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더 나은 것을 바라보라
본문: 히브리서 11:23-26
설교자: 최종혁
사람들은 멀리서 보면 다들 비슷해 보인다. 다들 비슷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 같다. 하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같은 상황에 대해서 모든 사람들이 같은 선택을 하지는 않는다. 단순히 먹는 것에 대한 선택을 어떻게 하는지만 봐도 그 사람에 대해서 조금은 더 알 수 있다. 먹는 것 뿐 아니라, 그 사람이 옷을 어떻게 입는지, 시간을 주로 어떻게 보내는지, 누구와 친한지, 돈을 어디에 사용하는지, 휴대폰에는 무슨 앱이 깔려 있고 어떤 용도로 많이 사용하는지 등을 보면 그 사람에 대해 더 알 수 있다. 결국 그 사람의 ‘선택’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좀 더 극적인 상황은 사람의 본질적인 성품을 더 잘 드러내기도 한다. 일상적인 상황에서는 사회화된 모습,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 보여줄 수도 있다. 하지만 특별한 상황에서는 본래의 모습이 드러나곤 한다. 운전을 하다가 갑작스러운 상황을 만났을 때가 일상에서 볼 수 있는 특별한 상황 중에 하나일 것이다. 또 하나, 식당에서 주문한 음식이 잘못 나왔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면 그 사람의 성품과 그 사람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알 수 있는 면이 있다. 몸이 아플 때, 힘든 일이 있을 때, 즐거운 일이 있을 때 어떻게 하는지 등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좀 더 알 수 있다. 특히 진로, 결혼, 직장, 이사와 같은 중요한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지는 결정적으로 그 사람의 어떠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 장’이라고도 불리고 ‘믿음 명예의 전당’이라고도 불리는 말씀으로서 ‘믿음’을 주제로 삼는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믿음으로”라는 표현을 반복해서 사용해서 그 믿음을 가졌던 사람들이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았는지를 강조하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설명한다.
먼저 믿음에 대해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강조하는 면은 이것이다.
히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즉 믿음은 눈 앞에 없는 것과 관계되어 있다. 바라는 것은 아직 미래의 일이어서 눈 앞에 없다. 보이지 않는 것은 말 그대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눈 앞에 없다. 그 눈 앞에 없는 것을 마치 눈 앞에 있는 것처럼 보는 것이 믿음인 것이다. 저자는 특별히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눈 앞에 없는 것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영이셔서 눈에 보이지 않으신다. 분명 하나님은 지금 계시지만 우리 눈 앞에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찾는 자에게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그 상은 미래의 일이어서 우리 눈 앞에 없다. 눈 앞에는 없지만 실재하는 이 두 사실을 눈 앞에 있는 것처럼 보고 사는 것이 믿음의 삶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산다고 바울도 말했다(고후 5:7).
그리고 이렇게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보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선택을 하며 살게 된다. 그 다른 선택으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낸다.
히 11:13–14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이들은 아직은 받지 못한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살았다. 그래서 그들의 선택은 달랐다. 그리그 그 다른 선택이 증언한 것, 나타낸 것은 이들이 이 땅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자기 본향을 찾아 가고 있는 “외국인”이며 “나그네”라는 사실이었다.
