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교회여, 힘써 싸우라(1)

본문: 유다서 1:1-4

설교자: 최종혁

성경이 말하는 참된 복음을 듣고 구원 받은 자들은 그 복음을 전할 뿐 아니라 복음을 위해 싸운다. 그렇게 복음은 계속해서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그리고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전수되었고 영혼들이 구원 받는 역사가 일어났다. 유평 지역에도 그 오래된 복음의 역사를 따라 60여년 전에 복음이 전파되었고, 지금은 유평 교회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위해 싸우고 있다.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을 위한 싸움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특히나 시간이 갈수록 이 싸움은 더 치열하고 교묘하기도 하기 때문에 그렇다. 알지 못하고 깨어있지 않으면, 우리의 복음은 어느 순간 그 힘을 잃게 된다. 하나님은 복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이 복음을 전하고 지킬 사명도 주셨다. 각 개인이, 그리고 교회가 함께 이 사명을 다해야 한다. 유다서를 통해서 특히 우리는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복음을 위한 싸움에 대해서 살펴보게 될 것이다.

먼저 3절 말씀을 보면, 유다는 이 편지를 기록하게된 동기와 목적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3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유다는 본래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대한 편지를 쓰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더 큰 필요를 느꼈다. 바로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에 대한 필요다. 사실 “힘써 싸우라”는 명령은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마 5:9)라는 예수님의 말씀이나,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 12:18)는 분명한 성경의 명령에 대치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지는 않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싸우고 싶어 하는 사람이 아니라 화평을 추구해야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싸움 자체를 즐기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싸워야할 것을 분명히 명령한다. 이 싸움을 거부하는 것은 마치 전쟁에서 아군들이 싸울 때 뒤로 물러서거나 혹은 탈영하는 것과 같다. 교회는 싸워야할 싸움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모호한 영역도 있다. 여기에서 평화주의자들과 전쟁주의자들이 싸운다. 평화주의자들은 그 영역에서 싸우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을 사랑 없는 싸움꾼이라고 비난한다. 반대로 전쟁주의자들은 그 영역에서 싸우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거짓과 타협한 배신자들이라고 비난한다. 사실 이런 싸움이 우리가 빨리 멈춰야할 싸움이다. 하지 말아야할 싸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다서가 다루고 있는 것은 우리 모두가 반드시 싸워야할 싸움이다. 우리 각자가 싸워야할 싸움이고 또한 함께 싸워야할 싸움이다. 교회 안에 들어와서 교회를 무너뜨리는 거짓과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이 싸움 자체보다는 싸움을 해야 하는 당사자인 교회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한다. 앞으로 주로 다루게 될 싸움은 흔히 ‘성도의 견인’이라고 말하는 교리와 연결되어 있다. 즉, 우리가 견고한 인내(싸움)로 믿음을 지켜가는 것에 대해서 말한다. 오늘 말씀은 그 다른 면에 있는 진리와 연결되어 있다. 바로 ‘구원의 안전성’이다. 우리 측면이 아닌 하나님 측면에서 믿음을 지키는 것에 대한 말씀이다. 편지의 서론에서 우리는 교회 혹은 성도를 정의하는 4가지 표현을 보게 되는데, 이 표현들이 바로 우리의 영원히 안전한 구원에 대해서 말해준다. 하나씩 살펴보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다

유다는 먼저 여느 다른 편지처럼 편지를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밝힌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부르심을 받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

특이한 점은 받는 사람이 언급되기는 하는데 특정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가 ‘일반서신’이라고 부르는 책들의 특징이다. 일반 서신은 어떤 지역의 교회나 개인을 편지를 받는 대상으로 특정하여 언급하지 않는 특징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반 서신에서는 어떤 특정 대상이나 상황이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편지를 쓰는 사람은 편지를 받는 대상을 생각했겠지만, 편지에서는 그 대상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일반 서신은 우리에게 좀 더 적용하기 쉬운 면이 있다. 모든 성경이 우리를 위한 것이지만,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기록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해석과 적용에 있어 더 유의해야할 부분들이 많은데, 일반 서신은 그런 면에서는 우리에게 조금 더 쉬운 면이 있다.

