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교회여, 자신을 지키라 (1)

본문: 유다서 1:17-25

설교자: 최종혁

교회는 거짓과 싸우고 거짓의 가장 큰 특징은 한 마디로 하자면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하나님을 부정하며 살아도 괜찮다고 말한다. 원하는 만큼 방탕한 삶을 살아도 괜찮다고 말한다. 내 삶의 주인이 나여도 괜찮다고 말한다. 그것이 사실이어서가 아니라, 그런 말을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거짓은 괜찮지 않은 것을 괜찮다고 말해줌으로써 자신의 정욕을 채운다. “모든 것이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한다.

거짓이 하는 말은 다양하다. 교리적인 혼란을 만들기도 하고, 진리에 거짓을 교묘하게 섞기도 한다. 부분적인 진리, 선택적인 진리만 전하기도 한다. 그래서 성경의 중요한 가르침을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다루기도 한고, 오해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 모든 것에 다 대응할 수는 없다. 그래서 유다서는 그 다양한 ‘말’에 대응하기 보다 그 한결같은 ‘삶’에 대응한다. 거짓은 결국 그 삶으로 본질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거짓은 하나님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방탕으로 바꾼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자기 정욕을 따른다. 원망하고 불만을 토한다. 비방한다. 뭐든 자기 이익을 위해서 한다. 이것이 그들의 한결같은 삶이다.

또 하나 지금까지 유다서가 강조한 것은 이런 거짓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거짓은 항상 좋은 것이 있을 것처럼 말한다. 실제로 그런 좋은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심판에 이르게 된다. 심판은 대개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성경은 확실히 심판을 말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보면 거짓은 맛있는 독약과도 같다. 맛이 있어서 계속 찾게 되지만 결국 나를 죽게 만들기 때문이다. 마약과 같다고도 할 수 있다. 결국은 나쁜 것을 알면서도 순간의 쾌락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나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독약, 마약이 무엇인지 정말 심각하게 점검해 봐야 한다.

실제 교회 안에는 이런 거짓을 적극적으로 전파하는 거짓 교사도 있고, 거짓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아 타협한 사람들도 있다. 타협은 하지 않았지만 유혹을 강하게 느끼고 있는 사람도 있다. 유다서의 마지막 부분은 이런 모든 요소들이 고려된 권면의 말씀으로 구성되어 있다.

23절까지가 권면의 말이고, 24-25절은 마지막 송영이다. 이 부분을 “교회여, 자신을 지키라”는 제목으로 함께 살펴보려고 한다. 내용은 크게 4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 경고를 기억하라(17-19절)

2. 사랑 안에 머물라(20-21절)

3. 그들을 긍휼히 여기라(22-23절)

4. 하나님을 의지하라(24-25절)

경고를 기억하라(17-19절)

유다는 다시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독자를 부르며 마지막 권면의 말을 한다. 앞선 말씀에서는 계속해서 “이 사람들”에 대해서 말했었는데, 그들과 독자들을 구분하는 것이다. 물론 실제로는 독자들 중에 “이 사람들”이 숨어 있는 것을 유다가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제부터 하는 말은 참된 성도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해야할 일들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다시 이들을 부르는 것이다. 이들에게 가장 먼저 하는 권면은 “기억하라”는 것이었다.

17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

“기억하라”는 명령은 성경에서 가장 자주 마주하게 되는 명령 중 하나다. 잊지 말라, 생각하라, 알라 등의 명령과 비슷한 의미다. 단순히 머릿속에 어떤 정보를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새기고 그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유다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도들을 통해 전해진 권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라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 이후에 어떤 일이 있을 것인지를 제자들에게 말씀해 주셨다. 예수님은 아버지께로 돌아가셨다가 다시 오실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에 제자들을 그냥 내버려두지는 않으실 것이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구하여서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다.

14:16–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오셔서 하실 중요한 일 중 하나는 바로 이것이었다.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이 말씀에 따라 성령님께서 오셨고, 성령님은 특별하게 사도들을 가르치시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들을 생각나게 하셔서, 교회의 기초를 세우게 하셨다. 그래서 사도들은 교회의 터로 표현되기도 한다.

