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본문: 말라기 1:6-14
설교자: 조정의
선지자 이사야는 천상의 예배를 목도했다(사 6:1-4). 하나님께서 높은 보좌에 앉으셨고, 그분의 옷자락은 성전을 가득 채웠다. 스랍들이(출 25:20-22) 하나님을 모시고 예배하는데, 두 날개로 날고, 두 날개로는 각각 그들의 얼굴과 발을 가렸다. 감히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어서 경외와 겸손과 절대복종의 태도를 갖춘 것이다. 그들은 서로 화답하며 찬양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3절). 그 소리가 어찌나 크고 위엄있던지 성전 문지방 터가 요동하고 성전에 연기가 가득했다. 하나님의 참모습을 알고 경외하는 자의 마땅한 예배가 이사야를 압도했고, 그는 떨면서 두려워했다.
사도 요한이 본 천상의 예배엔 셀 수 없이 많은 천사와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참여한다(계 4-5장). 그들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높여 찬양한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계 4:8, 5:13). 그들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존귀하신 어린양 앞에 엎드려 경배한다. 하나님 아버지의 그리스도의 영광과 은혜를 보고 감격한 자들의 마땅한 예배가 천상에서 세세토록 크게 울려 퍼졌다.
자, 이제 하나님께서 언약의 관계 안에 조건 없이 변함없이 사랑하신 자기 백성, 즉 포로된 나라에서 귀환하게 하시고, 나라와 성전을 재건하게 하시며, 원수로부터 보호하시고, 언약에 신실한 은혜와 축복을 부어주신 이스라엘에, 그들이 드리는 예배에 관하여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들어보자(말 1:6-14). 얼마나 충격적인 대조인가! 거룩하신 하나님이 마땅히 받으셔야 할 예배에서 얼마나 멀어진 건가? 자기 백성에게 멸시받는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하실까? 오늘날 하나님이 제사장 나라로 삼으신 우리에게,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관하여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말씀하실까?
1. 고발: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6절)
하나님은 언약의 백성들을 가리켜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라고 책망하며 부르셨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당신을 가볍게 여기거나 버릇없이 군다고 짐짓 야단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태도와 행위에 깊은 배신감과 모멸감을 느끼셨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는 아버지와 자녀, 주인과 종의 관계였다(신 1:31; 레 25:55; 참고: 출 19:6).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은 언약의 관계를 생각할 때, 절대로 취해선 안 될 마음과 행위로 그들의 아버지요 주 하나님을 막대한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께 반박했다: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6절).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7절). 하나님의 언약 백성 이스라엘은 스스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존중하고 있다고 착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 반박할 수 없는 증거를 내밀어 그들의 실상을 낱낱이 밝히셨다.
2. 증거: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7-14절)
그들이 하나님을 멸시하고 더럽히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는 그들의 모욕적인 예배였다. “여호와의 식탁”(번제단)에 드리는 “더러운 떡”(음식, 레켐 לֶ֣חֶם)은 그들이 하나님을 “경멸히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7절): 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식탁은 더러워졌고 그 위에 있는 과일(결실) 곧 먹을 것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는도다(12절).
그들은 하나님께 “눈먼 희생제물”,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렸다(8절; 참고: 신 15:21; 17:1). 또한 그들은 “훔친 물건”(13절)을 드렸는데, 이는 야생 동물에게 빼앗겨 찢긴 가축을 의미한다. 이런 가축은 사람도 먹지 못해 개에게 줬는데, 그걸 하나님께 제물이라고 바친 것이다. 혹시 “흠 있는 것” 외에는 드릴 것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그랬던 것이 아닐까? 그럴 리가. 14절을 보면 그들은 “짐승 떼 가운데에 수컷이 있”는데도,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속여” 하나님께 드렸다. 하나님은 이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라고 재차 물으셨다. 무지해서 또는 실수로 그렇게 한 게 아니라 알고서도 일부러 악한 일을 저질렀다는 말이다.
너무 큰 죄악이란 걸 몰라서 그랬을까? 그렇지 않다. 이런 모욕적인 제물은 그들의 총독에게도 감히 바칠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8절). 그랬다가는 그들을 기뻐하거나 받아 주기는커녕 분노하고 그들이 저지른 악행에 대한 엄중한 처벌을 내릴 것이 분명했다. 하나님은 다르실까? 당신의 이름을 멸시하고 수치심과 분노를 일으키는 예배를 그냥 다 받아주실까? 절대로!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면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9절).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 많은 백성이 언약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주신 은혜의 방편이 바로 제사였다. 죄인은 하나님 앞에 나와 은혜를 구하면서 자기 죄에 대한 상한 심령과 통회하는 마음을 하나님께 바쳤다(시 34:18; 51:17). 하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겨주셔서 그들의 죗값인 생명을 거룩한 제물(흠이 없는 제물)에게서 대신 취하시고, 자기 백성을 용서하시며 언약의 관계를 신실하게 지키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 바치는 제물은 상한 심령과 통회하는 마음이 아니라 멸시하고 업신 여기는 마음이 그대로 드러난 제물이었다. 그들은 사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자체를 굉장히 귀찮게 여겼다: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 하며 코웃음치고(13절).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이 그들을 받으실 수 있겠는가? 불쌍히 여기실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그들이 제물을 제단 위에 놓고 아무런 의미 없이, 하나님이 찾으시는 진실한 마음 없이, 형식적으로, 억지로, 의무감으로, 그래서 헛되이 불사르는 악한 행위를 더는 지켜보고 싶지 않아 이렇게 말씀하셨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10절). 사람이 불쾌하고 모욕적으로 여겨 기뻐하지 않을 예물이라면, 하나님도 당연히 기뻐하지 않으신다. 사람도 받지 않을 것을 하나님께 드릴 생각하지 말라. 절대로! 그런 마음과 행위로 드리는 예물을 지극히 미워하시고 혐오하시는 하나님은 차라리 성전을 폐쇄하고 예배를 금지하기를 원하신다. 반드시 기억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모욕적인 예배라도 꾸역꾸역 받으시는 분이 아니다. 참된 예배(자)를 찾는 분이시다.
