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교회를 … 사랑할 수 있을까?
본문: 에베소서 5:25-27 외 여러본문
설교자: 최종혁
현실을 보자
교회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 교회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물론, 교회가 죄 때문에 핍박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어도 세상은 교회를 사랑하지 않는다. 문제는 교회 안에 있으면서 혹은 스스로 ‘그리스도인(기독교인)’이라고 말하면서 교회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이 정량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교회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당연히 모든 사람의 마음을 정확히 분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 특히 ‘사랑’은 겉으로 드러나는 결과가 있기 때문에 그 결과를 통하여 최소한의 마음을 점검할 수는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선택’이고, 그 선택은 ‘헌신’으로 드러난다.
남녀 간의 진정한 사랑을 아름답게 그려낸 구약의 아가에는 반복해서 이런 표현이 등장한다.
아 2:16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도다 …
아 6:3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으며 …
아 7:10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도다 …
사랑이 그 사람의 ‘소속’을 바꾼 것이다. 나에게 속해서 나에게만 헌신하던 사람이 그 소속을 바꾸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헌신한다. 이것이 사랑의 결과로서 드러난다. 우선 순위, 시간, 에너지, 물질, 감정 등의 사용에 있어 무엇을 선택하는지 보면, 그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헌신’으로 보이는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사랑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랑은 하는데 ‘헌신’은 하지 않는 경우는 없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오늘날 교회를 사랑하지 않는 기독교인이 많아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분명한 지표 중 하나는 교회에 소속되지 않은, 소위 말하는 ‘가나안 성도’가 늘고 있다는 통계다. 작년(2024년) 11월 목회데이터연구소에서 제공한 통계에 따르면 2012년에 11%였던 가나안 성도는 2024년에는 31%가 되었다(20%p 증가). 즉,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는 사람 거의 3명 중 1명은 교회에 출석하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연령별로 보면 20대가 44%로 가장 높은 비율을 보였고, 30-40대도 거의 40%에 가까운 비율을 보였다. 지금 추세가 지속된다면 앞으로 이 수치는 더 높아질 것이라는 의미다.
가나안 성도의 숫자가 늘고 있는 것은 교회에 대한 인식 자체가 달라진 영향이 크다. 물론 현재 교회에 소속되어 있지 않다고 해서 교회를 싫어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소속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정말로 소속될만한 교회를 찾지 못한 경우도 많다. 하지만, 교회에 소속되지 않아도 충분히 신앙 생활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기독교인 중 59%가 종교 단체에 소속되지 않아도 종교 생활은 가능하다고 답했다. ‘종교’라는 포괄적인 질문에 대한 답이긴 하지만, 기독교를 포함해서 그렇게 답한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동료 기독교인에 대한 호감도가 긍정적인 비율이 20-40대의 경우 50% 언저리다. 50%의 기독교인은 다른 기독교인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통계에 있는 얘기는 아니지만, 교회를 나가서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을 더 ‘나은 선택’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많다. 전통적인 교회, 정형화된 예배와 제도를 가지고 있는 교회는 구시대의 산물 정도로 생각한다. 그래서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 속하기 보다 그 틀을 깨고 나가서 개인의 경건 생활에 힘쓰고 사회 봉사 등에 힘쓰는 것이 훨씬 나은, 혹은 옳은 신앙 생활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우리들’끼리 모여서 예배하고 ‘우리들’끼리 교제하고 ‘우리들’끼리 섬기는 ‘교회’는 옳지 않다고 본다. 그래서 교회를 떠나야 제대로 된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런 경우 교회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얘기를 많이하고, 상대적으로 자신은 더 나은 신앙인으로 여기는 경향도 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 모든 현상에는 교회에 대한 실망이 자리 잡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교회에 대한 어떤 기대가 있었는데, 충족되지 않은 것이다. 어떤 사람은 교리적인 면에 실망한다. 교회가 왜 동성애를 그렇게 반대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타종교를 포용하지 못하는지 이해 못한다. 어떤 사람은 교회의 역할 혹은 기능적인 면에서 실망한다. 전도를 제대로 못한다거나, 지역 사회에 공헌하는 바가 없다거나 하는 것들이다. 이 교회 저 교회 많이 다녀봤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성경적인) 교회의 역할을 제대로 하는 교회는 단 하나도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관계적인 면에서 개인적으로 실망하는 경우도 많다. 교회에서 상처를 크게 받은 것이다. 성도 개인에게 상처를 받은 경우도 있고, 교회의 인도자에게 상처를 받은 경우도 많다. 특히 교회 인도자에게 상처를 받아 실망했을 때 교회를 떠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교회의 어떤 결정 때문에 상처를 받는 경우도 있다. 놀랍게도(혹은 당연하게도) 교회 사역에 더 깊숙히 참여했던 사람이 상처를 크게 받는 경우가 많다. 열심은 기대와도 비례할 때가 많고, 그것이 무너졌을 때 실망도 그만큼 큰 것이다.
