, 어떻게 두 마음을 버리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지 말씀으로 진단하고 처방해 보자.
1. 두 마음 말씀으로 진단하기
본문 1-3절에서 야고보는 모든 신자가 두 마음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고 확진한다: 1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2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3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너희”라는 말에서 두 마음의 전쟁이 특정 소수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신자의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너희 중에 싸움”은 두 마음 간의 다툼이 내면의 전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야고보는 왜 그런 갈등이 발생하는지 아느냐고 묻는다. 외부 환경? 타인의 언행? 아니다.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다. 특별히 “지체 중에서”라는 말은 우리가 대적해야 하는 또 다른 마음이 우리 속에 진을 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같은 맥락에서 사도 바울은 신자가 겪는 두 마음의 전쟁을 일인칭 시점에서 아주 생생하게 묘사했다: “21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 7:21-23). 두 마음이 싸우고 있다.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마음과 죄의 법을 즐거워하는 마음. 옛 육신의 마음과 거듭난 새 마음의 혈투가 항상 일어난다. 신자는 늘 두 마음과 치열히 싸운다.
믿는 자로서 우리가 대적해야 할 마음의 특징을 본문에서 몇 가지 발견할 수 있는데, 1) 굉장히 강한 욕구를 표출한다는 것(“욕심, 시기, 살인”, 2절), 2) 그 욕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구하지 않으려는 방식으로 표출되거나(“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2절), 3) 반대로 정욕을 채우기 위하여 구하려는 욕구를 일으킨다는 것이다(“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3절). 대표적인 예로는 하나님과 친밀한 사귐을 누리려는 마음과 세상과 벗이 되려는 마음 간의 전쟁을 들 수 있다(4절). 어떤 신자도 대척점에 있는 두 마음을 함께 품을 수 없다.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 됨이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4절). 세상을 사랑하려는 마음은 매우 강렬하다. 어떻게든 세속적인 정욕을 채우려고 투쟁할 것이다. 그 마음은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마음을 어떻게든 억누를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온갖 좋은 선물과 은사를 정욕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바꿀것이다. 당신은 세상이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을 추구하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함께 추구할 수 없다. 세상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추종하면서, 하나님의 법을 따를 수 없다. 당신의 마음을 지배할 최종 권위자는 하나여야 한다. 당신이 온 맘 다해 사랑해야 할 대상은 하나여야 한다. 그래서 야고보는 둘 다 품으려는 신자를 가리켜 “간음한 여인들”이라고 무섭게 책망한 것이다.
하나님은 마음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크고 넓어서 우리가 영적인 간음을 해도, 두 마음을 품어도 얼마든지 우리를 이해하시고 있는 그대로 품어주실까? 절대 아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다(출 20:5,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야고보도 이렇게 묻는다: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5절). 우리 안에 있는 새 마음의 주인, 성령께서 “시기”하신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사모하신다. 우리 마음을 독차지하고 싶어 하신다. 우리 중에 싸우는 또 다른 마음, 세상을 사랑하고, 정욕을 추구하는 마음을 죽이고 싶어 하신다(롬 8:13). 자, 이것이 우리 현실이다. 어떻게 두 마음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두 마음이 아니라 전심으로 행할 수 있을까?
2. 두 마음 말씀으로 처방하기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두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긴 하지만, 그렇게 살아도 되는 것은 절대로 아니라는 사실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라고 명령했다(신 6:5). 전심을 요구한 것이다. 여호수아도 이렇게 요구했다: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5).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엘리야도 바알을 섬길지 하나님을 섬길지 정함이 없던 백성에게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라고 즉각적인 선택을 요구했다(왕상 18:21). 예수님도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라고 말씀하셨고(마 6:24), 이도저도 아닌 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무섭게 경고하셨다: “15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 3:15-6).
