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고요하게 평안하게

본문: 시편 131편

설교자: 최종혁

성경은 신앙의 성장에 대해서 말한다. 구원이 태어남이라면, 태어난 직후의 모습 그대로 계속해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성장할 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생명을 가진 것들은 성장하는 것처럼, 영적으로 다시 태어난 자들도 성장한다. 그래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때가 오래 되었는데 여전히 성장하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 매우 심각한 문제 제기를 했다. 그런 자들은 아무리 좋게 봐도 영적으로 심각하게 병들어 있는 상태이며, 사실상 영적으로 태어난 적이 없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성경의 원리는 단순하다. 구원 받은 자는 영적으로 자라간다. 그렇게 되기를 사모하고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한다. 하나님께서 믿는 자를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려고 부르셨기 때문이다(롬 8:29).

성장한 신앙인의 모습 중 하나는 환경에 따라 쉽게 흔들리지 않는 견고함이라 할 수 있다. 어린 아이들을 생각해 보면 상황에 따라 쉽게 감정이 흔들리고 생각이 달라진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 행동으로도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불안함이 있다. 하지만 성장함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인다. 자신의 감정을 다스릴 줄 알게 되고, 분별력 있게 상황을 파악한다. 그래서 쉽게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나타낸다. 신앙도 그런 비슷한 성장의 모습을 보인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런 영적 성장의 핵심에는 ‘어린 아이 같은 믿음’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 어린 아이 같은 믿음을 가질수록 오히려 더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이 된다는 것이다. 어린 아이 같은 믿음이라는 것은 무지한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믿음을 말한다. 단순하게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드러내신 그분의 모습을 신뢰하며 그에 따라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렇다고 하시면 그렇다고 믿고, 아니라고 하시면 아니라고 믿고, 그 믿음에 따라 행하는 사람이 신앙적으로 성숙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이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시편 131편은 바로 그런 어린 아이 같은 믿음에 관한 말씀이다. 어린 아이 같은 믿음으로 인해서 그 마음이 고요하고 평안한 사람의 고백이며, 그런 삶으로의 초청이다. 이 시편을 통해 우리도 어떻게 내적으로 고요하고 평안하게 성숙한 자로서 살아갈 수 있는지를 배워보자.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로서 시편 131편의 저자는 다윗이다. 이 시편을 통해 다윗은 3절 말씀과 같이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바라는 가운데 고요하고 평온한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란다. 먼저 그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를 살펴보자.

고요하고 평안한 상태(1절)

다윗은 먼저 자신이 3가지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시 131:1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여기서 “하려고 힘쓴다”가 문자적으로는 걷는다는 의미가 있음을 고려하면, 다윗은 마음, 눈, 발로 이어지는 삶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각각의 차이가 아니라, 마음과 겉으로 보이는 삶의 연관성이라 할 수 있다. 즉,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영향을 주고,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어떻게 행하는지에 영향을 준다.

마음이 교만하다는 것은 그 마음의 중심에 내가 있다는 의미다. ‘교만’에 대해서 우리는 자기 자랑을 하는 것, 으스대는 것, 거들먹거리는 것, 뽐내는 것과 같은 모습 만을 생각하지만, 기본적으로 교만은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자기중심적 사고와 맞닿아 있다. 내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내 생각은 옳아야 하고, 내 방식대로 일이 되어야 하고, 내가 원하는 것은 이루어져야 한다는 마음이 교만인 것이다.

이런 마음은 자연스럽게 높아진 눈으로 드러난다. “오만”은 문자적으로 높다는 의미다. 교만한 마음은 그 눈을 높아지게 해서 다른 사람들을 내려다 보게 한다. 내가 옳으니 다른 사람은 틀린 것이다. 내 방식대로 되어야 하니 다른 사람의 방식은 무시된다.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져야 하니 다른 사람이 원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내가 중요하니 다른 사람은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교만은 자신을 높이고 남을 깎아 내리려고 한다. 경쟁하여 더 높은 자리에 오르려 한다. 만족하지 않는다. 높은 자리에 오르면 그 자리에 다른 누군가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만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애쓴다. 한마디로, 할 수 없는 일, 불가능한 일을 하려고 한다는 말이다. 그런 일들을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해야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일을 하느라, 그들은 그 마음이 분주하고 괴로운 것이다.

