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본문: 시편 123편
설교자: 최종혁
이 시편은 시선에 대한 말씀이다. 눈을 들어서 시선을 하나님께 향하는 것이 1-2절에서는 강조된다. 3-4절에는 눈이라는 단어가 나오지는 않지만, 그 시선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있다. 시편 기자는 멸시가 넘치는 상황을 말한다. 멸시 받고 있는 상황은 시선이 아래를 향하고 있을 것이다.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나를 내려다 보고, 나는 고개를 숙이고 아래를 보고 있는 상황이 3-4절의 상황이다. 시편 기자는 그런 상황에서 눈을 들어서 하나님께 향한다. 그리고 기도한다. 시편 123편은 전체가 그렇게 하나님께 직접 드리는 기도다.
본문을 통해 기도의 세 측면을 살펴볼 것이다(기도의 대상, 기도의 태도, 기도의 이유). 이를 통해 하나님의 예배자로서 우리가 드리는 기도를 점검해 보고, 더욱 합당한 기도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란다.
기도의 대상(1절)
시 123:1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이 시편은 121편과 같이 눈을 드는 것으로 시작된다. 121편에서 성전으로 올라가는 순례자들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면서 자연스럽게 참된 도움이 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힘을 얻었다. 특별히 121편은 서로에게 그런 하나님을 상기시키며 격려하는 내용이었다고 할 수 있다.
123편도 동일하게 눈을 드는 것으로 시작되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다. 121편은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했다면, 123편은 하나님을 직접 바라본다. 그래서 이 시편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말한다. 그 하나님께 “하나님, 제가 지금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이 상황에서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가 바라보는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는 주”이시다. 성경은 ‘하늘’을 하나님의 거처,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말하곤 한다.
신 26:15 원하건대 주의 거룩한 처소 하늘에서 보시고 …
시 115:3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예루살렘, 시온 산, 성전 등도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종종 언급되지만, 실제로 하나님께서 그곳에 살고 계신 것은 아니다. 그래서 성전을 건축한 후에 솔로몬도 이렇게 기도했다.
왕상 8:27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
다만 성전의 의미에 대해서는 솔로몬은 이렇게 말했다.
왕상 8:29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성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시오며 주의 종이 이 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즉, 성전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이름을 두신 곳으로서 의미가 있고,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그래서 성전을 통해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기도한다. 그래서 이어지는 솔로몬의 기도를 보면, 사람이 이곳 성전을 향하여 기도할 때, 하나님은 하늘에서 들으시고 응답해 달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르셨다(마 6:9).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다.
하지만,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표현은 하나님이 계신 물리적 위치에 대한 표현은 아니다. 즉, 저 하늘 어딘가에 하나님이 살고 계셔서 우리가 비행기나 우주선 같은 것을 타면 도달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닌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처럼 육체를 가진 분이 아니시고 따라서 물리적인 공간에 계신 분도 아니시다. 이런 측면에서 하나님은 어느 곳에도 계시지 않다. 아무리 이 땅을 샅샅이 찾아보고, 깊은 바다와 모든 우주를 찾아본다고 해도,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어떤 장소에 하나님이 계시지는 않다.
그런데, 성경은 또한 이렇게도 말한다.
시 139:7–8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이 고백은 한 사람만 할 수 있는 고백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동시에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어느 곳에도 물리적으로 계시지는 않지만, 영적인 실체로서 어느 곳에나 계시기 때문이다. 이 말은 누군가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래도 나에게 어떤 기억이 남아있어서 마음으로는 함께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과도 다르다. 실제로 하나님은 어느 곳에나 계시다. 하나님께 ‘미지의 영역’은 없다. 물리적인 영역 뿐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생각까지도 그렇다.
그럼, 이런 하나님을 성경은 왜 하늘에 계신 분이라고 표현할까?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첫째로는 하늘 자체가 우리 눈에 보이는 하늘이 아니라 영적인 세계를 의미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것은 우리와는 다른 세계(차원)에 계심을 의미한다.