생각해 보라. 지금은 우리 나라에도 외국에서 들어와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어떤 외국인이 우리 나라에 와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 한국어 학원에 다니고, 돈을 모아서 좋은 차를 사고, 좋은 집을 산다면 어떨까? 그리고 한국인과 결혼까지 한다면 어떨까? 이 선택들은 무엇을 말해줄까? 이 사람은 한국에서 살려고 하는 사람이지, 잠깐 있다가 떠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반대로, 직장 생활을 하지만 최소한의 생활비만 남기고 모든 돈을 자기 나라 은행으로 보내고, 집은 잠만 잘 수 있는 곳으로 얻고, 어디 갈 일이 있으면 항상 버스만 타고 다니고, 한국어도 필요한 정도만 하고, 기회만 되면 그 나라에 들어갔다 나오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 이 사람은 누가 봐도 외국인이고 상황만 되면 자기 나라로 돌아갈 사람이다. 그의 선택이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사람의 선택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고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 무엇을 더 나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역으로, 그 사람이 더 나은 것으로 생각하고 바라보고 있는 그것이 사람의 선택을 바꾼다. 히브리서 11장은 바로 이 원리에 따라 살았던 사람들,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의 예를 보여주며 그것이 우리가 따라야 할 본임을 강조한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모세의 부모와 모세의 믿음의 선택을 보게 될 것이다. 이들은 남들이 보기에는 무모한 선택을 했고 손해보는 선택을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더 나은 선택이었다. 이땅의 나그네로서 그들은 더 나은 것을 바라봤기 때문에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었음을 오늘 말씀을 통해 살펴 보면서 함께 도전을 받기 원한다.
모세의 부모(23절): 무엇이 무모한 선택인가?
히 11: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먼저 모세의 부모가 믿음으로 어떤 선택을 했는지를 보자. 그들은 모세가 났을 때 그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기는 선택을 했다. 이 사건은 출애굽기 1-2장에 기록되어 있다.
야곱의 가족이 애굽에 내려간 후에 그들은 번성하기 시작했고 시간이 지나자 그들은 ‘가족’이 아닌 ‘민족’으로 불릴만큼 많아졌다. 그러자 애굽 왕은 위협을 느끼고 그들을 건축과 농사에 투입시키는 등 더욱 적극적으로 통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심지어는 아이가 태어나면 딸이면 살려두고 아들은 나일 강에 던져 죽이라는 명령까지 내리게 된다.
모세는 그런 상황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그 부모는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그를 숨겨서 석 달을 키웠던 것이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것이 “믿음으로” 한 선택이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왕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고 어기는 선택을 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았다”는 것이 이유로 제시되었다는 것이다. 출애굽기에서는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라고 되어 있다(출 2:20). 태어난 아기가 너무 귀엽고 잘 생겨서 도저히 나일 강에 던질 수 없었던 걸까? 그럼, 다른 부모들은 자기 아기가 못생겨서 그냥 나일 강에 던졌을까?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 어느 부모가 그렇게 하겠는가. 자기 아이가 못생겼다고 생각하는 부모도 없고, 설령 철저한 자기 객관화를 통해 자기 아이가 못생겼다고 생각하는 부모가 있다고 해도, 그런 이유로 아기를 그냥 죽게 두지는 못했을 것이다.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는 모세의 부모가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부분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창 1:31). 그리고 노아의 홍수 후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의 생명을 해하지 말 것을 분명하게 명령하셨다(창 9:5-6). 즉, 하나님은 사람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지키라는 명령을 이미 오래 전에 주셨던 것이다. 물론 창세기 말씀은 모세가 기록했기 때문에 모세의 부모는 기록된 말씀으로서는 이 말씀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명령은 분명히 조상들을 통해 들어서 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 명령에 순종한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당시 상황을 다시 생각해 보자. 절대군주였던 애굽의 왕이 이스라엘의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나일 강에 던져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에 불복한다는 것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모른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는 바로가 두려워서 눈물을 흘리며 그 명령을 따른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부모들이 아이에 대한 사랑 때문에 차마 그렇게 하지는 못했을 것이고, 그런 상황을 애굽 사람들이 (어쩌면 일부의 이스라엘 사람들도) 감시하고 고발했을 것이다. 누군가는 몰래 아이를 잘 키우기도 했을 것이고, 누군가는 나중에 발각되어 아이를 빼앗길 뿐 아니라 더 큰 화를 당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모세의 부모는 “믿음으로” 행하기를 선택했던 것이다. 왕의 명령을 두려워해서 아이를 죽이기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생명을 지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기를 선택한 것이다.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은 이 사건을 언급하면서 모세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행 7:20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의 아버지의 집에서 석 달 동안 길리더니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이 아이를 부모도 동일하게 아름답게 보고, 위험을 감수하고 아이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즉, 모세가 다른 아이에 비해서 특별히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물론 부모 눈에는 그렇게 보였을테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렇게 보시기 때문에 모세의 부모도 그렇게 보고 모세의 생명을 구하는 선택을 한 것이다.
