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내 사랑을 의심하지 말라

본문: 말라기 1:1-5

설교자: 조정의

구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는 주전 5세기 후반에 기록된 책이다. 바벨론에 사로잡혀 간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대로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면서(538-536), 스룹바벨(516)과 에스라(458), 느헤미야(445)를 통하여 각각 성전과 성벽을 재건하고 영적인 회복을 잠시 맛보았으나, 느헤미야가 바사로 잠시 돌아갔을 때(433-424), 다시금 영적인 퇴보를 겪었다. 재건된 성전 예배는 형식만 남은 종교 행위로 전락했고, 제사장과 백성의 삶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그분의 거룩한 율법을 욕되게 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지자 말라기(“나의 사자”)를 통하여 자기 백성의 죄를 꾸짖고 진정한 회개를 요구하셨다: 여호와께서 말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1절).

말라기서는 논쟁이라는 형식으로 예언된 말씀이다. 2절에 논쟁의 특성이 잘 드러나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2절; 6절 참고).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의 논쟁은 언약의 관계를 기반으로 한다(2:5, 14). 1-5절은 하나님께서 언약에 신실하셨는지에 관한 담론이고, 나머지는 이스라엘이 언약에 신실하였는지에 관한 다툼이다(1:6-3:18). 마지막 4장은 하나님께서 언약에 기초하여 자기 백성을 끝까지 사랑하여 회복하시겠다는 약속과 하나님께 돌이키고 그분을 경외할 것을 요청하는 언약적 권면이 담겨있다. 

말라기서는 요한계시록과 닮은 면이 있다. 각각 구약과 신약의 마지막 책, 하나님의 마지막 계시라는 점, 말라기서 이후에 하나님은 약 400여 년 침묵하셨고, 계시록 이후엔 이천 년이 넘도록 특별한 계시를 주지 않으신다. 둘 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이스라엘, 교회)에게 주어진 말씀이라는 점, 그리고 둘 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오실 메시아를 약속한다는 점. 하지만, 중요한 차이가 하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어떤 일을 하실지 전혀 알지 못한 상태였다는 것이고, 우린 알 뿐만 아니라 믿고, 그분이 보내신 성령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내신 하나님의 복음, 그 능력과 은혜를 알고 경험하는 우리에게 말라기서는 그래서 더욱 뼈아픈 충고가 된다. 만일 우리 믿음이 퇴보하고 있다면, 그래서 우리 죄를 분명히 깨닫고 회개할 필요가 있다면, 말라기의 예언은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하나님의 경고다.  

1. 주장과 증거: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먼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2절). 하나님의 사랑은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언약적(선택적)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여호와”로 알리셨다(2절). 여호와는 언약의 이름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알리신 이름이고(“스스로 있는 자”, 출 3:14), 또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약속하실 때 외치신 이름이다(출 34:6). 언약의 하나님께서 “너희를 사랑하였노라”라고 말씀하실 때, 일반적으로 모든 피조물이나 만민을 사랑하듯이 사랑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다. 선택적으로 자기 백성을(너희를) 특별히 사랑하신다고 고백하신 것이다(아하브). 하나님은 분명히 선택하셨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2절). 둘은 쌍둥이 형제고, 보통은 장자를 축복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에서가 아니라 야곱을 선택적으로 사랑하셨다. 우리도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적 사랑을 받았다(벧전 2:9).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은(엡 1:4), 그리스도의 피로 새 언약을 맺으시고(마 26:28),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아무도 우리를 끊을 수 없을 것이라고 굳게 약속하셨다(롬 8:39). 하나님이 우리를 미리 아시고, 택하시고, 아들의 핏값으로 속량하시고, 은혜로 부르셨으며, 날마다 거룩하게 하시고, 마침내 영화롭게 하신다(롬 8:29-30).

