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교회를 사랑합니다

본문: 빌립보서 1:3-11 외

설교자: 최종혁

어쩌면 교회를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 좀 편협된 말처럼 들릴 수 있다. 교회가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에 사랑을 전해야지, 우리끼리 사랑하고 우리끼리만 좋으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당연히 교회 밖의 사람은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랑의 흐름을 말하고 있는 것 뿐이다.

수평적인 이웃 사랑은 수직적인 하나님 사랑의 결과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가장 큰 계명으로 말한다. 거기서 시작된 참된 사랑이 이웃 사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웃 사랑은 가까운 형제 사랑에서 먼저 시작된다. 그렇게 사랑으로 하나된 교회가 세상 가운데 사랑을 전하는 것이다. 세상을 사랑하여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게 세상으로 흘러가고 세상 속에 나타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신 것도 이런 이유다. 요한일서에서 형제 사랑을 구원 받은 자의 가장 분명한 증거로 보는 것도 이런 이유다. ‘이웃 사랑’은 교회 밖에 적용되기 전에 교회 안에 먼저 적용되어야 한다.

그렇게 교회를 사랑하기 위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시선으로 교회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4가지를 살펴봤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자신의 소유로 보신다. 예수님은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6:18). 예수님은 교회를 “나의 것”이라 하시고, 교회에 자기 이름을 두신다.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그렇게 하시지만, 그들의 모임인 교회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신다. 그래서 어떤 방해나 어려움이 있더라도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시고 끝까지 지키신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사랑하신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고 말한다(엡 5:25). 예수님은 모든 것을 가지신 부요한 분으로서 자신의 권리를 내려 놓으시고 원수된 우리를 구원하셨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발적으로 그렇게 하셨다. 그렇게 하여 가치 없는 우리를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 있는 자들로 만드셨다. 그 어떤 피조물도 이해할 수 없고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그리스도는 교회에게 쏟아 부어 주셨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위해 기도하신다. 예수님은 교회의 지체 한 사람 한 사람을 마음에 두시고 교회의 하나됨을 위하여 기도하셨다(요 17:20-23). 신분적인 하나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셨고, 상태적인 하나됨을 위해 기도하셨다. 그렇게 교회가 사랑으로 하나될 때, 교회는 그리스도를 세상에서 선포한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하나되어 그 사명을 다할 수 있도록 기도하시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는 교회를 가족으로 보신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이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2:50). 예수님은 가족인 교회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 한 아버지의 형제된 교회를 우선순위에 두신다. 그들을 사랑하며 섬기신다. 그들로 계속해서 자기 형상을 닮아가게 하신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본이다. 우리에게 새계명을 주시면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명하신(요 13:34) 예수님께서 우리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신 것이다. 우리는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할 뿐 아니라, 공동체로서의 교회도 사랑해야 한다.

오늘은 시리즈 마지막으로 이러한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교회를 사랑했던 사람, 바울의 교회를 위한 기도를 살펴보고 교훈을 얻기 원한다.

1:3–11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4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5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6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7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8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9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10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11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이 말씀을 중심으로, 4가지 교훈을 생각해 보자. 이 4가지 교훈은 모두 ‘교회는 연약함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다르게 말하면 교회는 사랑스럽지 않은, 사랑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는 것이다. “교회를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기 어려울 때, 어떻게 여전히 교회를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 있는지를 함께 배워볼 것이다.

  1. 교회의 상태에 관계 없이 교회를 사랑할 수 있다.
  2. 교회의 좋은 점을 기억하며 감사할 수 있다.
  3. 교회의 부족함에 대해 간구할 수 있다.
  4. 하나님으로 인해 교회에 대하여 확신할 수 있다.

교회의 상태에 관계 없이 교회를 사랑할 수 있다

빌립보서를 읽어 보면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사랑했다는 것은 명확하게 드러난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을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빌 2:12)라고 불렀고, 그것으로는 부족한 듯, 좀 더 그 마음을 길게 표현하여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부르기도 했다(빌 4:1).

