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교회의 진정한 교제

본문: 사도행전 2:41-47

설교자: 조정의

현대 교회는 교제의 빈곤에 처해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소그룹, 셀 조직, 구역, 가정 교회 등을 통하여 교제의 기회를 많이 창출하고 있지만, 실제로 성도들은 역사상 최악의 고립감과 외로움을 호소한다. ‘속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 한 사람만 있어도 교회 생활은 할 만하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교회 안에서, 교제권을 찾기가 어렵다. 한편, 어떤 성도는 그리스도인 간의 교제가 필수는 아니라고 여긴다. 설교와 돌봄을 온라인을 통해 공급받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을 의뢰함>의 저자 제리 브릿지즈는 지금으로부터 33년 전에 쓴 책인 <진정한 교제>에서, ‘그리스도인의 교제가 위기에 처했다’고 평가했다. 33년이 지난 지금, 교회에 불어닥친 개인주의와 세속주의 때문에 문제는 더 심각해졌다. 어떻게 우린 진정한 교제를 되찾을 수 있을까?

그 답을 찾기 위하여 처음 교회가 시작됐을 때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시고 성령 충만을 받은 제자들을 통하여 복음이 선포됐을 때, 삼천이나 더해진 성도 무리로 예루살렘 교회가 시작됐다(행 2:41). 첫 교회의 교제는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먼저 거듭난 성도가 새롭게 더해진 성도를 교제권으로 끌어당긴 것도 아니었고, 그들을 위한 셀 조직이나 구역이 만들어진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하루아침에 교회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리고 진정한 교제가 이루어졌다(41-47절). 초대 교회 성도가 “다 함께” 힘썼던 일들과 그것이 그리스도인 간의 친밀한 교제를 형성하는 데 미친 영향을 찾아보고, 우리도 다 함께 힘써 교회의 진정한 교제를 이루어 풍성한 기쁨과 만족을 누리자.

1. 교제의 동력(1): 하나님의 권위 있는 말씀

본문에서 “그 말을(복음) 받은 사람들은” 누구인가? “세례를 받”아 “신도”가 된 삼천 명의 초대 교회 성도들이다(41절). 그들이 한마음으로 처음부터 계속해서 몰두한 일들이 있었는데(“힘쓰니라”, 현재형), 그중에서 가장 먼저 언급된 일은 바로 “사도의 가르침을 받”는 것이었다(42절). 사도의 가르침은 매우 특별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을 보고 들은 증인이었고, 하나님은 그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그분이 하신 모든 일과 말씀을 성령의 지혜와 능력으로 가르치게 하셨다. 그들의 가르침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친히 확증하셨는데, 그래서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고, 사람마다 그 권위와 능력에 “두려워”했다(43절). 초대 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의 권위 있는 말씀 듣기를 한마음으로 깊이 사모했다. 그래서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46절). 많은 신도가 함께 모여 사도의 가르침을 듣기에 합당한 규모의 장소인 성전에 매일! 모여서 권위 있는 하나님 말씀을 듣고 배웠다. 

말씀을 듣고 배우는 것과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무슨 관계일까? 가족이 친밀한 교제를 누리는 것은 많은 시간을 보내서이기도 하지만, 가족으로 묶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서로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 각 성도가 그리스도께 속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혈연관계가 된 형제자매요 한 가족이다. 우리의 교제가 친밀해지기 위해서 우리를 하나로 묶으신 분과 그분 안에서 우리가 함께 누리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알면 알수록 우리는 더욱 친밀해진다. 말씀은 우리를 하나로 부르신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가장 강력한 은혜의 방편이다.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듣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서로 친밀한 교제를 누리는 비법을 이렇게 전수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골 3:16). 그리스도인의 교제가 풍성해지려면, 우리 안에 말씀이 풍성히 거해야 한다. 우리의 교제가 진정으로 깊어지고 친밀해지려면, 우리 각 사람이 그리스도와 더 깊고 친밀한 사귐을 누려야 한다.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인의 사귐에 관하여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요일 1:3). 그리스도 안에서 우린 교제한다.

2. 교제의 동력(2): 그리스도를 함께 먹고 마심

두 번째로 초대 교회가 함께 전념한 일은 “떡을 떼는 일이다(42절). 매주 우리가 행하고 있는 ‘주의 만찬(성찬)’을 말한다. 그런데 그들은 날마다 이를 행하여 주를 기념했다: “날마다…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46절). 오늘날 간소화된 만찬은 소량의 떡과 잔을 나누지만, 당시엔 충분한 음식을 먹는 식사였다. 수천 명의 성도가 함께 먹을 장소가 없어서 집에서 먹었고, 흩어진 집에서 성도와 함께 먹는 식사의 중심엔 언제나 떡을 떼는 주의 만찬이 있었다. 무엇을 얼마큼 먹느냐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누구를 그리고 무엇을 기념했느냐이다. 

