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본문: 시편 121편

설교자: 최종혁

시편 120편을 통해서는 우리가 세상에 대해서 절망해야 우리의 시선이 올바르게 하나님을 향하고, 거기서 예배가 시작된다는 것을 배웠다. 이것은 가장 먼저는 구원과 관련하여 적용할 수 있는 원리다. 세상이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터진 웅덩이일 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또한 구원 받은 이후의 삶에도 적용된다. 세상에서 만족을 찾고 기쁨을 찾으면, 굳이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세상에서 절망한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다. 함께 모여 예배하는 자리로 향하는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이 주는 것으로 충분히 기뻐하고 만족한 상태에서, 그저 하나님이 주시는 또 다른 기쁨과 만족을 찾아가는 사람일 수 없다. 하나님이 예배자의 유일한 기쁨과 만족이어야 한다.

시편 121편은 이런 예배자가 고난의 때에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말해준다. 예배자는 고난의 때에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봐야 한다. 그의 유일한 기쁨과 만족이 하나님이셨던 것처럼, 그의 유일한 도움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121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1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2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3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4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5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6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7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8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이 시편에서 명백하게 반복하여 강조하는 표현은 ‘지키다’이다(3, 4, 5, 7, 8절, 6번).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지키시는 이’로서 ‘지키시는 일’을 하신다는 것이 이 시편의 주제다. 그래서 예배자는 그 하나님의 도움을 확신하며 이 순례의 길을 간다는 것이 이 시편이 주는 교훈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이 너를 지키신다(1-2절)

121:1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개인적으로 이 말씀을 가장 많이 묵상했던 때는 군대에서 행군을 할 때였다. 행군을 하면 거의 앞사람의 발뒤꿈치만 보면서 기계적으로 걷게 되는데, 가끔 고개를 들어서 멀리 앞을 보면, 앞에 보이는 것은 가야할 길과 그 주변에 있는 산들이었다. 그럴 때 생각났던 말씀이 이 말씀이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순례자들도 비슷했을 것이다. 그들은 힘든 길을 걸어 올라가야 했다. 힘들 뿐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했다. 오늘날처럼 길이 안전하게 만들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끄러져 떨어질 수도 있었다. 심지어 강도의 위험도 있는 길이었다.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비유 자체는 만들어 내신 것이지만, 비유의 배경인 예루살렘으로 혹은 예루살렘에서 가는 길에 그런 위험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 길을 가는 순례자들은 어떻게 이 길을 안전하게 걸어서 목적지인 성전에 도착할 수 있을지를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힘들고 위험한 길을 걸으며 예루살렘을 향해 눈을 들면, 그곳에 산들이 있었다. 그 산을 보며 순례자들은 여러 생각을 했을 것이다. ‘산이 참 웅장하네’하며 감탄도 했을 것이고, ‘언제 저 산들을 다 올라서 예루살렘에 도착하나’하고 염려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좀 더 영적인 생각을 했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예루살렘을 둘러싼 산은 마치 그 산들이 예루살렘을 보호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그것이 하나님의 보호하심처럼 보였을 것이다(시 125:2). 그러면서 그 하나님께서 나도 보호하실 것이라는 생각을 했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거기서 좀 더 깊이 들어가서 자신의 궁극적인 보호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생각까지 나아간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이들은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라는 질문을 깊이 생각해 봤을 것이다. 지금 눈 앞에 보이는 여러 산이 여러 신(도움)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가나안 사람들은 높은 곳에 세워진 ‘산당’이라 불리는 곳에서 그들의 신을 섬겼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을 정복할 때 이 산당들도 모두 제거해야 하라고 명하셨다.

12:2 너희가 쫓아낼 민족들이 그들의 신들을 섬기는 곳은 높은 산이든지 작은 산이든지 푸른 나무 아래든지를 막론하고 그 모든 곳을 너희가 마땅히 파멸하며