여기 사용된 “큰 일”이나 “놀라운 일”이라는 표현은 성경에서는 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지칭하는 단어다. 이런 면을 고려하면 이런 일들을 추구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수준을 넘어서는 것으로서 결국 자신을 하나님의 위치에 두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미워하시고 그들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잠 3:34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잠 6:16–17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 곧 그의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예닐곱 가지이니 17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시 18:27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

하나님께서 실제로 이렇게 하셨던 예가 에스겔 28장에 기록되어 있다. 에스겔 28:1-19은 두로 왕의 교만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말하는데, 이는 사탄의 교만과 하나님의 심판과도 이어져 있다.

겔 28:2–5 인자야 너는 두로 왕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네 마음이 교만하여 말하기를 나는 신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가운데에 앉아 있다 하도다 네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같은 체할지라도 너는 사람이요 신이 아니거늘 3네가 다니엘보다 지혜로워서 은밀한 것을 깨닫지 못할 것이 없다 하고 4네 지혜와 총명으로 재물을 얻었으며 금과 은을 곳간에 저축하였으며 5네 큰 지혜와 네 무역으로 재물을 더하고 그 재물로 말미암아 네 마음이 교만하였도다

두로 왕은 그 마음이 교만했다. 그래서 그 눈이 높아졌다. 스스로 다니엘보다 지혜로워서 모르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고, 그의 모든 부가 자신의 지혜와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계속해서 자신을 높였고, 결국 그 모든 것들을 통해서 그는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앉았다. 이 교만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심판을 선포하셨다.

겔 28:6–10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네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같은 체하였으니 7그런즉 내가 이방인 곧 여러 나라의 강포한 자를 거느리고 와서 너를 치리니 그들이 칼을 빼어 네 지혜의 아름다운 것을 치며 네 영화를 더럽히며 8또 너를 구덩이에 빠뜨려서 너를 바다 가운데에서 죽임을 당한 자의 죽음 같이 바다 가운데에서 죽게 할지라 9네가 너를 죽이는 자 앞에서도 내가 하나님이라고 말하겠느냐 너를 치는 자들 앞에서 사람일 뿐이요 신이 아니라 10네가 이방인의 손에서 죽기를 할례 받지 않은 자의 죽음 같이 하리니 내가 말하였음이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셨다 하라

마음으로 하나님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두로 왕을 하나님은 낮추겠다고 하신 것이다. 구덩이에 빠뜨리고 바다 가운데에서 죽음을 당하게 하셔서, 실제로 낮추겠다고 하신 것이다. 이사야 14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바벨론 왕에 대하여 비슷하게 하신 말씀이 있다. 다니엘서에 나오는 느부갓네살 왕의 경우도 비슷했고, 신약의 헤롯도 마찬가지였다. 에스더에 나오는 하만도 이런 교만한 모습을 보였고 하나님은 그를 심판하여 낮추셨다. 하나님은 교만을 정말로 미워하시고, 절대로 용납하지 않으신다. 드러나는 모습은 다를 수 있지만, 교만이라는 것이 결국은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이다.

이런 교만이 나와는 상관 없는 것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1절이 말하는 “큰 일”과 “놀라운 일”은 다른 모습으로 우리 삶에 얼마든지 나타난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무리들을 향하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마 11:28)이라고 표현하셔서 그 안타까움을 나타내셨다. 그 사람들은 절대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었다. 열심히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들이 되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게 맞다고 하니까 되지 않을 일을 위해 수고하면서 무거운 짐만 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은 절대로 사람이 할 수 없는 큰 일이고 놀라운 일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신 일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한계를 정하셨다. 따라서 그것을 넘어서려고 하는 모든 수고는 헛된 수고일 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라고 표현하신 것이다. 그들이 큰 일과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는 한, 그들에게 평안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늘날 각자의 방법으로 구원과 평안을 추구하고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런 한계는 꼭 구원 받는 것과 관련되어서만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주이며 주권자로서 모든 것에 한계를 정해두셨다. 우주의 질서가 바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한계다. 바다는 그 경계를 넘지 못한다. 인간의 생명에도 한계가 있다. 천사도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하지 못한다. 모든 것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한계가 있다.

그런데, 죄인은 그런 정해진 한계를 좋아하지 않는다. 죄 자체가 바로 그 한계를 넘으면서 시작되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열매를 먹었다. 열매 먹는게 큰 잘못이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한계를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행한 것이 문제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교만이고 높아진 눈이다.

