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본문: 고린도전서 2:1-5

설교자: 최종혁

기독교를 상징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대부분은 십자가라고 답할 것이다. 간혹 자동차 뒤에 붙여 놓는 물고기(익투스)를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일반적이지는 않아서 교회를 다니는 사람조차도 기독교하고 물고기가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십자가는 그렇지 않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도 왜 십자가가 기독교를 상징하는지 어느 정도는 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죽음을 상징하기 때문이고, 예수님의 죽음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사형틀인 십자가를 신앙의 상징으로 삼는 것은 일반적이라고 하기 어렵다. 마치 교수형에 사용되는 밧줄이나 참수대, 혹은 전기 의자 같은 것을 상징으로 삼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십자가형은 로마가 채택했던 사형 방식이었다. 로마는 자신들의 지배력을 확고하게 하기 위해서 중범죄자들을 공개적인 십자가형에 처했다. 로마 시민의 경우는 로마에 대한 극단적인 반역죄를 범했을 때만 십자가형을 선고했다고 한다. 그만큼 로마인들은 십자가형을 비인간적인 처형 방식으로 여겼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는 신명기 21:23이 그대로 적용되는 모습으로 보였다. 따라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일반적인 로마인들에게는 흉악한 범죄자였고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죄인이었다. 이것이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고 말할 때 당시의 사람들이 받았을 첫 인상인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고전 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처음 복음이 전해질 때 이런 상황이었는데, 어떻게 십자가가 기독교의 상징이 되었을까? 이런 상황이었다면, 그리스도를 전할 때 십자가 얘기는 빼야하지 않았을까? 굳이 물어보면 어쩔 수 없이 얘기해줄 수는 있어도 먼저 이야기할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렇게 했다면, 자연스럽게 십자가는 기독교에서 숨기고 싶은 사실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오히려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이 되었다. 위에 읽은 말씀에서 바울이 말한 것처럼,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했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했을까? 오늘 말씀을 통해서 살펴보자.

고전 2:1–5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3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4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5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여기서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에서 어떻게 복음을 전했는지에 대해서 말한다.

먼저 그는 자신이 했던 일(사역)을 하나님의 증거를 전한 것이라고 표현했다. “증거”는 어떤 사본에서는 “비밀”이라고도 되어 있지만 의미 상 큰 차이를 만들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바울이 전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한 마디 한 마디 해야할 말을 생각나게 하셔서 그 말을 그대로 전했던 것은 아니다. 바울은 자신이 생각해서 해야할 말을 했다. 하지만, 그가 전했던 메시지는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이었다. 그의 메시지가 그의 철학적 사고나 상상력의 결과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누구에게 배운 것도 아니었다.

1:11–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12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면서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26:22–23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언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23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 것,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직접 그에게 주신 계시가 바울이 전했던 메시지였다. 그가 했던 일은 그렇게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않고, 오직 진리로서 그대로 나타내는 일이었다(고후 4:2). 그랬기 때문에, 그렇게 전해진 말씀을 성도들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

살전 2: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이 상황은 헤롯의 연설과는 전혀 다르다(행 12:21-23). 헤롯의 연설에 대해서 사람들은 그것이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라고 하면서 헤롯을 높였다. 애초에 그 연설의 목적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헤롯은 자신을 높이기 위해서 연설했고, 사람들은 그에 화답했던 것이다. 이로인해 헤롯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

