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다시 새롭게
본문: 예레미야애가 5장
설교자: 조정의
1965년 미국 메카피 선교사의 복음 전파로 시작된 교회가 올해 60주년을 맞이했다. 로고와 주보 디자인을 바꾸고, 겸사겸사 새로운 구역과 성경 공부도 계획하고, 새로운 홈페이지도 구상 중이다. 기념 수건도 나누어줬다. 그런데 60주년을 맞이하여 이 모든 수단을 통하여 진짜 모든 성도가 함께 목표로 삼기를 원하는 것은 “다시 새롭게” 되는 것이다. 우리와 주님의 관계가 다시 새롭게 되는 것, 옛적 같게 되는 것. 그냥 과거 좋았던 때를 회상만하는 게 아니라, 주님과 맺은 새 언약의 관계 안에서 풍성한 복을 누리고 친밀한 사귐을 나누는 것을 중대한 목표로 삼는 것이다.
옛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그것을 간절히 원했을 때는 안타깝게도 언약의 하나님에게서 많이 멀어졌을 때, 그래서 비참한 현실 속에서 울부짖을 때였다. 칠십인역 성경엔 예레미야가 황폐해진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며 주저앉아서 울며 지어 불렀던 노래라는 표제가 본문인 애가에 붙어있다. 애가는 시편 119편처럼 히브리어 알파벳순으로 기록된 답관체 시로서 슬픔과 고통과 탄식의 시작부터 끝까지 모두를 표현하려 했으며, 마지막 5장은 히브리어 알파벳 개수인 22개의 구절로 되어있지만, 답관체 형식에서는 탈피한 흥미로운 구조로 되어 있다.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을 대표로 운율에 맞는 공동체적인 기도와 탄원의 노래를 부르면서, 터져 나오는 감정이 마구 뒤섞인 심정을 쏟아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다시 새롭게” 되려면, 먼저 지금 우리가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비참한 상태라는 것을 절감하고 참으로 애통해야 한다.
1. 우리가 당한 것을 기억하소서(1-18절)
BC 586년경,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망한 하나님의 백성이 처한 처참한 상황을 언약의 하나님께서 살펴보고 기억하여 주시기를, 불쌍히 여기고 회복시켜 주시기를 간구한다: 여호와여 우리가 당한 것을 기억하시고 우리가 받은 치욕을 살펴보옵소서(1절).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나라를 잃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과 기업을 잃었다. 이방인에게 집과 소유를 빼앗겼다(2절). 많은 남자가 전쟁으로 죽거나 포로로 잡혀갔다. 그래서 과부와 고아들이 넘쳤다(3절). 대적들은 남겨진 부녀와 처녀들을 여기저기서 욕보였다(11절). 백성을 보호하고 법과 질서로 다스려야 할 장로들은 대적에 힘없이 꺾이고 백성들의 존경을 잃었으며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12, 14절). 청년과 소년들은 나귀나 노예가 할만한 맷돌 가는 일과 목재 나르는 일에 착취당해 엎드러졌다(13절).
먹을 것이 없어서 살에 주름이 잡히고, 영양실조로 피부가 검게 변했다(10절). 마실 물을 얻으려면 돈을 지급해야 했고, 자유롭게 얻을 수 있었던 나무도 값을 치러야 구할 수 있었다(4절). 양식을 얻으려면 죽기를 무릅쓰고 노략꾼들과 맞서야 했다(9절).
바벨론에서 파견한 관리들의 지배 아래(8절), 마치 목을 계속 누르고 있어서 쉼 없이 고통받는 것과 같은 착취와 억압을 받았다(5, 8절). 중요한 것은 그 억눌림에서 벗어날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언약의 백성으로 누렸던 모든 영화를(면류관) 잃어버렸고(16절), 그 마음에 기쁨이 그쳤으며, 다시는 노래하거나 춤추지 않고 다만 깊은 슬픔에 빠져 상심 가운데 눈물만 흘렸다(14, 15, 17절). 이스라엘, 언약의 백성이 극심한 고난 중에 있었고,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을 두기로 하신 곳, 좌정하여 다스리겠다고 하신 시온은 황폐해져 들짐승의 거처가 되었다(18절).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이렇게 비참해진 것이 모두 그들의 죄 때문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6우리가 애굽 사람과 앗수르 사람과 악수하고 양식을 얻어 배불리고자 하였나이다 7우리의 조상들은 범죄하고 없어졌으며 우리는 그들의 죄악을 담당하였나이다(6-7절). 하나님이 아닌 이방인을 의지했던 백성의 죄, 그들의 조상으로부터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을 섬기고 사랑한 죄를 후손들이 대물림했고, 그 대가를 지금 혹독하게 치르고 있다고 크게 탄식했다: 우리의 머리에서는 면류관이 떨어졌사오니 오호라 우리의 범죄 때문이니이다(16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실 때, 분명히 복과 저주를 그들 앞에 두셨다: “26내가 오늘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27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28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따르면 저주를 받으리라”(신 11:26-28). 신명기 28장 20-68절에는 불순종할 때 받게될 저주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예레미야가 여호와 하나님께 살펴보고 기억하여 달라고 부르짖은 치욕스러운 일들과 일치한다. 하나님의 새 언약 백성인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죄로 인하여 우리가 받고 있는 고통스러운 징계는 없나?