문제는 구원 받은 후에도 우리에게 이런 성향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쉼을 주겠다고 하셨는데 우리는 여전히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처럼 살기도 한다는 것이다. 고요함과 평안함이 삶의 특징이 아니라, 분주함과 수고로움, 괴로움이 삶의 특징이 되는 것이다. 물론 그 경계를 넘는 것이 모두 죄라고 할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 죄의 경계를 분명하게 하신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죄는 아니라고 해도 결국 필요 이상을 원해서 분주하고 수고하며 살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쉼을 주시는 하나님과는 멀어진 삶을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은 죄가 된다.

우리 인생이 늘 분주하고 힘들고 고달픈 이유는 더 좋은 것, 더 많은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싶어하고, 오르지 못할 곳에 오르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그것이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그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한다.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내가 그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 즉 나 중심의 사고, 교만을 통해서 우리는 작은 일을 “큰 일”로 만들고, 평범한 일을 “놀라운 일”로 만든다. 작고 평범한 것이라도 그것을 내가 당연히 가져야 할 것, 나에게 있어야할 것으로 생각하고 열망하기 시작하면, 그것이 곧 크고 놀라운 일이 되는 것이다. 데이비드 폴리슨은 이것을 교만이 세워 놓은 ‘헛된 사다리들’이라고 표현했다.

데이비드 폴리슨, <성경적 관점으로 본 상담과 사람>, “나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저 좀 더 건강하고, 좀 더 돈이 있고, 좀 더 의미있는 직업, 좀 더 좋은 옷과 쉴 수 있는 휴가만 있다면 만족할 것이다. 약간의 성공, 그저 조금의 인정만 원할 뿐이다. … 나는 통제력을 원한다. 누가 그렇지 않겠는가! 나는 행복하기를 원한다. 하나님도 내가 행복하길 원하실 것이다. 나는 더 자신감있고 내 자신을 믿고 싶다. 내가 원하는 것은 … 결국 내가 원하는대로 되는 것이다. 난 좋은 것을 원한다. 나는 영광을 원한다. 나는 하나님이 내 뜻을 이루길 원한다. 난 하나님이 되고 싶다… 다들 그렇지 않은가!”

교만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면 결국 내가 하나님이 될 때까지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교만의 사다리에 올라있는 한 우리는 고요하고 평안할 수 없다. 계속해서 올라야 할 사다리가 있기 때문이다. 일상조차도 내가 할 수 없는 크고 놀라운 일이 되어 버린다.

주변의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 된다. 모두가 나를 좋아하게 만들기 위해 위선적으로 자신을 꾸민다. 남을 속인다. 자녀 양육도 ‘너무 힘든 일’이 된다. 완벽한 부모가 되려고 하고 그렇지 못한 자신을 경멸한다. 때로는 그 비난의 화살이 아이를 향하기도 한다. 다른 집 아이와 같지 않은 내 아이가 미워보이기까지 하는 것이다.

집안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것은 어떨까? 나는 누구보다 청소를 잘하고, 그래서 우리집은 그 어떤 집보다 깨끗해야 한다는 생각은 결국 소 없는 외양간을 만든다. 집은 깨끗할 수 있지만, 누구도 그 집에 가고 싶어하지 않게 된다. 직장에서의 성공은 어떨까? 성실하게 직장 생활을 하는 것은 당연히 중요하지만, 그 성실에 교만이 함께하면 야망이 되고, 늘 경쟁하고 늘 싸우는 사람이 된다. 교만한 열심은 일상도 괴로운 곳으로 만드는 것이다.

또 하나, 이와 관련하여 생각해 볼 수 있는 교만의 문제가 있다. 바로 고난 중에 우리가 쉽게 마주하는 교만이다. 고난은 사람을 가장 낮은 곳으로 끌고 내려가는데, 거기서 무슨 교만의 문제가 있을까 싶지만, 있다. 고난 중에 우리는 자신을 피해자로 생각하고, 피해자로서의 권리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욥의 경우가 그랬다. 고난 중에서 욥은 친구들과 논쟁했다. 그 논쟁 중에 욥은 억울함을 호소했고, 계속해서 하나님께 나아가서 말하고 싶다는 뜻을 피력했다. 이해할 수 없는 이 상황에 대해서 그는 말하고 싶었고 또 듣고 싶었던 것이다.

욥과 같은 상황에서 우리는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다면 최소한 나에게 그 이유나 목적은 알게 하셔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 여기 시편 기자가 말하는 큰 일과 놀라운 일의 범주에 들어간다. 하나님께서 감추어두신 것을 알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욥도, 마침내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을 때, 이렇게 반응했다.

