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본문: 에베소서 5:25-30 외 여러본문

설교자: 최종혁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위해 이렇게 기도했다.

엡 3:18–19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 길이, 높이, 깊이를 말하는 데, 각각의 차이를 강조하려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크기’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성도들이 알기를 위해 기도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바울의 말 자체에 역설이 있다는 점이다. 바울은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깨달아 알기’를 구하면서 그 사랑이 ‘지식에 넘친다’고 표현한다. 알 수 없는 것을 알기를 구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가 다 알 수 없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한계를 뛰어 넘는다.

그럼, 어차피 알 수 없는 것을 왜 알기를 구할까? 가늠할 수 없다고 해도, 막상 가늠해 보지도 않으면 얼마나 큰지를 느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우주가 크다는 것은 누구나 알지만, 우주가 얼마나 큰지를 재보려고 하면 그제야 우주가 얼마나 큰지 실감이 난다. 그리스도의 사랑도 그렇다. 우리는 습관처럼 혹은 마치 정해진 표현이 있는 것처럼 “크신 사랑”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렇게 말만하면 얼마나 큰지 알지 못한다. 재보려고 해야 그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안다. 그래서 오늘은 함께 이 사랑이 얼마나 큰지 재보려고 한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측량해 보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그렇게 사랑스럽게 바라보셨듯, 우리도 그렇게 교회를 바라볼 수 있기를 원한다.

엡 5:25–30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26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28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29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 30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

본문에서 찾을 수 있는 2개의 기준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측량해 보려고 한다. 2개의 ‘자’라고 표현해도 될 것이다. 첫째는 자기 희생의 자이고, 둘째는 상대 유익의 자다. 사랑의 본질적 특징이 자기를 희생하여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니, 적절한 자일 것이다.

자기 희생의 자
지불한 대가
사랑의 크기를 측량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기준은 그 사람이 사랑의 대상을 사랑하기 위해 어떤 대가를 치뤘는지를 보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그 대상을 위하여 무언가를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대가는 다양할 수 있다. 재물이 될 수도 있고, 시간이 될 수도 있다. 주말이면 항상 집에만 있던 사람이 자꾸 밖에 나가면 우리는 그 사람에게 특별한 일이 생겼다는 합리적인 의심을 할 수 있다. 재능 같은 것이 될 수도 있다. 자꾸 뭘 대신 해주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 것들이 사랑의 크기를 측량할 수 있는 기준이 된다.

그래서 가끔은 사랑하는 사이에서 그런 것을 가지고 비교하며 다투는 일도 있다. 누구는 이렇게까지 한다는데, 당신은 그 정도는 아니어도 이 정도는 해야하는 것 아니냐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런 식의 비교는 사실 옳지 않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대가를 지불한다는 것은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사실이기는 하다. 이 대가는 어떤 면에서는 ‘손해’이기도 하고 ‘허비’이기도 하다. ‘사랑’이 아니었으면 아예 하지 않거나 그에 합당한 무엇(값)을 요구할만한 일이기 때문이다. 제 3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때로는 어리석게까지 느껴지는 그런 일을 사랑하는 사람은 한다.

예수님도 교회를 위해 그런 일을 하셨을까?

엡 5:25 …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예수님은 교회를 사랑하셔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 여기서 자신을 주셨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행하신 모든 일들이 해당될 수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자기 목숨을 내어 주신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요일 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

예수님은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라고도 말씀하셨다.

마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에베소서 5장 2절도 예수님께서 자신을 버리신 이유를 ‘사랑’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엡 5: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예수님은 교회를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그들을 건지시려고 자기 목숨을 버리신 것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목숨을 내주는 것은 얼마나 큰 대가일까? 목숨은 사람이 줄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나중에 속한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말씀도 하셨었다.

요 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남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주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 어떤 것은 우리가 굳이 사랑하지 않아도 남에게 줄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어느 정도의 선의는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도 베풀 수 있다. 내가 크게 손해 보지 않고, 그렇게 해서 내가 얻을 것도 있을 때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사랑하지 않으면 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내가 큰 손해를 감수하면서 주는 것들은 사랑하기 때문에 주는 것이다. 목숨은 절대 남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목숨을 준다는 것은 나를 전부 주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목숨을 버리는 사랑이 가장 큰 사랑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교회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주시는 것으로 가장 큰 사랑을 보여 주셨다.

희생한 가치
다음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희생한 가치의 측면이다. 우리는 같은 희생이라고 해도 그 가치를 다르게 느끼는 면이 있다. 옳다 그르다를 떠나서 그렇게 느끼는 것이다.