저자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라고 밝힌다(1절). 앞 부분은 익숙하지만, 뒷 부분은 좀 흥미롭게 들린다. 왜 자기 형제의 이름을 밝힐까? ‘유다’라는 이름은 당시 매우 흔한 이름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구분을 하려고 했다면, 형제의 이름이 아닌 아버지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이 당시에는 일반적이었다. 누구의 아들 유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조차 여의치 않으면 출신 지역명을 사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유다는 자기 형제인 야고보를 언급했다.

생각해 볼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이유는 야고보가 유명하기 때문일 것이다. 야고보도 특이한 이름은 아니었지만, 교회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 사람들이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가 있었다(갈 2:9). 복음서에 자주 등장하는 야고보는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일찍 순교했다. 교회가 시작되었던 예루살렘에서 베드로와 함께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기둥 같이 여겨졌던) 사람은 바로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인 야고보였고, 이 야고보가 야고보서를 기록한 야고보다. 즉 누구나 알만한 야고보를 언급함으로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했다고 할 수 있다. 유다서를 기록한 유다는 야고보의 형제이면서 또한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인 유다였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익숙했던 표현인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조금 다르게 들릴 것이다. 어차피 예수님을 언급할 것이었으면 그냥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 유다’라고 했어도 되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러면 자신을 특정할 수도 있고, 자기 말의 권위도 확실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야고보를 통해 자신을 특정했고, 예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자신을 “종”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이 편지의 육신적 권위가 아닌 영적인 권위를 분명히 했다. 그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의 형제로서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그 주인인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를 가지고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다.

유다는 예수님의 다른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요 7:5). 생각해 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면도 있다. 자신들과 함께 놀면서 자란 형제가 어느날 갑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하면서 달라진 모습을 보이면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형제들에게 전환점이 되었던 것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의 승천 후 오순절 전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이 다락방에 모여 있었을 때, 예수님의 형제들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의 형제들도 예수님을 주로 알게 된 것이고, 그 후로는 더 이상 그들이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라는 사실은 무의미해졌다. 그래서 야고보도 그의 서신에서 자신을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라고 소개하는 것을 볼 수 있다(약 1:1). 야고보와 유다는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로서 함께 자란 특권을 누렸지만, 그것이 그들에게 어떤 특별한 영적 권위나 지위를 부여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시인했을 때 모든 것이 달라졌다. 유다는 예수님의 종으로서 그분이 주신 권위를 가지고 이 말씀을 기록했다.

뒤에서 보게 되겠지만, 이것은 거짓 교사들과는 확연하게 드러나는 차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주되심을 부인했다(4절). 하지만 유다는 예수님이 주인이시고 자신은 종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어떤 면에서 유다는 자신이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임을 자랑 삼아 자신을 높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너희들에게는 ‘주’일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그냥 좋은 ‘형’이었다는 식으로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너희는 못들었겠지만 예수 형이 이런 저런 얘기도 했었다는 식으로 다른 사람들을 속이거나 자신의 권위를 높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유명인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은근슬쩍 자신을 높이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유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과 예수님의 관계를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 가족이라는 사실은 그의 영적인 상태에 대해서 아무 것도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아마 유다도 함께)이 예수님을 찾아왔던 적이 있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예수님께 알렸다. 예수님께 가족이 당연히 우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둘러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는 자들을 보시면서 이들이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막 3:34)이라고 말씀하셨다. 단순히 그들이 지금 예수님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덧붙여 말씀하셨다.

3: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당시 유다의 입장에서 예수님의 이 말씀은 꽤나 서운하게 들렸을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진짜 구원자 예수님을 만났을 때는 이 말씀의 정확한 의미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가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라는 사실은 ‘특권’일 수는 있었지만, 그 자체가 그의 구원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요한이 기록한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지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나는 것이 아니다(요 1:12-13). 예수님께서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는 자는 육신의 형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 죽으심으로 거룩하게 하신 영적인 형제다(히 2:11). 예수님의 말씀처럼, 유다가 예수님을 믿고 주로 삼았을 때, 그는 진정한 예수님의 형제가 되었다. 다른 모든 구원 받은 자들과 같은 특권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가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였다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특권이었다.