욥 42: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하나님은 욥에게 나타나셔서 그동안의 모든 경위를 설명해 주지 않으셨다. 최소한 욥기 1-2장의 상황이라도 설명해주셔야 했을 것 같은데,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하나님이 모든 지혜로 결정하고 주권적으로 행하신다는 사실 뿐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그 말씀 앞에 욥은 무릎을 꿇었다. 그의 하나님에 대한 질문이 선을 넘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교만은 하나님이 나에게 설명해주실 의무가 있다고 말하지만, 겸손은 다 알지못해도 믿고 순종해야할 것을 말해준다.

하나님께서 감추어두셔서 알 수 없는 것은 그 상태로 두고 만족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모든 것을 알고 이해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 속한 것은 하나님께 두고, 그 하나님을 신뢰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설명해주실 의무는 없다. 하나님의 계시는 은혜다. 하나님의 숨기심도 은혜다.

신 29:29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알지 못할 때 답답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한계임을 인정해야 한다. 내가 알 수 없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해야 한다는 생각, 결국 그런 생각들이 교만이다. 때로 이런 것들은 염려와 걱정의 모습으로 우리에게서 드러난다. 마땅히 생각할 이상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 55:8–9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이 사실을 겸손히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평안도 없다.

다윗은 이런 측면에서 이렇게 고백한 것이다.

시 131:1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이 말씀에는 “더 이상”이라는 단어가 숨어있다. 다윗도 처음부터 이런 사람은 아니었다. 그도 마음이 교만해서 그 눈이 높아지고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썼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온전히 과거의 일로만 말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여전히 교만의 죄와 싸우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교만이 더 이상 그의 삶의 특징은 되지 않았기에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 어떻게 다윗은 이런 영적인 성장을 경험하게 되었을까? 그 비결은 2-3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요하고 평안할 수 있는 비결(2-3절)

시 131:2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2절 말씀은 다윗이 자기 영혼을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 위해 노력했음을 말한다. 그는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려고 노력했다.

여기서 “젖 뗀 아이”라는 표현은 두 가지를 의미할 수 있다. 여기 번역된대로 젖 뗀 아이를 의미할 수 있고, 이미 충분히 젖을 먹어서 만족한 아이를 의미할 수도 있다. 완전히 젖을 뗀 아이든, 일시적으로 젖을 뗀 아이든, 이 맥락에서 의미하는 바는 대동소이하다. 하지만, 아마도 “젖 뗀 아이”라는 번역이 더 적절할 것이다.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젖을 찾는다. 그것이 그의 생명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엄마가 잠을 못자서 힘들든, 어디가 아프든 상관 없이 젖을 찾는다. 시간과 장소도 상관 없다. 밤중이든 예배당에 있든, 아이는 젖을 찾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젖을 떼야하는 때가 온다. 그러면 아기는 자신에게 익숙한 것을 버리고 익숙하지 않은 것을 받아 들여야 한다. 그 과정이 쉽지는 않다. 전에는 엄마가 계속해서 내가 원하는 것을 주셨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먹기 싫어 하는 것을 자꾸 주신다. 내가 먹기 힘든 것을 주신다. 그래서 짜증도 내고 울기도 한다. 하지만, 그 시간을 지나 완전히 젖을 떼게 되면, 자신이 그렇게 원했었던 것이 가까이에 있어도 더 이상 그것을 찾지 않는다. 고요하고 평온하게 어머니의 품에 안겨있는다. 만족하고 즐거워 하는 것이다.

다윗은 지금 자기 영혼의 상태를 이런 아이에 비교하고 있다. 그는 자신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한다(“… 같게 하였나니”). 어느 순간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노력을 했다는 의미다.

어떤 노력을 했을까? 3절이 그 노력이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시 131:3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2절에서 밝히지는 않았지만, 결국 다윗 자신이 노력한 것은 “여호와를 바라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여호와를 신뢰하는 것이다.

모두가 젖을 뗀 경험은 있지만 누구도 그 당시를 기억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우리는 아이의 입장에서 상상해 볼 수 있다. 아이의 입장에서는 엄마가 왜 이럴까 싶을 것이다. 그동안 내가 원하는대로 주었었는데, 왜 갑자기 이 걸죽하고 맛 없는 것을 먹으라고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아이가 생각하고 말을 할 수 있다면, 엄마에게 따질 것이다. 엄마가 변했다고. 왜 젖을 주지않고 이런 이상한 것을 주냐고.

아이의 마음이 요동칠 것이다. 염려와 걱정이 몰려올 것이다. 젖이 곧 생명이었는데, 이제 어떻게 하나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엄마는 지금까지 나에게 이렇게 했던 적이 없다. 다른 엄마를 찾아가야 하나 고민이 될지도 모른다. 물론, 상상이다.