이런 실망으로 인해서 교회를 완전히 떠나지는 않더라도, 제대로 된 교회의 일원이 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교회에 참석하기는 하지만 꼭 해야할 일만 하는 것이다. 최소한으로 한다. 남에게 피해주지 않고 단체 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만 한다. 시키는 것, 해야할 것은 하지만 더 열심을 내서 무언가를 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또한 딱히 다른 성도에게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 더해, 오늘날의 ‘개인주의’는 교회에 대한 어떤 실망같은 것이 없는 사람들조차도 교회에 대한 태도를 미지근하게 만들고 있다.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생활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운 것이다. 회사 생활을 그렇게 하는 것처럼 교회 생활도 딱 ‘비즈니스 관계’ 이상을 원하지 않는다. 적당히 만나서 인사하고 너무 세상적이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너무 영적이지도 않은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사람 몇 명만 있으면 된다. 굳이 성도들 사이 관계 같은 것 알고 싶지 않다. 굳이 교회 안에서 이런 저런 일들에 참여하고 싶지 않다. 교회는 딱 주일 오전에 와서 밥 먹고 커피 마시고 시간되면 집에 가면 되는 정도면 좋다. 교회에서 하는 다른 행사에 굳이 신경쓰고 싶지 않다. 교회와 관련된 것은 일주일에 한번, 하루, 반나절 정도면 충분하다.
이유가 무엇이든, 이렇게 교회에 속하지 않으려고 하고, 따라서 헌신하지 않으려고 하는 기독교인들이 늘고 있다. 그 말은 교회를 사랑하지 않는 기독교인들이 늘고 있다는 의미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현실이다.
우리는 교회를 사랑해야 하는가?
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것을 문제로 봐야할까, 아니면 어떤 사람들의 주장처럼 올바른 방향으로의 변화로 봐야할까? 성경은 이것을 분명 문제로 본다. 그것도 아주 심각한 문제로 본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예수님께서 단번에 이루신 영원한 속죄에 대해서 많은 분량을 할애해서 논한 후에 이렇게 독자들을 격려했다.
히 10:23–25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24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서로 돌아보고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고 모이기에 힘쓰는 것, 이것이 교회를 사랑하는 가장 단적인 모습이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배교로 보았다. 그래서 이렇게 경고했다.
히 10:28–31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29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30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31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교회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영적으로 더 성숙한 증거가 절대로 아니다. 오히려 그 믿음이 참된 믿음이 아닐 수 있다는 증상이다.
당연히 이것은 히브리서 저자만의 생각은 아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에 속하고 싶어하는 것은 구원 받은 자의 특징이다. 즉, 애초에 교회를 사랑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말 자체가 모순이다. 왜 그런지 생각해 보자.
우선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란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라고 불렀다(엡 6:24). 베드로는 환난 중에 있는 교회에게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라고 말했다(벧전 1:8).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라고 말씀하셨다(요 8:42). 또 제자들에게 이렇게도 말씀하셨다.
마 10: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은 사람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지금 예수님을 사랑하고 내일 더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다. 이 사실을 전제에 두면 “교회를 사랑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말 자체가 모순”이라는 자연스러운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제 성경이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는지 몇 말씀을 살펴보자. 이 말씀들은 이어지는 설교 시간을 통해 더 자세하게 다룰 것이다. 오늘은 이 관계들이 어떤 면에서 우리에게 교회를 사랑해야할 당위성을 주는지만 살펴보자.
