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본문: 빌립보서 2:6-11
설교자: 최종혁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종종 크리스마스에 일어나는 기적에 대한 내용이 있다. 절대로 함께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가족이 갑자기 크리스마스에 나타난다거나, 크리스마스에 먹을 것이 없어 죽어가던 사람에게 누군가가 온정을 베풀거나 하는 것이다. 때로는 좀 더 ‘기적’에 가까운 일을 소재로 삼기도 한다. 뭐가 미스터리한 좋은 일이 크리스마스에 생기는 것이다.
아마 크리스마스의 기적으로 가장 유명한 실제 사건은 1914년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과 영국-프랑스 연합군 사이에서 있었던 일일 것이다. 양측은 전쟁 중이었지만 둘 다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면서 전쟁을 잠시 멈추고 함께 캐롤을 부르고, 음식을 나누고, 축구를 함께 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 거짓말 같은 실화는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말씀은 이보다 훨씬 더 거짓말 같은 실화로서 그야말로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다. 사실은 크리스마스 자체에 대한 이야기다. 많은 사람들에게 크리스마스는 보이는 것이 전부다. 그냥 예수라는 위대한 사람이 태어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그의 탄생에는 다른 위인들의 경우와 비슷하게 동화같은 아름다운 전설이 있다. 가난한 부모에게 태어났지만, 이 아이의 특별함을 알고 있었던 사람들(동방 박사, 목자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 아이는 자라서 본이 되는 삶과 좋은 가르침으로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쳤다. 이것이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크리스마스의 전부다.
하지만 성경에는 크리스마스에 대한 보이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고, 생각하고 싶어하지 않는 진짜 크리스마스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반짝이는 장식이나 귀여운 피규어, 아름다운 선물에 감추어져 있고, 노래에 감추어져 있고, 어쩌면 크리스마스에 우리가 행하는 선행에 감추어져 있기도 하다. 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면 사실 크리스마스는 누구에게나 좋은 날일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 없이 크리스마스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크리스마스는 사탄의 치밀한 계략의 산물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이 이야기를 해야 한다. 보이지 않고, 귀엽지 않지만, 진짜 크리스마스의 이야기, 진짜 크리스마스의 기적에 대한 이야기다.
빌 2:6–11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본문은 바울이 교회의 하나됨에 대해 권면하면서, 그 핵심이 되는 “그리스도의 마음”에 대해서 설명하는 내용이다. 교회가 하나되기 위해서는 3-4절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겸손한 마음이 필요한데, 그것이 곧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셨던 본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낮아지심, 섬김의 본으로서 언급할 수 있는 좋은 사건은 예수님께서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던 사건도 있을 것이다. 해당 사건에서 예수님은 직접적으로 섬김의 본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말씀하기도 하셨다. 하지만 바울은 그 사건보다 더 근본적인 사건을 생각했다. 바로 예수님의 궁극적인 낮아지심, 곧 성육신이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이 사건은 단순히 겸손의 좋은 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높으신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실제로 낮아지신 사건이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크리스마스의 이야기이고, 반드시 알아야 할 이야기다. 오늘은 이 말씀을 낮아짐의 본 혹은 명령과 관련해서가 아니라 낮아짐 자체의 의미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자.
예수님의 성육신에 대해서 기록한 6-11절의 말씀은 많은 학자들이 초대 교회의 찬송시로 생각하는 말씀이다. 바울이 기존에 있던 찬송시를 인용한 것인지, 아니면 바울이 기록한 이 말씀이 찬송시가 된 것인지는 확신하기 어렵지만, 이 말씀이 지금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주어진 것은 확신할 수 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그에 합당한 우리의 반응에 대해 알 수 있다.
이 찬송시는 이렇게 시작된다.
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이 땅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하늘에서 시작되었다. 크리스마스는 우리가 높은 곳으로 올라간 이야기가 아니라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있는 낮은 곳으로 내려오신 이야기다.
이 땅에 태어나신 예수님은 “낮아지신”(낮추신) 분이시지 본래 낮으신 분이 아니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예수님의 본질이다. 성경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표현하는데, 정말 흥미로운 표현이다.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지니신 하나님이라는 의미인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부) 하나님과는 구분되는 인격을 지니신 분이심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요한은 예수님을 “말씀”으로 표현하여 같은 사실을 선포했다.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기” 때문에 분명 말씀이신 예수님은 하나님과는 구분되는 인격이시지만, 동시에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모든 변하지 않는 속성을 지니신 것이다.
