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과거에서 배우라 (1)

본문: 유다서 1:5-10

설교자: 최종혁

 

믿음을 위한 싸움은 전면전보다는 스파이전이나 테러전에 가까울 때가 많다. 거짓은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오기 때문이다. 사탄이 광명의 천사로 위장하는 것처럼 거짓도 그렇다. 겉으로 봐서는 쉽게 그 차이가 드러나지 않는다. 때로는 차이가 보여도 그것이 결정적으로 보이지 않기도 않다. 그럴 수도 있지라는 생각이 든다.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을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다 보면 어느새 나도 그래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진리를 추구하는 선한 삶을 보면서는 오히려 거리를 두고, 거짓을 추구하는 악한 삶을 보면서 배우고 서로 위안을 받는다. 저 성도도 그렇게 하는 것을 보니 괜찮은 것 같아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거짓은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온다.

유다서는 이런 면에서 우리가 깨어 분별력을 갖추어야 하고 또한 힘써 싸워야 한다고 말한다. 나를 지키는 싸움을 해야하고 우리를 지키는 싸움을 해야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경각심을 주기 위해 이제 유다는 세 가지 과거의 사례를 언급하고, 그것을 그들의 지금 상황에 적용한다. 오늘은 과거의 세 사례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이 세 사건은 출애굽, 타락한 천사, 소돔과 고모라다. 이 사건들에는 4절에서 말한 가만히 들어온 거짓의 특징이 드러난다. 특히 결정적으로 모든 사건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끝났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우리에게도 경고가 되어야 한다.

먼저 5절 말씀은 “너희가 본래 모든 사실을 알고 있으나 …”라는 중요한 표현으로 시작한다. 거짓 교사들은 항상 ‘새로운 것’을 가지고 온다. 너희들이 알지 못했던 놀라운 진리를 알려주겠다고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진리는 이미 “단번에”(3절) 주어졌기 때문에 새로운 것이 없다. 그래서 사도 요한도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요일 2:24)고 말했다. 심지어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요일 2:27)라고도 말했는데, 이 역시 같은 맥락해서 한 말이다. 교회 안에 들어온 거짓 교사들은 너희는 우리가 가르쳐 주는 새로운 진리를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렇지 않다고 말한 것이다.

유다도 그런 측면에서 자신이 뭔가 새로운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생각나게 하려고 말하는 것 뿐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미 아는 그것을 “다시 생각나게” 하는 것은 분명한 의도가 있다. 그것은 지식적인 목적이 아니다. 이미 알고 있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래서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생각하게 해서 아는 바에 합당하게 행하기를 권면하는 목적이다. 우리도 이런 목적을 가지고 유다가 말하는 과거를 하나씩 살펴보다. 첫째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이고, 이 사건의 키워드는 ‘불신’이라 할 수 있다.

출애굽 – 불신 (5절)

5 …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

말했던 것처럼 유다는 독자들이 잘 알고 있는, 그 중에서도 가장 익숙한 구약의 사건을 꺼낸다. 바로 출애굽이다. 사실 우리에게도 출애굽은 가장 익숙한 구약의 사건일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여기서 출애굽의 주체를 “주”라고 말하는데, 문맥 상 자연스럽게 “주”는 예수님을 의미하고, 실제로 오래된 성경 사본에는 “예수께서”라고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예수”라는 이름이 아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을 때 주어진 이름이기 때문에 어색하게 들리기는 하지만, 예수님은 그 때부터 존재하신 분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전혀 문제될 것은 없는 표현이다. 유다는 이를 통해 구약의 사건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자연스럽게 연결하여 이 말씀을 읽는 자들에게 보다 직접적인 경고의 메시지를 전한다고 할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셨는지를 자세하게 기록했다. 애굽에 내려간 이스라엘 백성은 시간이 지나면서 노예 생활을 하게 되었고, 하나님은 때가 되었을 때 그들을 구하셨다. 애굽 왕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고 싶어하지 않았고, 하나님은 10개의 재앙을 통해 바로가 백성들을 보내게 만드셨다.