또한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의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자신은 전제와 같이 부어질지라도 기뻐하고 기뻐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빌 2:17-18). 우리가 볼 때 바울은 복음의 최전선에서 가장 수고했던 사람이고, 빌립보 교회는 뒤에서 지원했던 사람들이다. 바울의 수고가 훨씬 커 보일 수 있지만, 바울은 그렇게 상황을 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빌립보 교회의 섬김과 자신의 희생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하나의 제물이 되는 것으로 묘사한다. 각자의 역할이 달랐을 뿐, 그들이 함께 하나님께 제물을 드린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바울과 빌립보 교회와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를 볼 수 있는 표현이다.

반대로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이라고 눈물로 책망하며,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음을 상기시키기도 했다(빌 3:18-20). 이 역시 사랑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진심어린 책망이다.

이 편지의 시작에서도 바울은 교회에 대한 사랑을 숨기지 않는다. 1:7에서 그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기도할 때마다 빌립보 교회를 기억하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간구했다. 1:8에서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라고도 말한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이 사랑은 일부의 성도만을 향한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1:4, 7, 8에서 바울은 반복해서 “무리”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번역은 “무리”라고 되어 있지만 의미는 “모두”다. 빌립보서에 이름이 언급된 몇 명의 성도만을 사랑했던 것이 아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사랑했다.

바울과 빌립보 교회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하나의 사건이 2장에 기록되어 있다. 빌립보 교회는 감옥에 있던 바울을 돕기 위해 재정적 지원을 했을 뿐 아니라, 에바브로디도라는 사람을 보내서 직접적으로 바울을 도울 수 있게 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에바브로디도가 병들어 죽게 된 것이다(빌 2:27).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긍휼히 여기셔서 그를 낫게 하셨다. 그리고 병이 나은 에바브로디도를 바울은 바로 빌립보로 보냈다. 이 상황을 바울은 이렇게 기록했다.

2:25–28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26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27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28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그를 보낸 것은 너희로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라

에바브로디도는 병들어 죽게 된 것 때문에 근심했던 것이 아니고, 자신이 병들었다는 사실을 빌립보 교회가 알게 된 것을 알고 근심했다. 자신의 상황에 대해서 빌립보 교회가 얼마나 함께 아파하고 슬퍼할 줄을 알았기 때문이다. 바울도 마찬가지로 에바브로디도가 병든 것 뿐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 근심할 빌립보 교회 때문에 근심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에바브로디도의 병을 낫게 하신 것을 그를 긍휼히 여기신 것 뿐 아니라 자신도 긍휼히 여기신 것이라고 말한다(27절).

에바브로디도의 병이 낫자 바울은 지체없이 그를 빌립보로 돌려 보낸다. 병이 나았으니, 다시 바울을 도울 수도 있었고 바울이 원했다면 그렇게 했겠지만, 바울은 자신의 유익보다 에바브로디도로 인해서 염려했던 빌립보 교회를 먼저 생각했던 것이다.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상대의 입장을 먼저 고려하는 사랑이 이들 가운데 있었다. 누군가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여기고, 함께 슬퍼하고 또한 기뻐하는 사랑이 이들에게 있었다.

바울은 왜 이렇게 빌립보 교회를 사랑했을까? 먼저 생각이 드는 것은 빌립보 교회가 바울에게 있어 좋은 복음의 동역자였다는 점일 것이다. 빌립보서를 기록할 당시 바울은 감옥에 있고, 그 전에도 빌립보 교회에만 계속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분명 동역자들이었다. 1:5에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다고 말한다. 4:2-3을 보면 유오디아와 순두게, 글레멘드를 비롯한 성도들이 그의 동역자들이 되었다고 말한다. 구체적으로 이들이 어떤 식으로 바울의 동역자들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들을 비롯한 빌립보 교회는 일시적으로가 아니라 교회가 시작된 이후로 계속해서 바울의 전도 사역에 힘을 보탰다는 것은 알 수 있다.