수류탄이 떨어졌는데, 그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지휘관이 자기 몸으로 그 수류탄을 덮쳐서 자신을 희생하여 나머지 사람들을 구했다고 하면, 우리는 그 숭고한 희생에 경의를 표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갓입대한 젊은 병사가 같은 일을 했다고 하면 느낌이 다를 것이다. 병사의 희생이 훨씬 더 크게 느껴질 것이다. 단풍 구경을 가던 중년의 사람들이 탄 버스 전복 사고보다 수학 여행을 가던 중고등 학생들이 사고를 당한 것을 일반적으로 우리는 더 안타깝게 여긴다. 사람의 생명의 가치에 근본적인 경중이 있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이 포기한 것, 잃은 것의 측면에서 그 차이를 느끼는 것이다.

예수님의 희생을 이런 가치의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예수님은 교회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다. 목숨을 내주는 것, 그 자체가 큰 사랑이다. 그런데 그것을 고린도후서 8장 9절은 이렇게 표현했다.

고후 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에서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은 부요하신 분이시고 우리는 가난한 자들이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과 우리의 가치가 1:1로 대응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우리 입장에서 기분 나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예수님은 우리보다 훨씬 더 가치있는 분이시다. 그분은 부요하신 분이시고 우리는 가난한 자들이다. 부요하신 예수님께서 가난한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려고 가난하게 되셨다. 그럼 예수님은 얼마나 부요한 분으로서 얼마나 가난하게 되셨을까? 우리는 얼마나 가난한 자들이었을까?

일단, 여기서 말하는 부요함과 가난함은 ‘물질’과는 관계가 없다. 예수님께서 어떤 재물을 우리에게 주셔서 예수님은 그만큼 가난해 지고 우리는 그 만큼 부유해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구원 받은 자들은 전부 물질적으로 부요하게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는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부요함과 가난하게 되심은 빌립보서 2장에서 가장 잘 묘사한다.

빌 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얼마나 부요하셨는가?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모든 것을 가지신 분이시다. 아무 것도 부족한 것이 없으시다. ‘아무 것도’라는 것은 정말로 아무 것도를 의미한다. 예수님은 능력이 부족하지 않으시다. 지혜가 부족하지 않으시다. 먹을 것이 필요하지도 않으시지만 혹 그렇다고 해도 먹을 것이 부족할리도 없다. 세상의 모든 것이 예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시 50:10–12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뭇 산의 가축이 다 내 것이며 11산의 모든 새들도 내가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12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아니할 것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욥 41:11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하여금 갚게 하겠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당장에는 부족하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부족하게 될 수도 있을까? 그렇지도 않다. 예수님이 가지신 것은 ‘무한’하기 때문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생각해 보라.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는 수천명의 사람이 먹기에는 턱 없이 부족한 양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것으로 모든 사람을 배부르게 먹이셨다. 그렇게 먹고 남은 것을 모으니 12 바구니가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오히려 양이 늘어난 것이다. 이것이 창조주로서 예수님의 부족함 없으심이다. 무에서 유를 만드시기에, 예수님은 언제든 원하는만큼 가질 수 있으시다.

그래서, 사실 예수님의 부요하심은 예수님이 현재 얼마나 가지고 계신지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로 설명하는 것이 맞다. 앞서 읽은 빌립보서 말씀은 예수님을 “근본 하나님의 본체”라고 말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라고 말하는 것이다. 골로새서에서도 이렇게 말한다.

골 1:19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골 2: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예수님은 얼마나 부요하신가? 간단히 말해 하나님만큼 부요하시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런 예수님께서 가난하게 되셨다.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닌 존재가 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서 가지신 특권을 내려놓으신 것이다.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고 자신을 비우셨다. 그리고 인간의 몸을 입고 사람과 같이 되셨다. 그저 잠깐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나타나셨던 것이 아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셨다. 한없이 연약한 아기로 이 땅에 태어나셨다.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셨다. 부모가 그를 먹이고 입혀주어야 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혼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모습이 상상이 되는가! 모든 것을 가지신 하나님이 인간이 주는 음식을 기다리는 모습이 상상이 되는가! 영광 중에 계신 예수님의 모습을 알고 있었던 천사들에게 있어 예수님의 이런 낮아지심, 가난하게 되심은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그렇게 하셨을까?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렇게 하셨다. 교회를 사랑하셔서 그들을 대신하는 희생제물이 되시기 위해 사람이 되셨다. 그리고 실제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부요하심보다 오히려 이런 가난하심이 더 익숙해서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충분히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그냥 그런가보다 한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보라. 앞서 예를 들었던 수류탄에 몸을 던진 젊은 병사가 사실은 그 부대의 가장 높은 지휘관의 아들이었고, 굳이 그런 훈련을 받지 않아도 되는데 자원해서 훈련을 받다가 그렇게 되었다면, 우리는 더 큰 안타까움을 느낄 것이고 그 희생이 더 크게 느껴질 것이다.

