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흐트러짐 없이 주를 섬기라
본문: 고린도전서 7장 25-40절
설교자: 조정의
참 복음과 거짓 복음의 차이는 무엇인가? 성경적인 교회와 이단적인 교회의 차이는 무엇인가?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 극단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참 복음은 방탕한 삶으로 치우치는 것과(쾌락주의) 욕구를 강제로 억압하는 것(금욕주의) 모두를 거부한다. 성경적인 교회는 성도에게 극단적인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전 재산을 바치라고 강요하거나, 가정과 직장을 내팽개치고 오직 교회에만 헌신할 것을 강제하지 않는다. 성경적인 교회는 지상대위임령에 따라 ‘그리스도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에 오직 충성한다(마 28:20). 그런데 그리스도는 그분을 따르는 모든 제자에게 극단적이진 않지만 분명히 급진적인(radical) 삶을 요구하셨다. 그러한 급진적인(복음적인) 요청을 바울은 본문에서 “흐트러짐 없이 주를 섬기라”라는 말로 명령했다(35절).
바울은 7장에서 고린도 성도가 결혼과 관련하여 “쓴 문제에 대하여” 복음의 급진적인 원칙에 따라 답했다. 독신, 기혼, 홀아비-과부, 비신자와의 결혼 등 성도가 처한 상황은 각각 다르고,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과 선택하지 말아야 할 것이 각각 있었지만, 원칙은 분명했다. 상황에 따라 흐트러지지 말고 오직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우선적 목적을 가지고 주와 동행하라는 것이다. 이제 그들이 질문한 마지막 사례인 “처녀에 대”한 권면만 남았다(25절). 여기서 우리는 복음의 가장 급진적인 특성과 그 이유를 발견한다. 이 말씀이 우리 각 사람을 흐트러짐 없이 주를 섬기게 하고 교회가 복음의 분명한 원칙대로 굳게 함께 세워지길 원한다.
1. 복음의 원칙: 흐트러짐 없이 주를 섬기라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거하라, 지내라,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는 이전의 원칙이 처녀에 대한 권면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26b-7절). 상황을 바꿀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보다 앞선 일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일이 아니라 주의 일을 먼저 염려해야 한다. 어찌하여야 사람을 기쁘게 할까가 아니라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까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마 6:33). 성경은 이렇게 주님께 우선순위를 두지 못한 반복음적인 마음을 가진 자를 가리켜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라고 평가한다(약 1:8). 두 마음을 품은 자에게 성경은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라고 명령한다(약 4:8). 주께 구별된 확정된 마음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인은 결혼에 관하여 생각하거나 결정할 때도, 먼저 갈라지지 않은 마음(정한 마음)이 필요하다. 결혼하든지 하지 않든지,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 앞에 몸과 영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32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 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까 하되 33장가 간 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까 하여 34마음이 갈라지며 시집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간 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까 하느니라(32-34절). 오해하지 말라. 이것은 극단적인 선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급진적인 부르심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 의도를 이렇게 분명히 밝힌다(35절):
35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당하게 하여 흐트러짐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 성도에게 올무를 놓아 실족하게 하려는 자는 마귀와 세상이었다. 정욕을 무조건 억제하는 것이 좋다는 극단적인 교훈, 반대로 쾌락을 마음껏 즐겨도 좋다는 거짓 가르침이 그들을 복음의 부르심에서 흐트러지게 만들었다. 바울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곧 복음으로 인하여 성도가 유익을 풍성히 얻기를 원했다(롬 1:16). 그들이 바울이 권면한 복음의 이치에 합당하게 행한다면, 그들은 흐트러짐 없이 주를 섬길 수 있게 될 것이다.
복음으로 신자는 모두 영생을 누린다.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허락하신 지금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고, 그래서 불만이 생기면,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삶이 즐겁지 않다. 그분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고, 그분의 약속이 와닿지 않는다. 고통스러운 상황이 크게 보이고(남들보다 더),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작게 보인다. 복음의 급진적인 부르심의 방향이 뒤바뀐다. 어떤 상황에도 주를 기쁘시게 하고 섬기는 것을 추구하는 방향에서, 주가 나를 기쁘게 하고 섬겨야 할 것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이것은 정확히 흐트러짐 없는 마음에서 갈라진 마음으로, 겸손한 마음에서 교만한 마음으로, 하나님 중심적인 마음에서 자기중심적인 마음으로의 변질이다. 회개하여 마음을 성결하게 하지 않으면, 겸손히 낮추지 않으면, 복음의 은혜는 위에서 아래로 흐르지 않는다(잠 3:34; 약 4:6).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의 우선순위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항상 간직해야 할 복음적인 원칙이다(마 6:33).