이런 이유로 유다가 자신을 소개하기 위해 선택한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었다. 그는 예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자신을 바로 보고 있었고, 이 표현을 통해 그의 말이 단순히 권면의 말이거나 혹은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로서 인간적으로 가지고 있는 어떤 권위로 하는 말이 아니라, 그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주신 권위로 하는 말임을 분명하게 했다.

유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종들인 교회(우리)에게 이 편지를 썼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 피로 사신 교회로서 이 편지를 읽고 있다. 따라서 이 말씀을 우리는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이 말씀에 대해서 쉽게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면도 생각해야 합니다”, “제 생각은 다릅니다”라는 식으로 반응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나중에 보겠지만, 그것이 곧 거짓 교사들의 반응이었고, 그들은 그리스도의 종인 교회가 그렇게 그리스도에게 반응해도 괜찮다고 주장했다.

특별히 4절을 보라: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하나님의 은혜를 자신이 유리한 대로 사용한 것이다. 종들은 이렇게 할 수 없다. 예수님의 교회는 유다서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무거운 명령으로 받아야 한다. “힘써 싸우라”는 명령은 주인이 내린 소집령인 것이다.

아마 유다도 이어지는 말씀이 부담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앞서 읽었던 것처럼 사실 그는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3절) 편지를 쓰려고 했었다. 아마 성도들을 격려하고 힘을 주는 내용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어떤 상황으로 인해서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3절)는 내용의 편지를 써야 할 필요를 강하게 느꼈다. 성도들에게는 훨씬 더 부담이 되는 내용의 편지를 쓰게 된 것이다.

그래서 유다는 편지를 받을 대상을 생각하면서, 먼저는 그들에게 확신을 주고자 했다. 힘써 싸우는 것은 분명 쉽지는 않은 일이지만, 이것이 모두가 해야할 일이고 또한 할 수 있는 일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 확신의 근거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유다는 이 편지를 받을 대상을 생각하면서 그들에 대해서 3가지 수식어를 사용했다(1절). 그들은 (1) 부르심을 받은 자였고 (2)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은 자였고 (3)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이었다. 유다의 특징 중 하나는 이렇게 세 가지를 언급하기 좋아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세 개가 한 쌍을 이루는 것을 자주 보게 될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유다는 어느 특정 지역의 교회나 개인을 여기서 언급하지 않는다. 지금 여기서 사용한 3가지 수식어도 모든 성도에게 공통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수식어다. 우리에게 해당되는 표현인 것이다.

우리는 부르심을 받은 자다

먼저 유다는 성도들을 부르심을 받은 자라고 표현한다. 성경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부르시는 장면을 자주 본다. 하나님은 특별한 목적을 위해 사람을 부르셨다. 노아를 부르셨고 아브라함을 부르셨다. 모세를 부르셨고 많은 선지자들을 부르셨다. 신약에 와서는 우리가 지난 주일 마가복음에서 봤던 것처럼 제자들을 부르셨다. 후에 따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던 바울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유다가 말하는 부르심은 그런 사명이나 직무로의 부르심이 아닌 구원으로의 부르심이다.

성경을 보면 이런 구원으로의 부르심에 두 종류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일반적인 부르심이고, 다른 하나는 특별한 부르심이다. 일반적인 부르심은 외적인 부르심, 특별한 부르심은 내적인 부르심이라고도 한다.

예수님은 혼인 잔치의 비유 끝에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4)는 말씀으로 이 두 종류의 부르심의 차이를 언급하셨다. 비유에서 임금은 자기 아들을 위한 잔치를 베풀고 종들을 보내서 미리 청한 사람들에게 오라고 했지만, 미리 청함 받은 사람들은 모두 오기를 거절했다. 주인은 그들은 잔치에 합당하지 않다며, 종들에게 네거리 길에 가서 만나는 대로 사람들을 청하여 데려올 것을 명했다. 그렇게 해서 잔치에는 손님이 가득하게 되었다. 이 비유에서 청함을 받은 사람은 일반적인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고, 실제로 잔치에 온 사람이 특별한 부르심, 즉 택함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런 차이는 예수님의 생애 내내 보여진다. 예수님의 말씀을 똑같이 듣고, 예수님께서 행하신 능력을 똑같이 경험했지만,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거절했고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영접했다. 이것은 우리 측면에서만 보면 개인의 선택으로 보이지만, 더 높은 차원에서 보면 하나님의 선택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10:26–27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27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목자의 부르는 소리는 모든 양들에게 들린다. 하지만 그 부름에 응답하여 목자를 따르는 양은 그 목자의 양 뿐이다. 예수님은 이런 목자와 양의 모습을 통해 일반적인 부르심과 특별한 부르심의 차이를 말씀하신 것이다.

