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기쁨 사이 눈물 골짜기를 지날 때

본문: 시편 126편

설교자: 최종혁

이 시편에는 기쁨이 자주 언급된다. 사실 상 4절을 제외한 모든 절에서 기쁨이 언급된다. 하지만, 분류 상으로 이 시편은 비탄(애통)의 시다. 슬픔을 표현한 시인 것이다. 이 시편에서 말하는 기쁨은 과거의 기쁨과 미래의 기쁨이고, 현재는 눈물 골짜기를 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편은 분명 특정 상황이 배경이 되었겠지만, 다른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와 같이 보편적인 상황에서 불려지도록 기록되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를 생각해 보면, 어떤 노래는 성전에 올라가면서 부를만한 노래였고, 어떤 노래는 성전에 올라가서, 어떤 노래는 성전에 올라가기 전에 부를만한 노래였다. 시편 126편은 굳이 따지자면 성전에 올라가서 애통하며 부르는 노래일 것이다.

하늘나라를 향해 가는 순례자로서 또한 예배자로서 우리는 이런 상황에 있을 때가 적지 않다. 예배가 항상 기쁘고 행복하면 좋겠는데, 그렇지는 않은 것이다. 예배 자체가 싫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현실의 상황이 그만큼 무거운 것이다. 모여서 드리는 예배는 이런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좋은 가늠자가 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성경읽기나 기도와 같은 개인 경건 생활, 가정 생활, 사회 생활 등의 일상 예배도 마찬가지다. 때로, 어쩌면 자주, 우리는 무거운 마음으로 예배의 삶을 살아야할 때가 있는 것이다. 기쁨 사이의 눈물 골짜기를 지날 때가 있는 것이다. 아주 크게 보면 우리 삶 전부가 그렇다고 할 수도 있고, 작게 보면 우리는 기쁨의 언덕과 눈물의 골짜기를 계속해서 오르내린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시편 126편은 그런 사람의 시이고 그런 사람을 위한 시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기쁨 사이에 있는 눈물 골짜기를 지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자. 핵심 단어로 정리하면, 기억(1-3절), 기도(4절), 행함(5-6절)이라 할 수 있다.

기억(1-3절)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해야 한다.

126:1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이 표현은 자연스럽게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었던 이스라엘의 귀환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라는 표현은 성경에서 주로 포로기에서의 귀환을 의미하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동일한 표현이 하나님께서 고난 후에 욥을 회복시키실 때도 사용되었다. 욥은 포로로 잡혀간 적이 없고, 이어지는 말씀도 하나님께서 욥의 소유를 이전보다 갑절로 주셨다는 내용이다(욥 42:10). 즉, 이 표현은 기본적으로 회복에 대한 표현이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현재의 나쁜 상황을 이전의 좋은 상태로 돌려 놓으시는 것을 의미한다.

2-3절에서 이에 대한 추가적인 표현을 볼 수 있다. 이 일은 ‘여호와께서 우리(하나님의 백성)를 위하여 행하신 큰(위대한) 일이다. 이 일은 도저히 사람이 했다거나 우연히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그리고 분명히 우리를 위한 일이다. 그래서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혀에는 찬양이 찼었다. 기뻤다. 마치 꿈꾸는 것과 같이 믿을 수 없을만큼 기쁜 일이었다.

이스라엘 역사 속의 여러 상황들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출애굽도 그 중 하나다. 홍해를 건너고 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바닷가에 애굽 사람들이 죽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통해 그들이 실제로 본 것은 그들을 위하여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이었다(출 14:31). 그래서 그들은 노래와 춤으로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했었다.

이후에도 다 열거할 수 없을만큼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행하신 큰 일을 많이 경험했다. 여호수아 시대의 가나안 땅 정복, 사사들을 통한 구원, 히스기야 왕 때 앗수르 군대가 몰살했던 일 등 정말로 많다. 하지만, 이 시편에서 묘사하는 것에 가장 적합한 사건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었던 이스라엘이 다시 약속의 땅으로 귀환했던 사건이다. ‘회복’이라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셨다. 가나안 땅은 약속의 땅이었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기업의 땅이 되었다. 하지만, 반복되는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 땅에서 그들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 숭배에 몰두했을 때, 하나님은 언약에 따라 그들을 그 땅에서 쫓아내셨다.