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이렇게 성령님께서 사도들을 통해 교회의 기초가 되는 진리를 이미 견고하게 하셨기 때문에, 사도 요한은 ‘더 나은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거짓 교사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요일 2:26–27 너희를 미혹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27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여기서 우리는 진리와 관련된 성령님의 사역 3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성령님은 성경의 저자에게 특별히 역사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오류 없이 기록하게 하셨다. 이것이 성령의 감동이다. 둘째로 성령님은 그렇게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성도가 읽을 때 깨닫게 하신다. 이것이 성령의 조명이다. 셋째로 성령님은 교회 안에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를 세우셔서 교회를 말씀으로 자라게 하신다. 이것이 성령의 은사다.

이렇기 때문에 사도 요한은 이런 성령의 역사(기름 부음)를 부정하는 거짓 교사와 그들의 가르침이 필요가 없다고 말한 것이다. 사실 필요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있으면 안된다. 성령님이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에 그 밖에 있는 모든 것은 거짓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유다서의 논리도 동일했다. 유다는 이 진리를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라고 표현했다(3절). 뭔가를 더해서도 빼서도 안되는 불변의 진리인 것이다. 교회가 바로 이 진리의 기둥과 터다. 따라서 이 진리를 무너뜨리려고 하는 모든 거짓을 경계하고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런 상황이 잘 이해되지 않는 성도들도 있었을 것이다. 왜 영광스러운 복음이 핍박을 받는지, 왜 그리스도의 거룩한 교회 안에 거짓이 침투하고 성도가 그런 유혹에 빠지는지가 이상해 보일 수 있다. 더 나아가서 그런 현실이 사실은 교회가 잘못된 진리를 붙들고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닌지 하는 의심이 생길 수도 있다. 혹은 하나님께서 그런 교회를 포기하신 것은 아닌지 낙심하고 좌절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유다는 성도를 위한 첫 권면의 말로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한 말을 기억하라”고 한다. 주님께서 특별히 세우신 사도들이 이미 이 부분에 대해서도 말하고 기록해 두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말에 대해서는 이렇게 간단히 정리했다.

18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하지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

여기 사용된 표현들의 의미는 이미 충분히 살펴봤었다. 거짓의 특징이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대로 행한다. 그러면서 이들은 조롱한다. 하나님의 심판은 없으니 편하게 살라고 한다. 진리를 조롱하는 것이다. 마치 예수님께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믿겠다고 했던 사람들처럼, 말세를 사는 사람들도 똑같이 그렇게 한다. 믿을 생각이 없어서 증거를 부정하고 있으면서, 증거가 없으니 믿지 못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결국은 자기 정욕에 따라 살고 싶은 것 뿐이다.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교회 안에 있는 거짓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말씀하셨다. 산상수훈의 결론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7: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7:22–23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양의 옷을 입고 양 무리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이 사람들은 진짜라고 생각하게 만들었지만 결국 예수님은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실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 13장에 기록된 천국에 대한 비유의 말씀도 이런 사실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4가지 땅에 떨어진 씨의 비유를 보라. 길가에 떨어진 경우와 좋은 땅에 떨어진 경우에 대해서 사람들은 큰 논쟁을 하지 않는다. 길가는 믿지 않는 사람을 의미하고, 좋은 땅은 믿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런 돌밭과 가시떨기는 어떨까? 어떤 사람들은 이들도 믿고 구원 받은 사람이기는 하다고 본다.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결국 열매가 없기 때문이다.

성경 전체의 가르침과 비유의 맥락에 비추어 보면 이들은 구원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구원 받지 않는 사람들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하지만, 그렇지 않게 보려고 하는 경우도 있다. 구원 받은 것 같은데 뭔가 충분한 열매는 보이지 않는 것 같은 사람들이 현실에는 있기 때문이다. 믿음이 없지만 뭔가 열심히 하는 것 같은 사람과 믿음은 있는데 연약한 사람을 분별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애매한 모습의 사람들 중 어떤 사람은 정말로 구원 받은 사람일 것이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교회 안에는 이런 사람들이 있고, 사탄은 이를 교묘하게 이용한다.