3. 약속: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11, 14절)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 ‘어디에서 예배하는 것이 옳은지’ 따져 물었을 때,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찾으시”는 “예배하는 자들”이 따로 있다고 하셨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 곧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이었다(요 4:23). 말라기 선지자를 통하여 자기 백성에게 아버지 하나님은 똑같은 말씀을 하신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11절). 여호와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의 범위가 크게 확장되었다.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 예루살렘이나 유다, 사마리아가 아니라 땅끝까지 찾으신다. 유대 민족이 아니라 이방 민족 중에서도 찾으신다. 각처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거룩하고 향기로운 제물을 드리는 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크게 높임을 받게 되실 것이다.
14절에서는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이방 민족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열정적으로 당신을 참으로 경외하는 예배자, 만왕의 왕, 만군의 주로 경배하는 예배자를 찾으신다. 그런데 언제 어떻게 하나님은 참된 예배자를 찾아 그분의 크신 이름에 합당한 경배를 받으시게 될까?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그 때와 시기에 관하여 “곧 이 때라”라고 말씀하셨다(요 4:23, “지금이 바로 그때다”, 우리말성경 now is).
분명 예수님은 성전 예배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21절,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예수님은 이제 어디서든 영과 진리로 예배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신자는 성령과 진리의 말씀으로 거룩함을 입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산 제물이 된다(벧전 2:9, “제사장”). 그들의 삶이 곧 예배가 된다는 말이다(롬 12:1,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하지만, 냉정하게 판단해 보자. 우리 삶은 거룩한 향기가 아니라 더러운 냄새가 날 때가 많고, 흠 없는 제물이기보다는 흠과 결점이 많은 제물처럼 보일 때가 많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우리 예배를 기뻐 받으실까? 놀랍게도 그렇다.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깨끗한 제물로 하나님께 단번에 영원히 드려지셨고, 하나님께서 이를 기쁘게 흠향하셨기 때문이다(레 26:31):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 5:2). 그래서, 이제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 모든 이방 민족 중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크게 높임받으신다.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과 진리로 거룩함을 입은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께 합당한 예배를 진실한 마음과 고백, 거룩한 삶으로 드리고 있다.
적용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향기로운 희생제물로 받으셨다는 사실은,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더욱 진실하고 거룩하게 만들까 아니면 형식적이고 의무적으로 만들까?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독자를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제단을 쌓고 이삭을 결박한 뒤 그의 목을 칼로 그으려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위하여 숫양을 준비하셨고,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리게 하셨다(창 22:13). 이후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마다 그는 더 진실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배했을까? 아니면 형식적이고 의무적인 예배를 드렸을까? 아들을 대신하여 숫양을 준비하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흠 없는 제물로 독생자를 내어주셨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더욱 진실하고 거룩한 예배를 드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의 모든 공적 예배와 삶의 예배에 나타나야 한다. ‘어떤 옷을 입는 것이 예배자에게 합당한가?’라는 질문에 특정한 기준을 제시하는 것은 율법주의에 빠질 위험이 크다. 그러나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당신이 가장 경외하고 존중하며 사랑하는 하나님께 합당한 옷을 입어라.’ ‘어떤 찬양(스타일)이 예배에 가장 합당한가?’라는 질문에도 특정한 장르를 규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우리가 가장 하나님을 경외하고 기뻐하며 높여드릴 수 있는 가사와 음악으로 예배해야 한다.’ 설교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에 무언가를 더하거나 빼지 않도록 주의하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담대하게 진리만을 선포해야 하고, 듣는 사람은 사람의 지혜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그 말씀에 굴복해야 한다.
① 매일 주어지는 24시간 중 기도하고 성경 읽는 시간만 하나님께 구별된 시간으로 여기지 말라. 모든 시간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거룩한 예배 시간이다(시 31:15, “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 ② 헌금만 하나님께 구별된 거룩한 돈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하나님이 허락하신 모든 재물이 그분의 것이고,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해야 할 거룩한 제물이다(시 24:1,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③ 우리 입에서 찬양이 흘러나올 때만 찬양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다. 야고보는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라고 책망했다(약 3:10). 우리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거룩한 예물이 되어야 한다. ④ 말이 아니라 마음에 자리 잡은 생각도 하나님은 들으신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예배했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 19:14). 우리 마음에 들락거리는 생각은 통제하기 어렵지만, 우리 마음에 둥지를 트는 생각(묵상)은 통제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하고 기뻐하시고 향기로운 제물이 되어야 한다. ⑤ 우리가 하는 모든 일도 예배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7). 가정(엡 5:22-6:4), 직장(엡 6:5-9), 교회(벧전 4:9-10), 다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려드리는 예배다.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주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시 25:14).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을 막론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시리로다”(시 115:13).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시 14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