대하 36:17–20 하나님이 갈대아 왕의 손에 그들을 다 넘기시매 그가 와서 그들의 성전에서 칼로 청년들을 죽이며 청년 남녀와 노인과 병약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였으며 18또 하나님의 전의 대소 그릇들과 여호와의 전의 보물과 왕과 방백들의 보물을 다 바벨론으로 가져가고 19또 하나님의 전을 불사르며 예루살렘 성벽을 헐며 그들의 모든 궁실을 불사르며 그들의 모든 귀한 그릇들을 부수고 20칼에서 살아 남은 자를 그가 바벨론으로 사로잡아가매 무리가 거기서 갈대아 왕과 그의 자손의 노예가 되어 바사국이 통치할 때까지 이르니라

이 때의 상황이 얼마나 비참했는지는 예레미야애가를 읽어 보면 잘 알 수 있다.

4:3 들개들도 젖을 주어 그들의 새끼를 먹이나 딸 내 백성은 잔인하여 마치 광야의 타조 같도다

4:10 딸 내 백성이 멸망할 때에 자비로운 부녀들이 자기들의 손으로 자기들의 자녀들을 삶아 먹었도다

5:4 우리가 은을 주고 물을 마시며 값을 주고 나무들을 가져오며

5:11 대적들이 시온에서 부녀들을, 유다 각 성읍에서 처녀들을 욕보였나이다

5:14–15 노인들은 다시 성문에 앉지 못하며 청년들은 다시 노래하지 못하나이다 15우리의 마음에는 기쁨이 그쳤고 우리의 춤은 변하여 슬픔이 되었사오며

모든 노래와 기쁨이 사라진 상황이었다. 그런데, 포로로 잡혀간 바벨론에서 그들은 이런 조롱도 당했다.

137:1–3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2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3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포로가 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뻐할 수 없고 노래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런 그들에게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흥미로운 말씀을 하셨다.

29:4–7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5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6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으며 너희 아들이 아내를 맞이하며 너희 딸이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낳게 하여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 7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

포로로 잡혀간 땅에서 잘 정착하여 살라는 말이다. 이유가 뭘까? 금방 돌아오지 않을 것이어서 그렇다. 하나님은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29:10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그곳에서 70년을 있어야했다. 성인들은 사실 상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다고 생각해야할 정도의 기간이다. 마치 범죄한 출애굽 1세대가 광야에서 모두 멸망했던 것처럼, 범죄한 이들도 포로된 땅에서 멸망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예언의 말씀에는 분명한 회복의 메시지가 있다. 그 70년이 지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보고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는 약속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뭔가를 열심히 준비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독립정부를 세우고 독립군을 만들라고 하지 않으셨다. 바벨론, 그리고 그 후에는 바사 제국의 정치권에 침투해서 이런 저런 일을 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그저 그 땅에서 잘 정착하여 살고 오히려 그 땅의 평안함을 위해서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찾으라고 하셨다(렘 29:12-14).

당연하게도,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의 이런 약속은 사람들의 마음에서 희미해져갔을 것이다. 다니엘 9장을 보면 다니엘이 이 예레미야의 말씀을 읽고 회개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약속을 기억한 경건한 사람들은 다니엘처럼 기도했겠지만, 다른 많은 사람들은 회복의 약속은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누군가 그런 얘기를 꺼내면 아마 대다수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지금 뭐 진행되는 것도 하나도 없는데, 무슨 귀환이냐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약속을 잊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때가 되었을 때 예언했던 바와 같이(사 44:28) 고레스를 세우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돌려보내시고 성전을 재건하게 하셨다(스 1:1-4). 복잡하고 어려운 과정은 없었다. 이방 나라의 왕이었던 고레스를 통해서 순식간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어안이 벙벙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말이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진짜로 가도 되는건지, 혹시 무슨 속임수가 있는 것은 아닌지하는 의심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사실인 것을 알고 실제로 다시 시온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때, 이들은 기뻐했다. 이런 상황은 정말로 현실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상황이다. 이것이 꿈이여야지만 설명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정도였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라고 당시 감정을 표현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이 그랬었다. 처음 여자들을 통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않았다(눅 24:11). 그것이 사실이면 좋겠지만, 사실이기에는 너무 좋은 소식이었기 때문에 믿기 힘들었던 것이다. 도마도 마찬가지였다. 예수님의 부활이 싫어서가 아니라, 그 자체가 현실로 받아들이기에 너무 좋은 소식이었기 때문에 쉽게 믿지 못했다.