전 5:2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여기서 전도자가 강조하는 것은 ‘차이’이지 ‘거리’가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거리 상 사람과 멀리 떨어져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하늘의 하나님은 땅에 사는 우리와는 다른 분이시다.
둘째로는 하나님의 높으심,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시 11:4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
시 103:19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의 왕권으로 만유를 다스리시도다
성경이 어디든 계신 하나님을 하늘에 계시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가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높은 곳에 계신 분으로서 우리보다 높으신 분이시다. 그분은 우리를 포함하여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왕이시다. 따라서, 실제로 우리가 하나님을 본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올려다 봐야 한다. 모든 면에서 하나님은 우리보다 위에 계신,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본질적인 특징이다. 또한 그에 따라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가져야할 기본적인 태도를 말해주기도 한다. 우리는 높으신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앞에 엎드리고 순종해야 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것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절반의 설명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하나님의 본질적인 높으심으로만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 11:4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
시 113:5–6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이가 누구리요 높은 곳에 앉으셨으나 6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시 138:6 여호와께서는 높이 계셔도 낮은 자를 굽어살피시며 …
사 57:15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본질적인 높으심 만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낮추심으로도 나타난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빙산이라면, 그 높으심은 수면 위로 드러난 빙산의 일부이고, 낮추심은 수면 아래 숨겨진 빙산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이런 위대하심은 역사를 통해 수없이 드러났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개입하시는 모든 일들이 바로 하늘의 하나님을 바로 보게 하는 일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극적인 사건을 고르라면 단연 이 하나를 고를 수 있다.
빌 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가장 높으신 하나님께서 가장 낮은 곳으로 스스로 내려오신 이 사건이다. 창조주가 피조물을 구원하기 위해 피조물과 같이 된 사건이다. 이 구원이야 말로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어떤 의미인지를 우리들에게 가장 잘 보여준다. 하나님은 모든 권세와 능력을 가지신 분이시다. 그 힘으로 모든 피조물을 굴복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를 낮추기를 선택하셨고, ‘복종’을 선택하셨다. 물론 궁극적으로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께 복종하셨지만, 사람들 가운데 계시면서도 섬기는 자로 계셨다(눅 22:27). 그리고 그 섬김의 끝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는 것”이었다(막 10:45). 우리는 예수님께 ‘종’이나 ‘섬김’과 같은 단어를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지만, 사실 본질 상 하늘의 하나님이신 예수님께 결코 어울리는 단어가 아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을 낮추셨고, 그렇게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선포하셨다.
눈을 들어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께 시선을 향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나와 다르시지만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감히 내가 가까이 나아갈 수 없는 분이시지만, 나에게로 가까이 오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멀리서 팔짱을 끼고 내가 잘하나 못하나 감시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팔을 걷어붙이고 나를 돕기 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런 하나님이 우리 기도의 대상이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든 하나님을 향하여 눈을 들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하라고 하신다.
시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요 14:13–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14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이 두 말씀에서 한 가지 더 주목할 부분은 기도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한다. 모든 상황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따라서, 그 결과를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 이런 면에서 무언가를 구하는 기도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의 예배자로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엇에 영광을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히브리서의 말씀처럼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한다(히 4:16). 그리고 시편 기자처럼 하나님께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라고 고백해야 한다. 내가 지금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음을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것이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자기 영광을 위하여 행하시는 하나님은 이렇게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셔서 영광을 받으심을 기억하고, 그렇게 기도해야 한다.
기도의 태도(2절)
그렇게 하나님을 바라본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한다.
시 123:2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이 기도에서는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우리의 합당한 태도 두 가지를 배울 수 있다.
첫째는 자신의 위치를 제대로 아는 겸손이다.
시편 기자는 여기서 하나님과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과의 관계를 보다 명확하게 묘사했다. 이 둘의 관계는 상전과 종의 관계와 같다. 여주인과 여종의 관계와 같다. 이것이 분명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다. 평등한 관계가 아니라 상하의 질서가 있는 관계인 것이다.
