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교회여, 힘써 싸우라(2)

본문: 유다서 1:1-4

설교자: 최종혁

싸움에 대해 말할 때는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다. 싸우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은 ‘왜?’, ‘굳이?’ 라는 생각을 하고, 반대로 싸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싸우려고 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성도가 싸워야만 하는 싸움에 대해서 생각해 볼 것이다. 이 싸움이 어떤 싸움인지, 왜 싸워야 하는지를, 싸움의 목적과 대상을 통해 생각해 보자.

싸움의 목적(3절)

유다는 먼저 독자들을 “사랑하는 자들아”(3절)라고 부르면서 본론을 시작한다. 앞서 봤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하나님 안에서 사랑 받은 자들이고, 편지의 저자인 유다 역시 그들을 같은 마음으로 대한다. 그는 그들의 목자로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힘써 싸우라”는 내용의 편지를 쓰고 있다.

그런데 유다는 본래 다른 내용의 편지를 쓰고 싶었다고 말한다.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편지를 쓰려는 생각이 간절했다고 한다. 일반으로 받았다는 말은 쉽게 풀어 말하자면 똑같이 받았다는 의미다. 구원은 모두에게 동일하다. 누구는 더 큰 구원을 받고 누구는 더 작은 구원을 받지 않는다. 누구는 더 많이 구원 받고 누구는 덜 구원 받고 하는 일은 없다. 어쩌면 당시 교회 안에 그런 차별이 있어서 그것을 바로 잡고 싶은 마음이 유다에게 있었을지 모르겠다. 어쨌든 유다가 워래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주제는 ‘일반으로 받은 구원’이었다. 그것도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나중에 그런 내용의 편지를 썼을 수는 있겠지만, 유다서를 기록하던 이 때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보다 더 시급한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다. 다른 내용의 편지로 성도들을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다. 자신의 간절함을 넘어서는 강한 압박을 받은 것이다. 원인에 대해서는 다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 과정에 특별히 관여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상황을 통해서든, 사람을 통해서든, 혹은 보다 직접적으로 그 마음을 움직이셨든, 유다의 마음에 큰 부담을 주셨고, 그렇게 기록된 편지를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남겨주신 것이다.

이 권면의 편지(유다서)의 핵심 주제는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이다.

“힘써 싸우라”는 단어는 꽤 강한 어조의 표현이다. 이 단어는 고통을 전제로 한다. 고통 가운데, 목숨을 걸고, 전력으로 싸우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말에서는 ‘분투하다, 분전하다’ 정도가 비슷한 의미일 것 같다. 신약 성경에서는 실제로 전쟁을 표현할 때도 사용되었고, 치열한 영적인 싸움이나 노력을 표현할 때도 사용되었다.

이 싸움은 ‘모두가 승자’인 유치원 아이들의 스포츠가 아니다. 실제로는 잘하든 못하든 어차피 상 받고 끝나는 명랑 운동회가 아니다. 성경은 실제로 죽고 사는 전쟁을 말하고 있다. 검투사들의 싸움을 말하고 있다.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상황에서의 싸움인 것이다. 생사가 걸린 상황에서의 싸움이다. ‘허공을 치는 것’ 같은 싸움이 아니라 분명한 대상이 있는 싸움이다(고전 9:26). 그래서 하나님의 전신갑주가 필요한 싸움이다(엡 6:11, 13). 잘 준비해서 때가 되면 싸우면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계속해서 싸워야 하는 싸움이다.

무엇을 위해 성도가 그렇게까지 싸워야할까?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해서다. “믿음의 도”에서 뒤에 “도”는 의미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성경 번역가들이 추가한 것이고, 원래는 “믿음”이라고만 되어 있다. 믿음이라고 하면 우리는 먼저 개인의(주관적) 믿음을 떠올리지만, 때로는 믿는 바, 즉 믿음의 내용(객관적 믿음, 진리)를 의미한다. 예로, 예수님을 만난 후에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성도들은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갈 1:23)고 말했었는데, 이 때 믿음은 개인의 주관적인 믿음이 아니라 객관적인 믿음의 내용, 즉 복음을 의미한다.

