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교회여, 자신을 지키라 (2)

본문: 유다서 1:17-25

설교자: 최종혁

 

1. 경고를 기억하라(17-19절)

2. 사랑 안에 머물라(20-21절)

3. 그들을 긍휼히 여기라(22-23절)

4. 하나님을 의지하라(24-25절)

 

그들을 긍휼히 여기라(22-23절)

이제 유다는 직접적으로 거짓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에 대해서 말한다. 이들은 거짓에 유혹을 받고 있는 사람일 수도 있고, 어느 정도 타협한 사람일 수도 있고, 혹은 적극적으로 거짓을 전하고 있는 사람일 수도 있다. 거짓과 싸워야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들을 미워하고 최대한 피하거나 혹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너뜨리라는 명령이 주어질 것 같다. 하지만, 실제 명령은 그렇지 않다.

22–23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 23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까지도 미워하되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

긍휼히 여기라고 한다(명령). 그래서 구원하라고 한다. 교회는 영생에 이르도록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면서(21절), 이 땅에서는 긍휼을 나타내야 하는 것이다. 비록 적군(혹은 적군처럼 보이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렇게 해야 한다.

영화 등에서 군인에게 적군을 죽이지 말고 생포해 오라는 임무를 줄 때가 있다. 임무를 받은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그냥 죽이는 것이 더 쉬운데, 어떤 이유 때문에(정보, 관계 등) 생포를 해야해서 주인공이 많은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있다.

거짓과 싸우는 우리의 임무가 어떤 면에서는 이와 같다. 사실, 생포보다 더 적절한 표현은 구출이다. 구원이다. 대상이 누구든,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그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 사람이 얼마나 방탕한 삶을 살고 있든, 얼마나 진리를 부정하고 비방하든, 심지어 얼마나 나를 싫어하든 상관없이, 긍휼히 여기고 구원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인 것이다.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마 28:19)는 예수님의 명령은 이 상황에서도 유효한 것이다.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다”(마 5:7)고 하신 말씀,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눅 6:36)고 하신 말씀도 마찬가지로 이 상황에 적용된다. 야고보(유다와 같은 예수님의 또 다른 육신의 형제)는 긍휼을 행하는 것이 믿는 자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라고 분명히 말했다.

2: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따라서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긍휼히 행하는 것이 우리의 기본 태도가 되어야 하고, 이것은 유다서에서 지금까지 말했던 거짓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거짓에 대항하여 싸운다. 조금이라도 거짓을 내 삶에 허용하지 않고 내 주변에 두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거짓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다른 태도가 필요하다. 그들은 긍휼히 여겨야 한다. 그들이 거짓에 속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무찔러야할 대적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우리 싸움의 대상은 거짓의 아비인 사탄과 그에 속한 악한 천사들이다. 이들에게는 회개의 기회가 없다. 하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다. 비록 지금은 다른 편에 서 있더라고 해도 그들이 우리의 궁극적인 적이 아니다. 따라서, 그 사람들을 파멸시키는 것이 목적은 아닌 것이다.

이것이 정확히 죄인인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다.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을 잘 보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그렇지 않은 자는 멸망한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는데, 왜 심판하여 멸망하게 하실까? 사람의 죄 때문이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고 따라서 그 죄를 선택한 죄인을 심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긍휼히 여기신다고 해도 죄를 그냥 용납하지는 않으시는 것이다. 대신, 하나님의 긍휼은 독생자를 주시는 것으로 나타났다. 예수님을 보내셔서 믿는 자들의 죄를 사하시고 그들에게 영생을 주셨다. 죄인에게서 죄를 분리하여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멀리 옮기셨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것이 이것이고, 우리가 바로 이 예수님을 전하는 자들로서 같은 일을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긍휼이다.

이 명령은 교회 안에 있는 ‘싸움꾼’들에게 분명한 선을 제시한다. 싸움꾼들은 때로 싸우기를 즐기면서 이 싸움의 목적을 왜곡한다. 이 싸움은 단순히 거짓과의 논쟁에서 이기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나는 진리를 알고 있다고 자랑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거짓을 믿는 자들을 무너뜨리고 파멸시키는 것이 목적도 아니다. 거짓을 무너뜨리고 사람을 구하는 것이 목적이다.

