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과거에서 배우라 (2)
본문: 유다서 1:5-10
설교자: 최종혁
유다가 상기시킨 과거의 세 사건은 분명한 공통점이 있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던 사람들에 의해 하나님의 은혜는 이용되었고 하나님의 주권은 무시되었다(4절). 이것은 불신(불경건)으로, 반역(불순종)으로, 방탕(부도덕)으로 드러났다. 그 결과는 하나님의 피할 수 없는 심판이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 중에 있었지만 믿지 않는 자들을 광야에서 멸하셨다(5절). 하나님은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섬기는 특권을 가졌으면서도 더 높은 자리를 원해서 하나님을 반역한 천사들을 심판의 때까지 결박하여 가두셨다(6절). 하나님은 하나님의 동산과 같이 풍요롭고 아름다웠던 소돔과 고모라가 그들의 정욕을 따라 방탕했을 때 영원한 불로 형벌을 내리셨다(7절). 이것이 모두 알고는 있지만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과거였다.
사실 이와 같은 예는 얼마든지 더 찾을 수 있다. 노아 홍수 사건, 바벨탑 사건, 사사기에 반복되는 역사,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등 인류의 역사가 이런 죄와 심판의 반복이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인류는 결말을 알면서도 같은 죄를 반복하고 있다. 과거를 통해 배워야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다.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온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오늘 말씀에서 유다는 이들이 과거에서 배우지 못하고 같은 죄를 반복하고 있는 사실을 지적한다.
유 8–10 그러한데 꿈꾸는 이 사람들도 그와 같이 육체를 더럽히며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비방하는도다 9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비방하는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 10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는도다 또 그들은 이성 없는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
8절의 “그러한데”, “그와 같이”는 참 안타깝고 비참하다. 이 모든 과거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은 그 길을 똑같이 걸어갔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경고를 듣지 않았다. 정해진 심판이라는 결말이 있음을 알고도 그 길로 행했다. 오늘 말씀은 과거에서 배우지 못한 이들의 특징에 초점을 맞추고, 뒤에 이어지는 말씀은 이들에게 임할 심판을 강조한다.
“꿈꾸는 이 사람들”
이들의 구체적인 특징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 봤었던 3개의 단어로 설명 가능하다. 방탕, 반역, 불신이다. 8절에서 이들을 묘사하는 “육체를 더럽히며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비방하는도다”라는 표현도 이 3단어에 대응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8절은 이들에 대해 조금은 특별한 표현을 하나 더 사용했다. 4절에서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이라고 표현되었던 사람들이 여기서는 “꿈꾸는 이 사람들”이라고 표현되었다.
이들이 꿈꾸는 사람들이었다는 말은 이들이 어떤 허황된 꿈을 꾸고 있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물론, 이들은 허황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허황된 꿈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들은 과거의 길을 그대로 따르고 있으면서 그 예정된 결과에는 도달하지 않을 것처럼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방탕한 것도 괜찮고, 반역하는 것도 괜찮고, 불신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꿈은 그런 의미는 아니다. 이 꿈은 환상을 의미한다. 계시적인 꿈을 말한다. 즉, 이들은 자신들의 꿈을 하나님의 계시로 생각하고 그렇게 주장했다는 의미다.
하나님의 진리를 떠나 살기 위해서는 그것이 괜찮다고 말해줄 거짓이 필요하다. 아담과 하와에게는 뱀이 그런 역할을 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면 죽을까 두려워했던 그들에게 뱀은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4)라며 괜찮다는 확신을 주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다수’에서 이런 확신을 얻는다. 자세히 모르긴 해도 많은 사람이 그렇게 말하니 그게 맞을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한다. 특히, 자신이 듣고 싶은 말이 있을 때는 숫자에도 크게 연연하지 않는다. 그저 한 두 사람이라도 자기와 같은 말을 하면 그것으로 괜찮다는 생각을 한다. 오늘날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골라서 보고 들을 수 있다. 쉽게 말해 나에게 ‘괜찮아’라고 말해줄 사람이 많은 것이다. 내가 맞다고 해줄 사람이 많은 것이다. 심지어 AI도 그렇게 해주는 시대다. 우리가 듣기 좋아하는 거짓이 우리 안에 자리 잡기 너무 쉬운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유다서 당시 교회 안에 거짓을 가지고 들어 왔던 사람들은 숫자보다는 자신들이 가진 독점적인 권위를 강조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꿈을 통해 말씀하셨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의 말을 단순히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로 승격시킨 것이다. 그렇게 거짓을 진리로 바꾸고, 그들이 원하는 삶을 살면서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살도록 미혹했다.