그럴 때 아이가 고요하고 평안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다. 그 엄마를 믿는 것이다. 그동안 나를 안전하게 보호하고 사랑으로 양육해준 엄마를 지금도 그렇다고 믿는 것이다. 그리고 엄마가 주는데로 먹으면 된다. 상황은 다 이해가 되지 않지만, 엄마를 믿으면, 아이는 고요하고 평안할 수 있다.

다윗이 노력했던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하나님을 바라는 것이다. 그의 입장에서 해야할 것 같은 ‘큰 일’이 있었을 수 있다. 그의 주변에서도 당연히 그런 일들을 해야한다고 조언했을 수도 있다. 다윗의 삶에서 예를 찾아보면 사울을 죽일 수 있었던 기회가 그러했을 것이다. 다윗이 숨어 있던 굴로 사울이 무방비 상태로 찾아 들어왔을 때, 모두가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다윗만 다르게 생각했다. 그에게는 사울이 그의 생명을 찾아 죽이려고 한다는 것보다 사울이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셔서 세우신 왕이라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다윗이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했다면, 사울을 죽이는 일은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이고 해야할 일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더 중요한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 그에 순종하여 사울을 죽이지 않았을 때, 다윗의 삶 자체는 전혀 더 나아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평안했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가 왕이 되었을 때, 자신의 힘으로 이룬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왕으로 세우셨음을 그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이 외에도 다윗은 여러 경험을 통해 배우게 되었을 것이다. 나의 이기적인 이유와 목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 것은 평안에서 멀어지는 길이다. 만족할 수 없는 길이다. 평안과 만족, 기쁨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뜻 안에서 순종하며 살아갈 때 누릴 수 있는 특권임을 그는 배웠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도 고백했다.

시 23:1–6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우리가 반드시 인정해야할 사실이 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만 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없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의 교만이다. 그리고 그 교만은 우리로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하게, 쉬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이 사실을 인정하면, 우리는 다른 삶을 살 수 있다.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것이다. 지금부터 영원까지 그렇게 한다면, 지금부터 영원까지 우리는 고요하고 평안한 가운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 면에서 큰 착각 가운데 살아간다. 뭔가 큰 일을 해야할 것 같고 놀라운 일을 해야할 것 같다. 그래야 내 삶이 의미있을 것 같다. 하지만 하나님께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음을, 그래서 나에게도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많이 알았는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를 중요하게 보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알게 하신 것을 알고,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그것을 했는지를 중요하게 보신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으로 만족하며, 신실하게 살았는지를 보시는 것이다.

우리의 열정은 바로 여기에 있어야 한다. 바울의 삶에 대한 자세를 기억해야 한다.

빌 3:12–15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15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뭔가 고요하고 평안한 것과는 관계가 먼 것 같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바울은 헛된 교만의 사다리를 올라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할 수 없는 일을 하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약속을 바라보며 그 길을 달려간다고 말하는 것이다.

때로 1절의 말씀은 영적 게으름뱅이들의 모토와 같은 말씀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뭘 자꾸 하려고 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말씀을 기록한 다윗도 그렇고, 위의 바울도 그렇고, 사실 예수님도 그렇게 살지는 않으셨다.

중요한 것은 내면의 고요함과 평안함이다. 다르게 말하면 단단함이고 굳건함이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어린아이와 같은 단순한 신뢰에서 온다. 믿음의 삶은 그런 신뢰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드러내 주신 뜻에 따라 열정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마치 이제 막 젖 뗀 아이와 같은 염려와 두려움이 찾아올 수 있다. 그에 대한 성경의 답은 이렇다.

빌 4:6–9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8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9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계속해서 하나님을 바라며, 염려는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그에 따라 행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 평강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렇게 우리는 고요하고 평안하게, 굳건한 신앙인으로 자라갈 수 있다.

도전

끝으로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을 기억하라.

마 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시편 131편의 가장 궁극적인 적용이 바로 이 말씀이다. 사람들은 마치 스스로 큰 일을 이룰 수 있고 놀라운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살아간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짐을 더할 뿐이다. 절대로 교만한 삶의 끝에는 쉼이 없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께만 쉼이 있다.

예수님께 나온 우리는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께 배워서 교만을 내려 놓아야 한다. 내 중심의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때 우리는 고요하고 평안하게 하나님의 품에서 안식하며 살아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