2. 복음의 약속: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바울이 본문에서 다룬 “처녀”는 문맥 안에서 약혼한 여자를 말한다. 바울은 이미 앞에서 독신의 경우를 다뤘기 때문에 불필요한 반복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1-2절), 또 이 특별한 단어는(파르떼노스) 성경에서 여러 번 약혼한 여자를 가리킬 때 사용됐다(“약혼녀”, 36-7절; 마 1:23, 마 25:1). 바울은 이들에 관하여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스러운 자가 된 나의 의견을 말하노니”라고 답변을 시작했다(25절).
이것은 바울의 의견이 가진 권위를 결코 떨어뜨리지 않는다. 그는 권면을 마무리하면서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라고 자기 의견에 실린 영적 권위를 성령 하나님께 둔다(40절). 다만 주님께 직접 전수받은 계명이 아니라는 점을 엄격하게 구분한 것이다. 그러면서 바울은 복음에 충성스러운 자기 삶을 걸고 복음의 원칙대로 약혼한 남자와 여자가 어떻게 해야 할지 권면하는데, 아주 분명한 이유를 들어 설득한다: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26절). 임박한 환난은 무엇을 말하는가?
어떤 이들은 당시 고린도를 비롯한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진 로마 지역 곳곳에 발생하기 시작한 박해를 가리킨다고 본다. 하지만 주께서 재림하시는 종말의 관점이 여기에 더 부합한다. 바울은 29절부터 임박한 환난의 때에 합당한 삶의 방식과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29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0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1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29-31절). 이 역설이 강조하는 교훈은 이 세상의 삶은 일시적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속한 것을 영원한 것처럼 여기며 살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 나오는 여러 예시는 예수님이 종말에 관하여 가르치실 때 말씀하신 것과 유사하다. 예수님은 세상 끝에 일어날 징조를 묻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 24:37-39). 주님은 또한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임금 이야기를 들어 천국을 비유로 말씀하셨는데, 청함을 받은 사람 중에 그 영원한 천국을 하찮게 여기며 거절했던 자들로 소와 밭을 매매하는 자들, 장가들어 아내가 있는 자들이 나온다(눅 14:15-24). 모두 은혜 밖에 있는 자다.
그리스도인이 복음의 원칙대로 흐트러짐 없이 주를 섬기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 세상을 영원한 곳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혼이 그토록 중요한 것이 되고, 세상이 말하는 기쁘고 슬픈 일에 목을 맨다. 매매하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세상 물건을 쓰는 것에 삶을 바친다. 그렇게 영원하지 않은 것에 온통 마음이 빼앗긴 사람은 주가 임하실 때 미처 준비하지 못한 자로 발견될 수도 있다. 종말은 복음의 약속이고(롬 8:30), 그래서 종말을 준비하지 않으면서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사는 자는 복음의 약속을 잊어버린 자, 최악의 경우 그 약속을 받지 못한 자다.
어떻게 독신이 결혼하지 않고 주를 섬기는 데 올인할 수 있나? 왜 홀로된 형제자매가 재혼하지 않고 남은 삶을 주를 기쁘시게 하는 일에 전념하는 것인가? 세상이 말하는 슬픈 일을 만나도 감사할 수 있고, 기쁜 일을 만나도 그것에 마음을 온통 빼앗기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복음의 약속 때문이다. 누가 가난한 자 같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모든 것을 가진 자인가?(고후 6:10). 복음의 약속을 믿는 자다. 이 세상은 지나가고, 땅과 하늘도 새롭게 될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한 것만 영원히 남는다. 이 약속을 굳게 붙드는 자는 그래서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흐트러짐 없이 주님을 섬길 수 있다.