예수님은 태초부터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하나님이셨다. 예수님께 부족한 것은 없었다. 그런데 이 땅에서 예수님은 가난하게 되셨다. 세상의 모든 것이 나의 것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이, 배가 고프셨고 목이 마르셨다. 모든 존재하는 것에 생명을 주신 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사람의 생명이 어떤 동물의 생명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 성경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진리는 오직 사람 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다른 어떤 동물과 비교할 수 없는 생명의 가치를 가진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생각해 보라.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특별한 생명의 가치를 가진다면,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어떠시겠는가. 예수님은 그 무한한 부요하심을 내려 놓으시고 가난하게 되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셨다. 우리가 얻은 이 부요함에 대해서는 뒤에서 살펴보고, 여기서는 그렇게까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가 어떤 자들이었는지에 대해서만 생각해 보자.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다.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랑하시기 전 혹은 사랑 하실 때 우리는 어떤 자들이었냐는 것이다.

롬 5:6–7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는 연약한 자들이었고 경건하지 않은 자였다. 성경이 이 사실을 지목하는 이유는 우리가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7절이 이 사실을 분명히 한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는 않지만 있다.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도 있기는 하다. 그들은 그래도 ‘가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쉬운 일은 아니다. 최소한 의인이든, 선인이든 되어야, 누군가 대신해서 죽어주는 일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 있어 우리는 어떤 사람들인가. 6절은 먼저 우리는 연약하다고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능력이 없었다는 말이다. 우리가 가진 어떤 것으로 하나님의 호의를 얻어낼 수도 없었다. 우리는 또한 경건하지 않았다. 하나님께 나아갈 능력이 없는 것 뿐 아니라 나아가려고 하지도 않는 자들이었다는 말이다. 로마서 1장에 따르면 하나님을 알지만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않고 감사하지도 않는 자들이 우리들이었다. 우리는 스스로 지혜롭다는 착각에 빠져서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을 섬겼다. 그런 경건하지 않은 우리에게 로마서 1장 18절은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부터 나타난다고 말한다. 우리에게 합당한 것은 하나님의 진노인 것이다.

한마디로 8절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말한다. 그나마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는 의인이나 선인도 아닌 것이다. 그런데, 그 사실이 하나님의 사랑이 참된 사랑임을 확증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사랑이 아니면 설명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랑의 범주를 생각해 보면, 사랑으로도 설명이 불가능한 일을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10절은 이렇게 말한다.

롬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

우리는 단순히 나쁜 일을 한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쁜 일을 한 원수들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에서부터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원수인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담당하셨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드리신 화목제물이고, 그렇게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하게 하셨다.

여기 로마서 5장 10절 말씀에 예수님과 우리의 차이가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들이다. 아들이 원수를 위해 죽은 것이다. 앞서 수류탄에 몸을 던진 젊은 병사의 예를 다시 적용해 보자면, 나머지 병사들은 그의 아버지를 배신하여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을 살리기 위해 아버지 지휘관이 젊은 병사를 보냈고, 젊은 병사가 그들을 대신해서 죽은 것이다. 예수님은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그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하셨는데, 실제로 자신은 원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것이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며, 우리가 어떤 자들인지를 생각해 보면, 예수님께서 베푸신 사랑이 얼마나 큰지 조금은 가늠할 수 있다.

자발성
다음으로 생각해 볼 것은 자발성이다. 앞서 말한 이 모든 일들을 어쩔 수 없이, 강요에 못이겨서 했다고 한다면 그것을 사랑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랑처럼 보이는 행위는 한 것이지만 실제로 사랑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모든 일을 자발적으로, 기꺼이 하셨다.

에베소서 말씀에서도 이런 사랑의 측면을 볼 수 있는 표현이 있다.

엡 5:29–30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 30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

이 말씀은 양육과 보호를 중점으로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당연함도 함께 말하고 있다. 사람은 자기를 미워하지 않는다. 당연히 사랑한다. 예수님도 교회에 대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교회를 자기 몸으로 보시기에 예수님은 교회를 어쩔 수 없이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기꺼이 사랑하신다.