성경은 이것을 예수님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본질’이라는 것은 그 존재를 정의하는 것이기 때문에 변해서는 안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물과 기름은 같은 ‘액체’로서 비슷한 성질이 있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를 물이라고 부르고 다른 하나를 기름이라고 부른다.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본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라는 말은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이시라는 의미다. 다른 모든 피조물과는 구별되는 하나님만의 속성을 지니셨다는 말이다.
골 1:19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골 2: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히 1: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되신 적이 없다. 단 한순간도 하나님이 아니셨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이셨고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이실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이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라는 말의 의미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말씀하기도 하셨고(요 10:30), 아버지(하나님)를 보여달라는 빌립에게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반문하기도 하셨다(요 14:9).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 하신 가장 놀라운 말씀 중 하나는 이것이다.
요 8: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며 비웃듯이 물었던 유대인들에게 주신 대답이다(요 8:57). 이 대답에서 놀라운 것은 바로 동사의 시제다. 그냥 읽어도 어색한 것이 느껴질 것이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었느니라”고 과거시제로 말씀하셔야 할 상황에서 “있느니라”고 현제시제로 하셨다. 하나님으로서 예수님은 항상 계시기 때문에 ‘있었다’는 과거 시제를 사용하지 않으신 것이다. “있었다”고 말씀하신다고 틀린 말이 되지는 않지만, 맥락 상 마치 예수님이 아브라함보다 먼저 ‘태어난’ 것 같은 뉘앙스를 주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셨을 때 자신을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고 표현하신 것과 동일하게(출 3:14) 예수님은 항상 계신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다. 그리고 여기서 크리스마스가 시작된다. 예수님은 가장 높은 곳에서 이제 자신을 낮추신다.
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다. 여기서 “취할 것”은 강도가 힘으로 빼앗는 ‘강탈’에서 유래한 단어다. 강탈은 상대방에게 위해를 가하면서까지 무언가를 매우 원하기 때문에 벌이는 범죄다. 따라서 여기서 ‘취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해서 그것을 단단히 붙드는 것, 움켜쥐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시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반드시 붙들어야할 무언가로 여기지 않으셨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울이 강조하려고 했던 “그리스도의 마음”의 핵심이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예수님은 낮아지고 또 낮아지신다. 그렇게 하실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끝까지 그렇게 하셨다. 자기를 비우고,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죽기까지 하셨어도, 같은 마음을 품으셨다. 나를 비우는 것까지는 할 수 있지만, 종의 형체를 가지는 것을 할 수 없다거나, 종의 형체까지는 가능하지만 죽기까지 할 수는 없다고 하지 않으신 것이다. 여기까지가 내가 낮아질 수 있는 한계고, 순종할 수 있는 한계라고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끝까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다. 예수님의 이 마음이 크리스마스의 놀라운 기적을 현실이 되게 했다.
이제 예수님께서 어떻게 낮아지셨는지를 보자. 먼저 예수님은 자기를 비우셨다.
빌 2:7 오히려 자기를 비워 …
예수님께서 자기를 비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많은 논쟁이 있어 왔지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지 않는지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었다. 이 말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기를 멈췄다는 의미는 아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서의 본질적인 속성을 모두 버리셨다는 의미는 아닌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을 때도 ‘하나님의 아들’로서 여전히 하나님이셨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비웠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기를 멈췄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으로서의 권리와 특권을 내려놓으셨다는 의미다. 예수님은 하늘의 영광을 내려놓으셨다. 그 영광스러운 하늘나라를 떠나 이 땅에 오셨다. 하나님으로서의 권위를 자신의 뜻대로 사용하지 않으셨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이런 자기 비움을 부자가 가난하게 된 것으로 표현했다.
고후 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모든 것을 가지신 분으셨지만 마치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처럼 되신 것이다. 모든 것인 분이 자신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드신 것이다.
이것만 해도 하나님으로서 상상할 수 없는 낮아짐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천사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자기를 비운 예수님의 모습은 일견 천사인 자신들보다도 낮게 보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서 더 낮은 곳을 향하셨다.
빌 2: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의 권리를 내려 놓으셨을 뿐 아니라, 종인 사람의 형체를 가지셔서 사람과 같이 되셨다. 여기서 “형체”라고 번역된 단어는 바로 위의 “본체”와 같은 단어다. 번역은 다르게 되었지만 같은 단어로서 의미는 동일하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처럼 예수님은 사람이시다. 차이가 있다면 예수님은 본래부터 하나님이셨지만 본래부터 사람은 아니셨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심으로 사람이 되셨다.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되신 적은 없으시지만, 항상 사람은 아니셨기 때문에 사람이 되셨다. 이것을 성육신이라고 한다. 즉, 성육신이 의미하는 것은 예수님이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시다는 사실이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신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의 권리를 내려놓으셨을 뿐 아니라 사람으로 제약도 가지게 된 것이다.