이 모습이 신분제에 익숙했던 당시의 사람들에게 주는 이미지가 있을 것이다. 주인을 섬기는 종들은 주인에게서 눈을 떼면 안됐다. 물론 대놓고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은 해서는 안될 일이었지만, 주인의 일거수일투족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했다는 말이다. 손짓만 보고도 주인이 무엇을 원하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아야 했다. 상황을 빠르게 읽고, 주인에게 무엇이 필요할지를 생각하고 그에 대비해야 했다.
오늘날에도 이와 비슷한 관계가 없지는 않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과 그들을 돕는 비서의 관계가 비슷할 것이다. 아마, 군대에서 상관을 일대일로 섬기는 일을 하는 사람들(부관)은 상하 관계가 더 명확하기 때문에 더 이해하기 쉬운 상황일 것이다.
2절에서 묘사하는 상황은 이와 유사하면서도 동일하지는 않다. 앞서 말한 그런 상황에서 종들이 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것은 두려움과 긴장의 결과다. 혹시라도 무언가를 놓치면 큰 해를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2절에서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의 손을 바라보고 있는 이유는 그런 이유는 아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주실 은혜를 기대하면서 하나님의 손을 바라보고 있다.
시 104:28 주께서 주신즉 그들이 받으며 주께서 손을 펴신즉 그들이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시 145:15–16 모든 사람의 눈이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때를 따라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며 16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시나이다
하나님은 그 손을 펴서 좋은 것을 주신다.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의 손을 바라보고 있는 이유도 바로 그 ‘좋은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럼 왜 시편기자는 이것을 종과 주인의 모습으로 묘사했을까?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구할 때, 우리는 뭔가 맡겨둔 것을 찾아가려는 사람처럼 구할 수 없다. 마치 내가 일한 것에 대한 급여를 받는 사람처럼 하나님께 ‘내 것’을 달라는 식으로 구할 수 없다.
주인과 종의 관계가 그렇다. 예수님은 이런 말씀도 하셨었다.
눅 17:7–9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8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것이 주인과 종의 관계라는 것이다. 종은 주인을 섬긴다. 주인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권리가 없다. 종이 주인에게 무엇을 해주었다고 해도 주인이 감사할 이유도 없다. 종은 원래 주인을 섬기는 사람이고, 주인은 섬김을 받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갈 때 잊지 말아야할 사실이고, 이 사실이 우리의 태도를 결정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겸손히 나아가 은혜를 구해야 한다. 마치 내가 당연히 누려야할 권리를 빼앗긴 것처럼 불평하면서 하나님께 무언가를 내놓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권리를 가지신 하나님께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나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둘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는 확신이다.
2절의 뒷부분의 더 정확한 번역은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실 때까지 우리 눈이 하나님을 바라봅니다”다(현재어, 우리말, 쉬운성경 등). 즉, 한번 하나님을 바라보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바라보는 것을 말하고 있다. 겸손히 구하지만, 확신 가운데 포기하지 않고 구하는 것이다.
겸손은 한편으로는 주눅든 태도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그렇지는 않다. 주눅든 어린이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는 것처럼, 마치 그렇게 우리도 하나님께 구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알아서 주시기 전까지는 가만히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확신 가운데 구할 수 있다.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겸손’이 하나님의 높으심에 대한 반응이라면, 하나님의 스스로 낮추심을 생각할 때 우리는 확신의 태도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손은 욕심 많은 부자의 손과 같지 않다. 손에 쥔 것을 절대 놓지 않으려고 하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기 원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실 것이라는 확신 가운데, 계속해서 구할 수 있다.
누가복음 18장에서 예수님은 기도에 있어 이런 확신과 간절함에 대해서 비유로 말씀하셨다. 한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것은 포기하지 않고 간절한 마음으로 계속 구하는 과부의 태도였다. 불의한 재판장은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따라서 사람도 무시하는 사람이었다. 당연히 과부의 말은 듣지도 않았다. 하지만 과부가 계속해서 그를 찾아와서 같은 요청을 반복하니, 그것이 괴로워서 그의 요청을 들어 주었다는 얘기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재판장은 악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조차도 간절한 요청을 들어주었다면, 선하신 하나님은 더욱 그렇게 하지 않으시겠냐는 것이 비유의 요점이었다.