유다서에서 말하는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도 믿음의 내용으로 보는 것이 적합하기 때문에 번역가들은 “믿음의 도”라고 번역했을 것이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객관적인 믿음의 도를 위해 싸우는 것은 또한 주관적인 믿음을 위해 싸우는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애초에 믿음이 없으면 믿음의 내용을 위해 싸우지도 않는다. 또한 믿음의 내용이 잘못되어 있으면 그 믿음도 잘못된 믿음이 된다. 예를 들어,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다’가 아니라 ‘어느 정도의 행함이 있으면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 믿음의 내용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믿음도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믿음의 내용과 믿음 자체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유다서가 말하는 싸움은 결과적으로는 ‘믿음을 위한 싸움’이라고 통칭해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론적인 싸움이 아니라 실제적인 삶의 싸움인 것이다. 이 관계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말씀들을 통해 더 살펴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일차적으로 유다가 강조하는 것은 믿음의 내용, 변하지 않는 객관적 진리를 위한 싸움이다. 좁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의미하고 넓게는 성경의 모든 진리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이라는 표현에서 우리가 지켜 싸워야 할 믿음에 대한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이 믿음의 도는 성도에게 ‘주어졌다’. 이는 믿음의 근원에 대한 표현이다. 성경의 진리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누군가가 만들어 내거나 발견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이다. 주어진 것이라는 말은 주로 ‘전통’을 의미하는데, 문맥에 따라 긍정적일 수도 있고 부정적일 수도 있다. 여기서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선지자들을 통해, 사도들을 통해 주어진 전통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성도들에게 주신 진리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이 사실을 분명하게 말했다.

요일 1:2–3 …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3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

요일 1:5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

자신들이 전한 복음의 근원이 자신들이 아닌 예수님이시라고 말한 것이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다른 복음’을 받아들인 교회를 맹렬하게 책망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1:7–8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8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바울은 자신 만이 바른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자신을 포함해서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잘못된’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 가정하면서 말한다. 중요한 것은 복음의 내용이고, 바른 복음은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사실을 바울은 이어지는 말씀에서 분명히 말한다.

1:11–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12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바울 자신이 전했기 때문에 그 복음이 바른 복음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전해주신 것이기 때문에 그 복음이 바른 복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만 바른 복음을 전했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베드로, 요한 등의 사도들을 통해서도 복음을 전해주셨고, 그 모든 말씀들이 성경으로 기록되어 우리에게까지 전해졌다. 그래서 만약 바울 자신이라고 해도 이미 전해진 복음과 다른 내용의 복음을 전한다면 저주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복음의 근원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 사실로 인해 우리는 경각심을 가지고 항상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내가 옳다’는 생각을 기본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옳고 그름의 기준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에서 내가 벗어나지 않았는지 끊임없이 점검해야 한다. ‘나는 괜찮아. 저 목사님은 괜찮아. 우리 교회는 괜찮아’라는 생각은 긍정적인 태도로서는 좋을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베뢰아 사람들처럼 냉철하게 성경이 정말로 그렇게 말하는지 계속 점검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느 순간 사람의 전통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착각하게 될 수 있다. 사람의 권위를 하나님의 권위로 착각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을 위해 싸우는 것이지, 단지 전통이나 사람의 명예를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다.

둘째, 이 믿음의 도는 ‘단번에’ 주어졌다. 이는 믿음의 최종성과 절대성에 대한 표현이다. 수정할 필요가 없고 수정되어서도 안되는 최종적인 내용이 주어진 것이다. 히브리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마지막(최종적) 계시이심을 분명히 말한다.

1:1–2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

예수님 이전에도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셨다. 여러 방법으로 말씀하셨다. 하지만 아들 예수님을 통하여 최종적으로 말씀하셨다. 이 말은 더 이상 예전처럼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지 않으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따라서 오늘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셨다면서 하는 말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은 이미 말씀하셨고, 더 이상의 새로운 계시는 없다. 그래서 사도 요한도 요한계시록을 마무리 하면서 이렇게 분명하게 선언했다.

22:18–19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19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우리가 성경을 통해 믿는 바는 절대적이고 최종적이기 때문에 유일한 믿음이다. 이 믿음을 단 하나의 믿음이 아닌 여러 믿음 중 하나로 만들면 그것이 곧 거짓이고 배교다.

