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본문: 시편 122편
설교자: 최종혁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가 꼭 시간적인 흐름을 포함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는 어느 정도 그렇다고 볼 수 있다. 120편은 세상에서 절망하며 하나님을 찾는 내용이었고, 121편은 그렇게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표현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122편은 2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순례자가 예루살렘 성문 안에 서 있다. 거룩한 도성,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에 왔다는 사실에 감격한 순례자의 모습이 이 시편에는 그려져 있다.
성경에서 예루살렘은 특별한 도시다. 예루살렘은 다윗이 여부스 사람으로부터 빼앗은 도시로서, 다윗은 그곳을 통치의 중심지로 만들었고 후에 언약궤를 그곳으로 가져와서 예배의 중심지로 삼았다. 그렇게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중심 도시가 되었다.
하지만 예루살렘은 단지 이스라엘의 중심 도시 이상의 의미가 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여 자기 이름을 두신 하나님의 도시다.
시 132:13–14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14이는 내가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주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
시 87:1–3 그의 터전이 성산에 있음이여 2여호와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보다 시온의 문들을 사랑하시는도다 3하나님의 성이여 너를 가리켜 영광스럽다 말하는도다
이렇게 예루살렘이 특별한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시편에는 이런 예루살렘을 칭송하는 시들이 여럿 포함되어 있다(46, 48, 76, 84, 87편). 오늘 우리가 살펴볼 시편도 그런 시편 중 하나다.
이런 시편들을 읽을 때 주의해야할 것은 “예루살렘”을 지리적인 위치로만 이해하지 않는 것이다. 예루살렘이 칭송을 받는 이유는 그 땅 자체에 있지 않다. 경관이 아름답다거나, 사람이 사는 데 필요한 자원이 풍부하다거나, 혹은 교통의 요충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거나 해서 성경이 예루살렘을 칭송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 이유라면 더 칭송 받을 도시들이 많다. 예루살렘의 특별함은 바로 그곳이 하나님께서 계신 곳이라는 사실에 있다. 물론 하나님은 어느 곳에나 계신 분이시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선택하시고 예루살렘에 특별한 임재를 두셨다. 이것이 예루살렘이 특별한 이유고, 구약의 하나님 백성들이 예루살렘을 특별하게 여겼던 이유다.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함께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편 122편은 이런 면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시편 122편을 기록한 다윗이나 후대에 이 노래를 부르며 예루살렘을 향했던 수많은 순례자들과 같은 마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모인다. 그 장소가 예루살렘의 성전은 아니지만, 우리도 한 장소를 정해서 함께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그런 ‘모임’이 바로 ‘교회’다. 그래서 이 시편은 우리가 교회로서 모여서 예배할 때 가져야할 올바른 자세에 대해서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예배자의 기쁨, 예배자의 감탄, 그리고 예배자의 기도라는 소제목으로 예배자의 올바른 자세 3가지를 살펴 보겠다.
예배자의 기쁨(1-2절)
먼저 1-2절에서는 예배자의 기쁨을 볼 수 있다.