5:19–20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20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

싸움꾼들은 이 기적같은 일에 기뻐하지 않는다. 애초에 그것이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를 무너뜨리면 또 다른 싸움감을 찾아 나선다. 누군가를 정죄하기 바쁘다. 이것이 우리가 싸우는 모습이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의 임무는 파괴가 아니라 구출이다.

22-23절은 이렇게 긍휼히 여겨 구출해야 할 사람들의 세 그룹을 말한다(대상). 확실히 선을 그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기억하기 좋게 표현하자면, 거짓에 미혹되려 하는 사람들, 미혹된 사람들, 그리고 미혹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20절은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고 말한다. 이들은 미혹되려 하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이게 아니라 저게 맞다까지는 나가지 않았지만,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 혹은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상태다. 진리에 대한 견고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나타나는 모습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의 측면에서는 연약한 사람이고, 쉽게 외부에 영향을 받는다.

“의심하는 자”라고 표현되었지만, 때로는 너무 의심하지 않아서 문제가 된다. 진리에 견고하게 서 있지 못하기 때문에 거짓도 쉽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좋은 의도로 들었던 어떤 설교, 좋은 의도로 읽은 어떤 책 등에서 말하는 거짓을 접하면서, 오히려 그동안 알고 있었던 진리에 대해서 의문을 품는 것이다. 물론 진리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으로서 이런 의심(의문)이 필요하기도 하다. 베뢰아 사람들처럼 정말 성경이 그러한지 상고해 보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말하는 의심은 성경 자체에 대한 의심, 진리에 대한 의심이다.

구약에서는 이런 사람을 자주 “어리석은 자”라고 표현한다. 어리석은 사람은 지식이 부족한 사람이 아니라 지나치게 열려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특별히 악한 의도를 가지고 있지는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사람이 악한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쉽게 거짓이 그 열린 마음을 공격하여 유혹에 빠지게 된다(잠 14:15, “어리석은 자는 온갖 말을 믿으나”).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온 거짓 교사들은 먼저 이런 사람들을 노린다. 맹수들이 무리에서 가장 약한 개체를 공격하듯이 하나님의 양 무리에게 이런 의심하는 자들(연약한 자들)을 먼저 공격하여 넘어뜨리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날 우리가 더 주의해야하는 부분이 있다. 과거에 비해서 오늘날은 이런 ‘개방성’을 매우 높은 가치로 여기고 있다는 부분이다. 닫힌 것(배타적인 것)은 부정적이고, 열린 것(개방적인 것)은 긍정적이다. 무엇에 대해서 그러한지를 따지기 전에, 그 말 자체를 부정적이거나 긍정적으로 여기고 있다는 말이다. 이런 언어의 혼란을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의 진리는 닫혀 있다. 배타적이다. 이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우리집에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을 마음대로 드나들게 하는 것은 개방적이어서 좋은 것이 아닌 것처럼, 성경의 진리도 그런 것이다.

내 주변에 이런 의심하는 자가 있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무시하고 답답해 하는 것이 아니라, 긍휼히 여겨야 한다. 진리에 확고히 설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왜 이것도 못믿냐고 다그칠 것이 아니라 차근히 가르쳐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진리에는 열린 마음을, 거짓에는 닫힌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도와야 한다. 그것이 긍휼이다.

만약 내가 그렇게 의심하는 자라면,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나에게 잘못된 영향을 줄 수 있는 것들을 줄이고, 하나님의 진리를 말해주는 성경 자체로 돌아가야 한다.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다음으로 유다는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어떤 자”는 이미 미혹된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이미 미혹되어서 끌어내야만 하는 자들인 것이다. 시편 1편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들은 악인의 꾀를 따르고 죄인의 길에 서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았다(시 1:1). 이들의 결국은 ‘망하는 것’이라고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시 1:6).

“끌어내어”는 매우 강한 표현이다. ‘강제성(완력)’이 표함된 단어다. 어린 아이가 도로가에서 놀고 있는 것을 보면 위험하니 안쪽으로 들어와서 놀라고 좋게 말해줄 것이다. 그런데, 바로 옆에서 차가 달려오고 있는 상황이라면 그렇게 할 수 없다. 어디든 붙잡아 그 아이를 구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아이는 어딘가 다칠 수도 있다. 그래서 울음을 터트리고 왜 그러냐고 따질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이 어떤 상황에 있었는지를 안다면 고마워할 것이다.