교회는 그리스도의 소유다
마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이 말씀은 성경에서 처음으로 ‘교회’가 언급된 말씀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예수님의 소유인 교회를 예수님께서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말씀하신 교회는 넓은 의미에서 모든 구원 받은 자를 포함하는 우주적인 교회, 보이지 않는 교회를 의미하지만, 우주적인 교회의 부분 집합이 되는 지역 교회에게도 일정 부분 적용되는 말씀이다. 각 지역 교회들도 예수님의 소유다.
이 사실을 잘 볼 수 있는 또 다른 말씀이 계시록 1장의 뒷부분이다. 거기서 예수님은 일곱 촛대 사이를 거니시며 그 손에 일곱 별을 들고 계셨다. 예수님은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이며 일곱 별은 그 교회의 사자라고 설명해 주셨다(계 1:20). 교회의 주인으로서 예수님은 교회를 돌보시며 교회에 주권을 나타내신다. 베드로전서 2:9도 교회를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라고 표현한다.
교회는 다른 누구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교회는 예수님께 속했다는 것이다. 그 모습이 어떠하든 예수님은 교회를 “나의 교회”라고 칭하신다. 그리고 교회를 자신과 동일시 하신다. 그래서 예수님은 교회를 박해하는 바울에게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고 물으셨다(행 9:4). 바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예수님께는 너무나 당연한 말이었다.
바울은 예수님과 교회의 이런 관계를 알았기에 이렇게도 말했다.
고전 8:11–12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12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예수님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에게 죄를 범하는 것은 곧 예수님께 죄를 범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교회를 “나의 것”이라 하시고 그 교회에게 자신의 이름을 두셨다. 따라서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당연히 이 교회를 사랑해야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다음으로 우리가 교회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엡 5:25–27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26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교회를 사랑하셨다. 그래서 자신을 주셨다. 놀라운 것은 26절 이후의 말씀이 원인이 아니라 목적이라는 것이다. 즉, 교회가 깨끗하고 거룩하고 영광스러워서 티나 주름 잡힌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그들을 사랑하셔서 자신을 주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의 상황에서 그들을 사랑해서 그들을 그렇게 만드시려고 자신을 주셨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롬 5:6-10).
따라서, 이렇게 교회를 사랑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리스도가 사랑하시는 교회도 사랑해야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기도다
또한 교회는 그리스도의 기도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로 시작하는 기도문을 ‘주기도문’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문이라는 의미이고, 진짜로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주기도문은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되어 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에수님은 십자가를 앞두시고 제자들과 그들을 통해 시작될 교회를 위해 기도하셨다. 그 기도의 핵심 내용은 이것이라 할 수 있다.
요 17:20–22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21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교회를 위한 예수님의 기도는 교회가 서로 사랑하여 하나되는 것이었다. 에베소서 2장도 보면 이런 하나된 교회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처음부터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복음에 대해서 쉽게 오해하는 것 중의 하나는 복음을 나 개인에 대한 것으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복음은 개인에 대한 것이 맞다. 누가 나를 대신해서 구원을 받아주거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음의 모든 것이 “나”에 대한 것임을 알고 인정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끝)는 아니다. 에베소서 2:1-10은 개인의 구원에 대해서 말하지만, 11절 이후의 말씀은 교회에 대해서 말한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화평만 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이의 화평도 되신다. 그래서 구원 받은 자들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한 새 사람”이 된다(엡 2:15). 예수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간다(엡 2:22). 이것이 구원의 목적인 것이다. 예수님은 이 하나됨을 위해 기도하셨다.
따라서,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예수님의 기도에 따라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가족이다
끝으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가족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루는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님을 찾아 왔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 12:49–50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50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여기서 예수님은 영적인 가족의 우선순위를 강조하셨다. 이 가족은 육신의 혈통에 따르지 않는다.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 받았는지가 중요하다. 성경은 이렇게도 말한다.