특히, 빌립보서는 빌립보 교회가 바울에게 재정적 지원을 한 것에 대한 바울의 감사 편지이기도 하다.

4:10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바울은 이 당시 죄수의 신분이긴 했지만 지하 감옥에 투옥된 상태가 아니라 사도행전 28장에 기록된 것처럼 가택연금된 상태였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고, 바울은 그곳에서 계속해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빌립보 교회는 이런 바울의 상황을 알고 그를 위한 선교 자금을 지원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4:15–16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16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바울이 계속해서 빌립보 교회에 머물렀던 것은 아니지만, 교회는 그의 사역과 상황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재정 지원 등을 통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복음의 동역자로서 함께 일했던 것이다.

이런 좋은 동역 관계가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사랑했던, 혹은 더 쉽게 사랑할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근본적인 이유는 아니다. 바울은 단지 빌립보 교회가 좋은 교회였기 때문에 빌립보 교회를 사랑했던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빌립보 교회에도 여러 문제들이 있었지만, 그와 상관 없이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사랑했다.

바울이 이렇게 교회의 문제와 상관 없이 교회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잇는 좋은 예는 고린도 교회에 대한 사랑일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고전 4:14–15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15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바울에게 있어 고린도 교회는 그냥 문제 많은 교회, 문제 많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한 걸음 떨어져서 바라보면서 비판할 것이 있으면 비판하고 혹은 그냥 무시하거나 할 수 있는 그런 남과 같은 존재로 보지 않았다. 바울은 그들을 자신의 자녀들로 보았다. 자신의 사랑하는 가족으로 본 것이다. 그래서 그는 고린도 교회에게 이렇게도 말했다.

고후 7:3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를 정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전에 말하였거니와 너희가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

고후 12:15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하므로 재물을 사용하고 또 내 자신까지도 내어 주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사랑을 덜 받겠느냐

고린도에 바울이 쓴 편지를 보면 혹독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것은 정말로 그들을 사랑해서 그들을 죄에서 건져내기 위한 것이었지, 단지 그들을 비방하거나 모욕을 주려는 목적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실 바울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빌립보 교회가 바울의 마음에 있었던 것처럼, 고린도 교회도 그의 마음에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가 많은 교회라고 해도 여전히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줄 수 있는 교회였던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 교회의 좋고 나쁨이 교회를 사랑할 혹은 사랑하지 못할 이유가 되지 않았다. 물론 교회의 상태에 따라 사랑의 모습은 달라졌다. 어떤 교회에게는 격려를 더 많이 했고, 어떤 교회에게는 책망을 더 많이 하기도 했다. 하지만, 교회에 어떤 문제가 있으니 거리를 두거나, 어떤 문제가 있으니 외면하거나, 어떤 문제가 있으니 더 이상 함께하지 않거나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것들은 선택지에 없었다. 바울은 어떤 모습으로든 교회를 사랑했다.

그럼, 도대체 바울은 왜 교회를 사랑했을까?

바울은 예루살렘을 향해서 가면서 거기서 자신이 어떻게 될지를 알지 못했다(행 20:22). 그곳에서 사로잡혀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는 에베소의 장로들을 불러 그들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의 자신의 사역을 이렇게 표현했다.

20:18–21 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19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20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21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20:26–27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27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20:31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바울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에게 가르쳤다. 자기 손으로 수고하면서 그렇게 했다(행 20:33-34). 핍박 가운데서 그렇게 했다. 공적인 자리에서 그렇게 했을 뿐 아니라 각 집에서 사적으로도 그렇게 했다. 이 모든 일들을 단순히 지식 전달을 위해서 했던 것이 아니다. 바울은 “눈물”로 그렇게 했다고 말한다(19, 31절).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듣는 자들이 그 말씀에 따라 살아가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에베소 교회를 사랑했기 때문에 한 일들이었다. 왜 그렇게 교회를 사랑했을까?

