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 지네…

아아~ 고마워라 스승의 사랑

아아~ 보답하리 스승의 은혜

매년 5월 15일이 다가오면, 청년들이 쳥년부 교사들에게 꽃다발을 건네주며 이 노래를 부른다. 듣는 교사의 입장에서 굉장히 황송하고 부끄럽다. ‘내가 정말 어버이와 같이 이들을 사랑하고 돌보고 가르쳤는가?’, ‘스승이라고 불릴 만큼 본을 보여주면서 잘 살고 있는가?’라고 자문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가 모두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라고 말한다(갈 3:26, 28). 교회 안에서 선생의 역할로 섬기는 이들이 있지만, 본질적으로 거듭난 성도는 모두 동등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하나님은 신앙의 선배들 그리고 특별히 교사의 은사를 받아 앞서 우리를 가르치고 돌보고 이끄는 이들에게 합당한 태도로 반응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선생’이라고 불리는 이들에게 “주와 선생”으로 우리를 그분 안에서 하나 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라고 요청한다. 스승의 날을 맞이하여 성경이 각각 가르치는 일을 맡은 자와 그들의 섬김을 받는 자에게 어떤 마음을 품으라고 명령하는지 살펴보자.

 1. 스승: 가르치는 자
먼저, 성경은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고 경고한다. 이는 선생 된 이들이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약 3:1). 그렇다고 모든 성도가 하나님 말씀의 초보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때가 오래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라고 안타까워하면서 젖을 먹는 성도가 자라서 단단한 음식을 먹고 다른 성도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성숙함을 갖추기를 히브리서 기자는 간절히 바랐다(히 5:12). 정리하면 성경은 성숙하지 못한 사람이 다만 ‘선생이 되고 싶어 하는 태도’는 금하고, 진실로 성숙하여 ‘선생이 되는 것’은 장려한다.

그러면 교회 안에서 ‘교사’의 직분을 맡은 자만 스승일까? 그렇지 않다. “주의 종”(감독, 장로, 목사 등)에게 요구된 것이 “가르치기를 잘하”는 것이긴 하지만(딤전 3:2; 딤후 2:24), 직분이 없더라도 성도는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풍성히 채워져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해야 한다(골 3:16). ‘가르치다’와 ‘권면하다’의 원래 의미를 생각해 보면, 교회 안에서 선생의 역할을 하는 사람은 크게 두 가지 기능을 감당한다고 볼 수 있다. 첫째, 성경의 모든 지혜를 정확하고 진실하게 전달하는 기능 그리고 둘째, 성경의 모든 지혜를 삶에 적용하도록 권하고 깨우치고 인도하는 기능. 요컨대 선생은 바른 교리를 가르칠 뿐만 아니라 진리에 따라 살도록 돕는 일을 한다. 모든 성도는 각각 다른 성도, 특별히 자신의 돌봄 아래 있는 성도들에게 좋은 선생의 역할을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은사로서 “목사와 교사”는 교회 전체를 위하여 이 역할을 감당하도록 하나님이 세우신 일꾼이라고 볼 수 있다(엡 4:11). 바울은 디모데를 에베소 교회 전체를 위한 교사로 세워놓고 다른 충성된 사람들도 그 역할을 하도록 도우라고 권했다: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 2:2).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가르치는 역할을 맡은 자에게 구할 충성의 영역이 분명하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온갖 거짓 교훈에 시달리는 성도들을 하나님 말씀으로 인도하고 먹이려면, 교사는 먼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포로귀한기 이스라엘의 선생이었던 에스라가 결심했던 것과 같은 결단이 필요하다: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더라”(스 7:10). 그리스도의 말씀을 풍성히 채우고 또 부지런히 연구하며 충성스럽게 가르치는 일에 헌신해야 한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준행” 그리고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이라는 단서를 통해 발견할 수 있다. 선생은 정보를 전달해 주는 일만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 정보의 가치가 실제로 삶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보여주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 성경 교리를 잘 설명해 주는 역할만 해서는 안 되고, 성경 교리가 적용된 삶을 잘 보여주는 역할까지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인도자들이 전해준 말씀뿐만 아니라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라고 조언했다(히 13:7).

여기서 교사에게 요구되는 중요한 마음이 있다. 바로 아버지 또는 어머니와 같은 마음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일만 스승”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아버지”라고 소개했다(고전 4:15). 이것은 바울이 복음으로 그들을 낳고 길러냈기 때문에 특별한 돌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강조한 표현이다. 이런 특별한 관계를 성경은 교사와 제자 사이에 요구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교사들을 가리켜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라고 말했다(히 13:17). 가르치는 사람은 바른 교리와 본이 되는 삶으로 그리고 어버이와 같은 사랑으로 가르쳐야 한다. “스승의 마음은 어버이시다”라는 가사가 매우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스승이 그 마음을 품어야 하는 것은 맞다.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으니라”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처럼 선생이 하는 모든 일은 발을 씻어주는 사랑의 섬김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2. 제자: 가르침을 받는 자