히 2:11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은 자들을 예수님은 부끄럼 없이 형제라고 부르신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상관이 없다. 사랑스럽든 아니든 상관 없다. 유능하든 그렇지 않든 상관 없다. 구원 받은 자는 어떤 차별도 없이 영적인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집”이며(딤전 3:15) “하나님의 권속”이 되는 것이다(엡 2:19).
따라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예수님의 가족이라면, 다른 가족의 구성원을 사랑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지 않는다. 고민은 ‘어떻게 사랑할지’가 되는 것이 마땅하다.
정리하면 이렇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교회를 사랑해야 한다. 여기에 교회를 사랑해야할 당위성이 있다. 예수님이 교회와 자신을 동일시 하시고, 예수님이 교회를 사랑하여 자신을 주셨고, 예수님이 교회의 하나됨을 위하여 기도하셨고, 예수님이 교회를 가족이라 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교회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
여기에 하나를 덧붙이자면, 성경은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라 말하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데, 그 사람의 일부만을 사랑하고 나머지는 미워할 수는 없다. 전부를 사랑해야 한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마땅히 교회를 사랑해야 하고, 교회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교회를 사랑할 수 있는가?
여기서 이어지는 질문은, 그럼 우리가 교회를 사랑할 수는 있느냐는 것이다. 교회를 사랑해야하는 것은 알겠는데, 사랑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한 답이 필요하다.
교회를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교회에 큰 실망을 한 경우다. 교리적인 이유가 됐든, 실천적인 이유가 됐든, 개인적인 이유가 됐든, 어쨌든 큰 실망을 하고 상처를 받은 경우 교회를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개인의 잘못보다 교회의 잘못이 더 클 수도 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납득할 수 있는 이유가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어떤 이유도 교회를 사랑하지 않거나 교회를 사랑할 수 없는 이유는 되지 않는다. 이렇게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있다. 성경은 교회가 사랑스러우니 사랑하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성경은 교회가 사랑할만하니까 사랑하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즉, 애초에 교회의 어떠함이 교회를 사랑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물론 궁극적으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흠없고 거룩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나중의 일이다. 현재 이 땅의 교회는 그런 신부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어떤 목사님의 비유에 따르면 교회의 진짜 아름다움이 예식장에 들어선 신부의 모습이라면, 지금 교회의 모습은 그날 아침 제대로 잠도 못자고 부스스 깨어난 신부와 같다.
교회에 무슨 특별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 땅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특징을 교회도 그대로 가지고 있을 뿐이다. 즉, 죄의 특징을 교회도 가지고 있다. 교회는 구원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지만, 이 땅의 교회는 상태적인 측면에서는 여전히 죄인들의 모임이다. 그래서 교회는 완전하지 않다. 사랑스럽지 않다. 당연히 교회의 이런 연약함, 추악함, 더러움은 오늘날의 문제만은 아니다. 신약 성경을 읽어 봐도 교회 안에는 이런 문제들이 가득했다.
예루살렘 교회의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다른 사람들처럼 헌신적이게 보이고 싶어서 거짓말을 했다가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위선적인 신앙은 그 때도 있었던 것이다. 교회의 규모가 커져갈 때 헬라파 과부들이 구제에서 빠지는 일이 있었고 이로 인해 헬라파 유대인들은 히브리파 유대인들을 원망하는 일도 있었다. 교회 안에 계파가 생기고 갈등이 생긴 것이다.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은 선교사였던 바울과 바나바는 마가 요한을 선교 여행에 동행하는 일로 다투고 나서 서로 따로 선교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바울’이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살고 싶다고 하는 그 바울도 다른 성도와 다투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고린도 교회도 보라. 교회의 성도들은 은사를 통해 섬기는 것이 아니라 은사를 자랑했다. 서로 더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을 나타내야하는 만찬 예배에는 오히려 빈부의 격차가 드러났다. 가난한 자들이 교회에서 수치를 당했다. 그래서 그들은 모임은 유익이 되지 못했고 오히려 해가 되었다. 그들은 세상의 법정에서 서로 소송하며 싸우기도 했다. 세상에서도 보기 힘든 음행의 문제가 그 안에 있었다. 선택할 수 있다면 절대로 가고 싶지 않은 교회가 고린도 교회였을 것이다.