하나님으로서의 권리를 내려놓으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다시 오실 날에 대해서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24:36). 예수님은 하신 말씀과 하신 일에 있어서도 모든 것을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요 5:19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요 5:30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요 6: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요 8:28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요 12:49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요 14:10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이것이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자기를 비우신 예수님의 삶이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말하고 행하셨다.
여기에 예수님은 인간으로서의 제약도 경험하셨다. 아마 우리가 오늘날 누리고 있는 문명의 이기들만 없어져도 어떻게 사나 싶을 것이다. 자동차가 없고, 에어컨이 없고, 보일러가 없다고 생각해 보라. 전기가 없다고 생각해 보라. 이런 것 없이 과거의 사람들은 잘 살았지만, 지금 우리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삶이다. 이미 누려본 것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경험은 어떠했을까? 모든 것을 아시는 분께서 지식이 자라는 것을 경험하셨다. 어느 곳에나 계신 분께서 걸어서 이동하시고 배를 타고 이동하셨다. 나귀를 타기도 하셨다. 배가 고파서 무엇을 드셔야 했다. 목이 말라서 물을 마셔야 했다. 피곤해서 자야 했다. 머리 둘 곳이 필요하셨다. 아프기도 하셨을 것이다.
그 중에도 가장 놀라운 것은 예수님도 우리와 같이 모든 면에서 죄의 유혹을 받으셨다는 사실이다. 예수님 자신은 죄의 본성을 가지고 계시지 않았지만, 아담과 하와가 그러했듯 죄의 유혹은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그 유혹에 굴복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경험하신 유혹은 인류 중 누구도 경험하지 못했던 유혹이다. 예수님께서 종의 형체를 가지셔서 사람들과 같이 되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사람의 연약함을 직접 경험하셨다.
그래도 하나님이신데, 인생의 난이도를 낮출만한 무언가는 예수님께 있었을까? 예수님의 생애를 다룬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예수님이 멋지고 잘 생겼다면 아마 사는 것이 남들보다는 쉬웠을지 모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성경은 예수님의 외모에 대해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라고 묘사한다(사 53:2). 부모의 재력이나 사회적인 지위도 도움이 될 것이 없었다. 공생애 기간에도 예수님은 머리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으로서의 권리를 포기한다는 것 하나만해도 예수님께는 상상할 수 없는 낮아짐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더하여 사람이 된다는 것은 더욱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사람 중에서도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에 오신 것도 아니었다. 당시의 가장 강력한 왕의 아들로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아무도 알지 못하는,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는 평가를 들었던 나사렛 출신이었다. 이 정도면 다 낮아진 것일까? 낮아지기 싫은 사람이게는 이미 한계를 넘은 상황이지만, 하나님은 더 낮은 곳까지 예수님이 내려가길 원하셨다.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인간으로서 죽으셔야 했다. 그런데, 이 죽음도 편안한 죽음이거나 아름다운 죽음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극악한 죄인으로 선고를 받고 사형을 당하신 것이다. 십자가 형 자체의 끔찍함은 차치하더라도, 그 억울함은 사람으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어떻게든 십자가에서 죽게 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자신들의 법을 모두 무시하면서 재판을 진행했고, 결국 예수님을 ‘신성모독’이라는 죄로 사형을 선고했다. 신성모독은 그들이 하고 있었다. 예수님이 바로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이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저항하지 않으시고 그 판결을 받아 들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이 그냥 처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로마인의 손으로 예수님을 공식적으로 사형하기 원했다. 그래야 예수님이 공식적인 죄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순히 예수님의 죽음을 원했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죄인으로서 죽기를 원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비롯한 모든 것을 사람들이 거절하게 되기를 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살해가 아니라 사형이 필요했다. 예수님은 억울한 죽음을 당한 불쌍한 사람이 아니라, 법의 판결을 받아 사형받아 마땅한 사람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빌라도가 어쩔 수 없이 예수님께 사형을 선고하게 만들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사형을 받을 만한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민란을 염려하여 사형을 선고하고 십자가에 못박게 넘겨주었다.
그 예수님을 사람은 모욕하고 조롱했다. 예수님은 로마 병사들의 노리개가 되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왕처럼 차려 입혀놓고 조롱하며 침 뱉고 때렸다. 사람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당신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면 십자가에서 내려와보라고 조롱했다. 이 모든 일에 예수님은 잠잠하셨다. 대항하지 않으셨다.