히브리서 1장 1절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셨다고 말한다. 모세처럼 직접적으로 하나님께 말씀을 들었던 경우도 있지만, 꿈이나 환상을 통해 말씀하신 경우도 많았다. 요셉이나 다니엘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사도행전의 베드로나 바울도 환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적이 있고, 요한계시록도 하나님께서 요한에게 보여주셨던 환상을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지금보다 유다서가 기록되었을 시대에는 꿈을 통해 하나님께서 계시하셨다는 주장이 일반적으로 더 설득력있게 들렸을 것이다. 교회에 침투한 거짓 교사들은 이 점을 노렸다.
유다는 이 사람들이 교회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했는지를 상술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씀은 이들의 특징을 말해주고 있고, 이를 통해 꿈꾸는 이 사람들이 어떻게 했을지를 어느정도 추측해 볼 수 있다. 특별히 이들이 꿈꾸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이 이들의 부도덕, 불순종, 불경건과 어떻게 연관되었는지를 살펴보자.
특징 1 – 방탕(부도덕): “육체를 더럽히며”
이들은 육체를 더럽힌다(8절). 앞서 말했던 소돔의 사람들과 같은 것이다. 이 표현은 어떤 종류의 부도덕함도 의미할 수 있지만, 성경의 용례와 유다서의 문맥에서 볼때는 특별히 성적인 부도덕이 강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방탕으로 스스로 육체를 더럽히고 있었다. ‘누가 자기 육체를 더럽히는 일을 하겠어?’라는 생각이 들 수 있지만, 사실 이것이 이들이 목표로 했던 삶이다. 자신의 정욕을 따라 자유롭게 사는 것이다. 이들은 이런 삶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계시를 주셨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계시를 주신 방법은 누구도 알 수 없고 확인할 수 없는 그들의 꿈이었다.
이들이 처음부터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적극적으로 부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가만히 들어”오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들은 꿈을 통해 더 분명하고 확실한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성도들에게 모호하게 생각되는 부분부터 시작했을 것이다.
가상의 예를 들어 보자. 이들은 바울이 언급했던 우상에게 바쳐졌던 음식을 먹느냐 마느냐와 같은 문제에 있어 자유함을 강조하는 주장을 했을 수 있다. 그 자체로서 틀리지 않은 주장이다. 바울도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우상에게 바쳐졌던 음식을 먹는 것 자체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었다(고전 8:4; 10:25). 따라서 자유함을 가지고 음식을 먹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 자체도 문제는 아니었다.
우상에게 바쳐졌던 음식을 먹고 안먹고의 문제는 진리의 ‘회색지대’에 있어서 이렇게도 혹은 저렇게도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느 쪽을 선택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럼에도 거짓 교사들은 마치 이 말이 그런 의미인 것처럼 받아들이고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결론을 내린다.
바울은 앞의 사실에 더해서, 모두가 그런 지식과 양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니, 자신의 양심과 다른 성도의 양심을 고려하여 행해야 할 것을 말했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에게 죄를 짓는 것이고, 이는 또한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라고 강조했다(고전 8:11-12). 우상에게 바쳐졌던 음식을 먹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니지만, 그렇게 해서 그것을 죄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죄라고 말한 것이다. 바울은 그것을 복음에 정면으로 반하는 죄로 선고했다.