이 자발성에 대해서는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하신 말씀이 있다.

요 10:17–18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18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은 예수님이 강요에 의해서 하신 것도 아니고, 외부의 어떤 압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신 것도 아니다. 모든 권세는 예수님이 가지고 계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스스로”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기를 “선택”하셨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그린 영화들은 대부분 여기서 실패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장면을 보는 사람들이 더 감정을 이입하고 안타까워할 수 있게 묘사한다. 그래서 예수님을 부당한 재판, 종교 지도자들의 계략, 빌라도의 비겁함, 선동된 군중의 무지함, 로마 군사들의 광기에 희생된 선량한 분으로 묘사하는데 주력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원하지 않는 고난을 당한 분처럼 그려진다. 이 모든 것들이 거짓은 아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사람들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원하지 않는 십자가로 끌려가셔서 죽임을 당하신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궁극적으로 그들이 예수님의 목숨을 빼앗은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목숨을 버리셨다.

이 사실을 정확히 알 수 있는 장면이 바로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잡기 위해 군변들을 보낸 그 장면이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입맞춤으로 자신을 팔 것을 이미 아셨다. 하지만 그가 원하는대로 하게 그냥 두셨다. 베드로가 군병들에게 반항하며 칼을 휘둘러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쳐서 떨어뜨렸을 때, 예수님은 그 귀를 고쳐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 26: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그동안 병자를 고치고 물 위를 걷고 바람과 파도를 잔잔하게 했던 예수님의 능력이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여전히 그 모든 능력을 가지고 계셨다. 원하시면 당장이라도 천사들을 보내서 이 상황을 깨끗이 정리할 수도 있으셨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신 것이다. 이제는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마태복음 말씀에서 예수님은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말씀하셨다(마 26:55). 그 때는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예수님은 그들이 그렇게 하게 내버려 두신 것이다.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권력과 무력에 의해 십자가로 끌려가서 죽으신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 예수님은 스스로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셨고 스스로 십자가에 달리셨다. 예수님의 양, 교회를 위해서, 그들을 사랑하셔서 그렇게 하셨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교회를 위하여 치르신 희생이다. 예수님은 나만 위해서 이 희생을 치르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그렇게 하셨다. 그래서 바울은 음식으로 형제를 넘어지게 하지 말 것을 명하면서 그 형제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라고 표현했다(롬 14:15).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사실이 내가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도 결정하는 것이다. 요한도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말했다(요일 3:16). 어떤 면에서는 좀 특이한 논리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도 그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물론 성경은 그것도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의 그 큰 사랑을 알았으면 형제를 그렇게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한다. 교회를 그렇게 사랑하라고 말한다. 예수님의 희생의 사랑을 생각할 때, 내가 받은 사랑이 크다는 데서 생각이 멈추면 안되는 것이다. 그 사랑은 우리에게 부어졌고, 예수님은 우리가 그 받은 사랑처럼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신다.

상대 유익의 자

다음으로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교회에게 끼친 유익을 생각해 보자. 예수님의 자기 희생으로도 충분히 그 사랑의 크기를 잰 것 같지만, 예수님께서 그 희생으로 우리에게 이루신 일들을 보면 더욱 놀랄 일들이 있다.

거룩, 거룩, 거룩
먼저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엡 5:26–27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세 종류의 거룩을 찾아 볼 수 있다. 첫째는 칭의에 해당되는 신분적인 거룩이고, 둘째는 성화에 해당되는 상태적인 거룩이다. 그리고 셋째는 그 신분과 상태가 일치되는 온전한 거룩에 이르게 되는 영화다. 궁극적으로 교회는 그리스도 앞에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흠이 없는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워질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자기 피로 교회를 깨끗하게 하셨고, 지금은 교회를 거룩하게 하고 계시다.

‘거룩’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어울리는 단어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베드로가 그랬던 것처럼 그 앞에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는 것 뿐이었다(눅 5:8).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우리와 같이 되셔서 우리 죄를 속량하셨다. 그리고 우리를 거룩한 자들, 성도라고 칭하신다.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이끄셨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죄인인 우리의 자리에 서셨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말씀을 깨닫고 말씀에 순종하며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가는 삶을 살 수 있는 것도 우리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계속해서 거룩하게 빚어가고 계시기 때문이다. 결국 교회는 예수님의 신부로서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그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성경은 말한다(계 19:8). 그 옷을 준비하게 하시는 것도 결국은 신랑이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인 것이다.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았던 ‘거룩’이라는 아름다운 옷을 우리가 입을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다.