이 모든 일들이 예수님께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아니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내가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말씀하셨다(마 26:38).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셨다.
마 26: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십자가의 낮아짐은 예수님께서 피할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었던 낮아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아버지의 원대로 되는 것이 예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것이었고, 그것이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었을 때, 예수님은 기꺼이 그렇게 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을 잡으러 왔던 무리에게 베드로가 대항하여 싸울 때 그를 만류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 26:53–54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하실 수 없으셨던 것이 아니라, 하지 않으신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 하나님께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치밀한 계략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것이 아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예수님은 원하신다면 빠져나갈 수 있으셨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신 것이다. 하나님의 때가 되었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셔서 기꺼이 더 낮은 곳, 십자가로 향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끝까지 순종하셨다. 끝까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다.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은 낮아지고 낮아지고 낮아지셨다. 이것이 크리스마스의 의미다. 예수님의 탄생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신 낮아지심이다. 그렇게 태어나신 예수님은 더 낮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 향하셨고 결국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이 이야기를 지금까지 객관적인 시각에서 잘 들었다면, 한가지 의문이 마음 속에서 끊임없이 생겨날 것이다. 도대체 왜? 도대체 왜 하나님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까지 낮아지기를 원하셨고, 예수님은 왜 기꺼이 그렇게 하셨을까? 그렇게까지 해서 얻는 것이 무엇일까?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이렇게 이어진다.
빌 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가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지극히 높이셨다. 여기에는 3단계가 있다. 먼저는 몸의 부활이고, 다음은 다시 하늘로 올라가신 승천이고, 마지막은 보좌에 앉아 다스리시는 좌정이다.
행 2:32–33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33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
엡 1:20–22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벧전 3:22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스스로 낮추신 예수님이 가장 높은 이름을 얻으셨다. 그리고 결국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다.
빌 2:10–11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은 모든 인격적 존재를 포함하는 표현이다. 모든 인격을 가진 존재는 예수님의 이름에 무릎을 꿇게 될 것이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복종과 예배를 의미한다. 결국 모든 존재가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주되심에 대한 논쟁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모든 무릎”, “모든 입”이라고 말한다. 예외는 없다. 누구도 예수님이 왕이시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못하게 될 날이 온다. 물론, 지금도 예수님은 왕이시지만, 과거 이 땅에 연약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셨던 예수님께서 영광 중에 이 땅에 다시 오셔서 누가 진정한 왕인지를 나타내실 그 때, 모든 사람이 예수님이 왕이심을 시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이것이 크리스마스 이야기의 끝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낮아지심을 통해 모든 천사와 모든 사람을 그 앞에 무릎 꿇게 하실 것이고, 예수님은 그 모든 영광을 아버지 하나님께 돌리게 하실 것이다.
도전
이 모든 이야기 속에 우리는 어디에 있을까? 바로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예수님을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 자리에 우리가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는 우리의 선택이 아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렇게 될 것이다. “모든” 무릎이 예수의 이름에 꿇게 되고, “모든” 입이 예수를 주라 시인하게 된다. 낮아지신 예수님을 하나님이 그렇게 높이실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기꺼이 기쁨으로 그렇게 할 것이고, 누군가는 자기 뜻에 반하여 강제로 그렇게 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 말씀에서 마지막으로 주목할 것은 바로 이름이다. 예수라는 이름과 주라는 이름이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이름은 그의 이 땅의 부모가 아닌 하늘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직접 지어주셨다. 그 의미는 이렇다.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님은 이 땅에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그들을 구원하여 참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기꺼이 하나님을 예배하며 영광 돌리게 하려고 오셨다. 이것이 우리에게 찾아온 크리스마스의 진짜 기적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강제로 무릎 꿇릴 수 있으시지만, 그렇게 하기 전에 우리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우리가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기꺼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하기를 촉구한다.
롬 10:9–13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1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2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지금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라. 지금 믿으라. 이것이 크리스마스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크리스마스는 그저 예수라는 좋은 사람의 출생으로 끝나지 않는다. 크리스마스는 그분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며, 만 왕의 왕이심을 말한다. 이 크리스마스의 진짜 기적은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셔서 하나님께로 이끄시기 위해 낮아지셨다는 사실이고, 그 예수님을 믿고 주로 시인하는 자는 누구든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사실이다. 이를 거절하면 크리스마스는 나에게 비극적인 날이 될 것이다. 지금 만왕의 왕 앞에 무릎을 꿇고 경배하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