눅 18: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이것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가 가질 수 있는 확신이다. 하나님은 귀찮다고 기도를 듣지 않으시거나 분노하지 않으신다. 그러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확신을 가지고 간절한 마음으로 구할 수 있다.
기도에 있어 하나님의 응답을 크게 세 가지로 많이 말을 한다. ‘그래’, ‘아니’, ‘기다려’다. 이론적으로 이렇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지만, 실제 기도에서 이 응답을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인 것은 하나님께서 구한대로 응답해 주시면 알 수 있다. 하지만 ‘기다려’라고 어느 순간에 말씀해 주지는 않으신다. 그래서 이것이 기다리라는 응답인지, 아니라는 응답인지 잘 모르겠을 때가 많다. 그럴 때 우리는 내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구하고 있는지를 점검해 봐야 하고, 만약 그렇다면, 계속해서 구해야 한다.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는 마음이 들 수 있지만, 응답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 결국 어떤 응답을 하시든, 나의 기도는 헛되지 않음을 알고 간절히 구해야 한다. 이것이 예배자로서 합당한 기도의 태도다.
기도의 이유(3-4절)
끝으로 시편 기자는 자신이 이렇게 기도하는 이유에 대해서 언급한다.
시 123:3–4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은혜를 베푸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4안일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영혼에 넘치나이다
“은혜를 베푸소서”라는 말은 2절 끝에 나온 것까지 포함하면 3번 연속으로 나온다. 그만큼 절실하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이다. 그 이유는 “멸시”가 넘치기 때문이다. 멸시가 넘치기 때문에 넘치는 은혜가 필요한 상황인 것이다. 여기 사용된 “넘친다”는 표현은 사실 긍정적인 의미로 많이 사용되어서 풍성하다, 만족하다, 충분하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런데, 여기서는 부정적인 의미다. 좋은 것이 풍성한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멸시가 그리고 4절에서는 조소(조롱)가 넘치도록 풍성한 상황이다.
멸시와 조롱은 어떤 행동으로도 할 수 있지만, 가장 쉽게는 말로 할 수 있는 일이다. 상대방이 귀하게 생각하는 무언가를 깎아내리는 것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상대방을 무너뜨리는 것이 멸시와 조롱의 효과다.
히스기야 왕 때 유다를 점령하기 위해 올라왔던 앗수르의 전령인 랍사게가 했던 것이 그것이었다(왕하 18장). 히스기야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었는데, 랍사게는 그것이 아무 효과가 없을 것이라며 멸시했었다. 랍사게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효과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고 했던 사람들의 마음은 무너뜨릴 수 있었다. 그래서 히스기야의 사람들은 백성들이 알아듣지 못하게 유다 말이 아니라 아람 말로 해달라고 부탁을 하기도 했다. 백성들이 마음이 무너질 것을 염려 했던 것이다.
느헤미야와 유다 사람들이 성벽을 재건할 때, 산발랏과 도비야도 그렇게 했다.
느 4:2–3 자기 형제들과 사마리아 군대 앞에서 일러 말하되 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스스로 견고하게 하려는가, 제사를 드리려는가, 하루에 일을 마치려는가 불탄 돌을 흙 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 하고 3암몬 사람 도비야는 곁에 있다가 이르되 그들이 건축하는 돌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
이들이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실제로 성벽에 여유가 올라가서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앞선 경우와 마찬가지로 멸시와 조롱은 사람의 마음을 무너뜨릴 수 있다. 좌절하게 만드는 것이다. 특히 이렇게 의욕을 가지고 하는 일에 있어 의욕을 꺾는다. 이런 멸시와 조롱은 반복될수록 효과가 좋다.
많은 시편, 특히 다윗의 시편을 보면 그가 이런 어려움을 많이 겪었던 것을 볼 수 있다.