20:28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바울에게 있어서 교회는 그냥 교회가 아니었다. 교회는 내가 내 손으로 세운 교회가 아니었다. 나에게 도움을 주는 교회가 아니었다. 문제 많은 교회가 아니었다. 그 모든 교회의 수식어 앞에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이 붙어야 했다. 어떤 교회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다.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 교회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피로 사신 그리스도의 사랑의 열매가 교회다. 바울은 그런 교회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런 교회를 위해 수고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에베소 교회든, 고린도 교회든, 빌립보 교회든 마찬가지였다.

어떤 교회는 보다 더 사랑하기 쉬울 것이다. 어떤 교회는 사랑하기 좀 더 어려울 수도 있다. 교회 안에서도 어떤 성도는 더 사랑하기 쉽고, 어떤 성도는 더 사랑하기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사랑하지 않는 것은 선택지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교회를 사랑해야 한다. 특히, 사랑하기 어려울 때 이 수식어를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다. 형제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다. 교회의 어떠함에 관계 없이 교회를 사랑하자.

교회의 좋은 점을 기억하며 감사할 수 있다

다음으로 3절의 바울의 기도를 보면 그는 빌립보 교회를 생각하면서 감사했다고 말한다. 특히 그는 여기서 “나의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한다. 빌립보 교회 안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은 단지 그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이기도 하시기 때문이다. 한 교회에 속해 있는 것이다. 한 가족인 것이다.

감사의 내용은 5절에 기록되어 있다.

1:5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빌립보 교회의 첫날에 대한 말씀은 사도행전 16장에 기록되어 있다. 바울은 전도 여행 중이었고, 그의 계획은 아시아의 북쪽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울을 그곳으로 인도하지 않으셨다. 결국 환상을 통해 바울을 마게도냐 지역으로 보내셨고, 그곳에서 처음 만난 도시가 바로 빌립보였다.

새로운 곳에 가면 바울은 항상 유대인들의 회당을 먼저 찾아 그곳에서 복음을 전했다. 빌립보에서도 그렇게 하려고 했는데 회당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만큼 그곳에는 유대인의 숫자가 적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강가에 앉아 있던 여자들을 만나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고, 그 때 복음의 역사가 일어났다.

16:14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이렇게 빌립보 교회가 시작되었고, 그때부터 교회는 바울의 사역에 동역했던 것이다. “첫날부터 이제까지”라고 간단히 기록했지만, 정말 많은 기억이 있었을 것이다. 실라와 함께 감옥에서 기도하고 찬양했을 때, 옥의 문이 열리고 매였던 사슬이 풀렸던 기적을 경험했던 것이 빌립보였다. 그때 감옥에서 나와 바울이 향했던 곳이 바로 루디아의 집이었는데, 그곳에 형제들, 곧 교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서 바울은 위로를 얻었었다. 바울에게는 이런 좋은 추억들이 있었고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좋은 추억들도 있었을 것이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생각할 때 이 좋은 일들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감사했다.

그런데, 빌립보 교회를 생각할 때, 바울은 정말 감사할 것 밖에는 생각나지 않았을까? 즉, 빌립보 교회와는 오직 좋은 일만 있었을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당장 빌립보서만 읽어 봐도 그들 중에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이 있었다. 특히, 그들 중에는 복음에 열심으로 동역하고는 있는데, 같은 마음을 품지 못하고 있는 자매들도 있었다. 빌립보 교회를 생각할 때 이런 것들도 당연히 함께 생각이 났을 것이다.