둘째, 무조건적이다.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한 사랑을 일방적으로 자기 백성에게 쏟으신다. 물론, 백성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행할 때, 복을 얻고, 불순종할 때, 징계받기는 하지만, 그들의 태도에 따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방식이 달라지는 것뿐이지, 하나님의 사랑이 조건적인 것은 아니다. 복과 화 모두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하는 강력한 증거다(신 30:16; 잠 3:12). 아브라함의 믿음은 얼마나 불완전했는가? 야곱은 얼마나 인간적인 술수에 능했는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은 얼마나 원망과 불평이 많았는가? 모세와 다윗은 얼마나 완벽함에서 거리가 먼 지도자였나? 이스라엘은 왕이 없었을 때, 그리고 있었을 때도 얼마나 빠르게 죄를 짓고 우상숭배에 빠졌었는가? 그들이 얼마나 많은 선지자를 배척하고 죽였는가? 얼마나 하나님을 멸시하고 그분의 법을 거역했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신실하게 사랑하셨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하나님께 얼마나 불성실한가?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무시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원망과 불평을 얼마나 자주 쏟아내는가? 전심으로 하나님만 사랑하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이 없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말라기 1장 2절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롬 9:10-13). 우리가 하나님께 사랑받는 이유는 우리가 간절히 원하거나 달음박질해서가 아니라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 아무런 조건 없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롬 9:16).

셋째, 영원하다. “사랑하였노라”라는 표현은 과거형으로 보인다. 하지만 원문은 완료형으로 처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사랑하기로 선택하신 순간부터 지금까지(그리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사랑으로 사랑하신다는 고백이다(“나는 너희를 사랑한다”, 새번역). 과거형 번역, “사랑하였노라”가 더 합당하게 보이는 이유는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신 날부터 그들이 포로 귀환하여 약속의 땅에서 회생하려고 애쓰는 날까지, 하나님은 언제나 언약에 신실한 사랑을 변함없이 자기 백성에게 베푸셨기 때문이다. 3절부터 5절까지 하나님은 지금도 그들을 사랑하고 계신 증거를 에서와 에서가 이룬 민족, 에돔에게 선택적으로 하신 일을 통하여 제시하신다: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3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 4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역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원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 5너희는 눈으로 보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역 밖에서도 크시다 하리라.” 

에돔은 이스라엘 가장 접견 지역에서 가장 오랜 세월 형제 국가인 이스라엘에 원수처럼 대항했던 민족이다. 특별히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침략을 받을 때, 제국의 앞잡이 노릇을 하여 정보를 제공하고, 이스라엘의 자원을 탈취하고, 예루살렘이 함락되었을 때, 기뻐하며 같이 파괴하는 일에 동참하였다(옵 1:11-14). 하나님은 예레미야와 에스겔을 통하여 에돔을 심판하시겠다고 예언하셨고(렘 49:7-22; 겔 25:12-14), 실제로 에돔은 제국의 침략을 받은 적도 없고 민족이 대거 포로로 끌려간 적도 없지만, 말라기서가 기록된 시점에 그들이 머물던 곳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들은 세일 산을 기점으로 아카바 만까지 뻗은 험한 광야와 산지에 거주했는데, 그곳은 황폐하게 되었고, 그들이 머물던 광야이리가 차지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여 바사 제국 고레스를 종으로 삼아 국고를 지원하여 자기 백성이 성전과 성벽을 재건하는 등 나라를 다시 세우도록 주권적으로 역사하셨지만, 에돔에 관하여는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라고 분명한 의지를 밝히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그들의 죄를 따라 처벌하거나 갚지 않으시고 오히려 죄과를 그들에게서 멀리 옮기시는 크신 언약의 사랑을(인자) 베푸셨지만(시 103:10-12), 에돔은 그냥 내버려두셨다. 그래서 그들이 거주한 곳은 “악한 지역”, 그곳에 사는 에돔 백성은 그들의 죄로 인하여 “여호와의 영원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는 말을 듣게 될 것이었다. ‘여호와의 영원한 사랑을 받은 백성’ 이스라엘은 지금 그들이 처한 상황과 환경을 보면서, ‘하나님이 정말 우리를 사랑하시는가?’ 의심했다. 그러나 그들의 원수가 마침내 멸망하는 것을 눈으로 보고 나면 ‘아! 우리 하나님은 이스라엘 밖에서도 크신 만군의 여호와이시구나! 우리 원수에게 이런 일을 행하셨구나!’라고 마침내 깨닫고 합당한 찬양을 하나님께 돌려드리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삶에 일어난 크고 작은 일을 보면서, 우리 마음에 들지 않거나, 이해할 수 없는 문제를 겪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한다. 온통 자기중심적 사고에 갇혀 우리 하나님께서 온 우주 만물을 완벽하게 다스리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쉽게 잊어버린다. 성경은 뭐라고 말하는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하나님은 내 인생 밖에서도 크신 분이시다. 모든 것을 당신의 뜻대로 이루시는 전능하신 분이시다. 그분은 선택적으로 나를 사랑하셔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 마침내 하나님의 선이 이루어질 때, 우린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께 합당한 찬양과 경배를 돌려드릴 것이다.