갈라디아 교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 율법의 행위를 더한 거짓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 결과 이방인과의 교제를 거부하는 일도 있었다. 빌립보 교회에는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있었다. 그 둘은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자들이었지만 서로 하나되지 못한 문제가 있었다. 계시록에 나오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생각해 봐도 그렇다. 교회들은 각자의 연약함을 가지고 있었고 주님의 책망을 받아야 했다.
우리교회는 완전한 교회일까? 오순절에 성령님께서 오시면서 시작된 교회는 그 후로 언제든 완전했던 적이 없다. 어떤 사람들은 ‘초대교회’가 마치 완전했던 교회였던 것처럼 생각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전혀 그렇지 않다. 이상한 일이 아니다. 교회는 신분적으로 본다면 의인들의 모임이지만, 상태적으로 본다면 여전히 죄인들의 모임이기 때문이다. 단지 용서 받은 죄인들의 모임일 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교회 안에 죄가 있는 것이 옳다는 말은 아니다. 옳은 것도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추구해야할 것도 아니지만, 현상적으로 교회 안에 죄가 있는 것을 이상하게 볼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구원 받은 성도 개개인이 죄와 싸우고 있기에 그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도 그런 것 뿐이다.
성경이 “서로 용납하라”, “서로 용서하라”고 명령하는 이유는 그럴 일이 있기 때문이다. “서로 짐을 지라”는 명령도 마찬가지다. 만약 이 땅의 교회가 완전했다면, 이런 명령은 애초에 필요하지 않았다.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 하나되라는 명령이 있는 이유도 그렇게 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이 우리를 실망하게 만든다. 우리에게 큰 상처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우리가 교회를 사랑하지 못할, 사랑하지 말아야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앞서 봤던 것처럼 우리가 교회를 사랑해야 할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교회가 아닌 예수님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교회의 어떤 모습을 봤더라도, 어떤 경험을 했더라도, 그것 때문에 교회를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그와 상관 없이 우리는 교회를 사랑해야 하고, 또한 사랑할 수 있다.
따라서 “교회를 더 이상(이제는)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 상 교회를 사랑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다. 능력의 측면이 아니라 의지적 측면에서 하는 말이다. 특별히 그런 면에서 “교회를 … 사랑할 수 있을까”라고 묻는 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어떻게 보시는지를 보라. 예수님의 시선으로 교회를 본다면, 우리는 교회를 사랑할 수 있다.
교회를 사랑하기 어려울 수는 있다. 아니, 확실히 하자면, 교회를 사랑하기는 어렵다. 교회라는 개념 자체는 사랑하기 쉬울 수 있지만, 실제 교회는 사랑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교회를 사랑할 수 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더 사랑하기 원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다면,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교회도 우리는 사랑할 수 있다.
계속되는 교회에 대한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이 사실을 거듭 확인할 것이다. 특히, 예수님께서 교회를 어떻게 보시는지를 집중할 것이다. 예수님의 시선으로 교회를 바라볼 때, 우리도 예수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시선으로 교회를 바라보라. 그렇게 교회를 바라볼 수 있기를 하나님께 구하라. 우리는 교회를 사랑할 수 있다.