생각해 보면 그렇게 오래 끌 것도 없이 더 강력하고 직접적이고 극적인 방법을 사용하실 수도 있으셨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굳이 여러 차례 다양한 재앙을 보내셨다. 이유는 분명했다.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것은 단순히 애굽을 심판하거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로운 상황에서 구원해 내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출애굽의 모든 과정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기 원하셨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하나님을 믿기 원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시의 애굽 사람들이 신으로 여겼던 것들을 하나씩 무너뜨리셨다. 나일 강, 태양, 여러 동물 등 사람들이 신으로 받들던 것들이 재앙으로 바뀌었다. 그것들과 함께 무너졌던 것은 당시 실제로 눈에 보이는 신과 같이 여겨졌던 애굽 왕 바로였다. 바로의 절대적인 권력 앞에서 애굽 사람들은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신과 같았던 바로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전혀 막을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재앙으로부터 자기 백성을 보호할 수도 없었고, 심지어는 자기 자신도 보호할 수 없었다.

그런 면에서 10번째 재앙이 결정적이었다. 하나님은 힘이 부족해서 나일 강 물을 피로 바꾸는 정도의 (작은) 재앙을 일으키셨던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그 과정을 통해서 사람들이 분명히 보고 깨닫게 되기를 원하셨다. 그들이 신이라고 믿는 것들이 헛된 것들임을 알게 되기를 원하셨다. 그리고 결국 그들 위에 신으로 군림하던 바로가 아무 것도 아님을 바로의 장자를 죽이심으로 보여주셨던 것이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은 이 과정을 통해 하나님 만이 유일한 참된 신이심을 알 뿐 아니라, 그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에게 나타나셨었고 지금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신다는 것도 알아야 했다.

6:6–7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그들의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써 너희를 속량하여 7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출애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면서 모든 우상을 버리고 그 하나님을 믿어야 했다. 출애굽의 하이라이트이자 결말이라 할 수 있는 홍해 사건에 대한 말씀도 이 사실을 강조하는 것을 볼 수 있다(출 14장).

애굽을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펼쳐진 것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아니었다. 그들 앞에는 그들이 건널 수 없는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뒤에는 뒤늦게 마음을 고쳐먹고 그들을 추격해 온 바로의 군사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심히 두려워했다(출 14:10). 그리고 모세에게 원망의 말을 쏟아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여기까지 우리를 이끌어 내서 죽게 하느냐며 한탄했다. 애굽 사람 섬기면서 살게 그냥 내버려 두라고 우리가 말하지 않았느냐면서 따졌다. 눈 앞의 홍해와 뒤에서 들리는 애굽 군대의 소리에 백성들은 완전히 공황 상태에 빠졌던 것이다.

그 상황이 두려운 상황이라는 것은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직전까지 그들은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었다. 애굽에서 나오는 과정에 있어 하나님은 그들에게 능력을 보여주셨을 뿐 아니라 그들을 특별하게 대하신다는 것도 확실히 보여주셨다. 특히, 유월절 사건을 통해 이미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한번 시험대에 올랐었다. 이상한 명령이었지만, 그 말씀에 순종했을 때, 이스라엘의 장자들은 죽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 이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어떻게든 해주실 것이라고 믿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직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그 증거가 그들의 두려움과 원망이었다. 그들에게 모세는 이렇게 말했다.

14:13–14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14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하나님께서 구원하실테니, 잠잠히 그 모습을 보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셨다. 그들 눈 앞에 있던 홍해를 갈라 마른 땅처럼 그들이 건너가게 하셨고, 그들 뒤를 따라온 애굽의 병사들은 따라서 바다로 들어갔다가 하나님께서 다시 물을 흐르게 하셔서 바다에서 죽음을 당했다. 이 사건의 결말은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14:30–31 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매 이스라엘이 바닷가에서 애굽 사람들이 죽어 있는 것을 보았더라 31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

이 믿음이 하나님에 대한 궁극적인 믿음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출애굽 이후의 역사를 보면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다음 장인 출애굽기 15장만 봐도 그들은 물이 없자 하나님을 원망했다. 16장에서는 먹을 것이 없다고 원망했다. 평일에 내리는 만나는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라고 했는데 남겨두었다. 안식일에는 만나가 없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만나를 거두러 나갔었다. 백성들이 고기를 먹고 싶다고 원망하며 울었을 때, 모세는 하나님께 “이 모든 백성을 내가 매었나이까 내가 그들을 낳았나이까!”라며(민 11:12) 탄식하기도 했었다.