사도행전 12장에 이런 비슷한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감옥에 있던 베드로를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 꺼내셨다. 베드로는 천사가 하라는대로 했지만 “천사가 하는 것이 생시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했다(행 12:9). 베드로가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갔을 때도 사람들은 믿지 못했다. 베드로가 왔다고 전해 준 여자 아이에게 “네가 미쳤다”고 할 정도였다(행 12:15). 진짜면 좋겠지만, 넌 지금 꿈 같은 얘기를 하고 있는거야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 꿈 같은 얘기가 사실은 현실이었다. 이들도 후에 이 일을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라고 회상했을 것이다.

어느날 갑자기 왕의 조서가 내려오고 그 조서에 따라 70년 전의 땅으로 돌아가던 사람들은 그 길을 가면서도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하는 생각을 했었을 것이다. 그만큼 놀라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2절을 보면 그 때에 그들의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그들의 혀에는 찬양(기쁨)이 찼었다고 말한다. 그 기쁨을 숨길 수가 없었다는 말이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포로 생활은 편안하지 않았다. 그들에게서 기쁨은 사라졌고 슬픔 만이 가득했었다. 고통의 시간이었다. 어쩌면 다시는 웃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 그 불가능하게 보였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이것은 너무나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도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2절). 이것이 뭇 나라 가운데서 이 일을 본 사람들이 내린 결론이었다. 이들은 고레스가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일을 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사실 고레스 자신도 이렇게 말했었다.

1:2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고레스나 여기 언급된 이방 나라 사람들이나, 이들이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하나님께서 포로된 자들에게 베푸신 회복의 은혜는 그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생각해 보게 했다. 이스라엘에게 일어난 이 일은 하나님이 아니면 설명이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 결론은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더욱 당연하다. 그래서 그들은 3절과 같이 고백했다.

126:3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큰 일에 대해서 이렇게 1인칭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기쁠 수 밖에 없다. 감사할 수 밖에 없다. 특히나, 이 ‘큰 일’에 내가 기여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안다면 더욱 그럴 수 밖에 없다. 포로로 끌려가는데 있어 모든 책임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었다. 그들이 하나님을 배반했고 우상을 섬겼기 때문이다. 그들의 포로 생활은 고통스러웠지만,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할 자격이 그들에게는 없었다는 말이다. 느헤미야 때에 그들은 언약을 새롭게 하면서 이렇게 고백했다.

9:33 그러나 우리가 당한 모든 일에 주는 공의로우시니 우리는 악을 행하였사오나 주께서는 진실하게 행하셨음이니이다

그들이 당한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은 그들 자신에게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회복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이었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이 일은 하나님이 아니면 설명되지 않는 일이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으셨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나님께서 자격 없는 이들에게 큰 일을 행하셨고, 이들도 그것을 알기 때문에 그 사실을 선포하며 기뻐했다.