바울의 이런 입장이 누군가에게는 굉장히 모호하게 들렸을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거냐, 복잡하게 말하지 말고, 먹어도 된다 혹은 안된다로 명확하게 말해달라고 따지고 싶은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뒤의 말은 듣지도 않고 어쨌든 ‘먹어도 상관 없다는 거네’라고 스스로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꿈꾸는 자들은 이렇게 말해주었을 것이다. “바울도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저도 하나님께 받은 계시가 있는데 동일했습니다. 그러니 우상과 관련된 이 음식도 아무 문제가 없는 그냥 음식입니다. 이제는 여러분도 과거의 율법주의에서 벗어나셔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셔야 합니다. 이 자유함을 누리지 못하는 형제가 있다면 그것은 그의 연약함이고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이 말이 많은 사람들에게 단순명료한 진리처럼 들렸을 것이고, 특히 율법주의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사람들은 귀가 솔깃했을 것이다. 더구나 이 말을 해준 사람들은 그들과 애찬을 함께 하는 목자와 같은 사람들이었다(12절). 그들 자신도 자유롭게 우상에게 바쳐졌던 음식을 먹었다. 함께 애찬을 하는 자리에서 그렇게 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사람들은 자신들이 듣고 싶었던 말을 듣고 보고 싶었던 본을 보면서, 용기를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으며 다른 형제들을 실족하게 하는 죄를 담대하게 범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사실 우상의 제물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 중에는 그 이상을 원했던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과거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우상을 숭배하며 그곳에서 벌어지는 축제를 즐기고 쾌락을 즐기고 싶었다. 당시의 우상 숭배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문화였고 즐길거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 안에 들어왔지만 여전히 그런 삶이 그리웠던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도 교회 안에 있지만 계속해서 밖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과 동일하다. 사실 꿈꾸는 사람들도 그런 사람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 우상의 제물이 아무 것도 아니고, 우상도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은 큰 자유함을 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우상에게 제사가 드려지는 자리에 함께 하면서 죄악된 삶을 즐기면서 동시에 양심의 자유함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이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고전 10:19–21 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냐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냐 20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21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
결국 거짓을 따르는 자들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자신의 정욕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진리 안에서 그 정욕을 위한 작은 틈이라도 보이면 그것을 따르고 이렇게 육체를 더럽히는 방탕함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가상의 예를 하나 더 생각해 보자. 꿈꾸는 자들의 방탕함의 초점이 성적인 부도덕함에 있으니 그 부분을 생각해 보자.
고린도전서 5장은 음행의 문제를 다룬다. 교회 안에 음행의 문제가 있었다. 음행에도 종류가 있는데, 이 음행은 세상에서도 지탄받을 음행이었다. 그런데, 교회가 그런 음행을 용납하고 있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교만”하여졌다고 말했다(고전 5:2). 그래서 교회가 이런 죄가 교회 안에서 계속되고 있는데도 통한히 여기지 않고 음행한 자들을 쫓아내지도 않는다고 책망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안에 이런 사람들이 있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들은 이런 말을 한다. “예수님도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우리가 뭐라고 그 사람들을 정죄하고 쫓아낼 수 있겠어요. 우리도 다 죄인인데, 그럼 우리도 다 쫓겨나야 합니다. 어제 밤에 성경을 읽다가 잠이 들었는데, 하나님께서 저에게 그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아침에 일어났는데 여전히 그 말씀이 생생했어요. 나도 죄인이면서 그 형제에게 돌을 던지려고 했구나라는 생각에, 회개의 기도가 절로 나왔습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용납해야 합니다. 그게 우리 교회의 자랑이잖아요.”
정말 사랑이 넘치는 말처럼 들린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자신을 돌아보면서 순종하려는 사람의 말로 들린다. 오히려 바울이 사랑 없이 한 사람을 매장시키려는 이기적인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
그렇지 않다. 죄를 그냥 없는 셈치고 내버려 두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준다.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죄를 들춰내서 죄로 인한 영향을 키우는 것은 사랑으로 하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죄를 죄가 아니라고 하거나, 있는 죄가 없는 것처럼 대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예수님도 여인을 정죄하지는 않으셨지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이유도 하나님께서 죄를 그냥 없는 셈치고 내버려 두실 수는 없으셨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5장의 상황에서 음행한 사람은 사실 6장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자다(고전 6:9-10). 그런 사람을 교회가 성도로 받아준다면, 오히려 그 사람을 확신 가운데 편안하게 그대로 지옥으로 가게 만드는 일이 된다. 이런 일은 절대로 사랑으로 할 수 없는 일이다. 성경은 교회라는 공동체의 거룩과 보호를 위해서 음행한 자를 그 안에서 내쫓으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결국 그 사람을 사랑하여 바른 길로 인도하는 길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라고도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 교사들이 그렇게 하지 말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들 자신이 그런 삶을 원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으로 자기 자신에게도 면죄부를 주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이 만들어낸 성경의 권위로, 하나님의 권위로, 육체를 더럽히는 일을 하는 것이다.