출애굽의 과정이나 그 이후 광야의 삶이나, 쉬운 과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는 결과를 알고 성경에 기록된 것을 읽기 때문에 그들의 어려움을 과소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출애굽의 과정은 자신들의 생존과 삶을 걸고 매번 도박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모세가 사기꾼으로 드러나면 그들의 삶은 전보다 훨씬 더 괴로워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광야의 삶도 그렇다.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의 문제를 매일 마주할 수 밖에 없는 삶이었다. 그들의 고난은 실제였다.

하지만 또 다른 분명한 실제는,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믿을 수 있을만큼 충분히 보고 듣고 경험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기적은 출애굽으로 끝나지 않았다. 하나님은 출애굽까지만 책임지시고 그 뒤는 알아서 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매일 내리는 만나 뿐 아니라 반석에서 물이 나오고, 고기를 얻을 수 없는 곳에서 고기를 먹을 수 있게 되는 기적이 그들과 함께 했다.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이 그들을 인도했다. 시내산에서는 하나님의 임재를 마주하기도 했었다.

이 모든 경험을 통해 그들은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이 능력이 많으시며 또한 죄를 심판하시는 분이심도 알게 되었다. 동시에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며 구원하시는 선하신 분이심도 알게 되었다.

그 결과로 이들은 분명 어느 정도의 ‘믿음’도 가지고 있었다. 믿음에 따라 행한 부분도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믿음이 참된 것인지는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시험이 드러냈다.

1:2–3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참된 믿음은 시험을 만날 때 인내로 드러난다. 그래서 여러 가지 시험은 참된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하기 때문에 기쁘게 여길 수 있는 것이다. 거짓 믿음도 시험을 만나면 그 정체를 드러낸다. 시험이 없을 때는 참된 믿음과 거짓 믿음이 비슷하게 보인다. 시험이 차이를 드러낸다.

예수님도 네 가지 땅에 뿌려진 씨의 비유에서 이 차이를 말씀하셨다(마 13장). 돌밭에 떨어진 씨는 금방 싹이 나온다. 복음의 말씀에 기쁨으로 바로 반응하는 것이다. 하지만 잠시 견딜 뿐, 그 말씀으로 인해서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곧 넘어진다. 참된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어떤 면에서 이런 사람은 처음에는 다른 어떤 사람보다 더 확실히 구원 받은 것처럼 보인다. 말씀에 바로 반응했기 때문에 그 변화가 더 분명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기쁨도 쉽게 눈에 보이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믿음이 참된 믿음이 아니기 때문에 시험을 만날 때 인내를 만들어 내지는 못하는 것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여기에서 보인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경험하면서 기뻐했다. 출애굽기 14장은 홍해도하 사건을 기록했는데, 15장은 그들의 기쁨의 찬송을 기록했다. 분명 그들은 믿고 기뻐했다. 하지만 광야에서 시험을 만날 때 계속해서 그들은 원망했다. 그런 그들의 최종 시험대는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앞둔 가데스 바네아였다(민 13-14장).

가데스 바네아에서 모세는 각 지파의 지휘관 12명을 보내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오게 했다. 40일의 정탐을 마치고 돌아온 12명은 이렇게 보고했다. 첫째, 그 땅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젖과 꿀이 흐르는 놀라운 땅이다. 둘째, 그곳의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크다. 이 두 정보를 단순히 ‘그리고’로 연결했던 정탐꾼은 2명이었고, ‘그러나’로 연결한 정탐꾼은 10명이었다.

2명의 정탐꾼,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민 13:30). 이들의 입장에서 다른 선택을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대로였다. 그러니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실 것을 의심할 이유가 없었다. 그 땅의 거주민이 강하고 성읍이 견고한 것은 사실이기는 하지만 문제될 것은 아니었다. 그들보다 더 강한 애굽의 군대를 이미 하나님은 이기게 하셨기 때문이다. 광야 길을 오면서 많은 문제들이 그들 앞에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문제를 없는 것처럼 여기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에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14:7–9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8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9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지금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바로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는 것, 그래서 두려워하지 않는 곳, 곧 믿음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백성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라고 온 마음을 다해 호소했던 것이다.