사실 이런 상황은 바울의 입장에서는 (상대적으로) 더욱 힘이 빠질 수 있는 일이었다. 고린도 교회 같은 곳에 또 다른 문제가 하나 더 생기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괜찮을 수 있다. 안타깝긴 하지만 예상할 수는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부모는 어린 자녀에게 주의사항을 말해주지만, 그들이 아직 어리기 때문에 생길 수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처럼, 바울도 고린도 교회에 대해서는 그런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빌립보 교회와 같이 계속해서 좋은 모습을 보였던 교회라면 얘기가 좀 다르다. 여러 자녀를 둔 부모들 중에 가끔 “얘가 이렇게 할 줄 몰랐다”는 말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아마 빌립보 교회의 문제가 바울에게는 그렇게 느껴졌을 것이다. 당연히 빌립보 교회를 완벽한 교회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모범적인 교회라고는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기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 기대가 무너졌을 때 바울은 실망했을 것이다. 특히, 복음의 동역자로서 앞서서 일했던 사람들 간의 불화였기에, 어떤 면에서는 부끄럽기도 했을 것이다. 자신에 대한 배신처럼 느껴졌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바울은 감사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감사하기를 선택했다고 할 수 있다. 부정적인 일들을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마치 그것이 교회의 전부인 것처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좋은 점에 주목하여 감사했다. 이것이 사랑하는 사람의 선택인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사랑하려고 하는 사람은 상대방의 나쁜 점에 주목하기 전에 좋은 점을 주목한다. 그리고 감사한다.

우리는 감사를 어떤 상황에 대한 반응으로만 생각할 때가 있다. 그래서 감사할 일이 있을 때만 감사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감사는 엄밀히 말해 ‘선택’이다. 감사할 일이 있을 때도 누군가는 감사하지 않기를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감사할 일이 없는 것처럼 보일 때도 감사하기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교회를 생각할 때 부정적인 것들이 먼저 생각날 수도 있다. 그런 기억이 더 많을 수도 있고, 어떠한 하나의 부정적인 기억이 머릿속을 강하게 지배할 수도 있다. 그래서 교회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교회를 사랑한다면, 교회를 사랑하기 위해서 긍정적인 것들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대해서도 그렇게 했다. 고린도 교회의 많은 문제들을 사랑으로 지적하기에 앞서 바울은 그들에 대해서 감사했다(고전 1:4). 그들에게 언변과 지식이 풍족한 것에 대해서 감사했다(고전 1:5). 그들 중에 은사에 부족함이 없는 것에 대해서 감사했다(고전 1:7). 나쁘게 보면 감사할 거리를 짜내서 겨우 찾아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바울은 그렇게 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의 경우 바울이 감사했던 부분들은 교회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기도 했다. 지식의 풍족함은 교만으로 이어졌고, 은사에 부족함이 없는 것은 경쟁과 시기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 자체로서는 감사할 일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사람의 연약함이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가 아닌 것처럼 보이게 만들 수는 있지만, 은혜는 여전히 은혜이고 우리는 그 사실에 주목하여 감사할 수 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대해서도 그렇게 했던 것이다.

때로 우리는 이 반대를 선택한다. 부정적인 것에 집중하여 긍정적인 것도 무의미하게 만든다. 마치 사랑하지 않을 이유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것 같을 때가 있다. 교회가 보여준 최악의 모습만을 보면서 그것이 교회의 전부이고 본래 모습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심지어는 그런 교회를 비판하면서 내가 마치 높은 위치에 오른 것처럼 우쭐할 때도 있다. 우리 모두가 서로에 대하여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 연약한 우리들은 시간 문제일 뿐, 언젠가는 서로를 실망시키는 일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만 사랑하겠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누구도 사랑할 수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그 사람의 연약함이 그 사람의 전부인 것처럼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내가 보는 최악의 모습으로 그 사람 자체를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원래 저런 사람이었는데, 그동안 속았네’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어쩌면, 정말로 속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하지 않다. 내가 그동안 정말 속했다고 해도 내가 사랑하기 위해 노력한 모든 것이 무의미한 것이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내가 순종할 명령은 사랑하는 것이지, 사람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좋은 점에 집중하고 그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서로를 더 받아줄 수 있고, 용납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다.