산당이 곧 우상 숭배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고, 결국 산당은 계속해서 우상 숭배의 온상으로 남게 되었다.  남아있던 가나안 사람들만 그곳에서 우상 숭배를 한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사람들도 그들에 동조하여 함께 우상 숭배를 했다. 솔로몬 때에 성전이 건축되면서 하나님에 대한 예배는 성전에서만 드려져야 했는데, 사람들은 산당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함께 드리면서, 하나님을 그런 여러 우상 중에 하나로 만들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왕들에 대한 기록인 열왕기를 보면 왕에 대한 평가에 산당을 어떻게 했는지에 대한 부분이 언급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비교적 선한 왕으로 평가 받은 왕도 산당을 없애지 못했던 경우도 많았는데, 그만큼 산당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에게 깊숙하게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굳이 더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신들을 하나의 신(여호와) 때문에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다신론자들이었다. 여러 신을 섬겼다. 신들은 서로 경쟁 관계라기 보다는 상호보완 관계였기 때문이다. 어떤 신은 바다를, 어떤 신은 산을, 어떤 신은 땅을, 어떤 신은 하늘을 주무대로 삼는다. 비를 주관하는 신이 따로 있고, 땅을 주관하는 신이 따로 있다. 해를 주관하는 신, 달을 주관하는 신, 길을 주관하는 신 등 삶의 모든 영역에 신이 있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신의 상황에 맞게 주(메인)로 섬기는 신이 있고, 또 필요에 따라 여러 신을 섬겼다. 여행을 가면, 마치 오늘날 우리가 여행자 보험을 들듯이, 여행의 위험에서 신의 보호를 받기 위해 신관을 찾아가서 제사를 지내거나 돈을 지불하고 어떤 부적 같은 것을 사거나 마법 주문 같은 것을 배우거나 하는 식이다. 이런 다신론에 물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산당에서 그런 행위를 하고 예루살렘으로 향하기도 했을 것이다.

이런 산당에서 행해지는 우상 숭배 때문에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기도 하셨다.

6:2–3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산을 향하여 그들에게 예언하여 3이르기를 이스라엘 산들아 주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주 여호와께서 산과 언덕과 시내와 골짜기를 향하여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나 곧 내가 칼이 너희에게 임하게 하여 너희 산당을 멸하리니

이렇게 산과 산당, 우상 숭배가 연관되어 있었다. 그래서 신실한 하나님의 예배자들은 그들 앞에 있는 높은 산들을 보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이고, 그 끝에 도달한 곳은 바로 이것이었다.

121:2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그 산들이 상징하는 많은 신들이 아니라, 그 모든 산들을 만드신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궁극적인 도움이시라는 고백이다. 그런데, 그 하나님에 대해서 “천지를 지으신”이라고 말한 부분은 주목할 만하다. “도움”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니,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홍해에서 기적적인 구원을 베푸신 것이나, 광야에서 그들을 보호하고 인도하신 것을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창조를 언급한다. 단순히 그가 지금 산들을 보고 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라는 사실이 더욱 근본적인 확신을 주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선포하면서 시작된다(창 1:1).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이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데 있어 가장 기초가 된다.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경험하는 이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설명이 바로 이 창조주 하나님에게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 선포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의 선포다. 이어지는 창조의 기록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셨다. 이 모든 과정은 아름다웠다. 빛이 있으라 하셨을 때 빛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대로 되었고,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하나님은 애쓰지 않으셨다. 그 가운데 어떤 주저함도 없었고 갈등도 없었다. 하나님께서 물을 한 곳으로 모으고 뭍이 드러나라고 하셨을 때, 물이 거역하거나 뭍이 지체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능력으로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다.

또한 이 선포는 하나님의 유일하심에 대한 선포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말은 다른 모든 것은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창조주시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비슷한 성질이 있는 것들을 묶어서 분류할 수 있다. 다양한 종류의 개들이 있지만, 고양이 중에서 개를 찾는 것이 어렵지는 않다. 개는 개로서 가진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다. 그런 특징을 일반화 하면 점점 더 많은 것을 포함하는 분류를 만들 수 있다. 곤충, 파충류, 포유류 같은 것들이 그렇다. 동물, 식물이 그렇다.

그 일반화를 끝까지 하면 피조물과 창조주로 나눌 수 있다. 그런데, 창조주로 칭할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 밖에는 없다.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나머지는 모두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른 모든 것과 구별되는 유일한 분이시다. 창조의 위대한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 하나님이 창조의 하나님이시라는 말은 하나님의 절대적 능력과 절대적 다름을 의미한다.

그래서 신약에서 구원의 확실함에 대해서 말할 때도 창조가 언급되는 것을 볼 수 있다.