실제로 오늘날 이단의 교주들을 보면 이와 동일한 모습이 명확하게 보인다. 이들은 온갖 좋은 말로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 한다. 그리고 그것을 이용해서 신도들을 착취한다. 성적으로 착취하는 일도 많고 재물을 착취하는 일도 많다. 대부분은 이 둘이 함께 간다.
미국의 유명한 치유사역자인 베니 힌은 성령님께서 자기 방에 직접 나타나서 자신과 대화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성령님께서 병을 낫게 하신다면서 치유 사역을 하여 막대한 부를 쌓았다. 자가 비행기를 타고 다니며 추정 재산이 수백 억에 이른다.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이단들을 생각해 보면, 놀랍게도 모두 부자들이다.
성적인 착취도 그렇다. 지난 주에도 자신을 신이라고 칭한 어떤 60대 교주가 여성 신도 성폭력 범죄 등의 이유로 재판을 받고 있다는 소식이 뉴스에 올라왔다. 유명한 JMS는 “나를 사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며 성범죄를 저질렀고 작년에 대법원에서 징역 17년이 확정되었다. 이름도 신기한 돌나라 한농복구회의 교주 박명호는 ‘창기십자가’라는 교리를 내세워서 자신이 창기가 된 인류의 남편이 되어서 인류를 구원한다고 주장하며 성범죄를 저지른 정황이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이런 일들이 실재한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놀랍지 않은 것은, 결국 거짓을 따르는 사람들의 목적은 자신의 정욕을 채우는데 있기 때문이다. 12절은 이들을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라고 표현했다. 이들은 목자처럼 보이지만 양을 생각하는 참된 목자가 아닌 것이다. 자기 몸만 생각한다. 그래서 양이야 어떻게 되든 자신이 원하는 것만 얻으면 그만이다.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은 사람들이 자신을 따르게 하는 일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 이들은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준다. 그러면서 다른 권위는 무너뜨리고 자신의 권위를 세운다. 그렇게 권위를 업신여기는 것이 이들의 두번째 특징이다.
특징 2 – 반역(불순종): “권위를 업신여기며”
업신여긴다는 말은 세워진 것을 무너뜨린다는 의미다. 사실 ‘권위’라고 하면 여러 권위를 의미할 수 있지만, 이미 4절에서 밝힌 것처럼 이들이 무너뜨리는 권위는 예수님의 권위다. 하나님의 권위다. 죄의 핵심에 있는 것이 왕이신 하나님을 폐위하고 내가 그 자리에 앉는 것이고, 따라서 구원의 핵심에 있는 것이 다시 그 자리에 하나님께서 앉으시는 것인데, 이들은 구원을 말하면서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6절에서 천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들은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기를 원하지 않는다. 물론, 거듭 말하지만, 이들은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권위를 무너뜨리지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나는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지 않다고 말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권위를 이용하여 자기 권위를 세운다.
이들은 마치 하나님의 권위를 따르는 듯이 말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꿈으로 받았고 그에 순종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앞서 가상의 예를 들었던 고린도 교회 안에서 했던 것처럼 그렇게 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계시가 이미 주어진 계시와 일치하는 면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거기에 다른 계시를 살짝 더한다. 이런 일을 반복하면서 결국 하나님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자신의 권위를 세운다. 사람들이 들었을 때는 그 사람의 말이 곧 하나님의 말이 되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던 이단들도 모두 같은 수법을 사용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작위적으로 인용하면서 그것이 마치 지금 상황에 대한 말씀인 것처럼 사람들을 기만했다. 오늘날의 은사주의나 신사도운동은 아예 하나님께서 직접 자신들에게 말씀하신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고 지금도 말씀하신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지금도 새로운 계시를 주고 계시고, 자신들이 바로 그 계시의 통로라고 말한다.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성령의 능력을 부정하는 사람들이라며 비방한다.