요한이 말한 것처럼, 최종적이고 절대적이어서 유일한 복음을 여러 복음 중 하나로 만드는 공격은 크게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더하는 것이고 하나는 빼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을 보면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뺐다. 베드로후서 3장을 보면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강림’을 뺐다. 요한일서에서는 예수님의 ‘성육신’을 뺀 사람들이 등장한다.

빼는 것보다 조금 더 교묘한 것은 더하는 것이다. 빼는 것은 쉽게 드러나지만, 더하는 것은 그렇지 않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부인하지는 않는데 우리 세대에 이루어질 일은 아니라고 그럴 듯한 이유를 들어 주장하면, 그럴 듯하게 들릴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어느새 그렇다는 생각으로 바뀐다. 더해진 생각들은 대부분 우리 입장에서 받아들이기 좋은 것들이기 때문에 그렇다.

갈라디아 교회에 있었던 일이 그런 일이다. 그들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다는 바른 복음을 들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거짓 복음이 들어왔다. 그들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 전에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이방인은 먼저 유대교로 개종하여 유대인이 되어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이런 주장이 별로 설득력있게 들리지 않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 없이 믿음 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 더 비현실적으로 들렸을 것이다. 바울의 이 말을 들어보라.

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즉, 바울이 전했던 복음은 사람들이 좋아했던 복음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바울은 좀 더 노골적으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5:11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할례를 전하지 않은 것, 즉 율법을 복음에서 제외한 것 때문에 바울은 박해를 받았고, 사람들은 그것 때문에 오히려 십자가의 복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워 했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 할례를 전하는 사람들의 말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조상 대대로 중요하게 생각해 왔던 율법을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은 것 같았을 것이다. 바울이 전한 복음보다 훨씬 더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복음은 다른 복음이기에 틀린 복음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 3:1)라며 탄식할 수 밖에 없었다.

오늘날은 어떨까? 같은 일이 진행되고 있다.

가톨릭은 공식적으로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만 동시에 전통의 권위도 인정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지만 동시에 선한 행위로 그것을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예수님께 기도할 뿐 아니라 마리아에게도 기도한다. 지옥을 부정하지 않지만 연옥을 추가한다.

개신교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교회 밖에서 시작된 진리에 대한 공격이 어느새 교회 안에 수용되어 자리 잡고 있다. 성경에 진화론을 더한 유신 진화론이 대세가 되어 가고 있다. 심리학의 영향으로 회개해야 할 죄는 이해해야 할 병으로 바뀌었다. 상대주의의 영향으로 나는 이렇게 믿지만 네가 그렇게 믿는 것도 괜찮다는 진리에 대한 관용주의가 퍼져가고 있다. 성경이 죄라고 말하는 동성애가 있고 그렇지 않은 동성애가 있다고 말한다. 믿으면 건강해 지고 물질적 풍요를 누리게 된다는 것도 하나님의 약속으로 더해졌다. 지옥과 심판이 복음에서 빠지기도 한다. 예수님이 삶의 주인이시라는 진리도 점점 희미해져 간다.

이 모든 더하기 빼기의 중심에는 결국 사람이 있다. 완성된 믿음의 도에서 사람들이 듣기 좋은 것들은 추가되고,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것들은 제외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싸움은 어려운 싸움이기도 하다. 다수의 지지를 받는 것은 결국 사람을 좋게 하는 믿음이지 하나님을 좋게 하는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이 싸움을 싸워야 한다. 이 싸움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싸움이고, 하나님께서 주신 진리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해 싸워야만 한다.

싸움의 대상(4절)

4절에서 유다는 이제 자신이 그런 강한 부담을 느꼈던 이유를 말한다.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 사람이 있었다. 표현을 보면 이들은 아마 순회 설교자들이었던 것 같다. 요한이서를 보면 사도 요한이 특별히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주의할 것을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요이 10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하지만 반대로 요한삼서에서는 바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영접하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교회는 분별력을 가지고 참된 복음의 일꾼과 거짓 복음의 일꾼을 구분해야 했던 것이다. 유다는 지금 교회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보게 된 것이다.