당시의 다른 부모들도 자기 아이가 아름답게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자기 아이가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존재라는 것을 생각하지는 못했다. 혹, 그것을 생각했다고 해도 피부로 느껴지는 왕에 대한 두려움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보다 더 커서 모세의 부모와 같은 선택을 하지 못했다. 그런 면에서 모세의 부모는 “믿음으로” 모세를 숨겨서 키웠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또 하나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부모가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를 받았을 경우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모세의 아버지인 아므람은 태어날 아이가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이라는 말을 꿈에서 들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의 부모가 어떤 식으로든 모세가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근거는 있다. 이 역시 스데반의 말이 힌트가 된다. 스데반은 모세가 40살이 되었을 때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났다고 말한다(행 7:23).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이스라엘 사람과 다투던 애굽 사람을 쳐서 죽이게 된다. 그때 모세의 생각에 대해서 스데반은 이렇게 말했다.
행 7:25 그는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통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더라
즉 모세는 이미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여러 추론을 할 수 있겠지만, 성경의 기록을 통해서 도출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추론은 그의 부모가 그 사실을 알고 있어서 모세에게 전해주었다고 보는 것이다. 즉 그의 부모가 모세가 났을 때 “아름다운 아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귀엽고 잘생긴 아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해주신 말씀에 부합하는 아이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모세의 부모가 믿음의 선택을 해야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의 성취는 여전히 미래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그들에게 더 가까운 것은 왕의 명령이었다. 왕의 명령은 지금 당장의 위험이었다. 여기서 모세의 부모는 눈 앞의 왕의 명령을 어기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모세를 3달을 숨겨서 키웠다. 믿음의 선택을 한 것이다.
어떤 경우였든, 모세의 부모는 다른 사람들이 볼 때 무모해 보이는 선택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아이만 아니라 본인들도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왕의 명령과 하나님의 말씀이 선택지로 주어졌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했다.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다”는 표현은 그들에게 왕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들은 실제로 다른 아기들이 나일 강에 던져지는 것도 보았을 것이고, 그들과 같은 선택을 했던 부모들이 발각되어서 어떤 일을 당했는지도 보았을 것이다. 그런 인간적인 두려움은 그들에게도 분명히 있었다.
다만 그들은 누구를 더 두려워해야 하는지 알았을 뿐이다.
마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하나님은 애굽 왕보다 높으신 하늘의 왕이시다. 당연히 하나님을 더 두려워해야 한다. 사람들의 눈에는 이들의 선택이 무모해 보였을 것이고, 그들 자신도 무모한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일말의 의심이 있었을 수 있지만, 참된 믿음은 반대로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인간 왕의 말을 따르는 것이 훨씬 더 무모한 선택이다. 믿음으로 더 나은 것을 보는 사람에게는 왕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의 부모의 선택은 믿음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렇게 생각하기 어려운 이유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나를 두렵게 하는 그 무엇은 지금 눈 앞에 있기 때문이다. 지금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 남들이 일하는 것처럼 일해야 할 것 같고, 남들이 공부하는 것처럼 공부해야 할 것 같다. 자녀 양육도 남들이 하는 것처럼 해야할 것 같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이에게 잘못하는 것 같다.
이 모든 것들이 우리를 두렵게 하고 그에 따라 특정 선택을 하게 강요하는 것처럼 압박을 받는다. 하지만 우리가 더 나은 분, 더 높으신 분, 정말로 두려우신 분을 바라본다는 상황은 달라진다. 그러면 그 강요된 선택이 아닌 다른 선택을 해야한다는 것이 눈에 보인다. 모세의 부모가 하나님으로 인해서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으로 인해서 지금 세상이 강요하고 있는 잘못된 선택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이다.