하지만 바울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바울은 자신을 전하지 않았다.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지 않았다. 그가 전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그래서 사람들은 바울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랬기 때문에 바울은 “전했다”. 전했다는 말은 선포했다는 의미다.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말이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가장 큰 목적을 ‘선포’하는데 두었던 것이다. 자신의 말이라면 토론을 하고 설득을 하는데 목적을 두었을 수도 있다. 해당 주제로 대화하고 교제를 나누는 것도 목적이 되었을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먼저 권위 있는 말씀으로서 선포되어야 했고, 그래서 바울은 그렇게 하나님의 증거를 전했던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바울이 설득하지 않으려고 했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토론이나 대화의 주제가 되지 않았다는 말도 아니다. 다만, 말씀이 전해질 때는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선포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근원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권위를 갖는다. 따라서 가장 어린 아이의 입에서 나온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은 권위가 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빛아, 있어줄래?”라고 부탁하지 않으셨다. “빛이 있으면 좋겠네”라고 바라지 않으셨다. “빛이 있으라”고 명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선포되는 것이다. 구약의 선지서에서 계속 반복되는 표현이 있다. 바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혹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다.  선지자들은 자신들이 전하는 말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분명하게 인지했고 그 사실을 계속해서 강조했던 것이다.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고 싫어하고는 다음 문제다.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고도 다음 문제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선포되는 것이다. 그리고 듣는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당연히 이것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방식이 아니다. 바울이나 사도들이 자신들을 ‘신의 대리인’처럼 높이려고 이렇게 말씀을 전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훈련을 위해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10:7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라고 명하셨다. 이 말만 반복해서 해야할 것을 의도하신 것은 아니다. 하지만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것(선포하는 것)이 그들의 가장 중요한 사명임을 분명히 하신 것이다. 부활 후에 아버지께로 돌아가시기 전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들은 ‘증인’이 될 것이었다. 즉, 하나님의 증거를 선포하는 것이 그들의 주된 역할이었던 것이다. 사도들 뿐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에게 이 말씀이 해당된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따라 오순절에 시작된 교회는 계속해서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하나님의 증거를 선포했다. 바울이 고린도 지역에 갔을 때 했던 일도 바로 그 일이었다.

세상이 많이 변했지만, 여전히 교회들이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주요 방식으로 선택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권위있는 말씀으로 선포되어야하기 때문이다. 성경에 대한 지식을 얻는데는 강의 같은 방법이 더 적절할 것이다. 성경을 암송하려면 노래로 만들면 좋을 것이다. 성경으로 설득하려면 개인적인 권면이 도움이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교회 안의 말씀 사역의 일부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있고, 따라서 우리가 순종해야 하는 말씀이라는 사실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은 설교다.

설교에서 사람은 하나님의 대언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 이 때 설교자 자신은 아무런 권위가 없다. 그가 세상적으로 아무리 권위가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올바르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지 않으면 그 사람의 권위가 말씀의 권위를 대신하지 못한다. 그렇게 하게 두어서도 안된다. 우리 나라의 대통령, 대법관, 경제계 총수 누가 오더라도 잘못된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권위로 올바른 말씀으로 만들 수 없다. 하지만 말씀이 올바르게 선포되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고 해도 그 말씀은 하나님의 권위를 가진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이다. 이 사실을 설교를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잘 인지해야 한다.

그래서 좋은 설교자는 수백번 그 사람의 설교를 들어도 듣는 자들이 그 사람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고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복음에 대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는 더 깊고 풍성하게 알게 하는 사람이다. 그 사람에게 관심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관심이 생기게 하는 설교가 좋은 설교다. 그러니 설교에 대한 우리의 기대도 그러해야 한다. 경제에 대해서 궁금하면 유튜브를 찾아 보라. 뭔가 재밌는 것을 보고 싶으면 유튜브를 찾아 보라. 다이어트 방법도 유튜브 찾아 보면 된다. 내 생각이 옳다고 확신하고 싶은가? 유튜브를 찾아 보라. 설교는 그런 것을 위한 시간이 아니다. 다른 무엇이 아니라 이 시간에는 하나님의 증거가 전해지기를 기대해야 한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 자신의 사명이 하나님의 증거를 전하는 것임을 알았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그 일을 어떻게 해야하는지도 알았다. 그는 하나님의 증거를 전했기 때문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라고 말한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뭔가 맞지 않는 말 같다.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면 더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해야할 것 같다. 그래야 그 말씀이 더 잘 전달될 것 같다. 사람들이 사전 찾아봐야 알 수 있는 그런 단어들을 사용해야 격이 맞을 것 같다.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여기 “아름다운 것”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뛰어남, 월등함, 탁월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바울이 여기서 의미한 것은 일반적으로 어떤 탁월한 논리나 정교한 표현일 수도 있지만,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볼 때, 구체적으로 당시에 인정받았던 수사학 혹은 웅변술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당시의 고린도는 그리스-로마 문화 아래 있었고, 그들에게 연설은 하나의 즐길거리이기도 했다. 그래서 식사를 하면서 연설가들을 초대해서 그들의 말을 듣는 것이 고상한 취미인 경우도 있었다. 연설가들은 다양한 수사학과 웅변술을 익혀서 자신들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사람들에게 과시했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을 얼마나 잘 풀어내는지가 중요했다. 그래서 듣는 자들에게 놀라움을 선사하고 그들을 감동시키는 것이 중요했다. 그렇게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아야 후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음악을 듣는 것과 같았다. 음악을 그냥 듣는 사람들도 있지만, 음악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어떻게 연주되었는지 등을 듣는 사람들도 있다. 그 안에 있는 온갖 의도와 기법들을 찾아내고, 그런 것을 통해 음악을 더 깊이있게 들으면서 감동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당시의 연설 문화가 그러했다. 연설은 어떤 사상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쇼였다. 즐길거리였다. 그래서 연설가들도 어떤 사상가라기 보다는 청중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듣고 싶어 하는 방식으로 해주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보다 어려운 말, 고차원적인 말,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지만 알아들은 척하는 그런 말들로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감동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으로 서로 경쟁했고, 사람들은 그것을 즐겼다.