시 122:1–2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2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
표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 시편의 원저자는 다윗이다. 다윗에게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는 것은 언제나 기쁜 일이었다.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는 것은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늘 하고 싶은 일이고, 더 하고 싶은 일이고, 잘 하고 싶은 일이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고 누가 말하면, 망설일 이유가 없다. 다윗은 언제나 기쁜 마음으로 여호와의 집으로 향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여호와의 집”은 성전을 가리키고, 예루살렘에 성전이 세워진 것은 다윗이 아들 솔로몬에 의해서였다. 하지만, 성경은 성막을 가리켜서도 같은 표현을 사용했다(예, 삼상 1:7). 성막이든 성전이든,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곳이 하나님의 집이었기 때문이다. 다윗은 기브온에 있었던 성막으로도 기쁘게 올라갔을 것이고, 후에 그가 예루살렘에 만든 장막으로도 기쁘게 올라갔을 것이다. 그곳이 어느 곳이든 “여호와의 집”이라면 그는 기쁜 마음으로 그곳으로 향했다. 다른 이유는 없다.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다(삼상 13:14). 그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사람이었다는 말이다.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던 하나의 사건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온 사건이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가장 직접적으로 상징하는 물건이었다. 언약궤는 성소에서도 가장 깊은 곳인 지성소에 위치해 있었고, 대제사장도 일년에 한번 정해진 날 외에는 그 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가장 직접적인 임재를 그곳에 두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모세와 만나고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말씀하실 것을 모세에게 말씀하셨다(출 25:21-22). 광야에서 언약궤가 이동하는 것이 곧 하나님이 이동하시는 것으로 묘사되기도 했다(민 10:35-36).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 강을 건널 때도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먼저 발을 요단 강에 담갔을 때에 요단 강의 물이 그쳤었다(수 3:14-17).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는 행군을 할 때도 언약궤가 그 한가운데 있어서,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계심을 나타냈었다(수 6:8-9). 언약궤는 그 자체로서 마법 같은 능력이 있는 성스러운 물건은 아니었지만, 하나님께서 특별한 임재를 두시고 자신을 나타내시는 도구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런 언약궤를 이스라엘은 전쟁터에 가지고 나갔다가 블레셋에게 빼앗기는 수치를 당했었다(삼상 4장). 하지만 하나님께서 블레셋에게 재앙을 내리시자 그들은 언약궤를 돌려 보냈고, 언약궤는 기럇여아림이라는 곳에 머물러 있게 된다.
이후 왕으로 세워진 사울은 이런 언약궤에는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다윗은 달랐다.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그곳을 이스라엘의 중심지로 삼은 다윗은 곧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 오고 싶어 했다. 언약궤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윗은 하나님을 나라의 중심에 두고 싶었다. 하지만 처음에는 언약궤를 하나님의 규정대로 옮기지 않아서 웃사가 죽임을 당하는 재앙을 만나게 되고, 그래서 오벧에돔의 집에 두게 된다. 후에 하나님께서 오벧에돔의 집에 복을 주셨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은 다시 기쁨으로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왔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아는 것처럼 다윗은 힘을 다해 춤을 추기도 했다. 그만큼 기쁜 일이었던 것이다.
언약궤를 가지고 온 것이 기쁜 일이었던 이유는 단지 나라의 빼앗긴 보물 같은 것을 되찾아 왔기 때문은 아니다. 언약궤가 바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했기 때문이다. 그들을 떠나 계셨던 하나님이 이제는 다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 이스라엘의 참된 예배의 회복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다윗은 언약궤를 자신이 준비한 장막 가운데 두었다. 그리고 그곳이 그가 가장 사랑하고 기뻐하는 장소가 되었다.
시 26:8 여호와여 내가 주께서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오니
시 27:4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시 65:4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다윗에게 언약궤가 특별했던 이유, 언약궤를 둔 장막이 특별했던 이유, 그 장막이 있던 예루살렘이 특별했던 이유는 하나다. 바로 하나님께서 그곳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곳에 가까이 갈수록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는 말이 그에게는 너무나 반갑고 기쁜 초청이었다. 같은 이유로 그의 발이 예루살렘 성문 안에 서 있는 것도 그 자체로서 기쁜 일이 되었다(2절).
다윗만 유별났던 것이 아니다. 시편 84편을 기록한 고라 자손은 이렇게 고백했다.
시 84:1–4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2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3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4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너무나 기쁜 일이었고 너무나 원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하지 못할 때는 마음이 상하기도 했다.
시 42:4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이런 모습은 하나님의 예배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특징이다. 단순히 내가 원하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 하나님께 나아간다. 하나님이 내가 원하는 무언가를 주는 대상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대상 그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참된 예배다.
우리가 방금 읽은 시편 122:1-2은 그런 예배를 사모하는 자의 고백인 것이다. 그리고 이 고백은 오늘날 하나님의 예배자인 우리의 예배에 대한 태도를 돌아보게 한다.