시 22:6–8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7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8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여기서 다윗을 멸시하고 조롱하는 자들은 그와 하나님의 관계에 의문을 제기한다. 너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은 너를 기뻐하니,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사실, 이 고난 중에서 다윗이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도 이 부분이었다.
시 22:1–2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2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이렇게 연약해진 마음을 더욱 무너뜨리는 것이 멸시와 조롱인 것이다. 시편 42편에서 고라 자손도 비슷한 멸시와 조롱을 언급한다.
시 42:10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낙심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에게 이렇게 다짐하는 것도 볼 수 있다.
시 42:1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편 123편의 저자는 특히 이런 멸시와 조롱이 “안일한 자”와 “교만한 자”를 통해 온다고 말한다. “교만한 자”는 시편에서 하나님을 대적하여 그 마음이 높아져 있는 악인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자주 봤었던 표현이다. “안일한 자”도 비슷한 의미인데, 하나님 없이 자신으로 만족하며 사는 사람을 의미한다. 이들은 세상 속에서 충분히 만족하고 즐기며 사는 사람들이다. 그런 삶이 옳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눈에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그들을 멸시와 조롱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시편 120편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멸시와 조롱은 낙심의 이유가 될 수 있고 또한 불평과 불만의 이유가 될 수도 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내가 이렇게 저렇게 얼마나 많은 고생과 수고를 했는데, 겨우 이것이 그 결과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시편 73편의 아삽이 그러했다. 아삽이 묘사한 악인들의 모습이 정확히 “안일한 자”와 “교만한 자”에 대한 묘사다. 그들은 하나님이 없는 듯이 살았지만, 잘 살았다. 그들은 평안하고 부유했다. 다른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아삽은 거의 넘어질 뻔했다고 고백한다(시 73:2).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죄에서 벗어난 삶을 살아온 것이 헛되다고까지 말한다(시 73:13).
가상의 상황으로, 그런 악인들이 아삽과 가까운 친구들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그들이 아삽을 찾아와서 뭘 그렇게 힘들게 사냐고 하면서 자신들의 성공담을 그에게 늘어 놓는다고 해보자. 어떻게 다른 사람을 속여서 돈을 벌었는데, 얼마나 운이 좋아서 이렇게 편하게 살 수 있게 되었는지를 자랑한다. 그리고 집을 떠나면서 아내하고 자식들 그래도 맛있는 거라도 사주고 해야하지 않느냐면서 돈도 좀 주고 갔다면 어떨까? 고마울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 돈을 절대 쓰고 싶지 않을 것이다. 동시에 그 돈을 쓰고 싶은 마음도 있어서 더 수치스러울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믿고 사는 삶이 이런 삶이 맞는 것인지, 낙심이 되고, 한편으로는 화도 나고 불평과 원망의 마음이 생겨날 수 있다.
내 삶에 하나님의 은혜보다 더 풍성한 멸시와 조롱이 있다고 느껴질 때, 우리에게 이런 유혹이 찾아온다. 그럴 때, 여기 시편 기자가 그 상황을 기도의 이유로 삼은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기 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생각하고, 그 하나님의 은혜의 손을 바라봐야 한다. 세상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지 말고, 오직 눈을 들어 하나님께로 향하게 해야 한다. 그래야 세상을 바르게 바라볼 수 있다.
도전
시편 123편은 시선 혹은 관점에 대한 시편이다. 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지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시선을 어디에 두느냐다. 우리 시선이 세상에 고정되어 있다면, 고난은 괴로움일 뿐이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은혜와 영원한 삶은 그저 정신 승리처럼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우리 시선에 하나님께 고정되어 있다면,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이고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고난은 오히려 더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고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는 촉매가 된다.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하는 수업이 된다. 괴로움이 있지만,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결국은 그 모든 것에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실제적인 예배의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우리의 시선이 하나님을 향할 때, 우리 삶은 참된 예배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졸지도 않으시고 자기 백성을 지키신다. 항상 보고 계신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 눈이 위에 계신 하나님을 향할 때, 하나님의 눈은 이미 나를 향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손에 가득한 은혜를 보게 될 것이다.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