예수님의 또 다른 비유는 좀 더 명확하게 밭에서 곡식과 함께 자라는 가라지에 대해서 말한다. 교회 안에 그렇게 거짓이 들어올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천국을 큰 나무가 되는 작은 겨자씨로 비유하기도 하셨고, 가루를 전부 부풀게 하는 작은 누룩에 비유하기도 하셨다. 교회가 연약하게 보일 때가 있을 것을 전제로 하신 말씀이다.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교회이지만, 그렇지 않게 보일 때가 있는 것이다. 핍박을 받고, 거짓에 힘을 잃는 모습이 있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분명해 진다. 예수님은 세상 끝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이런 징조를 언급하셨다.

24:4–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5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바울도 같은 사실을 미리 말했다.

딤전 4:1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디모데후서 3장에서도 바울은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를 것에 대해서 말하면서(1절), 그 특징으로 사람들이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고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것을 언급했다(4-5절). 유다서에서 볼 수 있는 거짓 교사의 특징과 동일하다.

사도 요한도 이런 자들에 대해서 말했다.

요일 2:18–19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19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사도 베드로도 마찬가지다.

벧후 2:1 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벧후 3:3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성령님은 사도들의 입을 통해 교회가 이런 어려움과 유혹을 겪게 될 것을 이미 말씀하셨다. 여기에 더하여 유다는 이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적나라하게 밝힌다.

19 이 사람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니라

이 사람들은 화평케 하는 자들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는 자들이었다. 10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면서 진리를 왜곡하고 거짓이 참인 것처럼 주장하여 교회를 분열시키는 사람들이었다. 사랑으로 하나됨을 나타내는 애찬에 암초와 같은 자들로서 자기 이익을 위해서는 교회가 어떻게 되든지 신경쓰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특히 이들은 꿈꾸는 자들로서(8절) 자신과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다른 사람들과 구분지으면서 분열을 일으켰을 것이다. 이들의 특징으로서 유다는 “육에 속한 자”, “성령이 없는 자”를 추가적으로 언급하는데, 아마도 이들이 반대로 주장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자신들이 영에 속한 자이고 성령 충만한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특별한 계시의 말씀을 주신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요한복음 7장을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혼란스러워 하면서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생각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 중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아랫사람들을 보내서 상황을 알아보고 예수님을 잡아 오게 시켰다. 하지만 그들은 빈손으로 돌아와서 오히려 예수님에 대해서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라며 긍정적인 보고를 했다(요 7:46).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7:47–49 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48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 49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제대로 알고 있고 따라서 예수님에 대해서도 제대로 판단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들과 다른 생각을 가진 자들을 율법을 알지 못하는 자들로 평가절하했다. 그렇게 분열을 만든 것이다. 유다서에 등장하는 거짓 교사들도 동일하게 자신들만이 진리를 아는 것처럼 말하면서 교회를 분열되게 했을 것이다.

이들의 이런 특징은 정확히 구원 받은 자의 특징에 반한다. 구원 받은 자는 화평케 하는 자로서 하나됨을 추구하여 세상 가운데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낸다.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구원 받은 자는 영에 속한 사람이고 성령이 그 안에 거하시는 사람이다.

고전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따라서 19절에서 유다는 이런 사람들은 구원 받은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들의 말은 성령님께서 하신 말씀에 반하고, 그들의 삶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이런 자들이 교회 안에 있을 것이고, 그들로 인한 어려움을 교회가 겪는 것은 이미 예언된 바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놀라거나 실망하지 않고, 다만 경고를 받아 조심해야 한다고 유다는 말하는 것이다.

유다서가 기록될 때보다 더 세상의 끝에 가까운 지금, 이런 거짓이 교회 안에 더 많이 침투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것이 좋다는 말은 아니지만, 이상하게 생각할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성경이 그렇게 예언했고 그것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보고 있을 뿐이다. 이런 일들은 더 교묘하게 우리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다.

당장에 성경이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그렇게 가르치는 교회들이 얼마나 있는지 보라. 물론 겉으로는 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말을 가만히 들어보면 그렇지가 않다. 설교를 하는 사람들부터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에 하나님의 말씀은 없고 세상의 철학, 심리학, 자기 주장, 자기 경험만 가득하다.