우리는 ‘예배’라는 표현을 제한적인 의미로 이해하고 사용할 때도 있지만, 사실 성경적 관점에서 예배는 우리 삶 자체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나님을 위하여 창조하셨다(골 1:16,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히 2:10,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 이것이 창조의 목적이라면, 그렇게 사는 것이 곧 목적에 합당한 삶이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0:31은 구원 받은 자의 삶에 대해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라는 당연한 원리를 제시한다. 로마서 12:1도 같은 원리를 이렇게 다르게 표현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예배가 삶이고, 삶이 예배인 것이다.
성경이 이런 예배를 말할 때 사용하는 중요한 개념 중 하나는 하나님과의 ‘거리’다.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는 것, 하나님에게서 등을 돌린 것은 예배하지 않는 것이다. 반대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하나님과 친밀히 교제하는 것이 곧 예배다.
처음 아담과 하와가 창조되었을 때, 그들은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했다. 하지만, 그들이 범죄 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에덴 동산에서 쫓아내셨고, 다시 그들이 에덴 동산으로 들어올 수 없게 하셨다. 그렇다고 그 후로는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와는 말도 하지 않으시고 전혀 자신을 나타내지 않으셨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죄가 없을 때와 같지는 않았다. 죄가 가져온 하나님과의 ‘거리’를 에덴 동산에서 쫓아 내시는 것을 통해 상징적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범죄한 인간은 예전처럼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었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것처럼 오직 우리 죄악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다(사 59:20). 에베소서 2장에서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멀리 있게 되었다(엡 2:13).
이런 면에서 성막과 성전은 어떻게 사람이 다시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 예배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희생 제사를 통해 죄의 문제를 해결하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히브리서에서 분명히 지적하는 것처럼 짐승의 희생 제사는 명백한 한계가 있었다. 제사자는 분명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수는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임재를 두신 언약궤가 있는 지성소에까지는 나아갈 수 없었다. 심지어 제사장도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짐승의 제사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지 원리는 보여주었지만, 그것을 실제로 이루지는 못했던 것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완전한 제사장으로서 완전한 제사를 드리신 예수님께서 실제로 죄인을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게 하셨다. 이 부분에 대하여 치밀하게 논증한 후에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히 10:19–2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21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22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죄가 가져왔던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거리가, 죄가 사라짐과 함께 사라진 것이다. 예수님의 피로 이루신 죄 사함으로 죄는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에게서 무한히 멀어졌고, 반대로 하나님과 우리의 거리는 무한히 가까워졌다. 이것이 모든 구원 받은 자들이 영적으로 누리는 놀라운 실체다. 그리고 이것은 실제 삶을 통해 드러난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히 10:23–25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24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간단히 말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 실제 삶에서 이렇게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것이 ‘모이는 것’인 것을 볼 수 있다. 같은 약속을 받고 같은 소망을 가진 자들이 ‘모여서’ 서로 돌아보고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함께 예배자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고, 영원한 나라에서 진정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광을 우리는 누리게 될 것이다(계 21:3). 더 이상 ‘무언가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올 것이다(계 21:22). 그날을 간절히 기다리는 자들은 지금 함께 모여서 예배하는 것으로 그날의 기쁨과 영광을 맛본다.
즉, 우리 모든 삶이 예배이지만, 구원 받은 자들이 함께 모여서 드리는 예배는 그 중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가질 수 밖에 없고 또한 그래야 한다. 넓은 의미에서 생각해 보면, 구약의 성도들도 꼭 예루살렘에 가지 않아도 자신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살 수 있었다. 심지어 가까운 사람들끼리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찬양하는 예배도 드릴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하나님께서 정하신 예배의 장소에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중요했고, 특별한 기쁨을 주는 일이었다. 그래서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는 말이 그들에게 기쁨이 되었고, 그 여호와의 집이 있는 예루살렘에 발을 디디는 것이 특별한 감흥이 되었다.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제 짐승의 제사로 어느 정도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사로 온전히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다. 그 ‘온전함’을 온전히 누리는 것은 여전히 ‘새 예루살렘’이 임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지만, 지금 우리도 함께 모여서 드리는 예배 가운데 그 기쁨을 일부라도 맛볼 수 있다. 하나님을 높이는 모든 찬양,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기리는 기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예수님의 희생을 기념하는 주의 만찬, 그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침례, 성도의 교제와 섬김 등 우리가 모여서 행하는 모든 것이 예배이고 우리에게 특별한 기쁨이 되어야 한다.