하지만 다른 10명은 그렇게 반응하지 않았다. 그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의 말에 반대하며, 약속의 땅은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라고 악평했다(민 13:32). 그러면서 그곳의 거주민은 장대한 자들이어서 그들에 비하면 우리는 메뚜기 정도이니 절대 싸워서 이길 수 없다고 말했다(민 13:33). 이들이 볼 때, 거주민이 강하고 성읍이 견고한 것은 절대적인 문제였던 것이다. 절대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였던 것이다.

백성들은 이 10명의 말에 동의했다. 그래서 백성들은 밤새도록 통곡했다(민 14:1).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다. 사실 상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었다. 애굽이 아니면 광야에서라도 죽었으면 좋은데, 왜 여기까지와서 죽게하는 것이었다(민 14:2). 그러면서 그들은 지금이라도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더 낫다면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소리를 높였다(민 14:3).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을 믿고 싸우러 올라가자고 호소하고 있는 여호수아와 갈렙을 돌로 치려고 했다(민 14:10). 하나님은 이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셨는데, 이들은 지금 그 구원을 무효로 돌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에 대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14: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나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불신인 것이다. 순간적이 나약함이 아니라, 이들은 하나님을 알만한 충분한 경험을 했지만, 결국 하나님을 믿지 않기를 선택한 것이다. 중간 중간 이들에게 믿음처럼 보이는 모습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참된 믿음의 열매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결정적인 선택의 때가 왔을 때 이들은 차라리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기 전의 삶이 낫다며 그 삶을 선택한 것이다.

이들에 대해서 하나님은 심판을 선포하셨다.

14:22–23 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서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 23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물론 이 심판에서 예외는 있었다. 하나님을 믿었던 여호수아와 갈렙은 예외였다. 그들을 제외한 사람들은 광야에서 멸망했다. 고린도전서 10장도 같은 사실을 이렇게 기록했다.

고전 10:1–5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3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4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5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다 똑같은 경험을 했다. 그런데 다 하나님을 믿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다수가 믿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다. 그들은 구원을 받은 것 같았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에 속해있다고 해서 모두가 참된 하나님의 백성은 아니었던 것이다. 믿지 않는 자들은 멸망했다. 이것이 유다가 독자들에게 기억하라고 하는 첫번째 과거다.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온 사람들, 실제로는 경건하지 않지만 꾸며낸 경건으로 겉으로 보기에는 다른 성도와 다르게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참된 믿음이 없으면서 교회 안에만 있는 사람들이 있다. 잘못된 복음은 이런 사람들에게 괜찮다고 말해준다. 어쨌든 교회에 붙어 있으니 괜찮을 것이라고 말해준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결국 하나님은 믿지 아니하는 자를 멸하실 것이다. 눈에 보이는 교회와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를 일치하게 만드실 것이다. 이스라엘 안에 있다고 해서 다 참된 이스라엘이 아니었던 것처럼, 교회 안에 있다고 해서 다 참된 교회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경고를 듣는 것이다. 경고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보존하시려고 사용하시는 중요한 수단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내가 진리와 거짓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든지 상관없이, 나는 예전에 예수님을 믿기로 했고, 그것으로 기뻐했고, 교회에서 열심히 일도 했었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믿음이 아닌, 단순히 과거에 속한 믿음은 불신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천사 – 반역 (6절)

다음으로 6절 말씀은 타락한 천사에 대해서 말하고, 여기서의 키워드는 반역이라 할 수 있다.

6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이 말씀이 어떤 과거의 사건을 지칭하는지는 사실 특정하기 쉽지 않다. 아마도 둘 중 하나를 의미할 것이다. 첫째는 사탄을 비롯한 천사들이 처음 하나님을 반역했던 사건이고, 둘째는 창세기 6장에 기록된 홍수 전의 상황일 것이다. 두 관점 모두의 장단점이 분명해서 결정하기 쉽지는 않다.