10:29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만물(피조물)은 그들을 만드신 하나님의 능력을 뛰어 넘을 수 없다. 하나님에 대항할 수 있는 또 다른 존재도 없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은 확실하다는 것이 이 두 말씀의 기반에 있는 논리다.

이사야 40장에서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로하시면서 그들의 구원과 회복이 확실함을 논증하실 때 언급하신 것이 바로 창조다. 하나님은 유대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에 신실하지 않고 우상을 섬기며 범죄했을 때, 그들을 약속의 땅에서 쫓아내어 다시 이방 민족의 종이 되게 하실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하나님과 그들의 언약의 관계가 깨지는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은 다시 그들을 회복시키실 것을 약속하셨다. 이 회복의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알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40:12–17 누가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쟀으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접시 저울로 산들을, 막대 저울로 언덕들을 달아 보았으랴 13누가 여호와의 영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14그가 누구와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정의의 길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 주었느냐 15보라 그에게는 열방이 통의 한 방울 물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리니 16레바논은 땔감에도 부족하겠고 그 짐승들은 번제에도 부족할 것이라 17그의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시느니라

바다, 하늘, 땅, 산, 언덕 등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들과 하나님을 비교해 보라는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은 그들을 만드신 하나님과 비교할 때 아무 것도 아니다. 열방도 마찬가지다. 역사 상 제국이라고 불린 나라들이 있지만, 하나님은 그 어떤 힘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드시는 분이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열방을 두려워 하고, 또 두려워하는 만큼 의지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들은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신다.

우상도 마찬가지다. 열방이 눈에 보이는 힘이라면 우상은 보이지 않는 힘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보이지 않는 힘을 의지하고 싶어 한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40:18–24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을 그에게 비기겠느냐 19우상은 장인이 부어 만들었고 장색이 금으로 입혔고 또 은 사슬을 만든 것이니라 20궁핍한 자는 거제를 드릴 때에 썩지 아니하는 나무를 택하고 지혜로운 장인을 구하여 우상을 만들어 흔들리지 아니하도록 세우느니라 21너희가 알지 못하였느냐 너희가 듣지 못하였느냐 태초부터 너희에게 전하지 아니하였느냐 땅의 기초가 창조될 때부터 너희가 깨닫지 못하였느냐 22그는 땅 위 궁창에 앉으시나니 땅에 사는 사람들은 메뚜기 같으니라 그가 하늘을 차일 같이 펴셨으며 거주할 천막 같이 치셨고 23귀인들을 폐하시며 세상의 사사들을 헛되게 하시나니 24그들은 겨우 심기고 겨우 뿌려졌으며 그 줄기가 겨우 땅에 뿌리를 박자 곧 하나님이 입김을 부시니 그들은 말라 회오리바람에 불려 가는 초개 같도다

여기서도 하나님은 창조를 언급하신다. 우상들은 사람이 만든 것이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만드신 분이시다. 창조의 하나님과 우상들을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주신 해결책은 이것이었다.

40:25–31 거룩하신 이가 이르시되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교하여 나를 그와 동등하게 하겠느냐 하시니라 26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27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28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29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30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31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시편 121편이 언제 기록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는 이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해보라고 하신 것을 한다. 그는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서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았다. 그의 눈에는 그가 올라야할 산들이 보였다. 누군가에게는 그 산들이 고난의 상징이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그 산들이 도움을 줄 수 있는 많은 신들을 떠올리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예배자인 시편 기자는 그렇지 않았다. 그가 본 것은 그 산들을 포함하여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었고, 그 하나님이 그와 언약을 맺으신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라는 사실이었다. 그의 도움, 그의 유일한 도움, 궁극적인 도움은 바로 그 여호와에게서 온다는 것을 그는 묵상하게 되었다. 이 도움은 단지 이 순례길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 영원에까지 이르는 도움이었다.

그래서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너를 지키시는 이”(3, 5절),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4절)라고 표현한다. 자기 백성을 지키시는 것이 하나님의 특징인 것이다. 이어지는 말씀은 지키시는 하나님이 어떻게 지키시는 지를 말한다. 여기에는 어떤 불안이나 걱정도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기쁨과 확신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이어지는 하나님에 대한 묵상은 순례자의 찬송이며 예배다. 또한 서로를 향한 축복과 격려이기도 하다.