이 모든 것들이 주는 어떤 다른 유익들도 있다. 찬양을 하면 노래를 한다는 것 자체로 기쁘다. 기도를 하면 그 자체로 마음이 시원해지기도 한다. 설교가 큰 위로가 되기도 하고, 성도와의 교제가 힘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은, 그 모든 것을 통해서 우리가 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간다는 사실이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교회 가자”라는 말이 즐겁고, 교회가 보일 때 내 마음이 설레여야 하는 것이다.
사실 교회에 오래 다닐수록 이런 마음은 사라지고 기계적으로 그냥 교회에 다니기만 하기 쉽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이런 무뎌짐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한번 빼앗겨 보는 것이다. 아마, 많은 분들이 코로나 시절에 이런 경험을 했을 것이다. 모이지 못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우리가 함께 모여서 예배한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기쁜 일인지 한번씩 경험했을 것이다. 성경적인 교회를 찾기 위해 방황해 본 경험이 있는 분들도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계속해서 가지고 누리는 것에는 무뎌지기 마련이다.
만약 내가 그렇다면 이 말씀을 통해 도전을 받아야 한다. 일부러 교회를 떠나서 예배에 불참할 필요는 없다. 긍정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올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다시 생각해 보라. 말씀에 더 귀를 기울이고 마음에 담아두고 순종하기 위해 노력해 보라. 만찬 예배를 준비하고, 교회의 성도들에게 더 관심을 가져보라. 모든 것을 통해 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라. 예배를 반복되는 똑같은 일로 만들지 말고, 새로운 마음으로 예배를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소 나의 삶이 또한 예배가 되어야 한다. 삶에서 하나님께 함께 해야 감사할 것, 찬양할 것, 기도할 것이 자연스럽게 생긴다.
예배자의 감격(3-5절)
다음으로 살펴볼 수 있는 것은 예배자의 감격이다.
시 122:3–5 예루살렘아 너는 잘 짜여진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도다 4지파들 곧 여호와의 지파들이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그리로 올라가는도다 5거기에 심판의 보좌를 두셨으니 곧 다윗의 집의 보좌로다
다윗은 예루살렘의 성문 안에 서서 성 안을 둘러보는 듯이 이 말씀을 기록했다. 예루살렘 성을 둘러보면서 그는 감격했다. 이곳이 바로 하나님의 성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감격한 것이다.
그의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3절이 말하는 것처럼 잘 짜여진 건물들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예배하기 위해 몰려드는데, 예루살렘은 그 순례자들을 맞이할 준비가 잘 되어 있었던 것이다.
예배당에 오랫동안 살면서 종종 텅빈 예배당을 둘러볼 때가 있었다. 뒷정리를 하려고 그렇게 할 때도 있었고, 가끔은 예배를 준비하려고 그렇게 할 때도 있었다. 예배당은 단지 건물일 뿐이지만, 이 건물, 그리고 그 안의 각 장소, 물건들이 생각나게 하는 것들이 있었고, 그것을 따라가는 것이 예배를 위해 마음을 준비하는데 도움이 되었었다.