성경을 말하는 사람은 성경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놓는다. 그리고 대부분 그런 새로운 해석은 세상의 가치관에 부합한다. 사실 상 세상의 가치관에 부합하게 성경을 끼워 맞추고 있는 것인데, 오히려 그것이 과거에는 몰랐던 것을 이제 알게 되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렇게 교회들은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거하고 받아들일만한 것만 전한다. 그렇게 해도 하나님의 진리를 조금은 전하는 것이라 생각하면 안된다. 하나님의 온전한 진리를 전하지 않으면, 그것은 거짓을 전하는 것이다. 심판이 없는 구원은 구원이 아니다. 회개가 없는 은혜는 은혜가 아니다.

우리 주변에서, 우리 안에서 이런 일들이 크게 작게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교회에는 더 이상 소망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그들의 마음이 이해가 되기도 한다. 거짓에 물든 교회에 머물러 있는 것이 오히려 해롭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일들이 있다고 해서 교회 자체에 실망하고 낙담할 필요는 없다. 그렇게 하는 것조차도 우리가 사탄의 거짓에 패하여 굴복하는 모습이다. 성경은 이런 일에 대해서 이미 예언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지금의 모습이 하나님께서 당황하고 계시다거나, 악을 통제하지 못하고 계시다거나, 혹은 교회를 포기하셨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이 미리 말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세상이 끝을 향해 더 가까이 가고 있다는 의미일 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경고를 받는 것이다. 거짓을 분별하고, 내 삶에서 거짓을 몰아내는 것이다. 그냥 포기하고 예수님 오시기만 멍하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소유한 자들로서 영적인 일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하나되어서 세상 가운데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나타내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그러기 위해 먼저는 이 경고를 기억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음을 기억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순종해야 할 첫째 명령이다.

사랑 안에 머물라(20-21절)

거짓과 싸우는 교회가 자신을 지키게 하기 위해 교회에게 주는 두번째 권면은 20-21절에 기록되어 있다. 이 권면은 총 4개의 명령어로 이루어져 있는데, 21절의 “지키며”가 핵심 명령이고, 나머지 명령은 어떻게 이 핵심 명령을 이룰 수 있는지를 말해준다. 그래서 이 명령들을 하나로 묶으면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라”라고 할 수 있다.

먼저 21절의 명령을 보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라고 말한다. 유다서에는 “지킨다”는 동사가 여러 번 등장하는데, 6절에도 이 동사가 2번 등장한다(“지키지”, “가두셨으며”). 천사들이 자기 지위를 지키기 않았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흑암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가두어 지키고 계신다. 즉, 지킨다는 말은 어떤 장소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즉 머물러 있는다는 의미가 될 수 있는데, 21절이 그런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특별히 지금은 싸움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니까, 외부의 공격에 맞서 싸우면서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명령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라”다. 이미 1절에서 믿는 자에 대해서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었다”고 말했는데, 왜 그 안에서 자신을 지키라고 말하는 것일까? 얻기는 했는데, 잘못하면 잃을 수 있어서 그런 것일까? 실수하면 하나님의 사랑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말일까? 그렇지는 않다. 성경은 분명히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말한다(롬 8:39). 스스로 아무리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한다고 해도, 우리가 그 밖으로 나갈 수는 없다.

성경에는 종종 이런 명령이 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그렇게 하라는 명령이다. 이미 거룩해졌다고 하면서 거룩하라고 말한다. 이미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데 우리 안에 계시게 하라고 말한다. 이런 명령들은 주로 그 온전한 상태로 나아가라 혹은 누리라는 의미다. 여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라는 명령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누리는 그 자리에 계속해서 머물러 있으라는 의미다. 하나님의 징계도 분명 사랑의 표현이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를 징계하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속해서 징계를 받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누리리는 모습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주시고 친밀한 관계 속에서 교제의 기쁨을 나누는 사랑의 관계를 원하신다. 바로 그런 관계 속에 있도록 자신을 지키라는 것이 이 명령의 의미다.

그럼,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15:9–10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바로 그 사랑 안에 계속해서 거할 수 있는 방법인 것이다. 거짓은 정확히 이 반대를 말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하나님의 주되심을 부인해도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이 얼마나 모순적인지 알아야 한다. 사랑의 관계 안에 거한다는 것은 ‘상호작용’이 필요하다. 한쪽에서만 사랑하는 것을 우리는 관계라고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나의 어떠함과 관계 없이 나를 사랑하신다. 좋다. 옳은 말이다. 그런데, 그러니까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다도 된다고 말하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의 결론이 될 수 있을까? 절대로 그럴 수 없다.