고린도 교회에 리더들을 따라서 분쟁이 생겼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고전 1:12). 리더들 사이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바울과 아볼로, 게바 사이에 어떤 문제가 있어서 성도들이 어떤 사람의 편을 들었던 것이 아니다. 단지, 그들이 이들의 설교를 들을 때, 그것이 그들에게 익숙했었던 연설처럼 들렸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원래 하던 것처럼 자신들의 구미에 맞는 스타일의 설교자를 선호하게 되고 그들을 응원했던 것이다.

이런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바울은 처음부터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처음부터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나님의 증거를 전하지 않았다. 바울은 당시에 유명한 랍비 아래서 배운 사람으로서 분명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더욱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것이 단지 세상에서 사용되고 있는 방식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세상에서 사용되는 방식이라도 그것이 복음을 전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말의 지혜로 복음을 전했을 때의 문제는 분명했다.

고전 1: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말의 지혜로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만든다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그렇게 될까? 앞서 말했던 당시의 연설 문화를 고려해 보면 두 가지 정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말의 지혜로 복음을 전하면 복음의 내용,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부차적인 것이 된다. 말의 지혜라는 것은 결국 듣는 사람 중심이다. 청중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듣고 싶은 방식으로 해주는 것이 지금 말하고 있는 말의 지혜다. 그렇다면, 십자가는 부차적인 것이 될 수 밖에 없다. 앞서 말한 것처럼 누구에게도 십자가는 긍정적인 이미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대한 얘기는 가능한 숨겨야 한다. 사람들이 들었을 때 불편해할만한 내용들, 특히 심판이나 지옥에 관한 얘기는 하지 말아야 한다. 대신에 이런 이야기를 해야한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건강하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부유하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행복하기 원하십니다. 당신은 있는 그대로 아름답습니다. 당신이 최고입니다. 절대로 자신을 바꾸려고 하지 마세요.” 이런 말들이 십자가 앞으로 오게 될 것이다. 그렇게 십자가는 헛되게 된다.

다음으로 말의 지혜로 복음을 전하면 결국은 그리스도가 아닌 그 말을 한 사람을 따르게 만든다. 애초에 말의 지혜라는 것(수사학, 웅변술)이 그런 의도로 발전한 것이기 때문이다. 설득의 끝에 있는 것은 바로 나라는 사람을 믿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이단들이 사용하는 방법이다. 여러 방법을 사용해서 결국은 ‘교주’를 믿고 따르게 만든다. 그래서 그 사람이 이사를 하라고 하면 이사를 하고, 결혼을 하라고 하면 결혼을 한다. 사람을 따르는 것이다.

연설가들은 수사학을 통해 웅변술을 통해 계속해서 자신을 돋보이게 했다. 자신이 얼마나 탁월한지를 드러내려고 했다. 그렇게 복음을 전한다면, 결국 듣는 사람은 복음이 아닌 그 사람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그보다 더 탁월한 사람이 나타난다면, 그조차 다른 사람으로 대체된다. 말의 지혜는 그렇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만든다.