이들은 “가만히” 들어왔다. 몰래 들어온 것이다. 악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지만, 사람들이 알 수 없게 교회 안에 숨어 들어왔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거짓이 교회 안에 들어오는 모습과 동일하다. 이들을 분별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이들은 표면적으로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거나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빼기와 더하기를 교묘하게 한다. 그러면서 일견 의미 있는 주장을 한다. 사람들이 듣기 좋은 말을 한다. 효과가 있을 것 같은 말을 한다. 마치 기업이 마케팅을 하는 것처럼 교회를 운영하게 하면서, 그것이 문턱을 낮춰서 사람들을 교회로 오게 하여 복음을 전하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전도를 싫어할 교회가 어디있는가!) 예배 시간은 하나의 쇼 프로그램처럼 진행된다. 죄나 심판 같은 부정적인 얘기는 최대한 하지 말고, 긍정적인 얘기만 해야 한다고 한다. 지옥 같은 얘기는 예전에 못살 때나 먹히던 방법이지, 이제는 그런 식으로 복음을 전하면 안된다고 한다. 교회는 모이기 보다 흩어져서 다양한 활동을 해야 한다고 한다.

실제로 많은 교회들이 이런 방식을 따라 성장했다(대형 교회들). 하지만 그 성장은 숫자가 늘어난 것이지 정말로 복음이 확장된 것은 아닌 경우가 많다. 복음을 전하기 위한 그런 노력들이 모두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안에 교묘한 거짓이 숨어 있을 수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전하는 복음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본래 의미를 잃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원래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다. 그렇지 않은 복음을 전하고 있다면 잘못된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유다는 교회가 분별력을 가지고 영접하지 말았어야 하는 사람들을 영접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이들은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가라지와 같았다(마 13:24-30). 농부는 좋은 씨를 밭에 뿌렸지만, 밤에 잘 때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뿌렸다. 아무도 알지 못했다. 싹이 나고 자라서 결실할 때까지도 알지 못했다. 이런 일이 교회에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에 대한 경고의 말씀은 예수님부터 사도들까지 반복적으로 주어졌다.

7: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20:29–30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30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딤전 4:1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벧후 2:1 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거짓의 공격은 어느 시대에 한정된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 놀랄 필요는 없다. 대비해야 할 뿐이다. 오늘날의 우리도 듣는 것, 보는 것, 읽는 것 등 모든 면에서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

유다는 이들에 대해서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라고 표현한다. 이에 대해서는 5절 이후의 말씀에서 잘 설명해준다. 성경은 이들에 대해서 경고했을 뿐 아니라 이들에게 정해진 판결에 대해서도 이미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간단히 말하면 이들은 하나님께 정죄를 받아 심판에 이르게 된다.

문제는 단순히 이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 몇 명 있다는 데 있지 않다. 그들의 가르침과 삶이 실제로 교회에 영향을 준다는 데 있다. 20-23절을 보면 유다는 성도들을 권면하면서 자신을 지키라고도 하고,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고도 한다. 그리고 어떤 자는 불에서 끌어내라고 한다. 또 어떤 자는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지만 그 육체로 더럽힌 옷까지도 미워하라고 한다. 성도들 가운데 “가만히 들어온 사람”에게 그리고 그들의 가르침과 삶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따르면 결국 그들과 같은 판결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유다는 이 편지를 쓸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제 유다는 이들의 특징을 말한다. 믿음의 도를 위한 싸움이기 때문에 그들이 믿는 바의 잘못을 세세하게 드러내서 반박할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다. 유다는 그들의 분명한 삶의 특징을 말한다. 그들의 말보다는 그들의 삶이 그들이 누구인지를 더 확실히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들은 경건하지 않은 자들이다. 여기서 말하는 경건하지 않다는 것은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는다, 경외하지 않는다, 경의를 표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 표현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사용할 수 있는 표현이다. 이들은 종교인일 수 있고, 하나님에 대해서, 성경에 대해서 좋은 말을 할 수도 있지만, 실상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 아닌 것이다.

당연히 교회의 모임 안에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사람들’, 즉 불신자들이 있다. 유다는 지금 그런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불신자를 “가만히 들어온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믿음에 대해서 알고 있으면서, 그 믿음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자들이다. 거짓 교사들이고 배교자들이다.

유다가 언급한 이들의 특징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는 이용하고 하나님의 권위는 부인하는 자들이다.

