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냉담이라는 죄의 습관 끊기

본문: 여러 본문

설교자: 조정의

마지막으로 다룰 습관적인 죄는 바로 “냉담”이다. 원래는 습관적으로 우울감에 빠지거나 슬픔에 찬 상태, 하나님 주시는 기쁨을 상실한 채 사는 것이 왜 죄가 되는지를 다루려고 했는데, 슬픔보다는 냉담이 더 적합하다는 판단이 섰다. 성경은 슬픔 자체를 죄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라고 권면한다(롬 12:15). 죄로 타락한 세상에선 우는 일이 있기 마련이고, 그것을 슬퍼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우는 자들과 함께 우셨고, 죄를 비통히 여기셨다(요 11:33-5). 

그런데 신자에게 슬픔만큼이자 자연스러운 게 바로 ‘기쁨’이다. 슬픈 일과 기쁜 일이 각각 있다는 말이 아니다. 슬픈 일 중에서도 주님 안에 있기 때문에 기뻐할 이유가 항상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성경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라고 명령한다(빌 4:4). 그러면 냉담은 왜 문제가 될까? 사전적 의미는 1) “태도나 마음씨가 동정심 없이 차가움”, 2) “어떤 대상에 흥미나 관심을 보이지 않음”인데, 두 번째 정의가 우리가 항상 기뻐하지 못하는 이유 또는 슬픔과 우울감에 주기적으로 빠지는 주된 원인을 설명한다. 슬퍼하는 건 죄가 아니다. 그러나 그 슬픔 가운데서 우리를 위로하시고 항상 기뻐할 수 있게 하시는 하나님께 관심을 보이지 않고 그분의 약속에 흥미를 갖지 않는 것은 죄다. 그리스도인도 슬퍼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슬픔 가운데 자신을 바르게 진단해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우리 정체성은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는 자이기 때문이다(고후 6:10). 그렇다면 냉담은 왜 죄가 될까?

1. 냉담이 죄인 이유

먼저, 냉담이 죄인 이유는 명백한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요구하신 것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신 6:5; 마 22:37). 하나님 주신 지혜로 솔로몬은 “모든 사람의 본본”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기록했는데(전 12:13), “경외”는 하나님을 떨며 즐거워하는 사랑과 공경의 태도를 가리킨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이를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정리했다. 영원토록 하나님을 사랑하고 즐거워하는 것과 냉담은 절대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습관적으로 하나님께 흥미를 잃고 관심을 끄는 것은 분명한 죄다. 요컨대 성경은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무섭게 경고한다(고전 16:22).

또한 성경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는 것을 심각한 죄의 뿌리라고 설명한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 1:28-9).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고발하면서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롬 3:11),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고 했다(롬 3:18). 냉담은 죄인의 본성이다. 의인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롬 5:3). 환난 중에 인내하면 연단 받아 소망을 이루게 하실 것을 믿기 때문이다(롬 5:4). 의인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한다(벧전 4:13; 참고. 행 5:41). 여러 가지 시험이 주 안에 있는 자들을 잠깐 근심하게 만들 수는 있지만, 그들 믿음을 확실하고 귀하게 빚으실 주님으로 인해 크게 기뻐할 수 있기 때문이다(벧전 1:6-7).

2. 냉담에 얽매는 과정

그러면 우리는 왜 냉담에 얽매는 걸까? 하나님에 관한 관심과 흥미가 떨어지게 만드는 두 가지 상반된 요인이 있다. 하나는 형통이고 다른 하나는 고난이다. 편안하고 안락한 삶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서 우리를 멀어지게 만든다. 하나님은 광야 생활을 마치고 정착하게 될 자기 백성에게 ‘나를 잊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다(신 6:10-13). 한편, 괴롭고 슬픈 일도 하나님이 누구신지와 그분이 하신 약속을 잊어버리게 만든다. 아삽은 시편 73편에서 자신은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받는데, 악인은 형통한 것을 보면서 거의 넘어질 뻔하였다고 고백했다(시 73:2-3).  