앞서 말한 것처럼 ‘가르침을 받는 자’는 누군가에게 ‘가르치는 자’가 될 수도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가르침을 받는 자로서는 어떤 마음을 품어야 할까? 먼저, ‘잘 배우고 성장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히 5:12). 가르치는 자는 자신의 수고에 열매가 따르기를 기대한다. 가르침을 받는 자가 배운 것을 통하여 계속해서 성숙해지는 것을 보는 것만큼 기쁜 일은 없다(요삼 1:4). 예수님은 여러 번 깨닫는 것이 둔하고 배운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제자들을 책망하셨다(막 6:52; 8:21). 사도 바울도 갈라디아 교회가 “속히” 바른 복음을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다(갈 1:6). 바울은 또한 자신의 가르침을 받은 디모데가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기를 바랐다(딤후 3:14). 배우고 싶어 하지 않는 태도나 배운 것을 가볍게 여기는 태도는 가르치는 자를 낙심하게 만든다. 사실, 가르치는 자나 가르침을 받는 자나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가까이하려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런데 그 마땅한 태도가 가르치는 자에게는 큰 기쁨이 된다.

가르침을 받는 자들은 가르치는 자에게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존경을 표현할 수 있다. 먼저,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이다(히 13:17). 만일 가르치는 자가 인도하는 길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이 분명하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여 그 길로 인도하고 있다면, 가르침을 받는 자가 그 길을 따르는 것이 복이 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길이며 동시에 복과 생명과 형통이 약속된 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자기 삶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최고의 선이 실현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그 영생의 원칙을 성경으로 가르쳐주는 자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려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성경은 또한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가르친다(갈 6:6). 바울은 여러 번 “영적인 것”을 얻은 자에게 “육적인 것”으로 섬길 것을 요구하는데(롬 15:27, 고전 9:11), 이는 구약 시대 제사장이 영적인 돌봄과 섬김으로 백성을 섬기면, 그들의 필요를 백성이 돌봤던 오랜 전통과 맥을 잇는다. 제사장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육적인 기업이 없었고 오직 그들이 섬기는 백성에게서 “모든 좋은 것을” 얻었다. 신약 시대 그리고 오늘날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의 관계에서도 이런 사랑의 의무는 변함없다. “사랑의 의무”라는 말에 주목하자. 세속적인 선생과 제자 사이에서도 ‘돈(세금)을 냈으니 잘 가르쳐야 할 것 아니냐?’라는 식의 태도는 지탄을 면하지 못 한다. 교사와 학생의 관계가 단지 물질적인 거래 관계가 아니라는 말이다. 신령한 관계에서는 더욱 그렇다. 가르치는 자도 하나님 앞에서 충성해야 하고, 가르침을 받는 자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가르치는 자를 사랑으로 공경하고 그와 좋은 것을 나누는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은 전수되는 특징이 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와 사도들을 통하여 증언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가르침은 계속해서 가르치는 자들을 통하여 가르침을 받는 자들에게 전수되어 왔다. 그 말은 곧 가르침을 받는 자가 언젠가(혹은 동시에) 가르치는 역할까지 해야 한다는 것이다. 육신의 부모는 자기 자녀를 부지런히 가르칠 책임이 있다. 그래서 결국 모든 부모가 교회에서 가르침을 받는 자이면서 동시에 가르치는 자의 역할을 한다. 교회에서 교사의 역할을 맡은 성도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자들을 성실하게 가르칠 의무가 있다. 그런데 성경의 가르침은 전달되는 과정을 통하여 변화 또는 수정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전수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가르침을 받는 자는 잘 배우려는 마음과 함께 배운 것을 소중히 간직하고 전수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맡기신 ‘대위임령’은 모든 성도에게 맡겨졌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9-20). 주님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지키는 자는 ‘가르침을 받는 자’이고, 그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자는 ‘가르치는 자’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두 가지 역할을 주님의 명령으로 받아 신실하게 지켜야 한다.

결론
‘스승의 은혜’가 부담스럽긴 해도 교사로서 성경이 요구하는 마음을 잘 간직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하는 자극제로서는 충분히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말씀을 사랑하고 그 권위 아래 순종하려는 학생으로 배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가르치는 자는 자신이 진실로 믿고 사랑하는 그 말씀을 부지런히 연구하고 가르칠 책임이 있다. 자신의 가르침을 받는 형제자매를 아끼고 사랑하고 위하는 마음으로. 가르침을 받는 성도는 하나님 말씀으로 자신을 먹이고 인도하는 형제자매를 귀하게 여기고 존중해야 한다. 좋은 본을 따라서 ‘본을 끼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말씀으로 풍성히 채워져 서로 가르치고 권면하는 성도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아들의 거룩하고 흠 없는 형상으로 빚어가실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보답하는 합당한 태도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