두려움은 사람의 선택을 좌우하는 강력한 요소다. 그렇다면 잘 생각해 봐야 한다. 지금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정말로 영원의 관점에서도 두려워할만한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무모해 보이는 믿음의 선택으로 우리가 이 땅의 나그네임을 증언해야 할 것이다.
모세(24-26절): 무엇이 손해보는 선택인가?
앞에서 이어지는 출애굽기의 모세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살펴보자. 모세의 부모는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모세를 3달을 숨겨 키웠다. 아기가 커가면서 더 이상은 숨길 수 없게 되었다. 그 이후의 상황을 출애굽기는 이렇게 기록했다.
출 2:3 더 숨길 수 없게 되매 그를 위하여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강 가 갈대 사이에 두고
모세의 부모는 자신들이 아이를 위해 마지막으로 해줄 수 있는 것은 갈대 상자에 물이 새지 않게 하는 것 뿐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정말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는 마음으로 모세를 그 안에 넣고 갈대 사이에 두었을 것이다.
이에 하나님은 놀라운 섭리를 통해 모세를 다시 그 부모의 품으로 돌려 보내셨다.
출 2:4–10 그의 누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려고 멀리 섰더니 5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나일 강으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나일 강 가를 거닐 때에 그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6열고 그 아기를 보니 아기가 우는지라 그가 그를 불쌍히 여겨 이르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기로다 7그의 누이가 바로의 딸에게 이르되 내가 가서 당신을 위하여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이 아기에게 젖을 먹이게 하리이까 8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하매 그 소녀가 가서 그 아기의 어머니를 불러오니 9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기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기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 10그 아기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가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의 이름을 모세라 하여 이르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하였더라
결국 하나님은 모세의 부모가 모세의 어린 시절을 양육하게 하신 것이다. 학자에 따라서 이 기간을 짧게는 3년에서 길게는 12년까지 본다. 아마 그 중간 쯤일 것 같다. 어쨌든 완전히 바로의 왕궁에 들어가서 “바로의 딸의 아들”이 되기 전까지 모세는 부모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이 충분히 있었다. 그리고 왕궁에서는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웠다(행 7:22). 하나님은 그렇게 출애굽의 구원자를 준비시키신 것이다.
그리고 그가 장성하여 40세가 되었을 때, 그에게는 선택의 순간이 왔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살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한 사람으로서 살 것인지를 선택해야했다. 양쪽에 대한 정보는 이미 충분했다.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았고, 공주의 아들로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알았다. 단지 지식으로만 안 것이 아니라, 그는 실제로 그 삶이 어떠한지도 경험으로 알았다. 모세의 부모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선택을 했다면, 모세는 어떻게 될 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 상황에서 선택을 한 것이다.
모세의 선택에 대해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렇게 기록했다.
히 11:24–26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25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이 말씀에서 모세가 자신의 선택과 관하여 무엇을 알고 있었는지를 먼저 살펴보자. 일단 장성한 모세는 이미 공주의 아들로서 많은 시간을 살아왔다. 공식적으로 왕궁에 들어온 것이 12세였다고 해도 그후로 28년은 ‘공주의 아들’이라는 특권을 제대로 누리며 살아온 것이다. 그 왕궁 안에 그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가 하는 말에 사람들은 복종했다. 사람들은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노력했다. 당시 애굽의 왕은 말 그대로 신적인 존재였기 때문에, 공주의 아들로서 모세가 누릴 수 있었던 권력은 지금의 우리는 상상하기 어렵다.