“끌어내어 구원하라”는 명령은 이와 같은 상황을 전제로 한다. 이들은 이미 멸망의 길에 들어섰다.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는 표현은 마치 이들이 이미 불 속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유다가 의도한 것이 불 가운데 있는 사람을 구하는 것처럼 긴급하게 이 일을 해야한다는 것일 수도 있지만, 맥락 상 “불”은 7절에서와 같이 심판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이들은 아직 불 가운데 있지는 않다. 심판 가운데 들어가 있으면 이미 나올 수 있는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다서 말씀이 계속 강조한 것처럼 이들의 길은 심판을 향한 길이다. 지금 상태 그대로 있으면 그 결국은 정해진 심판이고 벗어날 수 없다.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과 동일한 “영원한 불의 형벌”(7절)이 기다리고 있다. 이들을 긍휼히 여겨야 한다. 그 길에서 벗어나 다시 복 있는 자의 길로, 구원의 길로 걸어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특별히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될 사람들은 ‘우리 가운데 있었던 사람들’이다. 단순히 다른 곳으로 교회를 옮기거나 한 사람들이 아니라, 한 때는 예수님을 주로 시인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다. 우리는 ‘우리 중에 하나’로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아니었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조용히 믿음을 떠나기도 하지만, 때로는 교회에 큰 상처를 남기고 떠나기도 한다.

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과정은 교회의 권징(징계)과도 관계된 경우가 많다. 주님의 권위를 부인하고, 주님의 몸된 교회의 권위를 부인하면서, 자신은 구원 받았다고 주장하는 자를 교회는 징계할 수 밖에 없다. 은혜를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그것을 즐기는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 과정은 물론이고 결국 징계로 출교를 하게 되더라도, 여전히 긍휼한 마음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 마태복음 18장이나 갈라디아서 6장, 데살로니가후서 3장 등이 이런 교회의 징계에 대한 말씀을 담고 있는데, 그 말씀은 모두 이런 긍휼한 마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살후 3:15, “원수와 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 같이 권면하라”). 교회는 긍휼한 마음으로 이들이 돌이키고 회개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회복(구원)을 목적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최악의 상황에 대해서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고전 5:5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구원하기 위해서 이 모든 일을 한다는 것이다. 어차피 멸망을 향해 가는 사람이라며 정죄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해도 긍휼함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단지 나와 같은 생각을 품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다. 한 영혼이 멸망하느냐 아니냐의 문제다. 긍휼한 마음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그가 돌이킬 때 기쁘게 맞이하고, 그가 떠날 때 가슴 아파해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불에서 끌어내야 할 사람들이 있다.

셋째로 23절은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까지도 미워하되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어떤 자는 자신이 미혹된 것을 넘어서 다른 사람을 미혹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여기 사용된 표현을 보면 긍휼히 여길 때 신중해야 함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그 육체로 옷을 더럽혔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옷은 겉옷이 아닌 속옷이다. 겉옷은 외부의 영향으로 더러워지기 쉽고, 속옷은 자기 몸에 의해서 더러워지기가 쉽다. 즉, 이 사람들은 외부의 영향을 받아서 겉만 더러워진 상태라기 보다는, 그들 자신이 거짓과 죄에 물들어 있는 상태다. 자신이 거짓에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그런 영향을 주고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이들의 옷까지도 미워하라는 것은 그만큼 민감하게 분별하라는 의미다. 조심하라는 것이다. 그 옷에 의해 나도 더러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이들도 긍휼히 여겨야 한다. “미워하라”는 명령은 죄와 그 영향에 대한 부분이지, 이 사람들 자체에 대한 명령은 아니다. 이 정도로 거짓에 물들고 방탕한 삶을 살면서 사람들에게 거짓을 전하고 다닌다고 해도 여전히 그를 “긍휼히 여기라”고 말한다. 다만, 주의해야 한다.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겨야 한다. 그들이 옷을 더렵히는 것처럼 나도 그런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가져야 한다. 난 괜찮을 것이라고 안심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특히 교회적으로는 더욱 그러해야 한다. 요한은 거짓을 가르치는 교사들에 대해서는 교회에게 이렇게 하라고 명했다.