참 편리한 주장이다. 자기 권위를 세우기에 이만큼 좋은 주장이 없다. 이런 주장들이 기독교를 빙자하는 이단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들이 하고 싶은 말,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에 정당성을 부여하기에 정말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성경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나만 알고 있고, 하나님께서 새로운 계시를 나에게만 보여주셨다고 하면, 결국 내가 절대적인 권위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진리를 만들어 낸다. 이 때 특별히 꿈이나 개인의 경험 같은 것이 중요시 되는 이유는 그 진위를 확인하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자신의 권위를 세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진리를 듣고 싶었던 사람들은 그들을 따른다. 괜찮다고 말해주는 사람을 찾은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방탕한 삶으로 하나님의 권위를 업신여기면서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평안함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이런 일들은 비단 은사주의나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쪽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사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본래 자리에 두지 않는 모든 사상들이 하나님의 권위를 업신여기는 일을 하고 있다. 세상의 학문은 말할 것도 없고, 신학도 이 길을 따라가고 있다. 성경이 모두 사실이 아니라고 말한다. 예수님의 말씀 중 어떤 것은 진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많다고 말한다. 성경의 명령은 문화적이고 상황적이어서, 오늘날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늘날의 가치관을 평가하지 않고, 반대로 오늘날의 가치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평가한다. 세상에서 동성애를 반대하는 것은 차별적이고 편협한 태도라고 비난하니, 교회는 어떻게든 성경이 동성애를 반대하지 않는다고 말하게 하려고 성경을 창의적인 방법으로 해석하려고 하고 있다. 세상이 진화론을 과학적 사실이라고 주장하니까, 교회는 성경 속에 진화론이 그대로 들어 있다고 말하려고 노력한다. 세상이 자녀 훈육은 학대라고 하니, 교회도 훈육을 멈춘다.
교회의 주인이 하나님이신지 세상인지 알 수 없는 일이 지금 우리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의 중심에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이다. 그것이 꿈일 때도 있지만, 우리의 이성일 때도 있고, 세상의 압력일 때도 있다. 혹은 또 다른 어떤 것일 수도 있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그 중 어떤 것도 우리를 더 하나님께로 가까이 인도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결국 그 종착지는 방탕이다.
특징 3 – 불신(불경건): “영광을 비방하는도다”
꿈꾸는 자들의 세번째 특징은 “영광을 비방하는도다”라고 표현되어 있다. 당연한 얘기지만 지금 말하고 있는 꿈꾸는 자들의 특징은 서로 독립적이지 않다. 가장 핵심에 있는 것은 결국 권위의 문제다. 이들이 가장 원했던 것은 방탕한 삶이었고, 그것은 하나님의 권위를 무너뜨렸을 때 가능했다. 그리고 유다는 세번째 특징으로서 이들의 이런 교만이 어떤 방만과 방종에 이를 수 있는지를 언급한다. 이들은 영광을 비방한다.
여기서 영광은 천사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어쩌면 뜬금 없는 말로 들릴 수도 있지만, 확실한 근거가 있다. 유다서는 사실 베드로후서 2장과 매우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다. 확실한 차이는 베드로후서 2장은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고 미래형으로 말하지만(벧후 2:1), 유다서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다고 하여 이미 일어난 일로 말한다는 것이다(유 1:4). 즉, 베드로후서가 일어날 일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라면, 유다서는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다. 분명 유다는 베드로의 편지에 대해서 알고 있었고, 베드로가 경고했던 일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서 이 긴급한 편지를 썼을 것이다.
유다서의 8-10절에 해당되는 베드로후서의 말씀은 이렇다.