이런 차이는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도 분명히 드러났다. 대표적으로 빌립보에서 루디아가 구원받을 때의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했다.

16:13–14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 14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여자들이 동일하게 들었지만, 하나님은 그 중에서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그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루디아를 특별히 부르신 것이다. 이것이 유다가 말하는 “부르심”이다. 하나님께서 루디아를 부르셨을 때, 루디아는 믿음으로 반응했다.

루디아만 그런 것이 아니라 구원 받은 사람은 모두 이런 경험을 한다. 하나님은 전하는 자를 통해 복음을 전하신다. 그리고 그렇게 전해진 복음을 들은 자들 중 누군가의 마음 속에서 그를 개인적으로 부르신다.

이 부르심은 실제로 귀에 들리는 소리는 아니다. 그래서 듣지 못한 자들은 이해할 수 없는 부르심이다. 하지만 이 부르심에 응답한 자들은 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항상 듣던 복음이 새롭게 들리는 그 경험이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말에 내가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는 그 경험이다. 예수님을 그냥 과거의 어떤 인물이 아니라, 도마처럼 ‘나의’ 주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게 되는 그 경험이다. ‘믿었다’는 표현보다 ‘믿어졌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그런 경험이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믿었습니다”라는 간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저를 이렇게 구원하셨습니다”라는 간증을 할 수 밖에 없는 그런 경험이다.

이것은 단지 성경의 어떤 사실을 알게 되는 것과는 다르다. 하나님께서 부르셨고, 나는 기쁜 마음으로 “네!”라고 답했다. 그리고, 그 후로 나의 삶은 전과 같지 않게 되었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그 마음이 다르다. 심지어 같은 죄를 범해도 그 마음이 다르다.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 차이를 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이고, 이런 부르심을 통해 우리는 구원을 받는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사실이다. 사람이 복음을 선포하고 그것을 통해 영혼이 구원을 받지만, 이것은 사람의 부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르심’은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음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어떤 전도의 비결 같은 것을 소개하는 책들이 많고, 그런 것들이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우리가 어떤 특정한 방식을 통해 구원 받는 사람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 즉,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면 듣는 사람은 무조건 믿고 구원을 받게 된다고 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런 것이 있으면 좋겠지만, 불가능하다. 구원의 원리가 그렇다. 그래서 똑같이 복음을 전해도 누군가는 이런 특별한 부르심을 경험하고 누군가는 그렇지 않다. 때로는 의아하고 때로는 놀랍지만, 그것을 통해 우리가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구원은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일반적인 부르심에 충성하는 것, 즉 신실하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전도는 그런 면에서 숭고한 일이다. 우리의 지상사명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이상을 생각해서는 안된다. 구원은 복음 전하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복음을 전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전해진 복음을 통해 영혼을 구원하는 일은 오직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이 사실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도, 그리고 복음을 듣고 구원 받은 사람에게도 변하지 않는 확신을 준다. 특별히 부르심을 받은 자라면 구원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실 것임을 확신할 수 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라고 말했다. 빌립보 성도들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살전 5:24)라고 확언했다.

교회는 부르심을 받은 자들로서 최선을 다해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야 한다. 그 믿음을 지켜야 한다. 믿음을 위해 싸워야 한다. 이어지는 유다서의 말씀은 이 사실을 계속 강조한다. 하지만, 그 모든 것에 앞서 교회인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를 부르신 이는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반드시 그 부르심을 끝까지 이루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특히, 이 싸움이 힘들다고 느껴질 때, 더 이상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될 때, 이 확신을 붙들고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신다.

1절의 이어지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는 사실이 왜 확신이 되어야 하는지를 두 측면에서 강조한다. 첫째는 하나님의 부르심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부르심은 하나님의 보호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을 얻은 자다

먼저, 성도가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은 성도가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유다는 독자들을 부를 때 계속해서 “사랑하는 자들”(3, 17, 20절)이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이 사실을 강조하기도 한다.