먼저,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이용한다: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바울은 율법의 행위가 아닌 은혜로 얻는 구원에 대해서 역설한 후에 로마서 6:1에서 이렇게 물었다.

6: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이에 대한 합당한 답은 “그럴 수 없느니라”(롬 6:2)다. 그런데, 이 거짓교사들은 “그렇습니다”라고 답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가장 큰 죄를 덮고도 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나아올 때 죄를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죄를 지었으면 죄를 지은 그대로 나오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있는 모습 그대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율법에서 자유합니다. 그러니까,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한다고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복음입니다.”

이들의 말에 누군가는 “그래도 죄를 지으면 안되는 것 아닌가요?”라며 반문했을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이렇게 답했을 것이다. “죄를 안짓는 사람 있나요? 어차피 우리는 죄를 짓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죄보다 크다는 것이고, 하나님은 어떤 죄든 용서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죄인지 아닌지에 너무 신경쓰지 말고, 자유를 누리면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쁨의 삶입니다.”

어떤가? 약간의 꺼림직함은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일리있는 말로 들릴 것이다. 특히, 항상 율법에 눌려 있던 자들에게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이 없을 것이다. 이들은 음행을 저지르고 온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며 용서하신다고 힘을 주었을 것이다.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에게 그 사람이 미움 받을 만한 일을 했으니 미운 마음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 그 마음은 하나님께서 용서하실 것이라고 위로했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죄를 범할수록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다 모든 죄를 정당화 했을 것이다. 그렇게 마음껏 죄를 지을 수 있는 면허를 주었다. 앞서 말한 더하기 빼기 중 더하기에 해당된다.

말도 안되는 궤변 같지만, 오늘날 가톨릭의 고해 성사나 개신교의 회개 기도를 사람들은 비슷하게 사용한다. ‘회개하면 되니까’라면서 지금의 죄를 정당화 하는 것이다. 그렇게 교회에 와서 눈물을 쏟지만 그것은 순간의 감정일 뿐 진정한 회개로 이어지지 않는다.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하지만, 그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신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자기가 편한대로만 이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더 방탕한 삶을 사는 것이다.

모든 면에서 이렇게 하지 않더라도, 일부의 죄에 대해서 이렇게 할 수도 있다. 유명한 목회자들이 그런 식으로 무너졌다. 다른 면에 있어서는 그러지 않았지만, 자신이 정말로 즐기고 싶은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방탕한 것으로 바꾼 것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은혜에 대한 심각한 오해다. 바울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할 수 없다고 하면서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2)라고 다시 반문한다. 애초에 그런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순간순간 죄를 범할 수는 있지만, 죄를 당연시 하면서 죄 가운데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요한도 동일한 원리를 말했다.

요일 1: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빛이신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사람이 어둠을 당연하게 여기고 그 가운데서 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요한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요일 3:8–9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9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바로 마귀의 일을 멸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은 사람은 그 마귀의 일, 죄를 짓는 일을 계속해서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법적으로 죄와 우리를 상관 없다고 선포할 뿐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죄에서 우리를 멀어지게 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를 죄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한다면, 그는 참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이 아닌 것이다.

둘째, 경건하지 않은 자들은 하나님의 권위를 부인한다: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먼저 언급했던 특징, 하나님의 은혜를 이용한다와 맥락을 같이 하는 특징이다. 거짓 교사는 예수님이 유일한 주재, 주인이심을 부인한다.

오늘날은 개인의 인권(권리)이 가장 침해 받을 수 없는 권리로 여겨져서, 누가 누구 위에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개념 자체가 이해하기 힘든 개념이다. 하지만, 이 편지가 기록될 때의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여러 종류의 “주인들”이 있었고, 그 주인의 권위 아래 있는 자들은 주인에게 복종해야 했다. 남편이 주인이었고, 부모가 주인이었고, 통치자가 주인이었다. 그 중에서도 황제는 가장 높은 권위를 가진 자로서 가장 높은 ‘주인’이었다.

하지만, 구원 받은 자는 그 가장 높은 주인이 바뀐 사람들이다. 바로 예수님이 주인이 되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 때문에 아내는 남편에서 순종해야 했고, 예수님 때문에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했다. 같은 이유로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고 주의 교훈으로 양육해야 했다.