이런 면에서 일상에서 믿는 자가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고 주변에 간증을 나누는 것이 실제적으로 중요하다. 첫째로는 그것이 서로를 격려하는 좋은 방법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보며 함께 기뻐할 수 있고, 또한 같은 은혜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그것이 믿지 않는 자에게 좋은 전도가 된다. 물론 믿지 않는 자가 처음부터 “여호와께서 너에게 큰 일을 행하셨다”고 말하는 일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냥 운이 좋았다고 생각할 것이고, 사람 잘 만나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아니면 네가 열심히 했으니까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반복되면 그들도 뭔가 다른 것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최소한 ‘네가 믿는 하나님은 나도 인정한다’는 마음은 가질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신 일을 통해 하나님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현실로 돌아올 필요가 있다. 1-3절은 시편 기자의 과거 회상이다. 이 일들은 이미 지나갔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났는지는 알 수 없다. 생각보다 이런 일들은 순식간에 지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구원의 기쁨도 빠르게 지나갈 수 있다. 에스라, 느헤미야의 말씀만 읽어봐도 귀환한 백성들이 얼마나 빠르게 현실의 어려움을 만나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럼, 그런 상황에서 이런 과거를 기억하는 것이 어떤 도움이 될까?

사실 과거의 회상은 단지 돌아갈 수 없는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 될 때가 많다. ‘그때가 참 좋았는데’에서 끝나는 것이다. 그때는 우리가 이런 열심이 있었고, 그래서 이런 저런 일들을 했고, 정말 좋았었다는 식으로 말한다. 이런 식의 과거 회상은 같은 과거를 공유한 사람들끼리 즐거운 이야기거리가 될 수는 있지만, 현실에 도움은 되지 않는다.

1-3절을 다시 보라. 그 때 우리가 좋았었던 이유를 뭐라고 말하고 있는가? 우리가 이걸 했고 저걸 했고가 아니다. 우리가 이루어낸 성취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하셨다는 사실이다. 상황은 달라졌다. 우리도 달라졌다. 좋았던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회복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 다시 포로가 될 수는 없다.

모든 것이 달라졌지만, 하나님은 달라지지 않으셨다. 따라서 현실에 도움이 되는 기억은 곧 하나님에 대한 기억이다. 과거를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기억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지금도 같은 하나님이심을 기억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하나님, 이스라엘을 포로기에서 회복하신 하나님, 나를 죄에서 건지신 하나님, 모두 동일한 하나님이시다. 지금 눈물 나는 상황에서 다른 모든 것은 다르지만 하나님은 동일하시다. 이것이 눈물 골짜기를 지나는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이다. 여전히 동일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다.

단순히 과거만 기억하면 우리는 현실에 한탄할 수 있다. 예전에는 그랬는데 지금은 왜 이러냐며 불평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을 기억한다면 기도할 수 있다.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자는 또 다른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4절)

126:4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 보내소서

1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 기도도 포로 귀환에 대한 내용처럼 들린다. 아직 돌아오지 못하고 여전히 포로되어 있는 사람들이 돌아올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처럼 들린다. 만약 포로 귀환이 이 시편의 배경이라면, 아직 온전한 귀환 혹은 회복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뭔가 상황이 지지부지한 것 같아 보일 때, 하나님께 이 상황을 해결해 주시기를 구하는 기도일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시편은 보다 일반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 지금의 이 슬픔에서 건져주시기를 구하는 기도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우리에게 큰 일을 행하셨던 것처럼 지금도 그렇게 해달라고 구하는 것이다. 이미 하나님은 슬퍼하던 우리를 기뻐하게 하신 적이 있다. 다시 한 번 그렇게 해주시기를 구하는 것이다.

여기 사용된 “남방 시내들 같이”는 흥미로운 비유다. 남방은 이스라엘 지역 남쪽의 사막 지대인 네게브를 의미한다. 그곳의 시내는 와디를 의미한다. 메마른 와디에 갑자기 홍수가 일어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렇게 구원을 베풀어 주시기를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여러 면에서 우리를 놀라게 한다. 그 대상에 있어서 그럴 때가 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니느웨 사람들을 구원하시려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기도 했다. 하박국 선지자도 하나님께서 악을 벌하시면서 어떻게 더 악한 자들을 사용하실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 방법에 있어서 그럴 때도 있다. 하나님은 여리고 성을 점령하려면 그 성을 매일 한바퀴씩 돌라고 하셨었다. 나병 환자였던 나아만에게는 나병이 낫고 싶으면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고 하셨다. 나아만은 자기 나라에는 더 좋은 강이 있는데, 씻으려면 거기서 씻지 여기서 씻으면 낫는다는게 말이 되냐며 분노했었다. 그 방법이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미디안과 싸우기 전에 기드온의 군사 수를 계속해서 줄이셨던 방법도 마찬가지다. 일반적은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방법이다.