실족하지 않게 너를 지키신다(3-4절)

121:3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3절에서는 대명사가 바뀐 것을 볼 수 있다. 1-2절은 일인칭(나)으로 되어 있었는데, 3절부터는 이인칭(너)으로 되어 있다. 이 시편이 서로 화답하면서 서로를 축복하는 노래였을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시점의 전환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순례길에서 불려졌다면, 인도자가 1-2절을 부르면 나머지를 합창으로 부르는 식이었을 것이다.

3절 이후의 말씀을 보면 시편기자는 실제로 순례의 길을 가면서 만날 수 있는 위험들을 언급하는데, 여기서는 “실족”하는 것을 언급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계속되는 산행과 비슷했다. 바위가 많은 산을 올라봤다면, 여기서 시편 기자가 말하는 “실족”의 의미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조금만 미끄러져서 넘어져도 크게 다칠 수 있는 상황이다. 잘못하면 낭떠러지로 떨어져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그런 상황에서 어린이나 노약자가 함께 걷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앞 서서 걸으면서 내가 밟은 곳을 그대로 밟으라고 할 것이고, 뒤에서 따라 걸으면서 위험한 곳을 밟지 않는지 지켜볼 것이다.

시편 기자는 이런 상황을 생각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런 위험한 상황에서 실족하지 않도록 지키신다고 말한다. 앞서 걸으시고 뒤 따라 오신다.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순례길을 걷는 자를 지켜보시며 지키신다.

시편 기자는 특별히 하나님께서 졸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앞서 말한 그런 상황에서 졸음은 곧 실족을 의미한다. 내가 졸아도 그렇고, 지켜보고 있던 사람이 졸아도 그렇다. 아이의 부모라면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려고 하겠지만, 긴 여행으로 지치면 자기도 모르게 졸 수도 있고, 그 순간에 아이가 실족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앞서 군에서 행군할 때 이 말씀이 제일 많이 생각났다고 했었는데, 또 다른 이유가 바로 이 졸음에 대한 언급 때문이었다. 행군, 특히 야간에 행군을 하다보면, 가시거리도 얼마 되지 않고 그냥 앞사람 발만 보면서 걷기 때문에, 거의 졸면서 걸을 때가 있다. 그러다 보면 평지인데도 돌뿌리에 걸려서 균형을 잃는 경우들이 있다. 실족하지 않으려면 계속해서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신다. 졸지 않고 우리를 지키신다.

이와 관련하여 떠오르는 사건이 있을 것이다. 바로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들의 대결이다.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들은 누가 섬기는 신이 살아있는 참된 신인지를 두고 공개적인 대결을 벌였다(왕상 18장). 사실 엘리야가 먼저 요청한 일이었다. 백성들이 하나님과 바알을 두고 저울질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엘리야는 제물을 준비하고 각자의 신을 부를 때 불로 응답하는 신이 참된 신이 아니겠느냐며 도전했고, 백성들도 엘리야의 말이 맞다고 인정해서 대결이 성사되었다.

그렇게 바알의 선지자들이 먼저 송아지를 준비하고 바알을 불렀다. 열심히 불러도 응답이 없자, 제단 주위에서 뛰놀았다. 그래도 아무런 응답이 없었을 때, 엘리야는 그들을 조롱하며 이렇게 말했었다.

왕상 18:27 정오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여 이르되 큰 소리로 부르라 그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은 그가 잠깐 나갔는지 혹은 그가 길을 행하는지 혹은 그가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엘리야의 이 말은 조롱이지만, 사실 당시 우상 숭배자들의 실제적인 믿음에 기초한 조롱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신이 때로는 잠을 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신은 잠을 자기도 하고, 자리를 비우기도 하고, 다른 일을 하느라 듣지 못하기도 하고, 혹은 기분이 나빠서 그냥 듣지 않기도 하는 그런 신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다. 영화 같은 것을 보면 작품의 세계관 안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가 있더라도 ‘절대적’이지는 않다. 뭔가 약점이 있다. 힘을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 짧다던지, 어느 정도 힘을 사용하면 쉬어야 한다던지하는 제약이 있는 것이다. 성격 상의 문제가 있거나, 자기 신분이나 위치에 문제가 있기도 한다. 어떤 식으로든 한계가 있다.