사실 천사에 대해서 우리는 많은 궁금증을 가지고 있지만 가지고 있는 지식에는 한계가 있다. 성경은 천사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만큼의 정보를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천사에 대한 그 정도의 사실을 아는 것이 우리에게 꼭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감춰두신 부분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여기서 유다가 강조하는 것은 천사에게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기 지위”, “자기 처소”가 있었는데, 그들 중 일부가 지위를 지키지 않고 처소를 떠났고, 그 때문에 하나님은 심판의 때까지 결박으로 그들을 흑암에 가두셨다는 것이다.

천사는 그 이름의 의미가 메신저, 쉽게 말하면 심부름꾼이다. 그들은 하나님 가까이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존재로서 창조되었다.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섬길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여러가지 일을 행한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도 하고 심판을 집행하기도 한다.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도 천사들이 종종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성도를 섬기는 일을 하기도 하고 나라들을 살피는 일을 하기도 한다. 하나님은 이들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권위 아래 두셨다.

천사는 그 존재나 사역에 있어 하나님과 가까웠기 때문에 성경에서도 “하나님의 아들들”로 지칭되기도 했다. 이들은 하나님처럼 전능하지는 않지만 어떤 피조물보다 뛰어난 능력을 지닌 존재들이다. 하나님처럼 전지하지는 않지만 매우 지혜로운 존재들이다. 하나님처럼 어느 곳에나 있을 수는 없지만, 어느 곳으로든 빠르게 이동할 수 있다.

에스겔은 타락하기 전의 사탄의 모습을 “완전한 도장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웠도다”라고 묘사한다(겔 28:12).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라고 말하기도 한다(겔 28:15).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천사라고 해도 그 지위와 처소는 정해져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 아래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 아래서 하나님을 섬겨야 했다. 하나님께서 천사들의 자리를 정하셨고, 그곳이 그들이 지켜야 할 자리였다. 그런데, 그들이 그 자리를 지키지 않고 떠났다. 천사의 일부가 그렇게 했고, 사탄이 그 선봉에 있었다.

14:13–14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14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하나님을 반역한 것이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14:12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14:15 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

28:17 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여 내가 너를 땅에 던져 왕들 앞에 두어 그들의 구경거리가 되게 하였도다

자기 자리를 떠나 더 높은 곳으로 오르려고 했던 천사들을 하나님은 낮추셨다. 성경의 말씀들을 종합해 보면, 하나님은 그들 중 일부는 심판의 때까지 결박해 두셨고, 일부는 그냥 두셨다. 거라사인의 땅에 있던 군대 귀신은 예수님께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했었는데(눅 8:31), 그 무저갱이 바로 지금 하나님을 반역한 천사(귀신)들이 결박되어 있는 곳이다. 베드로후서에도 이런 사실을 알 수 있는 말씀이 있다.

벧후 2:4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이렇게 하나님을 반역한 천사들 중의 일부는 이미 결박되어 심판의 때를 기다리고 있다. 만약 창세기 6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천사를 의미한다면, 그들의 치명적인 죄로 인해서 그들도 이렇게 결박되어 있을 것이라고 합리적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유다서 6절의 말씀은 이런 배경에서 읽으면 그 의미가 분명하다. 천사들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들의 자리를 지키지 않고 떠났다. 그들의 자리는 섬기는 자리였지만, 한편으로는 특권의 자리였다. 그런데, 그들은 더 많은 것을 원했고 지켜야할 자리를 떠났다. 그들 위에 있는 하나님의 자리를 원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왕권을 부정한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결박하여 흑암에 가두셨다. 여기 “가두다”는 앞에 “지키다”와 같은 단어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자리를 지키지 않았을 때, 하나님은 천사들을 심판의 자리로 낮추시고 그곳을 벗어날 수 없게 지키신다는 말이다. 심지어 지금의 이 “결박”이 끝도 아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위한 “큰 날의 심판”을 준비하셨고, 절대로 이들은 그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아무리 위대한 천사라고 해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는 없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부인하여 반역한 자들의 예정된 결말이다. 이 말씀은 빌립보서의 말씀을 상기시킨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고,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모두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이다(빌 2:9-10). 모든 천사,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될 것이다. 그 앞에 반역자로 선다면 심판의 주 앞에 복종하는 무릎을 꿇게 되는 것이다. 그 앞에 백성으로 선다면 사랑의 주 앞에 예배하는 무릎을 꿇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 과거의 경고를 오늘 우리는 들어야 한다. 천사도 자기 자리를 지키지 않고 하나님의 주되심을 부인하며 반역했을 때 영원한 심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은 더 나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착각일 뿐이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도 같은 일을 한다면 결국 같은 결말을 맞을 수 밖에 없음을 알아야 한다.