요이 10–11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11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라

그 사람을 긍휼히 여길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와 친밀하게 교제하며 교회 안으로 불러들여서 가르치게 하는 것은 해서는 안될 일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긍휼히 여기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죄를 제거했지 용납하지 않았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은 죄인들의 친구였지만, 그들의 죄에는 조금도 가담하지 않으셨고 그들의 죄를 괜찮다고 하지도 않으셨다. 바리새인들에게 회개를 외치셨던 예수님은 세리와 창기들에게도 동일하게 회개를 외치셨다. 우리는 하나님보다 긍휼할 수 없다. 죄를 용납하는 긍휼은 없다.

특히 구원 받은 자도 여전히 죄에 끌리는 관성이 남아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바울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도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탄식했다(롬 7:24).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죄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악은 그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2)는 성경의 명령은 과하지 않다. 나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겨야 한다.

긍휼한 마음은 죄인의 구원을 보고 싶고 회개를 보고 싶다. 이 사람이 구원 받은 사람이었으면 좋겠으니까, 이 사람이 회개한 것이었으면 좋겠으니까, 조금만 그 비슷한 것이 보이면 받아주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그것이 긍휼한 마음이 있는 증거이기도 하다. 하지만 선은 분명해야 한다. 죄를 미워해야 하고 두려움으로 분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긍휼이 거짓을 우리 안에 가만히 들여오는 통로가 될 수 있다. 나는 긍휼한 마음으로 했던 일이 결국 나를 오염시키고 교회를 오염시킬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마 10:16).

여러 면에서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것은 말만큼 쉽지 않다. 하지만 아마도 긍휼히 여기는 것을 가장 어렵게 만드는 것은 긍휼히 여기지 않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미혹되려고 하는 자에게는 긍휼한 마음이 생길 수 있지만, 이미 미혹되어 거짓을 따르고 있고 그런 거짓을 퍼뜨리고 있는 사람은 그냥 안보고 싶은 마음이 더 먼저 생긴다. 특히 그로 인해서 내가 어떤 피해를 입고 상처를 받았다면 더욱 그렇다.

긍휼은 모든 사람이 남의 얘기일 때는 “그냥 그렇게 하면 되지”라고 쉽게 말하지만, 막상 자기 일이 되면 그게 그렇게 쉽게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남의 돈 일만 달란트는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지만, 내 돈 백 데나리온은 크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긍휼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2절의 기도였다.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하나님의 긍휼이 얼마나 크고 풍성한지를 알게 될 때, 우리도 조금이나마 더 그분을 따라 긍휼히 여길 수 있다. 내가 받은 긍휼을 기억하고 긍휼히 여길 수 있어야 한다.

믿음을 위한 싸움, 진리를 위한 싸움은, 우리 주변에 견고한 성을 쌓고 우리와는 다른 사람을 쫓아내고 아무도 들어올 수 없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사실은 반대다. 이 진리의 견고한 성 안으로 사람들을 불러 들여야 한다. 이 안에 있는 사람들이 나가지 않게 해야 한다. 한편으로는 차가운 이성이 필요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뜨거운 마음이 필요하다. 진리와 긍휼로 우리 자신을 지켜야 한다.

하나님을 의지하라(24-25절)

마지막으로 우리는 다시 이 서신의 시작으로 돌아간다. 우리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마치 내가 오늘 이것을 하지 않으면 떠내려 간다는 마음가짐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 파선한다는 마음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구원의 안정성, 성도의 견인이라는 진리의 전부가 아니다. 이 설교 시리즈의 시작에서 밝힌 것처럼,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믿는 자를 지키신다. 우리가 이 믿음을 지키고 영광에 들어가게 할 모든 자원은 하나님께 있다. 그래서 우리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3-23절 말씀, 특히 17-23절 말씀에 어느 정도로 순종하면 내가 스스로 믿음을 잘 지키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60-70? 90%? 99%? 수치로 따질 수도 없지만, 100%가 아니라면 의미가 없다. 만약 구원 받은 후 나의 삶이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 있는 문제라면, 우리는 모두 믿음에 있어 파산하게 될 것이다. 어느 정도 믿음을 지킬 수 있을지는 모른다. 누군가는 다른 사람보다 더 잘 지킬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중 누구도 우리의 대적 마귀보다 강하지 못하고 지혜롭지 못하다. 결국 우리는 패할 것이고 믿음을 잃게 될 것이다. 존 맥아더 목사가 종종 말했던 것처럼, 만약 우리가 받은 구원을 잃을 수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구원을 잃을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이미 이 사실을 1-2절에서 살펴봤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은 그 부르심을 끝까지 이루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 안에 두고 사랑하신다. 그리고 끝까지 지키셔서 그 사랑하는 아들에게 우리(교회)를 주실 것이다. 편지의 끝에서 유다는 다시 한번 이 사실을 강조하며 하나님을 찬양한다.