그런 한계를 만드는 이유는 그래야 사람들이 좋아하는 서사가 생기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 강력함에 뭐든지 가능할 것 같지만, 곧 한계 앞에서 좌절하게 되고, 주변의 도움을 받거나 하여 그 좌절을 극복하고 한계를 뛰어 넘어 불가능해 보였던 일을 하는 식의 서사를 사람들은 좋아한다. 그렇지 않고 어떤 한 절대적인 힘이 있으면 우여곡절이라는 서사가 사라져서 사람들은 흥미를 잃는다.

사람이 만든 우상들이 그런 한계를 가지고 있는 이유도 같다. 사람들은 자신이 무언가를 할 수 있고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렇게 할 수 있는 신을 만든 것이다. 완전한 신이 아니라 불완전한 신이다. 내가 무엇을 해주어야 그 신은 일할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정확히 그 반대다. 하나님은 완전하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는 우여곡절이 없다. 창조 때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힘들게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내가 무언가를 해주어야 하나님께서 제대로 일할 수 있지 않다. 우리를 지키는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가 완전하신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4절은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지키심에는 어떤 헛점도 없음을 강조한다.

121: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번역에는 빠져있지만, 본래 4절은 “보라!”로 시작한다. 강조의 표현이다. “정말로, 진짜로”라고도 번역할 수 있다. 우리가 24시간 하나님을 관찰하고 있어도 하나님이 조시거나 주무시는 모습은 볼 수 없다.

육신의 부모도 자기 자녀를 그렇게 지켜보지는 못한다. 살면서 할 효도의 대부분을 다 한다는 나이의 아기의 부모도 그렇게 아이를 돌보고 지키지 못한다. 인간으로서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피곤하고 그래서 아기가 밤에 깨서 울면 아기가 밉기도 하다. 가끔씩은 얘가 일부러 나를 괴롭히려고 이러는 것이 아닐까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생기기도 한다. 물론,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최선을 다하여 아이를 돌본다. 하지만 부모는 졸기도 하고 자기도 한다. 아기가 아프면 내가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다는 사실에 무력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런 내가 부모인 것이 미안하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실족하지 않게 졸지도 않고 지키신다.

상하지 않게 너를 지키신다(5-6절)

121:5–6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6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는 우리를 지키시는 이로서, 우리를 상하지 않게 지키신다. 여기서도 시편 기자는 순례길을 생각하고 있다. 중동의 뜨거운 태양은 단순히 피부를 검게 만드는 것을 넘어서 문자 그대로 사람을 상하게 하고 해칠 수 있다. 그정도까지 가지 않더라도 기진맥진하게 만들어서 그 길을 포기하고 싶게 할 수 있다.

그런 길에서 하나님은 그늘이 되어 주신다. 우리나라는 여름에 습도가 높아서 그늘의 효능이 그렇게 극적으로 느껴지지 않지만, 중동 같이 습도는 낮은데 기온은 높은 곳에 가면 그늘은 극적인 차이를 만들어 낸다. 특히, “네 오른쪽에서 네 그들이 되시나니”라는 표현은 개인적인 보호가 강조된 표현이다. 하나의 큰 그늘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한 그늘이다. 마치 왕이 행차할 때 옆에 신하가 큰 우산이나 양산 같은 것을 들고 왕을 보호하는 것과 같다. 여기서는 하나님이 그늘이시니까, 내 옆에 거대한 사람이 있고 내가 그 그늘 아래 있는 것과 같은 이미지다. 그늘을 찾아 다닐 필요도 없이 바로 내 옆에 있다. 하나님은 그렇게 백성들을 보호하신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낮의 해든, 밤의 달이든,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그늘 아래 있는 자를 해칠 수 없다. 여기서 “밤의 달”이 언급된 것은, 달이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는 당시 사람들의 믿음과 관련된 표현으로 보기도 하지만, 단순히 달이 있는 밤에 일어날 수 있는 어떤 일로부터도 하나님께서 지키신다는 표현으로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낮이든 밤이든, 하나님은 보호하신다.