믿고 구원 받았다고 말하지만, 예수님을 주인으로 시인하며 살고 있지 않다면, 그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영원한 천국이 아니다. 예수님을 주라고 불렀지만 자기 뜻대로 살았던 사람에게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고 말씀하실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리를 떠나도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을 조심하라. 그런 삶을 사는 자들과 함께하지 말라. 나에게 혹 그런 안이함이 있는지 점검하고 돌이키라. 하나님의 심판에는 예외가 없음을 두려운 마음으로 기억해야 할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 – 방탕 (7절)

천사의 이야기가 조금 멀게 느껴졌다면, 이제 다시 우리 인간의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바로 소돔과 고모라 사건이다. 이 사건의 키워드는 방탕이다.

7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여기서 말씀은 “그들과 같은”이라는 표현을 통해 6절에서 언급한 반역과 지금 말하고 있는 방탕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분명히 한다. 우리는 죄를 단순히 사람 사이의 관계에 해가 되느냐 아니냐를 가지고 판단하지만, 성경의 기준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죄는 하나님과 관계되어 있고, 하나님의 주권을 부인한 결과로 나타난다.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도 구약에서 가장 유명한 사건 중 하나다. 아마 뒤를 돌아봐서 소금 기둥이 되었던 롯의 아내 때문일 수도 있고, 그들을 위해 기도했던 아브라함 때문일 수도 있다. 여튼, 소돔과 고모라는 죄, 특히 성적 타락의 상징과 같은 도시였고, 하나님은 그들을 직접적으로 심판하셨다.

소돔과 고모라가 처음 언급된 것은 창세기 13장이다. 아브라함은 함께 길을 가던 조카 롯과 이제는 따로 가야할 것을 알고, 롯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그때 롯은 더 좋아보이는 소돔을 선택했다. 그곳은 물이 넉넉했고, 여호와의 동산과 같았다고 성경은 묘사한다(창 13:10). 좋은 땅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곳 사람들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창 13:13)이었다. 왜 이렇게 평가되었는지는 창세기 19장에서 드러난다.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렀다(창 19:1). 이들은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아브라함을 방문하고 소돔에 도착한 상황이었다. 이들을 본 롯은 그들을 집으로 영접했다. 그런데 그들이 식사를 하고 자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손님을 보기위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그 목적이 좋지 않았다.

19:4–5 그들이 눕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노소를 막론하고 원근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5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오늘 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상관하리라”는 성행위에 대한 완곡어법이다. “소돔 백성들”은 남자들이었다. 남자들이 몰려와서 새로운 남자들을 내놓으라고 하고 있는 상황이다. 유다서 7절을 다시 보면 소돔의 죄에 대해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 가다가”라고 표현했다. 천사들이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고 다른 것을 원했던 것처럼, 이 사람들도 그들에게 허락되지 않은 다른 것을 원했던 것이다. 성적인 욕망에 사로잡혀서 그들은 더 큰 자극, 새로운 자극을 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내로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여자를 원하고, 여자로 만족하지 못하고 남자를 원하는 일이 그 도시에 가득했던 것이다.

또 하나 놀라운 것은 이에 대한 롯의 반응이다.