형통한 삶과 험난한 삶이라는 상반된 환경이 똑같이 냉담이라는 죄를 낳는 이유는 뭘까? 모든 죄가 태어나는 기본적인 원리는 같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는다(약 1:15). 하나님을 경외하고픈 열정이 아니라 자기 욕심이 마음의 권좌를 찬탈할 때, 자기애에 속아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약 1:14). 욥은 굉장히 유력하고 형통한 삶을 누렸을 때도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았다(욥 1:5,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나중에 고난을 겪을 때도 그는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하나님을 높였다(욥 1:21). 욥의 간절한 원함(“욕심”)이 항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는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비천에 처할 줄도 알았다(빌 4:12).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는 자로 살았다. 자기애에 사로잡혀 미혹되지 않고 하나님을 기뻐하고 영화롭게 하고픈 열정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냉담은 다른 어떤 요인이 아닌 자기를 가장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냉담의 열매를 맺는 이들은 풍부할 때나 궁핍할 때나 그들 자신을 먼저 생각한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기쁘시게 할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나를 즐겁게 하고 기쁘게 할까’를 가장 먼저 생각하고 간절히 원한다. 그래서 풍부할 때는 내가 만족스럽고 행복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불필요한 존재처럼 멀리한다.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의 고백처럼,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라고 말한다(눅 12:19-20). 또한, 궁핍할 때는 내가 괴롭고 고통스럽기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고 미워하여 가까이 두려 하지 않는다. 마실 물이 없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를 원망했다.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시험했다(출 17:7). 불신의 대상은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래서 고난 중에 우리 마음은 하나님에 관해 쉽게 냉담해지는 것이다.

3. 냉담이라는 죄의 습관 끊기 

그러면 어떻게 냉담이라는 죄의 습관을 끊을 수 있을까? 냉담이 하나님에 관한 흥미와 관심 부족이라면, 냉담을 끊어내는 일은 하나님께 흥미와 관심을 갖게 하는 일과 관련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유다는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자신을 지키라고 권면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자기 정욕대로 행하는 자들을 경계하는 동시에,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고 기도하라고 훈계했다(유 1:20-21). 유다의 교훈은 오늘날 냉담에 빠진 성도들에게 큰 유익을 주는데, 먼저, 우리는 하나님께 무관심한 것이 비정상이며 우리가 마땅히 품어야 할 마음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항상 경계해야 한다. 다윗의 이 품은 이 마음이 우리 마음이 되어야 한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시 27:4). 종교활동을 열심히 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단지 죄를 범하지 않는 것으로 만족하면 안 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전부를 내어주셨고, 우리의 전부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라고 성경은 묻는다(약 4:5).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온통 독차지하실 때까지 그분의 경쟁 대상이 무엇이든 혹은 누구든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하기 힘든 대상 또는 사랑할 만한 이유가 한정된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별 볼 일 없는 대상에게 관심과 흥미를 어떻게든 가지라고 권하는 게 아니란 말이다. 사도 바울은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라고 중보기도 했다(엡 3:18-9).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충만하게 베푸시는 사랑의 크기는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광대하지만, 성경은 그것의 어떠함을 측량하여 깨달아 맛보라고 권한다. 최근에 선물 받은 청교도의 책이 있다. 스티븐 차녹의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이라는 책과 아이작 암브로스의 “예수를 바라보라”이다. 각각 2,000페이지, 1,500페이지에 육박한 대작이다. 내용 자체도 훌륭하지만, 하나님을 더 알기 원하고 즐거워하기 원하는 그들의 마음을 헤아려 보라. 그들은 유다의 권면처럼 “지극히 거룩한 믿음(객관적) 위에 자신을 세우”기 위하여 헌신했다(유 1:20). 우리도 그래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냉담한 것은 마땅히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흥미를 느껴야 할 사랑의 대상이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은 어쩌면 2,000페이지가 넘는 자산 투자 서적을 읽는 데 아무런 지루함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 1,500 시간이 넘도록 유튜브 영상을 즐겁게 시청할 수도 있다. 물론 개인의 취미 활동이나 여가 생활이 주는 유익이 분명 있다. 그러나 당신의 주된 관심 대상이 누구인지 생각해 보라. 당신이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는 원천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라. 마땅히 그 주인공은 하나님과 그분께서 주시는 은혜가 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회개하여 열심을 내라!


“죄의 습관 끊기”를 통하여 얽매이기 쉬운 죄 곧 불만족, 불친절, 불경건, 미움, 냉담을 다루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라고 말했다(히 12:1-2). 허다한 믿음의 증인들 모두 인내로써 삶의 경주를 마치고 하나님 보좌 앞에서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우리도 그들이 걸었던 믿음의 경주를 하고 있으며, 그 길에서 반드시 벗어버려야 할 것이 “얽매이기 쉬운 죄”다. 감사한 것은 우리에게 “믿음의 주”가 계신다는 것이다. 그분이 우리 앞서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고 앞서간 믿음의 증인들을 결승점까지 모두 인도하셨다.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 아들이시면서도 순종함을 배워 온전함을 드러내신 예수 그리스도는(히 5:8) 하나님의 아들딸이 된 우리에게 순종을 가르쳐 반드시 온전케 하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