도전
우리 교회에 무슨 일이 있나라고 궁금해할 수 있지만,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이 우리와 전혀 관계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 교회의 성도들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교회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성도들의 마음이 전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보여지고 있는 현상은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우리도 자신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를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어쨌든 성도 수가 늘고 있으니 괜찮은 것이 아니다. 주일학교나 중고등부가 체계적으로 잘 운영되고 있으니 괜찮은 것이 아니다. 좋은 설교가 선포되고 있으니 괜찮은 것이 아니다. 일주일에 한번은 만나서 영적인 교제를 하고 있으니 괜찮은 것이 아니다. 교회의 성도 수가 줄어드는 것보다, 교회를 사랑하는 성도가 줄어드는 것이 문제다. 성도들의 교회에 대한 사랑이 줄어드는 것이 문제다. 만약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라면 우리는 이미 쇠퇴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존 맥아더, <하나님이 계획하신 교회>, 15-17. “모든 교회는 성장과 쇠퇴라는 동일한 굴곡을 거친다. 첫 세대는 대개 진리를 발견하고 확립하기 위해 노력한다. … 둘째 세대는 진리를 유지하고 전파하기 위해 노력한다. … 하지만 세 번째 세대는 교회 사역에 그토록 무관심할 수가 없다. …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힘써 노력해서 이룩한 것을 당연시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이것이 두렵다. 목회 사역에서 가장 처리하기 힘든 일은 바로 무관심이다. 교회를 세우는 일에 동참하지 않은 사람들이 모든 것을 당연시하는 것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그들은 싸움에 동참하지 않은 관계로 대가를 치른 적도 없고, 그러니 값진 승리의 기쁨을 맛보지도 못했다. 그들은 과거의 싸움이 어땠는지 알지 못한다. … 초창기 한 젊은 부부는 교회에 헌신하기 위해 신혼 여행을 포기하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 새로 온 교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일에 더욱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상황인데도 사소한 일로 법석을 떨거나 시간을 낭비하곤 한다. 아울러 무관심은 비판을 낳는다. 모든 것을 당연시하는 사람은 조그만 흠이라도 발견하면 비판을 일삼는다. … 그런 사고방식은 절대로 바람직하지 않다. 하나님은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에 훌륭한 교인을 많이 허락하셨다. 참으로 감사할 따름이다. 하지만 편리할 때만 교회에 오는 교인들도 있다. 그들에게 교회 출석은 삶의 우선순위 가운데 끄트머리를 차지한다. 그들은 주말에 다른 곳에 갈 여유가 없을 때만 교회에 나온다. 헌신의 필요성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또 어떤 교인들은 주일 저녁에는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 일주일에 설교 한 편이면 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교인들의 안일함을 깨우치려면 일주일에 2백편의 설교도 모자란다.”
우리 교회에 대해서 동일한 감사의 마음과 두려움의 마음이 있다. 우리 각자가 자신을 돌아보고 예수님에 대한 사랑, 교회에 대한 사랑을 회복하지 않으면 에베소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경고가 우리의 현실이 될 수 있다.
계 2:4–5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주인에게 쓰임 받지 못하는 종은 얼마나 비참한가. 신랑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신부는 얼마나 불쌍한가.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할 것이 있다면 회개해야 한다. 변화될 것이 있다면 변화되어야 한다. 교회를 사랑하자.
아마 오늘 같은 말씀이 큰 부담이 될 수 있다. 어떻게든 시간을 더 내서 교회일을 뭔가 더 해야할 것 같을 수 있다. 실제로 그런 것이 필요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느냐 마느냐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것이다.
앞서 아가서의 말씀을 통해 사랑하는 사람은 소속을 바꾼다고 말했다(나는 그에게 속하였고, 그는 나에게 속하였다). 그래서 사랑하는 것은 나의 것 중 어떤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나를 주는 것이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사랑의 헌신이다.
고린도전서 13장 1-3절이 이 둘의 차이를 잘 구분해서 말한다. 나를 주는 것과 나의 것을 주는 것의 차이다. 때로는 나의 것을 주는 사람이 더 많이 주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 이상 무엇을 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여전히 성경은 그것을 사랑과 구분한다. 드라마 같은 것을 보면 가끔 부부가 다투는 장면이 연출될 때가 있다. 그때 한쪽에서 말한다. 내가 더 이상 뭘 어떻게 해야하냐고. 돈도 잘 벌어오고, 바람 피운 적도 없고, 기념일도 다 챙기고, 애도 잘 보고 … 뭘 더 원하냐고 묻는다. 그럼 상대방이 이렇게 답한다. “당신이요.”
교회를 사랑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내가 뭔가를 더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무엇을 하든 그것을 사랑으로 하는 것을 의미한다(고전 16:14). 내가 가진 어떤 것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나를 나누는 것이다. 주님이 그렇게 교회를 사랑하셨다. 그리고 나를 그렇게 교회를 사랑할 수 있게 만드셨다. 우리는 교회를 사랑할 수 있다. 교회를 사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