19:6–8 롯이 문 밖의 무리에게로 나가서 뒤로 문을 닫고 7이르되 청하노니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하지 말라 8내게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하건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 내리니 너희 눈에 좋을 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라

자신을 찾아온 남자들(천사들) 대신에 자기 딸을 내주겠다는 롯 역시 정상이 아니다. 소돔은 이런 죄악이 가득했다. 당연히 무리는 롯의 말을 듣지 않았다. 롯을 밀치고 강제로 집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이에 천사들이 개입해서 롯을 집안으로 들이고 문을 닫는다. 그리고 사람들이 들어올 수 없도록 그들의 눈을 어둡게 했다. 여기서 마지막으로 이들의 죄악됨을 나타내는 표현이 또 등장한다.

19:11 문 밖의 무리를 대소를 막론하고 그 눈을 어둡게 하니 그들이 문을 찾느라고 헤매었더라

눈이 보이지 않는데도 이들은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미 그들에게 한 차례 임한 이 심판에도 그들은 방탕을 멈추지 않았다. 하나님은 이 방탕한 도시를 불로 심판하셨다.

19:24–25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께로부터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리사 25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에 쏟아진 유황과 불은 영원한 것은 아니었다. 그 불은 그 때 그곳에 있던 사람들을 멸하고 꺼졌다. 하지만 유다는 그들이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았다고 말한다. 이 땅에서의 죽음으로 방탕의 죄에 대한 심판은 끝나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내리셨다. 그들 눈 앞에 유황과 불이 쏟아질 때, 모든 것이 끝났구나라고 생각했겠지만, 사실 상 그것은 시작이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방탕한 것으로 바꾸는 자들이 기억해야 할 세번째 과거다.

방탕한 삶은 지금의 즐거움을 준다. 그 즐거움을 원하는 사람은 그래서 더 방탕한 삶을 살게 된다. 나에게 즐거움을 주는 이 삶이 잘못되었다는 생각도 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이 이상하게 보인다. 소돔에 대한 심판이 결정되고, 롯이 그 사실을 자기 사위들에게 알렸을 때, 사위들은 그의 말을 “농담”으로 여겼다(창 19:14). 그들 입장에서는 심각하게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 하나님의 은혜를 이용하여 방탕한 삶을 사는 사람들과 동일하다.

하지만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셨다.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비처럼 쏟아질 때, 롯의 사위들은 롯의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 말이 사실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됐을 것이다. 하지만, 때는 늦었다. 그들은 롯을 통해 베푸신 하나님의 마지막 은혜마저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돌이킬 수 없는 영원한 하나님의 심판에 빠져들어갔다. 얼마나 비참하고 안타까운 인생인가.

유다는 지금 단순히 과거에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얘기해 주고 싶은 것이 아니다. 이들에 대한 추모를 하고 싶은 것도 아니고, 이들을 정죄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그는 이것이 지금 은혜를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있는 자들에게 “거울”이 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들이 지금 괜찮은 것이 정말 괜찮은 것이 아님을 알게 되기 원했다. 누구도 소돔의 백성 같은 결말에 이르게 되지 않기를 원했다.

그래서 지금 경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방탕한 것으로 계속해서 바꾸면서 살아가고 있다면, 나는 지금 불과 유황으로 타는 둘째 사망을 향해서 가고 있는 것임을 알고 그 길에서 돌이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예정된 심판을 맞이하게 될 뿐이다.

도전

오늘 말씀은 정말로 엄중한 경고의 말씀이다. 각자의 입장에서 이 경고의 말씀을 잘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고 보여주셨다. 나중에 ‘진짜인지 몰랐어요’라고 핑계할 수 없게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 천사들,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 누구도 핑계할 수 없다. 그들의 불신, 그들의 반역, 그들의 방탕에 대해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구에게도 책임전가를 할 수 없다. 그들의 불신과 반역, 방탕에 대해 하나님은 그들에게 책임을 물으시고 그들을 심판하셨다.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동일하게 하실 것이다. 그러니, 이 경고의 말씀을 듣고 돌이키라. 혹시라도 이 멸망의 길을 따라 가고 있다면 지금 내 삶의 방향을 바로 잡으라. 거짓 위로와 평안, 기쁨에 머물러 있지 말고, 진리로 나아오라. 이것이 또 다른 하나님의 은혜다. 누군가에게는 마지막 은혜일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은혜에 오늘 응답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