양육과 보호

엡 5:29–30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 30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

여기서 바울은 자기 몸을 사랑할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어떻게 자기 몸을 사랑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사람은 자기 몸을 양육하고 보호한다. 양육하는 것은 필요를 공급하는 것이고, 보호하는 것은 아끼는 것, 소중히 여기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우리 몸에 대해서 그렇게 한다. 잘 먹이고 입힌다. 너무 잘 먹이고 입혀서 탈일 정도다. 아프면 병원에 데려가 준다. 누구보다 나를 걱정해 준다. 누가 나를 비난하거나 안좋은 것을 말하면 신경이 곤두선다. 누구보다 나를 잘 이해한다. 나에게 나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 그런데 예수님은 교회를 그렇게 양육하고 보호하신다는 것이다.

몇 가지 측면에서 그렇다. 먼저 예수님은 교회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신다.

마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빌 4: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예수님은 염려하는 제자들에게 “하물며 너희일까보냐”고 물으셨다. 하나님은 새도 먹이시고 들풀도 입히신다. 그런 분께서 우리에게 관심이 없으시고 우리 필요를 모른 체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 사랑으로 우리를 그런 위치에 올려 놓으셨다.

예수님은 또한 교회를 아끼셔서 위하여 기도하셨다.

요 17:15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교회와 끝까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도 하셨다(“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지금도 예수님은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신다. 또한 교회를 위하여 성령님을 보내주셨고, 결국 다시 교회를 데리러 오실 것이다.

요 14: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예수님께서 교회를 보호하고 아끼신다는 가장 분명한 예시는 다메섹으로 가던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하셨던 말씀일 것이다. 예수님은 교회를 핍박하던 바울에게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물으셨다. 예수님은 교회에 자기 이름을 두셨다. 교회를 자기 몸으로 생각하고 양육하고 보호하신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교회는 이런 유익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신분의 변화
하지만 아마도 예수님께서 교회에게 끼치신 유익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신분의 변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몇 가지만 살펴보자.

요 15: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우리를 종이 아닌 친구로 삼으셨다.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게하신다.

요일 3: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롬 8:16–17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7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진노에서만 구원 받을 수 있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다. 하나님의 상속자로 삼으셨다. 그래서 놀랍게도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고 성경은 말하기도 한다(고전 3:21).

히 2:11–12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12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의 문제만 없애 주신 것이 아니다.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동안의 죄는 용서해 주고 이제부터는 최대한 의롭게 살아보라고 하지 않으셨다. 우리를 의인으로 만드셨다. 거룩하게 만드셨다. 그런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그런 우리가 모인 교회 중에서 하나님을 찬송하신다. 우리의 예배 인도자가 되어 주신다는 말이다. 우리가 함께 모여 하나님을 찬양할 때, 예수님은 기꺼이 우리 중에서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신다.

우리는 가치 있는 자들일까, 가치 없는 자들일까? 우리가 가치 있는 자들이어서 예수님께서 사랑하셨다는 생각에 대해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래도 나은 자들, 그나마 괜찮은 자들도 아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내어 주시고 구원하신만큼 가치 있는 자들이기도 하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 자매들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그런 존귀한 자들이 되게 하셨다.

우리가 어쩌다가 이런 사람들이 되었는가. 다른 이유가 없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을 희생하시고 우리에게 이런 유익을 끼치셨다. 한없이 부요한 자로서 가난하게 되셔서 우리를 이렇게 부요한 자로 만들어 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이 이렇게 크다.

도전
이런 예수님의 사랑을 내가 받았다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직 늦지 않았다. 예수님은 여전히 그 사랑 안으로 당신을 부르고 계신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그 크신 사랑을 맛보고 기뻐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 사랑 안에 들어온 모든 사람들은 반드시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베푸신 사랑은 우리의 지식에 넘친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이다. 우리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사랑을 하나님은 창세 전에 생각하셨고 그 사랑을 실행하셨다. 우리가 그 사랑을 받았다. 내가 알고 경험한 사랑과 동일한 사랑을 알고 경험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바로 교회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교회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떤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다운 일, 곧 경건함이다.” 정말 그렇다. 우리가 추구하는 경건은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는 것, 곧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교회를 사랑하셨다면 우리도 그렇게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 모여서 함께 예배하고 교제하기에 힘써야 한다. 은사에 따라 섬겨야 한다. 서로 용납하고 받아 주어야 한다. 어떻게든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아 이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사랑 받은 자로서 우리가 할 일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인 이 교회가 나의 사랑, 우리의 사랑이 되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