한 가지 두려운 사실이 있다. 방금 언급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만드는 말의 지혜가 오늘날 교회 안에도 있다는 사실이다. 교회 안에 ‘스타 목사’ 혹은 ‘스타 선교사’와 같은 연설가들이 있다. 그들은 화려한 언변으로 사람들의 귀를 사로잡는다. 그들은 성경을 말하고 그리스도를 말하는 듯 하지만, 결국은 자기 얘기를 하고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얘기를 해준다. 아주 감동적으로, 아주 재밌게. 설교 시간이 짧게 느껴질 정도다. 사람들은 설교를 통해 은혜를 받았다고 말하고 다시 또 그의 설교를 찾아 듣는다. 그런데, 그 설교를 통해 남는 것은 그리스도와 십자가가 아니라, 그 설교자와 감동적인 이야기 뿐이다. 내 삶을 변화시킬 하나님의 말씀은 남지 않고, 그냥 좋은 감정만 남는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만든 것이다.

문제는 이런 유혹이 모두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런 설교를 하고, 그런 설교를 듣고 싶어하는 문제가 있다. 그렇게 해서 점점 더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의 메시지를 희미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설교가 아닌 다른 하나님의 일을 할 때도 비슷한 상황들이 벌어진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때로 다른 이유나 다른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나를 드러내고 싶고, 내가 인정받고 싶어서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할 수 있다. 그리스도와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것과 상관 없이 그냥 어떤 일을 할 수도 이다. 그냥 아이들이 좋으니까 교회학교에서 섬기고, 그냥 노래하는게 좋으니까 찬양팀에서 섬기는 식이다. 좋아서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십자가와 상관 없이 하는게 문제다. 그렇게 하면 결국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섬김이 아니라 사람이 원하는 섬김을 하게 될 것이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영광을 받는 것으로 끝날 것이다. 그렇게 우리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조심하고 두려워해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하지 않기로 선택한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쉽고 편해서가 아니라, 어렵고 불편하지만, 그렇게 해야 참된 복음을 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울은 그는 웅변가가 아니었고 철학자도 아니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증인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작정했다.

고전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1절에서 말한 바울이 전했던 “하나님의 증거”의 핵심이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전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 알기 원했지만, 반대로 그것에 방해가 되는 것은 무엇이든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

빌립보서 3장에서 바울은 사람들에게 자랑할만한 여러가지를 언급했다. 그는 자신도 세상의 기준에서 자랑할만한 것들이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3:7–9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

기준이 바뀐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가 가장 중요한 것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그것만 알기로 작정했다. 사람들이 어떤 말을 듣고 싶어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 어떤 말씀을 사람들에게 하시고 싶으신지가 중요했다. 사람들이 십자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하지 않았다. 십자가가 그들에게 어떤 의미인지가 중요했다.

그럼, 십자가는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23–24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이고 지혜다.

이방인들에게 십자가의 예수님은 흉악한 범죄자로 보였지만 사실은 이러했다.

벧전 2:22–24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23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24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유대인들에게 십자가의 예수님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이러했다.

3:13–14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이 흉악한 범죄자여서가 아니라 우리가 흉악한 범죄자여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셨지만 그것은 우리를 위한 것이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을 믿어 구원의 복을 받게 하시려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던 것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의 중요성이다. 십자가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있다. 하나님의 공의가 있다. 하나님의 구원이 있다. 그러니, 이 십자가를 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십자가의 중요성(중심성)을 알기 때문에,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가 율법주의의 유혹에 빠졌을 때, 이렇게 그들을 책망했다.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분명한데, 너희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냐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복음의 모든 것을 설명한다.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은혜가 필요했는지, 우리가 받은 구원이 얼마나 큰 것인지, 그 모든 것을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 눈 앞에 밝히 보여준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 그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바울은 과분함을 느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고전 2: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약함, 두려움, 떨림의 원인이 바울의 어떤 육체적 연약함(질병) 때문이라고 보는 경우도 있지만, 그보다는 자신의 사명에 대한 태도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바울은 자신의 직분에 대해서 이런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딤전 1:12–16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13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14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5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6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은 감히 자신이 해서는 안되는 일을 주님께서 하라고 맡겨주셨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주님의 교회를 가장 적극적으로 핍박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를 겸손하게 했다. 하지만, 바울은 그 은혜에 감사했다. 그리고 이 복음 전하는 일에 자신의 모든 생을 바쳤다.