사람들은 그런 위치에 오르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한다. 심지어 악한 일, 비겁한 일을 해서라도 그 자리에 오르고 싶어한다. 일단 그 자리에 오르기만 하면 누릴 수 있는 것들이 엄청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주의 아들이 되고 왕이 되는 것은 노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태어나기를 그렇게 태어나야 한다. 그런데, 모세는 그렇게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그런 특권을 누리며 살았다. 정말 모두가 부러워할만한 삶을 산 것이다. 이럴 때 사람들은 ‘천운’을 타고 났다는 표현을 쓴다. 요즘에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다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사실 천운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일 뿐이고, 모세의 어떠함과는 아무 관계 없는 하나님의 선택일 뿐이다. 여튼 모세는 누구나 가지고 탐내는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권력 만을 의미했던 것이 아니다. 25절을 보면 모세는 “죄악의 낙”도 누릴 수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죄악의 낙”은 그 자체로서 죄악된 것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결혼 관계 밖에서 성적인 쾌락을 즐기는 것은 그 자체로서 죄악된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낙’도 많다. 배우는 것을 낙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고, 운동하는 것을 낙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다. 여행, 음악, 인간 관계 등 사람들이 낙(즐거움)으로 여기지만 죄악되지 않은 것들은 얼마든지 있다.
모세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그런 즐거움을 원없이 누릴 수 있었다.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그런 즐거움을 얼마든지 현실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좋아하는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먹고 마시는 것을 원하면 그렇게 하면 됐다. 성적인 쾌락을 원하면 그렇게 하면 됐다. 잠을 자고 싶으면 자고, 어딜 가고 싶으면 가고, 당시 상황에서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을 모세는 원하는만큼 누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역시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삶일 것이다. 사람들은 하고 싶은 일 하나를 하기 위해서 하고 싶지 않은 일 아홉을 한다고 말한다. 하고 싶지 않지만 해야하는 일을 해야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일반적인 세상의 원리인 것이다. 하지만 모세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다. 하고 싶은 일은 하고,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으면 됐다. 부럽지 않은가!
26절은 여기에 더하여 모세의 재물에 대해서도 말한다. “애굽의 모든 보화”가 그의 것이었다. 애굽은 일찍 강력한 왕권을 확립한 나라로서 부유한 나라였고, 모세는 그 부를 충분히 누릴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모세는 살면서 돈 때문에 먹을 것을 못 먹거나 입을 것을 못 입었던 적이 없었을 것이다. 집 걱정 같은 것도 해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걱정이 없었다. 현재 애굽의 보화 뿐 아니라 앞으로 쌓일 애굽의 보화도 그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모세가 지금까지 누려왔고 또 앞으로도 누릴 수 있는 것들이었다. 특별이 무엇을 해야하지도 않았다. 어떤 노력을 해야 지금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냥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 있으면 됐다.
여기서 가만히 있지 않고 다른 것을 선택한다면,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이런 것들이 있었다. 24절을 보면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할 수 있었다. 그 자리를 내려놓고 노예의 신분으로 돌아갈 수 있는 선택의 기회가 모세에게 있었다. 25절을 보면 낙을 누리는 것 대신에 고난 받기를 선택할 수 있었다. 26절을 보면 지금 눈 앞에 있는 애굽의 모든 보화 대신에 수모(치욕)를 받고 나중에 준다는 상을 선택할 수 있었다.
모세에게는 선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명확히 보였다. 그래서 충분히 계산할 수 있었다. 한쪽에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권력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즐거움과 원하는대로 가질 수 있는 재물이 있다. 다른 한쪽에는 노예라는 신분과 고난과 수치가 있다.
여기에 선택에 있어 추가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일단, ‘둘 다’는 선택지에 없다.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 둘째로 모세 입장에서는 가지고 있지 않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모세는 이미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었다. 모세의 선택은 그냥 가만히 있든지, 아니면 이것을 포기하든지였던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어이없는 상황일 것이다. 어이없이 쉬운 선택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만약 이 상황을 두고 고민하고 있는 모세를 옆에서 봤다면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고민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둘 다’가 선택지에 없다는 것은 오히려 감사한 일이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 되기 위해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더욱 감사한 일이다. ‘천운’을 얻어서 그 자리에 왔는데, 그것을 제 발로 걷어찰 이유는 전혀 없다.