함께 먹고 마시는 만찬은 참여한 모든 성도에게 기쁨과 순전한 마음(‘‘일치된 마음’)을 일으켰다(46절). 만찬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함께 기념하고(눅 22:19) 그분이 교회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교회에게 부어주신 구원의 은혜를 함께 먹고 마셨기 때문이다(고전 11:25-26). 많은 사람이 교회에서 소속감을 간절히 갖고 싶어한다. 그래서 자신을 가장 편하게 해주고 많은 공통점을 가진 사람을 끊임없이 찾는다. 그러나 소속감은 그렇게 얻는 것이 아니다. 존 파이퍼의 아들 바너버스 파이퍼는 소속감을 이렇게 정의했다: “소속감은 우리가 가장 편안하고 안락하게 느끼는 곳 혹은 타인과의 공통점이 가장 많은 곳에 의해 정의되지 않는다. 소속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있으라고 의도하신 곳, 그러므로 우리가 참 생명과 깊은 만족과 기쁨을 발견하기를 바라시는 곳에 의해 정의된다”(34-5pp). 만찬은 우리의 진정한 소속을 계속해서 상기시킨다: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고전 10:17). 한 떡에 참여하는 우리는 한 몸이기 때문에 바로 거기서 소속감을 가지고 서로 교제해야 한다. 다른 이유나 조건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또한 우리는 한 떡에 참여함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함께 누리는 풍성한 생명과 만족과 기쁨을 발견한다. 영적으로 궁핍하고 메말라 서로를 사랑할 힘이 없는 우리는 그리스도를 먹고 마심으로 채워져 서로를 뜨겁게 사랑할 생명력을 얻는다. 만찬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약속된 은혜를 더욱 풍성히 먹고 마시게 하여, 우리의 사귐을 부요하게 만든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요 6:55-58).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자들이 누리는 교제다. 만찬은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는 일로, 교제의 생명줄과 같다. 

3. 교제의 행위: 성도가 나누는 삶과 물질

지금까지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더욱 풍성하게 하는 동력(자원)이 무엇인지 살펴봤다면, 이제는 실제로 그리스도인의 교제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살펴볼 차례다. 42절에서 초대 교회 성도들이 누린 교제를 “서로 교제하고”라고 짧게 묘사했는데,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코이노니아의 기본적인 의미는 ‘나눔’이다. 

교제 또는 사귐의 본질적인 특징이 바로 ‘나눔’이다. 친밀하게 사귀는 사이에서는 모든 것을 나눈다. 시간을 나누고, 감정을 나누고, 물질을 나누고, 한마디로 삶 전체를 나눈다. 그래서 가장 친밀한 관계인 부부 관계를 성경은 ‘한 몸’의 관계라 부른다. 모든 것을 공유하는 것이 한 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은 교회도 한 몸이라고 했다. 그래서 성도의 사귐은 본질적으로 나누는 것으로 나타난다. 초대 교회 성도들이 어떻게 삶을 나누었는지 보라: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44-45절). 

1) 삶의 공유: 다 함께 있어라는 말에서 그들이 공예배 시간 또는 사교 시간에만 삶의 일부를 나눈 것이 아니라 삶 전체를 공유했다는 걸 알 수 있다. 계속 함께 있으면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 보여줄 수 없다. 원치 않아도 본모습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리스도인의 교제가 그렇다. 서로 죄를 서로 고백하고(약 5:16),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라(엡 4:2)는 명령은 우리가 그만큼 삶을 있는 그대로 나누는 것을 전제로 주어졌다. 물론, 모든 성도에게 생각나는 모든 것을 말하고, 느끼는 모든 감정을 표현하라는 말이 아니다. 내 삶에 중요한 문제와 내가 겪는 슬픔과 고통을 아무하고도 나누지 않으면 성도 간의 진정한 교제가 이루어지기를 바랄 수 없다는 말이다. 성도와의 교제가 형식적이고 유익하지 않다고 여기는 많은 경우는 자신이 겪는 어려움, 자신을 진짜 위태롭게 하는 죄의 문제를 아무하고도 나누려 하지 않는 자기 방어 때문이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는 전우다(딤후 2:3). 형제자매에게 당신의 삶을 나누라. 그리고 그들이 안심하고 삶을 나눌 수 있는 전우가 되어라.

2) 물질 공유: 성도의 나눔은 영적인 것을 넘어 물질적인 것을 포함한다. 영적인 것을 넘는다는 표현이 과장된 것처럼 들릴지 모르겠다. 영적인 것이 더 큰 범위가 아닌가? 물질적인 것은 영적인 것보다 더 기초적인 것이 아닌가? 그러나 현실적으로 영적인 것을 많이 공유하면서 물질을 나누는 데 인색하기가 얼마나 쉬운지 모른다. 야고보는 경건을 말하면서 그 경건이 더럽지 않고 정결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열매가 바로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 사람이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한 사람이다(약 1:27). 왜 갈수록 성도들이 물질을 나누지 않는가? 왜 필요가 있는 성도는 있는데, 그 필요에 둔감하거나 무관심해지는가? 세속에 물들기 때문이다. 따뜻한 말, 격려와 위로는 해줄 수 있지만, 실질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부담을 지기는 싫은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말과 혀로만 나누는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나누는 사랑이다(요일 3:18). 우리는 진리의 말씀과 함께 자기 목숨을 내어주는 사랑을 그리스도께 받았다. 그리고 받은 그 사랑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는 형제자매로서(벧전 1:22), 서로의 필요에 민감해야 한다. 서로를 불쌍히 여기고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교제가 살아있는 교회가 되려면 좋은 프로그램이나 조직이 필요한 게 아니다. 그것들은 사실 교제를 돕는 수단에 불과하다. 진정한 교제가 살아있는 교회는 하나님의 권위 있는 말씀을 사모하는 교회다. 만찬을 통해 자신의 소속을 분명히 하고 자신이 받은 풍성한 은혜를 계속해서 채우는 교회다. 삶을 나누고 필요를 채우는 교회다. 몇 사람이 힘쓴다고 해서, 잠깐 노력한다고 해서 진정한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게 아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서로 힘써야 한다. 영원한 사귐을 위하여 더 깊이 친밀하게 그리스도 안에서 사귐을 누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