이 원리는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날도 동일하다. 내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가 내 삶의 주인이 되시는 것, 그것이 우리 믿음의 핵심에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로 하여금 이 땅을 다스리게 하셨다. 하지만 사람이 ‘절대 왕’이 된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왕을 대리할 수 있는 권한을 주신 것 뿐이었다. 그것을 상기시켰던 것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원하는대로 먹을 수 있었던 사람은 그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없었는데, 이유는 단 하나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이를 통해 사람은 자신이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 왕이심을 늘 생각해야 했다.

하지만 그 열매를 먹음으로 사람은 스스로 왕이 되었다. 아무도 그 아래 복종하지 않고 복종 시키려고만 하는 혼자만의 왕이 되었다. 좋게 말해 왕이지, 하나님의 왕국에서 반역을 일으킨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를 하나님의 ‘원수’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렇게 원수된 우리를 예수님께서 구원하신 것이다. 그래서 다시 왕이신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신 것이다.

1:13–14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즉, 예수님은 믿는 자의 죄를 속하신 구원자이기도 하시면서 그들의 왕이시기도 하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부르는 성도들의 가장 일반적인 표현이 “주님”이다. 4절에서 유다도 예수님을 “우리 주”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당연한 믿음을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온 거짓 교사들은 쉽게 무너뜨릴 수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빼기는 쉽게 분별되는 것이 아니었나? 놀랍지 않게도 사람들은 여전히 주인이 되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듣고 싶은 말을 듣기 위해서 온전한 믿음에서 빼기를 해도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것이 꼭 옳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게 더 낫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알리스터 벡은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 말씀의 진리 앞에 섰을 때, 나는 그 말씀 아래 엎드려 ‘예수님은 나의 주재이시며, 나의 주님이시고, 나의 왕이십니다. 저에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든지, 아니면 어떻게든 말씀을 재구성 해야 한다. 누군가 나에게 ‘아니요, 이건 아무 문제 없어요’라고 말해줄 곳을 찾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말해 주는 사람이 가까운 친구여도 좋지만, 유명한 목사님, 설교자, 저자, 신학자, 전문가면 더 좋을 것이다. 더 믿음이 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성경의 진리가 아니라 그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진리처럼 보이는 거짓이다. 그리고 그 위에 지어진 내 삶은 무너져 내릴 수 밖에 없다.

결국 거짓은 말이 아니라 삶으로 드러날 것이다.

1:16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거짓 교사들의 이론은 계속해서 달라지겠지만, 결국은 삶이 드러낼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싸워야할 대상을 드러낼 것이다. 교회는 바로 그들과 그들이 전파하는 거짓을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 힘써 싸워야 한다.

도전

우리가 믿음을 위하여 싸워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켜야 할 믿음을 주셨고, 대적들은 이 믿음을 무너뜨리기 위해 공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와 사람의 거짓이 싸우는 진리 전쟁의 한 가운데 있다. 이것은 언젠가는 끝날 전쟁이고 성도는 분명 승리할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 이 전쟁은 쉬지 않는다. 휴전도 없고 정전도 없다. 우리 대적은 절대 쉴 생각이 없다. 우리도 쉬어서는 안된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한 가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거짓은 결국 삶으로 드러난다고 했다. 그렇다면 진리는 어떨까? 진리도 결국은 삶으로 드러난다. 어떤 삶으로 드러날까? 하나님의 은혜를 방탕한 것으로 바꾸지 않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더 거룩한 삶을 추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언제나 삶의 주인으로 모시는 그 삶을 통해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내 삶을 이런 관점에서 점검해 봐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진리의 말씀 앞에 나는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다르게 말하면 주재이며 우리 주이신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나는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말씀 앞에 경외함으로 엎드리고 있는가, 아니면 말씀을 내가 원하는대로 바꾸고 있는가? 이 싸움은 내 안에서 먼저 시작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나는 지금 진리를 전파하고 있는지, 아니면 거짓을 전파하고 있는지. 진리를 위해 싸우고 있는지, 아니면 진리를 공격하고 있는지 점검해 봐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잘 싸우고 있으니까 괜찮을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한다. 작은 틈이 큰 댐을 무너뜨리듯, 교회도 그렇게 무너진다. 하나님의 교회로서, 하나님께서 주신 이 믿음을 위해 함께 힘써 싸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