하지만, 모세의 선택을 보라. 24절에서 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했다. 25절에서 그는 고난 받기를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다. 그리고 26절에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
특별히 여기서 주목할 단어는 26절의 “여겼으니”다. 이 말은 모세가 계산했다는 의미다. 어떤 순간의 감정이나 인정에 휩쓸려서 이런 선택을 한 것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합리적인 사고를 통해 이런 선택을 했다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계산을 어떻게 했길래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모세는 비교했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는 것,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 애굽의 모든 보화를 얻는 것을 모두 더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과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을 더한 것과 비교했다.
그렇게 비교를 해보니 결과는 명확했다. 지금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불리는 것이 손해였다. 지금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이 손해였고, 애굽의 모든 보화를 얻는 것이 손해였다. 지금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불리지 않으면 모세는 다시 노예가 되는 것 같았는데 생각해 보니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었다. 지금 죄악의 낙을 누리지 않으면 그 어떤 즐거움도 없을 것 같은데, 그보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위하여 수모를 받는 것이 더 즐거운 일이었다. 지금 애굽의 보화를 포기하면 나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것 같은데, 오히려 하늘의 보화가 쌓인다. 이것이 모세의 계산이었고, 이 계산에 따라 모세는 합리적인 선택을 했던 것이다.
모세의 선택은 옳은 선택이었을까? “믿음으로” 모세가 봤던 것을 보는 사람에게는 옳은 선택으로,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잘못된 선택으로 보일 것이다. 믿음으로 보는 사람에게는 모세가 무한한 이익을 선택한 영리한 사람으로 보일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모세는 눈 앞의 보장된 이익을 버린 어리석은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믿음으로 보는 사람에게 모세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정상적인 사람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모세는 지극히 비상식적이고 이상한 사람이다. 당신에게 모세의 선택은 어떻게 보이는가?
한가지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모세가 “고난 받기를 .. 더 좋아했다”는 말은 모세가 고난 자체를 즐거워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죄악의 낙”에는 어떤 유혹도 느끼지 않았다는 말도 아니다. “잠시”의 즐거움이긴 하지만 어쨌든 즐거움을 주는 것은 맞다. 우리가 살찔 것을 알면서도 야식을 먹는 것과 같다. 야식에는 순간의 즐거움이 있고, 그 맛을 알수록 유혹은 더 크다.
그런 면에서 보면 모세는 사실 더 어려운 선택을 한 셈이다. 우리는 모세와 같은 것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랄 뿐이지 실제로 그것을 경험해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모세는 실제로 그 모든 것을 누린 사람이다. 이 모든 것을 누려봤던 또 다른 유명인은 솔로몬이지만 어쩌면 모세는 그 이상을 누렸을지 모른다. 애굽은 이스라엘보다 더 큰 제국이었기 때문이다. 모세는 권력과 재물과 쾌락이 주는 유익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 맛을 아는 사람이었다. 그것을 알고 포기하는 것은 모르고 포기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모세는 정말로 더 나은 것, 하나님을 바라봤기 때문에 그 선택을 했던 것이다. 무엇이 손해보는 선택이냐고 물을 때, 모세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고 불리는 것이 손해라고 답했던 것이다. 더 나은 것을 바라봤기 때문이다.
모세와 똑같은 선택을 했었던 신약의 사람도 있다. 바로 사도 바울이다.
빌 3: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빌 3:7–8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이런 면에서 보면 그리스도인은 냉철한 사업가와 같다. 절대로 손해보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믿음 때문에 손해 볼 것 같다면, 제대로 한번 계산해 보라. 믿음 때문에 손해볼 일은 없다. 믿음이 없다면 이 삶이 손해처럼 보이겠지만, 믿음이 있다면 이만큼 이득 보는 일도 없다. 계산에 믿음으로 보고 있는 것을 제대로 넣으면, 우리는 합리적인 선택을 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이 믿음의 선택이다.