죄인이 구원 받는 것은 어떤까? 하나님은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구원의 길을 여셨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사람이 되어서 죽는 것이었다. 그렇게까지 해서 구원한 사람들을 보면 그 희생이 납득이 되는가? 그렇지도 않다. 가장 선하고, 가장 지혜롭고, 가장 뛰어난 사람들만 구원 받아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구원은 그렇게 여러 면에서 우리를 놀라게 한다. 결국은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시간에 있어서도 그렇다. 하나님의 구원은 순식간에 이루어질 때가 많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실 때, 천천히 시간을 두고 병이 낫지 않았다. ‘곧’ 나았다. 베데스다 연못의 38년 된 병자는 여느 때와 똑같은 하루를 시작했겠지만, 예수님을 만나서 완전히 다른 하루를 살게 되었다. 날 때부터 맹인되었던 사람도 그날 그가 눈을 떠서 세상을 보게 될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의 눈을 뜨게 하셨을 때, 그는 난생 처음으로 세상을 보게 되었다.

광야에서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고기를 먹이시겠다고 하자, 모세는 양 떼와 소 떼를 잡고, 바다의 모든 고기를 모아도 부족할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런 모세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11:2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여호와의 손이 짧으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

그리고 하나님은 바람으로 메추라기를 몰아 오셔서 백성들을 다 먹이셨다.

비슷한 사건이 또 있다. 아람 군대가 사마리아를 포위했을 때, 먹을 것이 없어서 자기 아이를 먹는 일까지 일어났었다. 그런데 엘리사는 하루 아침에 그 문제가 해결될 것을 예언했다. 이 말을 들은 한 장관은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라며 믿지 못했다(왕하 7:2). 하나님은 아람 군대가 큰 군대의 소리를 듣게 하셔서 모든 것을 남겨두고 도망하게 하셨고, 그들이 남겨둔 것을 백성들이 챙겨와서 모든 식량 문제가 해결되었다.

4절의 기도는 바로 이런 하나님을 신뢰하여 드리는 기도다. 사람들은 현실의 가능성을 따지지만, 하나님께는 그런 것이 무의미하다. 하나님은 정말로 사막에 강이 흐르게 하시는 분이시다.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으시다. 원하시면 가장 악한 사람도 구원하신다. 말도 안되는 방법을 사용하신다. 당장에라도 그렇게 하실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구하면서, 얼마나 많은 제약을 두는지 모른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 없다고 믿는 것은 아니지만, 마치 그런 것처럼 제약을 두고 구할 때가 있다. 남방 시내들 같이는 안될 것 같고, 유평 마을 앞 개울 정도는 될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어차피 물 흐르고 있으니까 하나님이 조금만 도와주시면 될 것처럼 구한다. 사실 하나님이 돕지 않으셔도 괜찮을 것 같은 것을 구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 기도에 간절함이 없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 응답을 모르기도 한다.

눈물 골짜기에 있을 때, 이 골짜기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지금이라도 끝내실 수 있다는 사실이다.

30:5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저녁의 울음이 아침에는 기쁨으로 바뀔 수 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수 있다. 이것이 눈물 골짜기에서 우리가 가져야할 확신이다. 이 눈물 골짜기에 38년을 있었든 나면서부터 있었든, 이 한가지를 확신하고 기도해야 한다. 또 다시 슬픔 가운데 눈을 뜨게 되더라도, ‘기도해봤자 소용없네’라고 생각하고 기도를 멈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을 믿고 또 다시 구해야 한다. 다시 한번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며 기뻐 찬양할 날을 기대해야 한다.

눈물 골짜기를 지날 때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고 기도해야 한다. 하지만 그러면서 골방에 숨어있어서는 안된다. 시편 126편의 마지막 두 구절은 우리에게 실제적인 도전을 던진다. 골방에 숨고 싶을 때, 행하라는 것이다.