자신 또는 사랑하는 가족이 질병을 앓고 있거나, 경제적인 큰 위기를 겪고 있거나,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많은 갈등과 고통을 경험하고 있거나, 명예나 존경, 인정 등 소중히 여긴 것들을 잃어버리고, 간절히 바라는 것이 계속해서 이루어지지 않을 때, 비방과 험담을 듣고, 배우자나 자녀 등 가까운 지인으로부터 계속해서 상처받을 때, 우리는 예레미야처럼 이 모든 치욕스러운 일이 우리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아니다. 꼭 그렇지만 않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은 약속된 복과 저주가 물질적인 것이냐 영적인 것이냐의 큰 차이를 보인다. 물론 새 언약도 물질적인 것을 약속한다(종말). 그러나 옛 언약만큼 이 땅에서 직접적으로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새 언약은 먼저 하나님과 누리는 영적인 복을 약속한다. 그리고나서 그 하나님이 가지고 오실 모든 물질적인 복을 기대하라고 권한다. 자기 피로 새 언약을 맺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래서 여전히 이방인의 지배를 받고 착취와 치욕을 당하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요”(마 5: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 5:6). 그들의 물질적 빈곤이 아니라 영적 빈곤을 보고 눈물로 회복을 구하라고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새 언약의 백성으로서 우리의 영적 현실을 살펴봐야 한다. 나는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누리고 있는가? 하나님과 나는 가까운가? 나는 하나님만 섬기고 있는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마땅히 하나님을 경외하고 따르지 않는 세상 그리고 나 자신을 보며 애통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일에 언제나 목마르고 굶주려 있는가?
2.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19-22절)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진 사람에게서 두 가지 증상을 발견한다. 첫째로 그들은 하나님을 불신한다. 하나님이 자기 삶을 옳게 혹은 영향력 있게 다스리지 못하고 계신다고 믿는다. 그래서 감사와 찬양은 줄고 원망과 불평만 는다. 둘째로 그들은 궁극적인 회복의 시작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에서 찾는다. 환경이나 사람이 변하면 자신도 회복이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판단과 정죄는 많이 하지만 자백과 회개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언약 백성을 대표로 이렇게 하나님께 회복을 간청했다: 19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오며 주의 보좌는 대대에 이르나이다 20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잊으시오며 우리를 이같이 오래 버리시나이까 21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22주께서 우리를 아주 버리셨사오며 우리에게 진노하심이 참으로 크시니이다(19-22절).
먼저, 그는 다시 새롭게 되는 일에 반드시 필요한 두 가지 진리에 의존한다: 1)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 2) 하나님께서 돌이키신다. 이스라엘을 점령한 것은 이방 제국이고, 그들에게 치욕을 가져다준 여러 원인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예레미야는 그런데도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영원히 살아계시고 보좌에 앉아 세세토록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경외하며 신뢰한 것이다. 그리고 예레미야는 언약 백성이 겪는 모든 수치와 고통에서 벗어나는 데 가장 필수적인 일로 원수의 멸망이나 좋지 않은 상황과 환경의 변화를 요청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하고 궁극적인 회복의 열쇠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하나님께로 돌이키시는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모든 “복”의 근원이다(시 73:28).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이키시기를 간절히 구하자. 주께로 돌아가는 것을 삶의 중대한 목표로 삼자. 그러면 주께서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실 것이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맺으신 새 언약 안에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모든 영생의 복을 주실 것이다. 복을 더 많이 누리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우리와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 먼저다. 복은 따라오는 것이고, 물질적인 것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초월한다. 주께서 약속하신 복은 단지 건강과 부와 명예와 화목한 관계가 아니다. 오히려 비천과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을 아는 일체의 비결을 익힌 삶이다(빌 4:12). 그 비결은 단순한 정신 승리가 아니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알기 때문에 얻는 참된 기쁨과 만족이다(시 23:4). 즉, 하나님과 우리의 친밀한 사귐, 뜨거운 사랑의 관계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허락하신 모든 상황과 환경을 초월하는 참된 복을 항상 누릴 수 있다.
애가의 결말은 끔찍하다. 그래서 희망적인 21절을 다시 한번 읽는 것이 전통이라고 한다. 주께서 우리를 아주 버리신 것처럼 보일 때도, 크게 진노하신 것처럼 느껴질 때도, 언제나 주께 구하는 것은 옳다. 주님께 바라고 은혜를 간청하는 것은 언제나 희망적이다. 주께서 언약에 신실한 사랑으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롬 8:31-39). 지난 한 해, 당신이 어떤 어려움과 치욕스러운 일을 겪었는지 하나님은 다 살펴보셨고 또 기억하신다. 오늘부터 시작될 새해에도 하나님은 보좌에 앉아 다스리시면서 당신에게 좋은 일 그리고 고통스러운 일을 골고루 허락하실 것이다. 현세에 물질과 사람의 복을 풍성히 주시면서도 박해를 겸하여 주실 것이다(막 10:30).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단순하다. 우리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으로 살도록 하시려고(신 8:3). 다시 말하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음으로 붙들고 살게 하시려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더욱 친밀한 관계를 누리며 살아가게 하시려고 보이는 것들을 주시기도 하고 빼앗기도 하시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는 일희일비한다. 단순하게 좋은 일에 기뻐하고 감사하며, 고통스러운 일에 불신과 원망을 쏟아낸다(욥 2:9-10). 그러나 복 있는 자는 언제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주기도 하시고 취하기도 하시는 하나님을 범사에 인정하고 그분과 올바른 관계 안에 거하기를, 친밀한 사귐을 누리기를 언제나 추구한다.
새해 우리 교회의 목표는 “다시 새롭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로고, 홈페이지, 구역과 성경 공부 프로그램을 바꾼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교회 정책이나 어떤 성도와의 관계를 개선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물론,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상태에서 세운 정책이나 관계 개선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보다 먼저, 우리 각 사람이 하나님께 돌이켜야 하는 일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새롭게 하셔야 하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이켜 당신께 가까이하게 하시기를, 그래서 우리 각 사람과 가정, 교회를 다시 새롭게 하시기를 기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