교회의 부족함에 대해 간구할 수 있다

다음으로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위해 간구했다(4절). 빌립보 교회의 필요를 알고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 구한 것이다. 앞서 말한 감사는 긍정적인 것에 대한 사랑의 반응이라면, 지금 여기 말하는 간구는 부정적인 것에 대한 사랑의 반응일 것이다. 사랑은 긍정적인 것에 집중하고, 그것을 보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정적인 것 혹은 잘못된 것을 무조건 눈을 감고 무시하지는 않는다.

빌립보서에서도 바울은 교회 안의 죄를 바로 잡기 위해 대면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좋은 것에 집중한다는 것이 ‘좋은게 좋은거야’라는 태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조금이라도 껄끄러울 수 있는 주제는 꺼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떤 부정적인 기억은 정말로 기억하지 않는 것이 최선일 수 있다. 마음으로 용서한 일에 대해서 남아 있는 쓴뿌리가 있다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할 것이다. 때로는 진리를 말하여 죄를 바로 잡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에 앞서 가져야할 태도는 마찬가지로 사랑이다. 그래서 사랑하기 때문에 긍정적인 것에 시선을 두고 하나님께 감사하기를 선택하는 것처럼, 사랑하기 때문에 부정적인 것, 특히 어떤 연약함에 대해서는 비난과 정죄가 아닌 하나님께 간구하기를 선택해야 한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위해 간구의 내용은 9-11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11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10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11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이 기도는 에베소 교회를 위한 기도나 골로새 교회를 위한 기도와도 유사하다. 바울은 교회의 영적인 성장을 위해 기도 했고, 그 핵심에는 올바른 지식(진리)과 넘치는 사랑이 있다. 이 기도는 매우 광범위해서 모든 성도, 모든 교회를 위해서 드릴 수 있는 기도다. 우리는 모두 성장해야 할 영역이 있기 때문이다.

때로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 성장이 굉장이 더디게 나타난다. 당연히 이 정도는 할 것 같은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게 될 때가 있다. 그런 모습을 보게 되면 실망하고 좌절하기 쉽다. 비판하기도 쉽다. 그러면서 거리를 두고 멀어지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자녀의 성장을 바라보는 부모라고 생각해 보라. 부모는 누구보다 자녀의 성장을 바란다. 때로 다른 아이들의 성장을 보면서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성장하지 않는 내 자녀에 대해서 실망스런 마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모는 자녀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냥 버려두지 않는다. 어떻게든 그가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부모다. 교회도 그런 것이다.

요삼 3–4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4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

성도가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은 목회자들에게만 기쁨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성도에게도 기쁨이 된다. 그런 사람들은 더 사랑스러워 보일 것이고, 사랑하기 더 쉽다. 그럼, 그렇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불평하면 될까? 분노하면 될까? 아니다.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그들이 자랄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한다.

이런 간구의 기도는 두 측면에서 도움이 된다. 첫째는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께서 기도의 대상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실제적으로 그가 성장하도록 도울 수 있다. 다른 하나는 기도하는 내가 기도를 통해 그 사람을 더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기도하면, 그 사람을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자리에서 내려와서 그 사람을 긍휼히 여길 수 있게 된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중보자로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중보의 기도를 하는 것으로서 다른 성도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때로 교회에 대해 부정적인 이야기를 쏟아놓으면서, 이게 다 사랑해서 하는 얘기라고 포장하려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정말로 사랑해서 하는 얘기인지 아닌지 점검해 볼 수 있는 기준은 바로 교회를 위한 기도다. 하나님은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말씀하셨다. 정말로 교회를 사랑하여 염려한다면, 그 염려가 되는 일로 인해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교회의 부족함이 보인다면, 성도의 연약함이 보인다면, 그것을 정죄하거나 거기서 멀어지려고 하지말고, 위해서 기도하라. 사랑하는 자로서 그렇게 하라.