이렇게 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마음으로(감정, 느낌) 하는 것이지 머리로(이성, 행동) 하는 것이 아니라고 반박하는 경우도 있다. 그 말을 나를 사랑해서 모든 희생을 하는 사람에게 해보라. 부모님의 말씀에 항상 불순종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해서 자신의 삶을 망치고 있는 사람이, 제발 엄마 아빠 말 좀 들으라고 하는 부모님께, 나는 마음으로 사랑하고 있으니까 그런 율법적인 얘기는 하지 마세요라고 한다면 어떨까? 부모의 속이 탈 것이다. 사랑에 감정이 없는 것은 문제지만, 감정만 있는 사랑도 진짜 사랑이라 할 수 없다. 사랑은 나의 모든 것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애초에 마음이니 머리니 구분하는 것도 무의미하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면 하나님의 사랑 안에 계속해서 머물도록 자신을 지켜야 한다. 순종하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잘 안되는 부분이 있는 것은 우리가 지금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입장에서 어쩔 수 없는 부분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가 싫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이용하고 싶은 사람일 뿐이다. 유다의 말대로 육에 속한 자고 성령이 없는 자다.

그럼, 어떻게 순종할 수 있을까? 유다는 이에 대해서 3가지로 권면한다.

20–21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21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첫째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라”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3절과 같이 주관적인 믿음이 아닌 객관적인 믿음이다. 즉, 믿음의 내용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 하나님의 말씀 위에 자신을 세워가라는 명령이다.

말씀 위에 자신을 세워가는 것은 크게 두 단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말씀을 잘 배우는 것이고, 둘째는 그 말씀을 삶에 적용하는 것이다.

먼저는 말씀을 잘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바울은 에베소의 장로들을 모아 이렇게 말했다.

20:32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교회는 오직 말씀으로 든든히 세워질 수 있다. 사람 사이의 정이 교회가 세워지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공통의 관심사가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비슷한 환경이나 성향도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부차적인 것이다. 교회를 든든히 세우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목적이기도 하다.

딤후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말씀 위에 나를 세우는 것은 다르게 말하면 성장의 과정이기도 하다. 예수님 믿고 구원 받았으면 끝이 아닌 것이다.

5:11–12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 12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이게 정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얼마나 정상이 아닌가 하면, 이런 사람은 구원 받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없을만큼 정상이 아니다. 11절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는 지적인 능력이 부족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듣기를 원하지 않는 태도를 의미한다. 마치 태어난 아이가 젖 먹기를 원하지 않는 것과 같다.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어지는 히브리서의 말씀에서는 이런 사람은 애초에 생명을 얻은 적이 없었던 사람일 수도 있음을 경고하는 것도 볼 수 있다.

말씀 위에 자신을 세우는 것은 성도에게 있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럼, 언제까지 자신을 세워야할까?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에 이르기까지 이 일을 멈추지 않는다. 이 정도면 성경 충분히 많이 읽었고 잘 알고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계속해서 더 배우고 알아야 한다. 우리가 살기 위해 계속해서 먹는 것처럼 그렇게 해야 한다.

여기에 삶의 적용, 즉 순종이 함께 있어야 한다. 순종은 결과이기도 하지만 원인이 되기도 한다. 말씀을 그냥 알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할 때, 그것이 정말로 말씀 위에 ‘나’를 세우기 때문이다. 진리를 경험하면 그만큼 나에게 그 진리가 더 확고해 진다. 순종으로 말씀이 진리 임을 내 삶에서 증명할 때, 말씀 위에 나를 굳게 세워갈 수 있다.

따라서 스스로 계속해서 말씀으로 자신을 세우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말씀 사역에 최선을 다해 참여하며 유익을 누려야 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일상에서도 계속해서 말씀으로 나를 세우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 바쁘고 시간이 없어서 이 일을 못한다는 것은 너무나 무책임한 핑계다.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을 수 없다.