3. 결혼 관련 사례4: 약혼한 경우
자, 그러면 지금까지 살펴본 복음의 원칙과 복음의 약속을 가지고 마지막 결혼 관련 사례인 약혼한 그리스도인의 경우에 적용해 보자. 복음의 급진적인 부르심 그 우선순위에 따른 첫 번째 권면은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이다(26절). 일정 기간 후에 결혼하기로 약속한 상태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가장 급진적인 부르심이 분명하다(파혼). 물론 약혼자와 결혼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장가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28절). 바울은 약혼을 이행하여 결혼했을 때, 그들이 겪게 될 육신적인 어려움을 생각하여 그들을 아끼기 때문에 그냥 지내라고 권면했지만, 분명히 결혼하는 것도 죄가 아니라고 밝혔다. 38절에 보면 결혼하는 자도 잘하거니와 결혼하지 아니하는 자는 더 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둘 다 분명 잘하는 것이다. 다만, 복음의 원칙과 약속을 생각하면 더 좋은 것이 있을 뿐.
구체적인 적용은 36-7절에 나온다(새번역이 더 이해하기 쉽다): 36어떤 이가 결혼을 단념하는 것이 자기의 약혼녀에게 온당하게 대하는 일이 못된다고 생각하면, 더구나 애정이 강렬하여 꼭 결혼을 해야겠으면, 그는 원하는 대로 그렇게 하십시오. 결혼하는 것이 죄를 짓는 것이 아니니, 그런 사람들은 결혼하십시오. 37그러나 결혼하지 않기로 마음을 굳게 먹은 사람이, 부득이한 일도 없고, 또 자기의 욕망을 제어할 수 있어서, 자기 약혼녀를 처녀로 그대로 두기로 마음에 작정하였으면, 그것은 잘하는 일입니다.
두 가지 경우가 나온다. 약혼한 대로 결혼하는 것(36절) 그리고 약혼을 취소하고 독신으로 사는 것(37절). 두 가지 경우 모두 매우 세심한 조건들이 붙는다. 1) 결혼을 약속한 상대방의 유익, 2) 정욕을 절제할 수 있는 은사, 3) 본인의 뜻. 첫 번째 조건은 결혼한(할) 배우자에게 의무를 다하라는 명령에 부합한다(3절). 두 번째 조건은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라는 명령에 부합한다(2, 9절). 마지막 세 번째 조건은 7장 전체에서 바울이 개인에게 허용한 모든 명령에 부합한다. 결국 모든 권면에 순종하는 것은 개인의 의지적 선택이기 때문이다.
한번 상상해 보라. 어떤 청년이 1년 후 결혼하기로 했다고 고백하는데, 그 약속대로 결혼해도 잘하는 것이지만, 그 약속을 취소하고 혼자 사는 것은 더 잘하는 것이라고 권할 수 있을까? 물론 우리는 본인이 원해서 결혼으로 부르신 하나님께 순종하여 배우자의 유익을 구하려는 사람을 축복하고 또 짝지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하지만 복음의 원칙과 약속이 이 정도로 급진적인 삶의 방식을 우리에게 요구한다는 것을 모두 알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결혼에 관하여 가르치실 때,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결혼은 사람이 결코 나눌 수 없기 때문에, 음행한 이유 외에는 이혼할 수 없다고 하시자, 제자들은 “만일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그런 것이라면 차라리 결혼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마 19:10, 우리말 성경). 그들은 모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라는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이었다(마 16:24). 그러나 결혼에 관하여는 하나님의 기쁨이 아니라 자신들의 기쁨,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들의 뜻을 온통 이루기 원한 것이다. 그걸 얻지 못한다면 차라리 안 하는 게 좋다고 말하면서.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는 어떠한가?
‘이것이 당신을 따르는 삶이라면 차라리 따르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라는 마음과 싸우고 있지 않은가? 당신에게 허락하신 환경과 상황 가운데 당신은 복음이 약속한 영원한 보상을 바라보며 잠시 주어진 것들에 인내하고 있는가? 감사하고 있는가? 주님과 함께 충만한 기쁨으로 거하고 있는가? 복음이 당신에게 요구하는 원칙대로 흐트러짐 없이 주님을 섬기고 있는가?
그리스도는 잠시 독신으로 사셨지만, 영원한 교회의 신랑이 되셨다. 그분은 자녀가 없으셨지만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을 하나님의 영원한 자녀가 되게 하셨다. 그분은 가난하여 머리 둘 곳도 없으셨지만, 하늘에 속한 모든 보화를 영원히 우리와 나누시고, 흠모할 만한 것이 없는 천한 종처럼 사셨지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으로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영원히 우리와 나누신다. 주가 이 땅에 계실 때 좁은 문을 향하여 좁은 길로 흐트러짐 없이 정진하셨다면, 그 뒤를 따르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마땅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