벧후 2:10–12 특별히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는 형벌할 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당돌하고 자긍하며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들을 비방하거니와 11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도 주 앞에서 그들을 거슬러 비방하는 고발을 하지 아니하느니라 12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고 그들의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이 말씀과 유다서의 말씀을 비교해 보면 11절에서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도 비방의 고발을 하지 않은 대상은 또 다른 천사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특히 유다는 타락한 천사인 마귀의 예를 들었다. 즉, 천사장 미가엘은 타락한 천사일지라도 여전히 천사인 마귀에 대해서 비방하지 않았는데, 이 꿈꾸는 사람들은 영광스러운 존재인 천사를 비방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베드로의 표현처럼 이들은 당돌하고 자긍했다. 그래서 천사들을 비방하는 일도 서슴치 않았다. 이들의 교만이 말 그대로 하늘을 찌른 것이다. 이들은 차마 하나님을 비방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 자신을 천사보다 높여서 천사를 비방하고 판단했다. 방만의 끝에 이른 것이다. 그래서 유다는 10절에서 이들을 “이성 없는 짐승”으로 비유했다.
천사도 다른 천사를 비방하지 않는다는 예로서 언급된 9절 말씀은 매우 흥미롭다.
유 9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비방하는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
사실 이 말씀은 우리가 구약에서 찾아볼 수는 없는 내용이다. 내용 자체도 매우 흥미롭다. 모세의 시체를 두고 미가엘과 사탄이 다투어 변론을 했다니, 판타지 만화에서 나올 법한 이야기로 들릴 것이다.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많지만, 본문의 의도를 이해하는데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전통 속에 있던 이야기를 하나님께서 유다를 통해 사실로 확언해 주셨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전통의 모든 이야기가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 이야기에 한정된 이야기다.
모세의 시체를 두고 미가엘과 마귀가 어떤 변론을 했을지도 궁금하다. 어떤 사람은 모세가 천국에 갈 수 있느냐 없느냐를 두고 다투었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마귀가 모세의 시체를 요구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후자가 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마귀는 모세의 시체를 통해 모세를 우상화하려고 했을 수 있다.
이런 내용들은 유다와 유다서의 독자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자세한 설명은 없다. 유다가 이 예를 통해서 강조하려고 하는 것은 천사장인 미가엘이 타락한 천사인 마귀에 대해서도 비방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만이 그 일을 하실 수 있기에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가 최선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꿈꾸는 사람들은 그런 선을 넘었다는 것이다. 이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했는지는 특정할 수 없다.
어쩌면 유다는 이들이 율법(말씀)을 폐기하는 것으로 천사들을 비방했다고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스데반은 율법에 대해서 “천사가 전한 율법”이라고 표현했었다(행 7:53). 갈라디아서 3:19도 율법에 대해서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이라고 표현한다. 히브리서 2:2도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강림하실 때 “일만 성도 가운데” 강림하셨다고 모세는 표현했는데(신 33:2), “성도”는 문자적으로 “거룩한 존재들”을 의미하기 때문에 천사들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하다.
즉, 율법의 전수에 있어 천사들의 역할이 중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거짓 교사들은 그런 말씀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방탕한 삶을 추구했다. 그 자체가 천사를 모욕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들은 좀 더 직접적으로 천사들을 비방했을 수도 있다. 바울의 경우 전해진 복음의 권위를 강조하기 위해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말했었다(갈 1:8). 그런데 이 꿈꾸는 자들은 자신들이 전한 거짓 복음을 참된 복음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런 식으로 실제로 천사들을 저주하거나 비방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유다의 논지는 분명하다. 설령 천사가 정말로 비방 받을 만한 일을 했다고 해도 그 일은 하나님 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꿈꾸는 사람들은 지금 그 하나님의 일을 자신들이 하고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것이다. 그 모습을 유다는 이렇게 묘사했다.
유 10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는도다 또 그들은 이성 없는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
방만한 것이다. 이성 없는 짐승이 본능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것처럼 이 사람들도 그렇게 방탕한 삶을 위해 자신들이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어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스스로 무엇을 하는지, 그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하고 있었다. 정확히 로마서 1장이 말하는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된” 사람의 모습이다(롬 1:22). 하나님은 이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신다(롬 1:24). 그러자 사람들은 이성 없는 짐승 같이 본능에 따라 행한다. 모든 방탕이 그 결과로 따라온다. 그리고 로마서 1장은 그들의 그 모든 상황에 대한 태도를 이렇게 정리한다.
롬 1:32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이들은 단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닌 것이다. 이들은 스스로 어리석게 되었고, 그 어리석음을 계속해서 따르는 사람들이다. 그러면서 스스로는 지혜롭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진리가 아닌 자신이 만들어낸 진리에 따라 살면서 그렇게 한다.