도전
모세와 모세 부모의 선택은 세상의 기준에서 볼 때, 무모하게 보이고 손해처럼 보인다. 어리석고 비상식처럼 보인다. 그들이 원래 그런 ‘이상한’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그들의 선택에는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특별한 이유가 있다. 바로 더 나은 것을 바란 ‘믿음’이라는 이유다. 그들의 믿음이 아니면 그들의 그런 이상한 선택은 설명되지 않는다. 믿음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다른 선택을 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지금 나의 삶, 나의 믿음을 점검해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만약 지금 내 삶에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제거한다면 무엇이 달라질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믿음이 없다면 나의 선택은 어떻게 달라지겠는가? 만약 주일에 교회 나오는 것 외에는 별로 달라질게 없다면 정말로 나의 믿음이 참된 믿음인지 고민해 봐야할 것이다. 믿음이 아니더라도 비슷하게 말하고 행동하고, 비슷한 선택을 하면서 살 것 같다면, 지금 나는 내가 이 땅의 나그네처럼 살고 있지 않다는 의미가 된다. 더 나은 것이 있다는 것을 증거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복음을 전하는 것도 이 선택과 관련되어 있다. 전도가 참 쉽지 않다는 생각을 자주 할 것이다. 특히 부모로서 자녀에게 복음을 전할 때 종종 그런 한계를 경험하게 된다. 다른 가족이나 가까운 친척, 친구, 동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도 비슷하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으면 ‘정말 좋아’라는 말을 하고 싶은데 그게 쉽지 않아서 그렇다. 물론, 정말 좋은 것이 없는데 거짓말을 하는게 쉽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정말 좋은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 그들에게 지금 좋아 보이는 어떤 것을 포기하라고 하는 것이 쉽지가 않은 것이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믿음으로 더 나은 것을 보고 있는 우리가 그에 합당한 선택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밖에 없다. 사람들이 보기에 무모하고 손해보는 것 같은 선택을 하는 것이다. 어리석어 보이는 선택, 이상해 보이는 선택을 하는 것이다. 최소한 뭔가 다르다는 것을 그렇게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면서 한숨만 쉬고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고 있는 그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으로 인해서 평안하고 기뻐해야 한다. 그렇게 우리는 즐겁게 본향을 향해 가는 나그네 임을 세상 가운데 증언하고, 그들에게 우리와 함께 가자고 말할 수 있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이 길은 사실 예수님께서 먼저 걸어 가셨던 길이기도 하다.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님을 따라 앞에 있는 것을 바라보며, 더 나은 것을 바라보며 걸어가는 것이다.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믿음의 선진들을 믿음의 영웅들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떤 면에서 이들은 영웅들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와는 다른 종류의 사람들은 아니다. 여기 언급된 사람들은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단 한번도 흔들리지 않았던 사람들은 아닌 것이다. 때로는 이들도 잘못된 선택을 했다. 다만 이들은 약속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본향을 향해 걸어간 것 뿐이고, 우리가 해야할 것도 그것이다.
오늘 말씀의 제목을 “더 나은 것을 바라보라”고 한 이유는 “더 나은 것” 즉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상을 바라볼 때 우리가 믿음의 선택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더 나은 것”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비교”를 해보라는 의미로 그렇게 한 것 뿐이다. 사실 믿음으로 더 나은 것을 제대로 보고 있다면, 지금 우리가 하나님과 비교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들은 비교 대상이 될 가치가 없는 것들이다. 이 비교의 답은 명확하다. 언제나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이 옳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따르는 선택이 당연한 선택이다.
그렇게 하는 자들에게 성경이 주는 약속의 말씀을 보라.
히 11:15–16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한 집을 준비하시고 보상을 하신다는 것도 큰 위안이 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는 이 말씀이 정말 큰 위로가 된다. 그 하나님을 바라고, 하루 하루 믿음의 선택을 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길 기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