2층 홀은 성도들이 다 같이 모여서 주의 만찬을 나누고 찬양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공간이다. 앞에는 말씀이 전해지는 강대상이 있고, 바로 옆에는 찬양을 돕는 피아노가 있고, 아래는 만찬 떡과 잔을 두는 상이 있다. 장의자를 보면 대충 저 자리에 누가 앉으시지 하는 생각이 든다. 1층 홀은 성도들이 함께 식사를 나누고 교제하는 공간이다. 그리고 그 바로 옆에서 그 시간을 돕기 위해 자매님들이 수고하는 주방이 있다. 어르신들이 좋아하시던 탁구대, 젊은 사람들이 좋아하던 농구대도 있다. 이 모든 것들이 예배를 위해서 준비된 것들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아마 다윗도 그런 비슷한 마음으로 예루살렘 성을 바라봤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는 예배자들을 생각한다.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전례대로 올라온다(4절). 율법에 따라 남자들은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에는 이렇게 예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나아와야 했다. 이들은 각자 다른 상황에서 살았다. 이것이 “지파들 곧 여호와의 지파들이”라는 표현에서 드러난다. 누군가는 요단 강을 건너왔을 것이고, 누군가는 산길을 따라 이곳에 왔을 것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예루살렘에 온 사람도 있었고, 어쩌면 생의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온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혼자서 온 사람, 친구와 온 사람, 온 가족을 다 데리고 온 사람 등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저마다의 다른 상황 속에서 살다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라는 말에 따라 예루살렘으로 올라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다양한 사람들은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왔다.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4절).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상황이 다르고, 각자의 사정이 다르지만, 하나님을 예배하기위해 예루살렘에 왔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 삶에 행하신 놀라운 구원에 감사하기 위해서 그곳에 온 것이다. 다윗의 눈에 들어온 그 수많은 다양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시라는 충분한 이유들로 보였을 것이다. 그들이 곧 하나님께 드려지는 풍성한 예배를 상징했을 것이다. 하나님께 풍성히 드려지는 예배에 다윗은 감격했다.
그리고 또 하나, 다윗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통해 나타내시는 주권을 기억하며 감격했다. 5절의 표현을 보면 아마도 이 시편을 기록한 시점은 다윗이 하나님께 ‘영원한 집(보좌)’에 대한 언약을 받은 후인 듯하다. 다윗이 하나님을 위한 집을 짓고 싶다고 했을 때, 하나님은 다윗이 아닌 그의 아들이 그렇게 할 것이라고 말씀해주시면서, 대신에 하나님이 그를 위해 영원한 집을 지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삼하 7장). 그 약속은 영원한 왕위에 대한 약속이었고, 궁극적으로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하여 성취되었다.
그로 인해서 다윗은 기뻐했지만, 그것이 단지 자신의 왕조가 계속해서 이어질 것에 대한 기쁨은 아니었다. 다윗의 시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다윗이 정말로 원했던 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였다. 그에게 있어 예루살렘이 보여 주었던 것도 그런 하나님의 통치였다. 즉, 다윗이 예루살렘 성 안에 서서 보고 있었던 것은 그런 하나님의 통치 아래 보호 받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모여드는 모습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모습이 그에게는 감격스러운 모습이었다.
이것이 마찬가지로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가 감격할 수 있는 부분이다. 우리는 여전히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한다(마 6:10). 여전히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질 날을 기다리며 기도하는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구원 받은 자들의 모임인 교회를 보면서는 “거기에 심판의 보좌를 두셨으니 곧 다윗의 집의 보좌로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주권에 순종하는 자들의 모임, 예배하는 자들의 모임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다윗이 보기에 예루살렘이 그런 곳이어야 했다. 하나님의 주권이 바로 서고,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넘치는 곳에 예루살렘이어야 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 와서 봐도, 하나님을 섬기는 민족은 다르구나를 느낄 수 있는 곳이어야 했다. 여기 시편 122편에서 그런 예루살렘의 모습에 감탄하지만, 다른 시편에서는 그렇지 않은 모습에 탄식하기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교회를 볼 때도 비슷할 것이다. 탄식이 나오는 모습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추구해야할 교회의 모습은 분명하다. 하나님의 주권이 바로 서고,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넘치는 곳이 교회가 되어야 한다. 세상의 다른 어떤 사회나 공동체와 이런 면에서 구별되어야 한다. 우리가 더 나은 음악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더 재밌는 연설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 봉사를 그 어떤 단체보다 더 많이 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예배로 구별되어야 한다. 특별히 우리의 다양함이 예배의 다채로움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숫자가 많은 것은 그만큼 풍성한 예배를 의미해야 한다. 우리들 각자의 다른 삶이 다른 감사의 제목이 되어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예배자의 기도(6-9절)
마지막으로 다윗은 이런 모든 예배의 중심이 되는 예루살렘의 평안을 위해서 기도한다.