둘째 권면은 “성령으로 기도하라”다. 성령으로 기도한다는 말의 의미가 모호하게 느껴진다면, 성령 없이 기도한다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좋을 것이다. 앞서 거짓 교사들을 유다는 성령 없는 자라고 했다. 이들은 어떤 기도를 어떻게 할까? 이들은 자신의 욕심을 위해 기도할 것이다. 자신들이 원하는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를 위해 기도할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되지 않았을 때, 원망하고 불만을 토했을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기도다.

그렇다면, 반대로 성령으로 기도하는 것은 내 뜻대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원하시는대로 구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기도 끝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이라고 말하는 것이 정확히 이런 의미다.

성령은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

8:26–27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도 무엇을 구해야할지 모를 때 성령님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뜻을 아시고 우리를 구해 기도하신다는 말이다. 바로 그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한다.

먼저는 성경을 통해 드러내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구하는 것이 성령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삶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다 알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럴 때조차 하나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해야 한다.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구한 것인지 아닌지 헤깔린다면, 하나님께서 이 기도를 듣지 않으시면 내가 어떨 것인지를 생각해 보라. 듣지 않으셨을 때, 원망과 불평이 나온다면 하나님의 뜻대로 구한 것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것은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고, 거기에는 결과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나의 원함이 아닌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사람은 어떤 결과에도 감사로 반응한다.

이런 태도가 많은 의심과 유혹 속에서 우리를 지킨다. 우리는 너무 쉽게 내 생각대로 판단하고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내 생각을 내려놓고, 항상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는 방법이다.

셋째 권면은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다. 거짓을 따르는 자들에게 예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듯이, 진리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예수님의 긍휼이 기다리고 있다. 지금 눈 앞에 좋아 보이는 세상의 것들을 따르다 보면 결국은 멸망에 이르는 것처럼, 영원에 속한 것을 따르다 보면 결국은 영생이 이르게 된다. 이것이 참된 믿음을 가진 자들의 기다림, 즉 인내이고 소망이다. 그리고 이 소망이 지금의 삶을 순종으로 이끈다.

바울은 부활에 대해서 말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고전 15: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고전 15:31–34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32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33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34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이 소망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이 흐려지면, 그만큼 순종의 삶도 힘들어진다. 이유를 잃기 때문이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의 종교 생활이 되어 버리고, 순종도 형식적일 뿐이다.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지 못하게 되면 세상은 그만큼 더 나에게 매력적으로 보인다. 거짓에 더욱 취약한 상태가 되고 결국은 휩쓸리고 말 것이다.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그리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천사들이 말했던 것처럼, 그리고 그 후로 성경의 저자들이 기록한 것처럼, 예수님은 다시 오신다. 우리가 믿음으로 보았던 것들을 우리 눈으로 보게 될 날이 올 것이다. 그날을 기다리는 사람이 오늘을 제대로 살 수 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다.

결국 이 모든 것들에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기 위해 힘써야 한다. 말씀으로 나를 세우고, 기도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소망으로 인내하며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한다. 적당히 어느 수준이면 되겠지하고 멈추는 것이 아니라, 물살을 거슬러 헤엄치듯이 그렇게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우리는 세상 속에서 자신을 지키고 거짓과 싸워야 한다.

도전

이 모든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우리는 각자 힘써야 하지만 동시에 함께 힘써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다.

교회가 이래서, 교회가 나의 이런 필요를 제대로 채워주지 않아서 내가 이렇다는 식으로 핑계할 수는 없다. 결국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개인의 신앙으로 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함께 할 때 더 잘할 수 있다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교회에(혹은 사람에) 지나치게 의존적이어서 교회가 어떻게 해주지 않으면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처럼 생각하는 것도 문제지만, 반대로 교회가 아니어도 나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도 문제다.

20-21절의 명령들은 모두 복수형으로 되어 있다. 우리가 교회로서 함께 이런 일들에 힘써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를 기억하라. 혼자서도 괜찮다는 것은 심각한 교만이고 착각이다. 이 거대한 거짓의 파도를 혼자 넘어갈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교회로 부르셨다. 그러니 함께 믿음 위에 우리 자신들을 세우고, 성령으로 함께 기도하며, 함께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자. 함께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 자신을 머물게 하여 지키자. 위로하고, 격려하고, 때로는 도전하며 함께 끝까지 이 길을 가자.

다음 시간에는 특별히 이 길에서 멀어진 자들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하는지,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궁극적인 밑을 구석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