스펄전은 이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위해 새로운 태양이나 달을 만들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사실, 마찬가지로 3절에서도 새로운 길을 만들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시기에, 전혀 상하게 하지 않는 해와 달, 편안한 새로운 길을 만들면 더 좋을 것 같은데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환경에서 걷게 하신다. 똑같은 어려움 가운데 주시고, 똑같은 위험에 노출 시키신다. 다만, 그 가운데서 실족하지 않게 지키신다. 해를 당하지 않게 보호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언제 어디서나 너를 지키신다(7-8절)

121:7–8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8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여기서 시편기자는 이미지를 사용하기 보다는 보다 직접적으로 말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말한 ‘하나님의 지키심’이 단지 순례길에서 보호하심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영적인 보호하심임을 확실히 한다.

7절에서 말하는 “환난”은 일차적으로는 “악”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께서 모든 악으로부터 그 영혼을 지키실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요일 5:18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하나님은 이 일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하신다. 8절에서 말하는 “너의 출입”은 ‘네가 어디에 있든지’의 관용적 표현이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은 끝까지 지키실 것을 말한다.

24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이

실제로 예루살렘을 향한 순례길을 가면서 어떤 사람은 실족해서 넘어지기도 했을 것이다. 심지어 그로 인해 생명을 잃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낮의 해 때문에 상한 사람도 있고 밤의 달로 해를 입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것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시편 121편이 거짓임을 의미할까? 아니면 그 사람들은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음을 의미할까? 아니다.

유진 피터슨, “기독교인의 삶은 주님과 끊임없이 대화하며 산책할 수 있는 조용한 정원으로의 탈출도 아니고, … 천국 도시로의 환상 여행도 아닙니다. … 기독교인의 삶은 하나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는 길에서 기독교인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과 같은 땅을 걷고, 같은 공기를 마시며, 같은 물을 마시고, 같은 가게에서 쇼핑하며, 같은 신문을 읽고, 같은 정부 아래 시민으로 살며, 식료품과 휘발유에 같은 가격을 지불하고, 같은 위험을 두려워하며, 같은 압박을 받고, 같은 고통을 겪고, 같은 땅에 묻힙니다.

차이점은 우리가 걷는 매 걸음마다, 우리가 내쉬는 매 숨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지켜주심을 알고, 하나님께서 동행하심을 알고, 하나님께서 다스리심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의심을 겪든지 어떤 사고를 경험하든지 간에, 주님께서 모든 악으로부터 우리를 지키시며 우리의 생명 자체를 보호하신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삶에서 경험하는 모든 어려움들에 대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는 가운데 그렇게 해야한다. 하나님은 가장 좋은 길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고, 그것이 내가 볼 때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그 길이 어떤 길이든, 하나님은 결국 나로 그 길에서 실족하지 않게 지키시고 모든 위협으로부터 상하지 않게 보호하셔서, 결국은 하나님께로 나를 이끄실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나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신다.

도전

결국 믿는 자는 내가 믿는 하나님께서 끝까지 나를 지키신다는 사실은 어떤 상황에서도 신뢰하고, 그 하나님을 언제나 나의 도움으로 삼아야 한다.

유진 피터슨, “질병이 찾아오고, 불안이 엄습하며, 갈등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어지럽힐 때, 우리가 저지를 수 있는 유일한 심각한 실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는 일에 지루함을 느끼시고 더 흥미로운 그리스도인에게 관심을 돌리셨다고 결론짓는 것이거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방황하는 순종에 실망하여 잠시 우리를 스스로 돌보게 내버려 두셨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또는 하나님께서 중동에서 예언을 성취하는 일로 너무 바빠서 지금 우리가 처한 복잡한 문제를 해결할 시간을 내지 못하신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저지를 수 있는 유일한 심각한 실수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런 실수는 심각한 죄로 이어질 수 있다고도 경고한다. 하나님이 나를 지키지 않으신다고 생각하는 그 때나 장소에서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는 죄다. 나의 도움이 다른 곳에서도 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죄인 것이다.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 주변을 둘러보지 말고 눈을 들어 보라. 산이든 하늘이든, 무엇이든 하나님 만드신 것들을 보라. 그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나의 도움이시다. 나의 모든 도움이고 유일한 도움이시다. 하나님이 나를 지키시는 이시다.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고 실패하지 않는 유일한 분이시다. 내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는 실수를 하지 않는다면, 나의 삶은 언제나 지키시는 하나님으로 인해서 안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