하나님으로 인해 교회에 대하여 확신할 수 있다

또 하나 이 기도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바울의 빌립보 교회에 대한 확신이다.

1: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수고에 보상하실 그날까지 빌립보 교회가 그들의 믿음을 지킬 것에 대해서 확신하며 말한다. 그런데, 이 확신은 빌립보 교회가 그동안 보여왔던 신실함에 기초해있지 않다. 물론 그것이 그들의 믿음이 참된 믿음임을 증명하였겠지만, 궁극적으로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대해서 지금까지 잘해왔기 때문에 앞으로도 잘할거라는 확신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바울이 확신을 가진 것은 처음 그들 안에서 착한 일(선한 일)을 하나님께서 시작하셨다는 사실에 기초해 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 엄청난 기대를 한다. 마치 드디어 이 땅에서 완벽한 교회를 찾은 것처럼 기뻐하고 좋아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실망할 일이 생긴다. 그렇지 않을 수가 없다. 사람은 완벽하지 않고, 사람들이 모인 교회도 그렇다.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 보인다. 그러다 보면 기대가 무너지고, 어느 순간 교회에 어떤 기대도 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있다.

이는 교회의 문제가 아니라 잘못된 기대의 문제다. 이 땅의 교회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완벽한 교회를 찾으려고 하면 실망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버려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잘못된 기대를 버리고 올바른 기대를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잘못된 기대는 사람에게 기대하는 것이다. 올바른 기대는 하나님께 기대하는 것이다.

때로 우리는 눈에 보이는 어떤 문제로 인해서 하나님에 대한 기대도 내려놓을 때가 있다. 어떤 사람은 절대로 구원 받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어떤 사람은 절대 어떤 면에서 나아지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우리가 그렇게 생각해도 괜찮을까?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 우리를 구원하는 기적을 우리 안에 일으키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도 일하고 계신다는 말이다. 성도에 대해 어떤 기대도 없다는 말은 하나님에 대한 기대가 없다는 말도 된다.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이런 면에서 기대하고 확신할 수 있다. 하나님으로 인해서 확신할 수 있다.

이 확신이 우리로 계속해서 불완전한 교회를 사랑할 수 있게 한다. 지금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온전하게 하실 교회를 기대하며, 우리는 지금의 교회도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이 그렇게 했고,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

도전

어쩌면 오늘 말씀은 불완전한 교회를 위한 변명처럼 들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금이나마 내가 이 불완전한 교회를 왜 사랑해야 하는지,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었기를 바란다.

처음 이 설교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말했던 것처럼, 어떤 이유에서든 교회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오늘날 개인주의의 영향 때문에 혹은 교회에 대한 실망 때문에 교회 사랑하기를 멈췄거나 혹은 주저하는 성도들이 있다. 그런 분들에게 마지막으로 이 말씀을 통해 도전하기 원한다.

고후 5:14–17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16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17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우리가 여전히 서로를 ‘육신을 따라’ 안다면, 사랑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이 보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않는다. 우리를 움직이는 가장 근본적이고 궁극적인 힘은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나 뿐 아니라 우리 모두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님의 그 사랑이다.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예수님을 위해 살게 하신 예수님의 그 사랑이다. 그렇게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들이 되었다. 더 이상 이전 기준으로 사랑할 사람과 사랑하지 못할 사람을 나누지 않는다. 나에게는 모두가 사랑할 사람들이다. 특히나,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 교회는 더욱 그렇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지 않는가!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로 하여금 교회를 사랑하고 싶게 만들지 않는가! 그렇다면, 그렇게 사랑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들은 그저 장애물들일 뿐이다. 오히려 내 사랑을 증명할 수 있는 도구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바라보신 것처럼 교회를 바라보자. 장애물을 이겨내고 사랑하자. 교회를 사랑하신 주님께 나도 주님처럼 교회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