24–25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이 25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24절은 누가 이렇게 하는지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능히 … 하실 이”라고만 말하고 있다. 1절의 말씀과 바로 이어지는 25절에서 “능히 하실 이”가 누구인지는 분명히 알 수 있다. 하나님이시다. 하지만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자체를 강조하기위해 ‘능히 하시는 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속성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사랑과 능력이 최상위에 있다. 유다서 1절이 하나님을 ‘사랑 하시는 분’으로서 믿는 자를 보호하시는 분으로서 강조했다면, 여기 24절은 ‘능히 하시는 분’으로서 믿는 자를 보호하시는 분이심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기 원하시고 또한 지킬 수 있는 분이신 것이다.

24절은 하나님께서 능히 하시는 일 두 가지를 말한다. 첫째로 하나님은 믿는 자를 보호하셔서 거침이 없게 하신다. “거침이 없다”는 번역은 오해의 소지가 있는데, 넘어지지 않게 지키신다는 의미다. 넘어진다는 것은 때로는 죄를 범한다는 의미도 되지만, 여기서는 그 이상의 넘어짐을 의미한다. 로마서 11:11에서 바울은 유대인들에 대해서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라고 묻는다. 유대인들이 다시 일어날 어떤 희망도 없이 영원히 멸망했느냐는 의미다. 바울은 그럴 수 없다고 답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믿는 자를 넘어지지 않게 지키신다는 의미도 동일하다. 참된 성도도 삶에서 죄로 넘어지고 연약해 지기는 한다. 하지만 완전히 믿음을 버리고 떠나지는 않는다.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지키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시고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22:31–32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32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사탄은 베드로의 믿음을 떨어 뜨리려고 하였다. 만약 예수님께서 붙들지 않으셨으면, 베드로는 그렇게까지 넘어졌을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공적으로 부인하고, 완전히 떠나갔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가룟 유다처럼 믿음을 버리지는 않았다. 그는 믿음을 지킬 수 있었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회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는 다른 형제들을 굳게 하는 교회의 인도자가 되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지키신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당하는 시험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고전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모든 상황이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다. 어떤 상황도 하나님의 계획에서 벗어난 상황은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상황을 허락하셔서, 우리가 믿음을 지키게 하신다. 어떤 어려움을 만날 때, 가끔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것이다. 만약 내가 이런 상황을 지금이 아닌 이전에 만났다면 믿음을 지키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어쩌면 정말로 그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상황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능히 그렇게 하신다.

예수님은 이렇게 분명히 말씀하셨다.

6:39–40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10: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하나님은 구원 받은 자를 절대로 잃어 버리지 않으신다. 그 손에서 놓지 않으신다.

둘째로 하나님은 믿는 자를 그렇게 지키셔서 하나님의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신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 우리는 누더기가 되어 서지 않을 것이다. 두려움으로 서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능히 그렇게 하신다.

이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일인가. 사람이 죄를 선택한 후, 그 누구도 하나님의 영광 앞에 이렇게 설 수 없었다.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를 죄를 드러냈고, 그 앞에서 우리는 두려워 떨 수 밖에 없었다. 로마서 1장 18절에서 3장 8절까지의 말씀을 읽으면서 ‘나는 전혀 이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요한계시록 뒷부분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21: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22:15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

이 말씀들 앞에서 정직하게 나를 점검해 보면, 나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 자격을 내 스스로 갖추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게 말할 수 없는 사람은 없다. 믿는 자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자는 두려움 없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워서 부끄럽게 하지 않으실 것이다. 오히려 자녀를 자랑스러워하는 아버지처럼 우리를 그 앞에 세우실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하시는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형벌을 받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 나를 부끄럽게 만들고, 하나님을 두려워 하게 만드는 나의 모든 죄를 빠짐없이 예수님께서 대신 담당하셨다. 그 예수님을 통하여서 하나님은 나를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신다. 다른 이유는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격 없는 자에게 값 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내가 입은 것 뿐이다. 연약하고 누더기같이 찢긴 삶이라 해도, 온전하신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모든 자를 하나님은 온전히 보호하시고 온전히 세우실 것이다.