두 마음은 절대로 품지 말아야 할 마음이다. 그런데도 많은 신자가 너무도 태평하게 두 마음을 가지고 산다. 그렇게 하나님을 멸시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이 아무렇지 않을 것이라고 착각한다. 하나님을 그렇게 취급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교만이 가득하다. 마음으로 간음하고 있으면서도 근심하거나 애통하지 않는다. 야고보는 두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리가 마땅히 품어야 할 마음이 슬픔과 애통과 통곡이라고 말한다: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9절).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언젠가 하나님께 마음을 더 쓰면 되겠지 뭐’ 이런 식의 죄책감과 불편함을 가지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간음한 자가 배우자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는 것처럼 진심으로 자기 죄를 슬퍼하고 모든 감정과 의지를 동원하여 뉘우쳐야 한다. 야고보는 그런 마음을 갖는 것을 “주 앞에서 낮추”는 것이라고 했다(10절). 자기 혼자 미안한 마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주 앞에 그 마음을 가지고 나오는 것이다. 그 마음은 겸손한 마음이다.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 앞에서 두 마음을 품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 마음을 상하게 하고 그분의 신의를 저버리는 죄인지 처절히 깨닫고 통회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자에게 은혜를 쏟으신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6절). 늘 두 마음을 가지고 살면서 아무렇지 않게 주 앞에 나와서 가식적으로 고백하고 행동하는 자는 은혜를 입을 수 없다. 하나님은 그들을 토하여내신다. 물리치신다. 겸손히 애통하고 우는 자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신다. 진정으로 회개하자!
그다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우리 지체 중에 진을 친 악한 마음을 죽이는 것이다. 7-8절을 보라: 7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8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상한 심령, 애통하고 회개하는 마음을 보이면, 하나님도 우리를 가까이하신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종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신다. 우리가 마귀를 대적할 때, 마귀가 우리를 피하게 하신다. 우리 지체 중에 진을 친 원수의 본부에서 대장을 쫓아내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힘입어 우리는 마음과 손을 모두 깨끗하게 해야 한다. 몸으로 짓는 죄만 죄가 아니라 마음이 나뉜 것도 죄다. 마음을 성결하게 하는 것은 악한 마음을 죽이고 주를 위한 마음만 나를 차지하도록 싸우는 것이고, 손을 깨끗이 하는 것은 전심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의 열매를 맺기를 힘쓰는 것이다. 둘 다 부정과거형이 사용된 것은 이것이 굉장히 시급하고 중요하게 여겨야 할 일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전쟁에서 나태함은 패배의 원흉이다. 방심은 자패의 지름길이다. 두 마음을 그냥 내버려두지 말라.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 대항하는 모든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속히 처단하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하고 온전한 삶의 방식에서 벗어난 모든 삶의 방식과 태도와 습관을 즉각 뜯어고치라.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데 방해가 되는 모든 것과 싸우라!
선지자 호세아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음녀를 아내로 삼는다. 그는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음녀를 사고 이렇게 말했다: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음행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호 3:3). 호세아는 값을 주고 순결하지도 않고 충절을 지키지도 않을 여인을 샀다. 그리고 전심으로 그녀를 사랑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한 가지를 구했다. ‘나를 전심으로 사랑해 줄 수 있겠니?’ 하나님은 호세아를 통하여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싶으셨다. 하나님은 자기 하나뿐인 아들의 목숨값으로 세상과 음행하던 우리를 사셨다. 순결하지도, 충절을 지키지도 못할 우리를. 그리고 자기 이름과 아들의 핏값을 두고 약속하셨다. ‘나는 너를 전심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한 가지를 요청하신다. ‘너희도 나를 전심으로 사랑할 수 있겠니?’ 그 사랑을 깨달은 신자는 날마다 울며 애통히 여기며 고백할 것이다. ‘주님 제가 주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겠습니다’ 자기 마음을 매일 쳐서 복종시키고, 땅에 있는 지체를 죽여가면서. 그렇게 하나님께 우리 마음의 전부를 드리자. 그분께 합당한 전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