결국 그 끝은 멸망이다. 이미 과거의 역사가 이 사실을 증명했다. 이들은 그 과거에서 배워야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도 멸망을 맞이하게 된다. 이들의 길을 따르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꿈꾸는 이 사람들에 대한 경고
흥미롭게도 하나님은 아주 오래 전에 율법을 주시면서 모세를 통해 이런 꿈꾸는 자들에 대해서 분명히 경고하셨다.
신 13:1–2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 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2그가 네게 말한 그 이적과 기사가 이루어지고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따라 섬기자고 말할지라도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주어졌다. 바로 앞의 말씀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하지 말지니라”라고 되어 있다(신 12:32).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말씀하셨고, 거기에 무엇을 더하거나 빼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주어진 경고의 말씀이 신명기 13장이다. 가나안 땅에 들어 가면 선지자나 꿈 꾸는 사람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겨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적과 기사를 보일 것이라는 것이다. 이적과 기사는 그렇게 보이는 것일 수도 있고, 실제로 기적적인 일이 일어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 이적과 기사가 보인다고 해도, 중요한 것은 그가 전하는 말씀이다. 그 이적과 기사를 행한 사람이 다른 신을 따라 섬기자고 말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실제로 눈에 보이는 어떤 일이 일어났으니까, 그 사람의 말이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신 13:3–5 너는 그 선지자나 꿈 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4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따르며 그를 경외하며 그의 명령을 지키며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를 의지하며 5그런 선지자나 꿈 꾸는 자는 죽이라 이는 그가 너희에게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며 종 되었던 집에서 속량하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게 하려 하며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행하라 명령하신 도에서 너를 꾀어내려고 말하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아무리 그 사람의 말이 설득력이 있고, 심지어 실제로 어떤 이적을 보인다고 해도, 그 말을 듣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미 말씀하셨고, 이미 하신 말씀을 변경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이미 하신 말씀과 다른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시는 분이시고 식언하지도 않으시기 때문이다. 유다는 교회가 이 말씀과 같이 꿈꾸는 사람들에게서 멀어지고 절대로 그 길을 따르지 말라고 경고했던 것이다. 만약에 그렇게 하면 그들이 그런 것처럼 멸망의 길을 피할 수 없다.
도전
우리는 어떤가? 우리도 과거에서 배워야 한다. 결코 “그러한데 … 그와 같이”라는 말이 우리에게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이 과거의 경고를 가볍게 생각하지 말고 지금 나에게 이런 위협과 위험이 있지 않은지 점검해야 한다.
외적으로는 오늘날의 꿈꾸는 자들을 조심해야 한다. 오늘날 정말로 많은 꿈꾸는 자들이 있다. 하나님의 권위를 자기 권위로 삼아서 자기 말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런데, 그들을 분별하는 것이 쉽지 않다. 기본적으로 교묘한데다가 그들이 미디어 안에 있기 때문이다. 미디어는 항상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미디어 안에 있는 사람의 진짜 삶을 모른다. 그래서 더 속기 쉽다. 거짓은 삶으로 드러나는데 그 삶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더 조심해야 한다.
내적으로는 나에게 이런 꿈꾸는 자의 모습이 있지 않게 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그저 다른 사람의 애기로만 끝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말씀을 어떻게든 내가 원하는대로 말하게 만들고 싶은 욕망이 있을 것이다. 내가 듣고 싶은 말씀이 있다. 그런 생각을 버려야 한다.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것이지, 내가 듣고 싶은 말을 찾는 곳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나는 들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말씀을 받지 않으면, 결국 내가 원하는 대로 말씀을 읽는 것 밖에 되지 않고, 그것이 곧 주제 넘는 방종임을 알아야 한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하고 반드시 경고를 받아야할 것은 이 모든 방탕과 반역과 불신의 근본에 있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버린 데 있다는 사실이다.
벧후 1:19–21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20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21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이미 하나님은 우리에게 경험보다 확실한 말씀을 주셨다. 이 말씀은 누군가의 뛰어난 사고의 결과물이 아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다. 이 말씀의 권위 아래 머물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말씀으로 굳게 지켜주실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