이것이 능히 하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이 싸움을 싸우게 하시고 승리하게 하실 것이다. 당연히 모든 영광이 그분께로 돌아가야 한다.

25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여기에 우리의 믿음이 있다. 여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이 싸움을 싸울 수 있다. 싸움은 치열할 것이다. 우리는 피를 흘릴 것이다. 하지만 패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능히 우리를 보호하셔서 거침이 없게 하시고 우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우리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순종해야할 가장 중요한 명령이다.

도전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보면 무거운 짐을 지고 가던 주인공 크리스천이 마침내 십자가 앞에 도착했을 때 어깨 끈이 느슨해지고 등의 짐이 떨어져 나간다. 그리고 천사가 다가와서 그의 죄가 사해졌음을 말해준다. 어렸을 때 이 책을 읽으면서 의아했던 것은 이 장면이 책의 끝이 아니라 초반부였다는 점이었다. 죄 사함을 받았으면 이제 천국에 들어가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과정이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뭔가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이 마치 천국에 자기 힘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처럼 소설을 썼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어린 나이에 ‘믿음으로 얻는 구원’, ‘영원한 구원’에 대한 이해가 그 정도였던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순간의 사건이기도 하지만, 천국에 이르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 과정은 천로역정이 묘사하는 것처럼 많은 유혹과 어려움과 싸움이 있다. 힘든 길이다. 그 과정에서 때로는 나의 힘으로 이 길을 다 가야할 것 같고 그래서 불가능하다고 느껴질 때도 있지만, 결국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이 계신 곳까지 인도하신다. 물론 그 성으로 들어갈 때 우리가 내놓을 것은 그동안 내가 얼마나 고생했고 얼마나 신실했는지가 아니다. 우리가 내놓을 것은 나의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하신 일이 나로 그 천국에 들어가게 할 것이다.

그렇게 천국에 들어간 사람의 모습을 번연은 이렇게 묘사했다.

존 번연, <천로역정>, “그들이 천성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모습이 변하고 황금처럼 빛나는 옷이 입혀졌다. 또 어떤 이들은 수금과 면류관을 들고 와 두 사람에게 전해 주었다. 수금은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주어진 것이었고, 면류관은 그들의 명예에 대한 상징이었다. 온 천성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이런 말이 들려왔다. “주님의 기쁨에 참여하라.” 그러자 크리스천과 소망도 큰 소리로 온 힘을 다해 찬양을 부르기 시작했다.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나님께서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셔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신 것이다.

그런데, <천로역정>은 이렇게 아름답게 마무리되지 않는다. 크리스천과 동행했었던 ‘무지’라는 사람도 천성 문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에게는 내놓을 증표가 없었다. 무지는 “나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님께서 거리에서 나를 가르쳐 주셨소”라고 말했다. 그는 모든 역경을 딛고 천성 문 앞에까지 왔지만 죄 사함의 증표가 없어 결국 천성에 들어가지 못했다. 정말로 무지했던 것이다. <천로역정>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그곳을 가만히 살펴보니 멸망의 도시만이 아니라 천성의 문에서도 지옥으로 통하는 길이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천국에 가까운 사람이다. 천국에 가까이 왔는데, 그 안에 들어가지는 못하는 사람이다. 우리 중 누구에게도 이런 불행이 현실이 되지 않기를 원한다. 지금 죄 사함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지금 예수님의 도우심을 구하라. 지금 믿음에서 멀어지고 있어도 마찬가지다. 나의 믿음이 거짓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유다서의 경고를 기억하고 믿음을 위하여 싸우라.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라. 그리고 그 밖으로 나간 자들을 긍휼히 여기고 구하라. 무엇보다 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다함께 이 싸움을 싸우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려드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