앞서 ‘부르심’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그것이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신 것, 즉 예정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맞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구원하기로 예정하시고, 그렇게 예정한 자들을 때가 되었을 때 부르신다. 누군가에게는 이런 하나님의 예정과 부르심이 좀 차갑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성경은 그 모든 것의 동기가 하나님의 ‘사랑’임을 강조한다.

1:7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

1:4–5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은 사랑하셔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부르셨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회개와 믿음보다 앞선다.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먼저 무언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품거나 선한 일을 해서 우리를 사랑하기로 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인이었을 때 예수님을 통하여 자기 사랑을 확증하셨다. 이미 가지고 계셨던 사랑을 그때 나타내 보여주셨다는 의미다.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다. 그래서 요한일서에서 요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음을 강조하면서 그 사랑에 감탄한다.

요일 3: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

구원 받은 자들은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유다는 우리가 하나님에게 사랑을 받았다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사랑을 받았다고 말한다(1절). 우리가 하나님에게 사랑을 받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유다가 강조하는 것은 사랑의 ‘영역’ 혹은 ‘공간’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 안에 두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17: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17:23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17: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교회는 단순히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 안에 두시고 사랑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을 사랑하신 것 같은 그 사랑으로 우리도 사랑하신다.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이 말이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부모가 자기 자녀를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생각해 보라. 부모는 자기 자녀를 옆집 아이를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지 않는다. 다른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지 않는다. 부모는 자녀를 자기의 일부인 것처럼 사랑한다. 자기 안에 두고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 아무리 자녀가 세상의 질타를 받는 악한 일을 저질렀다고 해도, 부모는 여전히 자기 자녀를 사랑한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사랑을 얻었다는 말도 이와 같다. 하나님은 그냥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 안에 두시고 사랑하신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그 영원한 사랑의 관계 안으로 우리를 부르셨고, 우리는 절대로 그 사랑 밖으로 나갈 수 없다.

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하나님의 부르심은 사랑의 부르심이고, 사랑으로의 부르심이다. 이 사랑은 영원한 사랑이기에 멈추지 않는다. 무한한 사랑이기에 다하지 않는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라고 하여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 중 하나가 사랑임을 밝혔다. 사랑이 없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사랑을 얻었다는 말은 우리가 영원히 그 안에서 안전하다는 의미다. 이것이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다. 우리가 어떤 싸움을 하고, 그 싸움에서 쓰러지고 넘어질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 안에서 사랑을 얻은 자다.

우리는 지키심을 받은 자다

다음으로 성도가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은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끝까지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것이다.

전쟁을 사실적으로 잘 그려낸 영화를 보면, 전쟁을 앞둔 병사들의 마음에 동화가 될 때가 있다. 특히 승산이 없는 싸움인 것을 알면서도 싸워야 하는 병사들을 보면 그 두려움이 어떨까 상상해 보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지휘관들은 병사들의 사기를 올리기 위한 연설을 한다. 이 싸움이 왜 필요한지, 결국 이 싸움을 통해 무엇을 얻게 될 것인지를 강력하게 호소한다. 너의 조국을 생각해라. 너의 부모와 아내와 자녀를 생각하라와 같은 말을 한다. 그렇게 해서 두려움을 이기고 싸우게 하려는 것이다.

대부분 영화에서는 그런 연설을 들으면 두려워하던 병사들이 무기를 흔들면서 함성을 지른다. 마치 이미 승리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한다. 영화의 몰입을 위해서 그런 서사를 이해하면서 따라가려고 하기는 하지만, 한쪽에는 항상 꺼림칙한 것이 남아있다. 이것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있다고 해도, 병사의 입장에선 여기서 죽으면 끝인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다. 지휘관이야 전쟁의 승리를 통해 정말로 얻는 것이 있겠지만, 제일 앞에 서 있는 병사는 돌격 하자마자 죽을 운명일 뿐이고, 그에게 남는 것이 있다면 그는 누리지 못할 명예 뿐일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사기가 오른 병사들은 제일 먼저 달려나가서 죽는다. 물론, 그 죽음이 승리의 밑거름이 되기도 하지만, 그 병사들 입장에서는 사실 실제적인 의미가 없는 승리가 될 뿐이다.