시 122:6–9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7네 성 안에는 평안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함이 있을지어다 8내가 내 형제와 친구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에 평안이 있을지어다 9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
사실 지금처럼 중동 지역에 전쟁이 있거나 할 때, 이 본문을 통해 예루살렘의 평안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내용의 설교도 종종 듣게 된다. 하지만 처음에 말했던 것처럼, 여기서 예루살렘이 언급된 이유를 잘 생각해 보면, 이 말씀이 그렇게 직접적으로 예루살렘이라는 도시를 위해 기도하라는 의미는 아님을 알 수 있다. 다윗은 예루살렘을 하나님께서 이름을 두신 예배의 장소로 보고 있고, 그래서 예배를 위해 예배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의미로 이 말씀을 기록했다.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방해 받거나 멈추지 않고 평화 가운데 계속해서 드려지기를 구한 것이다.
다윗은 그것을 위해 예루살렘의 평안을 구하라고 말한다. 그렇게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형통을 주시기를 구한다. 그리고 그곳에 예배하러 올라온 모든 사람들의 평안을 구하고, 그들을 축복한다. 이 모든 하나님의 은혜가 결국은 9절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집을 위한 예배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게 한다.
이스라엘, 그리고 예루살렘의 역사를 생각해 보면, 다윗의 이 기도는 언급하기도 무색할 정도다. 전세계에서 이스라엘만큼 전쟁의 중심에 있는 지역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기도는 궁극적으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응답될 것이다.
사 2:2–4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3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4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
예루살렘은 다윗의 기도처럼 평화 가운데 다시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중심지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때가 되면 단지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가 아니라 만방에서 많은 백성이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고 말하며 이 예배의 중심지로 몰려들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참된 예배가 드려질 것이다.
그럼, 이 말씀은 지금 우리와는 관계가 없을까? 그렇지는 않다. 앞서 그렇게 적용했던 것처럼 지금의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를 위해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수 있고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교회의 평안을 구하는 것이다.
계속해서 우리가 평안 가운데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기를 구해야 한다. 당연히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던 예배가 당연한 것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에게 예배가 소중하고 함께 예배하는 예배 공동체인 교회가 소중하다면, 우리는 그것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외부의 공격으로 인해서 혹은 내부의 어려움으로 교회의 평안이 깨질 수 있다. 더 이상 예배를 드리지 못할 수 있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또한 형제와 친구를 위하여 기도한 것처럼, 교회 전체를 위해 기도하면서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 해야 한다. 특별히 9절을 다시 보면 다윗은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라며 다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다짐이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여호와의 집으로 예배하기 위해 올라가면서 또한 예배하고 내려가면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기 원합니다. 우리 교회를 평안 가운데 지켜주시고, 우리 나라를 지켜주소서. 하나님이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가 필요하다.
도전
예배하러 가자는 말이 즐겁고, 예배하는 장소를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럽고, 이 예배가 지속되기를 기도하고 싶은 마음은 어디서 흘러나올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흘러나온다. 예배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싶기 때문이다. 따러서 나에게 있어 예배가 이렇지 않다면, 궁극적으로 내가 던질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우리가 매일 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래서 예배를 기뻐하고 예배에 감격하고 예배를 위해 기도하는 예배자들이 되기를 기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