행함(5-6절)

126:5–6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6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기쁨으로 거둘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다시 큰 일을 행하실 것에 대한 확신이다. 하나님께서 남방 시내들 같이 회복시키실 것에 대한 확신이다. 이것은 단순한 희망 사항이 아니다. 힘든 상황 속에서 단순히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합리적 추론의 결과다. 하나님을 생각하기 때문에 내린 결론이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 눈물을 기쁨으로 바꾸실 것이다. 이 확신은 이미 우리가 앞의 말씀들을 통해서 살펴봤다.

중요한 것은 이 확신이 언제 현실이 될지는 모른다는 것이다.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게 될 텐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게 하실텐데, 그 때가 언제인지는 모른다. 그럼 어떻게 해야할까? 하나님께서 기쁨을 주실 때까지 앉아서 눈물을 흘리고 있으면 될까?

시편 기자는 아니라고 답한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린다. 6절의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라는 표현은 지속적으로 이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더 강조되었다. 울면서도 씨를 뿌리기 위해 나간다는 것이다. 지치지 않고 계속해서 일을 한다는 의미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눈물을 흘리면서 씨를 뿌리면 반드시 풍성한 수확을 거두게 될 것이라는 농사의 비법 같은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뿌린대로 거둔다는 수확의 일반 원리를 지금 자신의 상황에 적용하고 있다. 지금은 눈물 가운데 있지만, 지금 해야할 일을 한다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기쁨으로 결실을 맺게 하실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씨를 뿌리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하는 것(예배)을 의미한다. 지금이 고통스럽고, 앞으로도 고통스러울 것을 알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다. 이 장면을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렇게 표현했다.

5:7–8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8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예수님은 울며 씨를 뿌리신 것이다. 고통을 마주하고 순종의 길을 걸어가셨다. 그리고 기쁨으로 거두셨다.

53:10–11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11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예수님을 따라 우리도 이 눈물 골짜기에서 씨를 뿌려야 한다.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의 구원을 위해 계속해서 노력하는 것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죄악된 마음과 치열하게 싸우는 것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예수님 때문에 세상과는 다른 선택을 하는 것, 여러 어려움 중에서도 성도를 격려하고 봉사에 힘쓰는 것 등 주님을 위해 하는 모든 것들이 씨를 뿌리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하나님은 기쁨으로 거두게 하실 것이다.

지금 슬픔의 감정에 매몰되지 않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책임을 다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우리가 이 눈물 골짜기에서 해야할 세번째 일이다.

도전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이런 눈물의 골짜기를 허락하실까? 먼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고통 받는 것을 보는 것을 재밌어하시기 때문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3: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그럼, 하나님도 어쩔 수 없어서 우리가 고통을 받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하나님께 어쩔 수 없는 것은 없다. 그럼, 왜일까? 우리는 이에 대한 답을 알고 싶지만, 하나님은 다 말씀해주지 않으신다. 다만 우리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신다.

29: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지만, 하나님은 이유없이 그냥 믿으라고 하시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믿을만한 분이심을 하나님은 수 없이 보여주셨고, 예수님이 그 가장 확실한 증거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 우리 삶이 눈물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 우리는 눈물 골짜기에 있지만, 기쁨 사이에 있다. 하나님의 구원과 구원 사이에 있을 뿐이다. 하나님은 반드시 다시 우리에게 기쁨을 주실 것이고, 궁극적으로 영원한 기쁨 가운데 살게 하실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상황에서 계속해서 씨를 뿌리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고 바라며 순종의 삶을 사는 것이다. 눈물이 나지만, 그래서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을 수 있지만, 그래도 밭으로 나가서 씨를 뿌리는 것이다. 그 모든 눈물을 하나님께서 기쁨으로 바꾸실 것이다. 사실 내가 흘린 눈물과 비할 수 없는 기쁨이 우리를 기다린다. 눈물 골짜기를 지날 때,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자. 하나님께서 나에게 얼마나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그렇게 선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