하지만, 교회의 싸움은 그렇지 않다. 이 싸움에서 교회는 단 한 사람도 전사하지 않는다. 단 한 사람도 승리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게 되는 일은 없다. 이 싸움이 끝나고 나서 우리는 명예로운 전사자들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리지 않을 것이다. 전사자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지휘관이 우리를 절대적으로 보호할 것이기 때문이다.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10:27–29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28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앞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결코 멈출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안전하다고 했었다. 하나님의 지키심에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멈추지 않는 한, 우리의 부르심(구원)이 안전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능력이 멈추지 않는 한, 우리의 부르심은 안전하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의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모든 일은 의지 만으로 되지는 않는다. 공부를 잘 하겠다는 의지는 중요하지만, 의지만 있다고 공부를 잘 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운동이든, 미술이든, 다른 어떤 분야든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그 부르심을 이루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고 해도, 만약에 능력이 없다면 그렇게 하실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많은 계획이 실패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계획도 실패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의지만 가지신 분이 아니라 절대적인 능력을 가지신 분이시다. 사랑 없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신 것처럼, 능력 없는 하나님도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의 사랑이 달라지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의 능력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제나 계획한 바를 이루신다. 하나님께서 계획을 말씀하시는 것은 결과를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 신부인 교회를 지키신다. 흠 없고 점 없는 온전한 신부로 교회를 지키시고 그 아들에게 주실 것이다.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확실한 일이기 때문에 ‘과거형’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부르신 교회를 온전하게 끝까지 지키신다. 우리가 모두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면 단 한 사람의 낙오자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이 전쟁에서 가질 수 있는 절대적인 확신이다.

도전

정리해 보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주인이신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이 땅에서 힘겨운 싸움을 해야 한다. 이 싸움은 결코 쉬운 싸움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도 자연스럽다. 하지만, 우리는 승리를 확신할 수 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끝까지 지키실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

우리는 넘어질 수 있지만(그리고 그렇게 되겠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일으키실 것이다. 포기하고 싶은 좌절감,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패배감, 혹은 이런 일을 하면 안될 것 같은 자괴감 등 온갖 생각과 감정이 우리를 괴롭히겠지만, 하나님은 그런 우리 마음을 지키시고 강하게 하실 것이다. 우리의 확신은 잘 하고 있는 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약속하신 하나님에게서 온다.

그래서 유다는 2절에서 독자들을 향해 이런 축복의 기도를 한다.

2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믿음을 지키는 우리 삶에 하나님의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필요할 것이다. 많이 필요할 것이다. 승리가 확실한 싸움이라고 해도 이 싸움이 쉬운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싸움에서 우리는 여전히 실패하고 넘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지 않으신다면, 즉, 하나님께서 우리가 행한대로 갚기만 하신다면 정말 견디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시다. 특히 우리가 나 자신도 납득하기 어려운 그런 실패를 경험할 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엄두도 나지 않을 때, 우리가 기억해야할 하나님의 속성이 바로 긍휼이다.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하시다. 하나님께 상한 마음으로 나아오는 자에게 하나님은 긍휼을 베푸신다.

그리고 요동하는 우리 마음에는 하나님의 평강이 필요하다. 우리는 상황에 일희일비한다. 어제는 기쁨과 감사가 충만했다가, 오늘은 불평과 원망이 넘친다. 하나님께 우리 소망을 두지 않으면, 우리는 이런 롤러코스터 같은 신앙에서 벗어날 수 없다.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른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하다. 계속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리고 또 하나,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또한 그렇게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자들임을 알아야 한다. 믿음의 싸움에 몰두하다 보면, 우리는 싸움의 대상을 오해하기 쉽다. 나를 지키기 위해 쳐내기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비록 거짓의 대언자가 된 사람이 있다고 해도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과 평강과 사랑을 그에게도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 이 명령은 22-23절에서 분명한 명령으로 주어지기도 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 먼저는 우리에게 이 기도가 필요한 것이다.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다. 우리는 부르심을 받은 자다.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은 자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다. 복음이 우리를 이런 특권으로 이끌었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복음을 위하여 싸우라고 하신다. 확신 가운데 이 싸움에 동참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