2. 반박: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나님은 말뿐인 사랑이 아니라 증명된 사랑으로 자기 백성을 변함없이 사랑하셨지만, 정작 그 백성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했다: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2절). ‘언제 우리를 사랑하셨나요?’, ‘어디에서 그 사랑을 발견할 수 있단 말입니까?’ 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사랑을 감히 의심하는가? 언약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과 달리 그들의 사랑은 조건적이고 수시로 변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우리의 사랑은 신실함과 거리가 멀다. 그래서 하나님도 그러실 것이라고 쉽게 의혹을 품고 오해한다. 또한 우리는 온 우주가 우리를 중심으로, 우리를 위하여 움직이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우리가 원치 않는 문제나 어려움을 만나면,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지 않으시거나 대충 사랑하신다고 느낀다. 그러나 온 우주는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 영광을 위하여 움직인다. 그리고 하나님은—정말 놀랍고 감사하게도—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 곧 우리의 최대 유익이 되게 역사하신다.

쉽게 말해 우리는 단순히 건강을 원하지만, 하나님은 질병 가운데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기를 원하시고, 우리는 단순히 부를 원하지만, 하나님은 때로 궁핍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부요하심을 충분히 경험하게 하신다. 우리는 갈등 없는 관계를 원하지만, 하나님은 그 갈등 가운데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고 주님의 겸손한 마음을 더 배우게 하신다. 요컨대, 우리가 좁은 시야로 우리 삶에서 하나님이 일하고 계심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래서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는 것처럼 느낄 때, 우리 지경 밖에서도 크신 하나님을 목격해야 한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섭리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라.

3. 적용

첫째, 당신은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는가?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시 103:2). 당신은 언제 하나님의 사랑에 뜨겁게 감사드렸는가? 단순히 하나님의 사랑과 그동안 베풀어주신 은혜를 떠올리거나 다시 생각하는 수준이 아니라 감격하고 압도되어 찬양과 경배를 돌려드린 적이 언제인가? 말라기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이 대면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감격을 잊었다. 감사를 잊었다. 하나님이 정말로 나를 사랑하시는가 의심에 빠질 정도였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책망하신 에베소 교회도 같은 문제를 겪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한 수고, 희생, 헌신이 살아있었지만, 처음 사랑을 버렸다(계 2:4).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지금도 변함없이 조건 없이 제한 없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그 사랑은 우리가 세세토록 감사와 찬양을 돌려드리기에 충분한 사랑이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당신의 영혼에게 말하라. 여호와를 송축하고 그 은택을 기억하라고!

둘째, 당신의 예배는 실질적인가 아니면 형식적인가? 중심이 있는 예배인가 아니면 중심을 잃은 예배인가? 하나님은 육신이 연약한 자기 백성이 당신의 사랑과 은혜를 계속해서 기억하고 또 맛볼 수 있도록 예배를 허락하셨다. 예배는 우리가 드리는 것이지만 그보다 더욱 우리가 받고 누리는 은혜가 크다. 당신이 하나님의 사랑에 뜨겁게 감사드리거나 감격하지 못하는 증상은 예배 시간에 어떤 마음으로 예배드리는지에 분명히 나타난다.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모여 드리는 공적인 예배 그리고 개인적인 삶의 영역에서 드리는 삶의 예배, 그 예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당신의 마음 중심에 하나님이 얼마나 실질적으로 높임을 받으시고 기억되며 감사와 찬양이 돌려지는지 점검해 보라. 하나님을 공경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 예배는 당신이 하나님을 그만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낸다. 진정으로 예배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