고전 15: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바울은 고린도의 다른 연설자들처럼 자기 확신으로 가득하지 않았다. 그는 약하고 두려웠고 떨었다. 그가 맡은 일이 너무나 중하고 귀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언제나 이런 두려움과 떨림이 있다. 하지만 동시에 확신할 수 있는 것도 있다.

고전 2:4–5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5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고린도의 연설자들은 자신의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인해 확신했다. 하지만 바울은 앞서 말한 것처럼 의도적으로 그 모든 것을 거부했다. 그의 말을 통해 사람들이 그를 따르게 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말을 통해 사람들이 또 하나의 철학 사상(“사람의 지혜”)를 알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원했던 것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되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믿고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이런 변화는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살전 1:4–10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5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6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7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8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9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10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데 있어 바울의 말은 무슨 역할을 했을까?

고후 4:5–6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6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바울의 말을 통해 하나님은 구원 받는 자들의 마음에 빛을 비추신다. 어둠 가운데 있어서 아무 것도 보지 못하던 자들에게 빛을 비추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알 수 있게 하신다.

스펄전, “복음의 능력은 설교자의 웅변에 있지 않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사람이 영혼을 변화시키는 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복음의 능력은] 설교자의 학식에 있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사람의 지혜에 근거한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혀가 썩을 때까지, 폐가 다해 죽을 때까지 설교할 수 있지만, 성령이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하여 영혼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주지 않는 한 단 한 영혼도 변화되지 않을 것입니다.”

스펄전이 잘 표현했지만, 바른 복음을 전했던 성도들은 모두가 이런 사실을 알고 같은 마음으로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도 자신을 전파하지 않았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전파했다. 이 복음이 올바르게 전파될 때,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셨다. 이 복음이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전파되었을 때가 아니라, 약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올바르게’ 전파되었을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다. 바울은 그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고,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하신 것을 선포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방식이었고, 사실 모든 사도들, 모든 성도의 방식이었다.

처음 우리는 ‘왜 십자가가 기독교의 상징이 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했었다. 십자가가 결코 당시 사람들에게 좋은 이미지가 아니었는데, 어떻게 교회는 십자가를 그들의 상징으로 삼았는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에 대한 단순한 답은 ‘교회가 계속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기 때문’이었다. 이어진 질문은 ‘왜 교회는 그렇게 했느냐’였다.

이 질문에 대해서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그 답을 찾았다. 교회가 그렇게 했던 이유는 복음을 전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에 달려 있었다. 복음을 전하는 목적은 설교자의 지혜와 능력을 드러내서 사람을 따르게 하는 것이 아니다. 복음을 전하는 목적은 듣는 사람을 지적으로 설득하는데 있지 않다. 복음을 전하는 목적은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거나 어떤 만족을 주는 것이 아니다.

만약 이런 것들을 목적으로 삼았다면, 교회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복음을 전했을 것이다. 훨씬 좋은 방법, 쉬운 방법이 많다. 바울은 굳이 쉬운 방법을 두고 어렵게 복음을 전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교회는 그런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모든 것을 배척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 바로 이 어리석어 보이고 힘 없어 보이는 메시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능력을 나타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죽은 영혼이 살아나기 원한다. 그것을 위해 복음을 전한다. 죽은 시체에 화장을 예쁘게 해서 살아 있는 것처럼 보여지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죽은 자가 살아나기를 원한다. 그 일은 우리가 할 수 없다. 사람의 지혜와 능력으로 불가능하다. 오직 하나님께서 하신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신다. 그래서 십자가는 어리석고 약해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지혜다.

이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에 대해서 앞으로 몇 주간 함께 살펴보게 될 것이다. 이 시간이 우리에게 있어 무엇이 정말로 중요한지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원한다. 우리에게 있어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만큼 중요한 사실이 없다. 그 십자가를 전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십자가를 전한다. 말로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십자가의 능력이 나타나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도 전한다. 그러니, 무엇을 하든, 이 십자가의 중요성, 십자가 중심성을 잊지 말라. 우리 삶에 여러 지혜가 필요한 것은 맞다. 여러 능력이 필요하기도 하다. 이런 저런 도움을 세상에서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것이라도 십자가를 중심에서 밀어낸다면, 멈춰야 한다. 그것은 더 이상 알지 않기로 작정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잃고 하나님의 능력을 잃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그저 죽은 영혼을 예쁘게 화장하는 일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항상 우리 마음과 생각의 중심에 있게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