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형제 사랑
본문: 요한일서 3장 16-18절
설교자: 장문길(부천교회)
교회에서는 형제사랑에 대해서 강조하지 않아도 매주 마음속에 형제사랑에 관한 동기가 부여됩니다. 우리가 드리고 있는 주의 만찬 때문입니다. 주의 만찬을 대할 때마다 우리는 날 사랑하시는 주님에 관해 생각하게 됩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다는 것,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안다는 것, 그 사랑은 우리가 설명하지 않아도 우리는 우리 앞에 진설된 떡과 잔을 통해 우리가 받은 사랑이 어떤 사랑인가 깨닫게 한다는 것,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각자가 느끼는 몫대로 느끼고 있습니다. 한 주간 생활하는 모습들이 달랐기에 주일 아침에 주님의 사랑을 느끼는 강도는 다를 것입니다. 누가 더 사랑을 많이 느낄까요? 한 주 동안 경건하게 잘 살았던 사람이 느낄까요, 한 주 동안 형편없이 살았던 사람이 더 많이 느낄까요?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이 형편없다고 느끼면 느낄수록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 가운데 깊이 알고 깨닫고 감사하고 그 사랑을 흉내 내려고 할까요? 아마도 경건하게 살고 거룩한 삶을 살면서 말씀을 잘 알아서 실천하는 사람이 더욱 그럴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사랑이 감격적으로 느껴질 때는 하나님 앞에 나오기도 부끄러웠을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랑을 본받기를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 알 때입니다.
주님께서 생명을 내어주신 모든 성도들은 형제 사랑에 대해서 잊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사탄이 우리의 마음에 다른 생각을 주어서 때때로 우리 마음속에 주님보다 더 좋은 것을 생각나게 해서 그것으로 빠지게 되든지, 반대로 하나님 앞에 형편없어서 정죄를 받아서 하나님 앞에 나오지 못하게 되든지 하는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매주 우리가 예배드리는 자리에 나오면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사랑이 어디서부터 온 것인지 알기에 형제 사랑에 관해서는 우리에게 특별히 말이 필요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앞의 말씀은 부담없이 들리지만 뒷부분은 참 부담스러운 말씀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다는 것,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다면 너희도 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는 것이 맞는데,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다면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셨습니다. 문법적으로 좀 문제가 있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받은 사랑은 이런 사랑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시고 기대하시는 것은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리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요일 3:17-18)”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는 사람일까요?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어떻게 사는 것입니까? 머릿속에 믿음이 머물러 있는 사람입니까, 믿음이 행동으로 나오는 사람입니까? 속에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가둬두고 있으면 미칠지도 모릅니다. 누군가 ‘비밀이야, 너만 알고 있어’라고 하면서 비밀을 말하면 마음속이 미칠 듯이 답답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것이 행동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속에 믿음이 있으니 믿음대로 사는 것입니다.
엉뚱한 교리를 가르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변화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과거에는 믿으면 행동이 변화하는데 요즘은 믿어도 행동이 변화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교리를 말했습니다.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변화가 없는 것을 보면서 성령 세례, 또는 성령 충만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단적인 교리를 가르쳤던 발단은 누군가를 보면서 믿는 사람인가라는 의문에서 도움을 주려고 했던 것 같아서 마음이 좀 씁쓸했습니다. 저는 예수님 믿을 때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 그래서 나도 세상과 나 자신이 죽었다, 그러므로 이제는 주님과 함께 주님 때문에 사는 것이라는 것을 믿고 다짐했습니다. 구원받은 이후로 교리적으로 잘 몰라도 저에게 확실한 것은 예수님은 생명도 아끼지 않고 날 위해 죽으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분을 사랑하면서 살아야겠다, 그 방법은 목숨 다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참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돕기 위해 다른 교리를 말한다면 그것은 이단일 것입니다.
우리 속에 믿음이 있을 때 믿음대로 사는 것처럼, 주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면서 사는 것입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약 2:14-17)” 믿음은 우리의 머릿속에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믿음이 들어오면 행동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 형제들이 모였습니다. 그들의 재물을 가져다가 사도들 앞에 놓았고 재물을 공유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알았으니 너희들이 가진 것을 가져다가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야 한다고 협박했거나 많이 내는 사람이 많이 받을 것이라는 강조도 아니었습니다. 구약 때부터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셨던 것을 그들이 알았던 것입니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은 누가 특별히 가르쳐주지 않아도 오랫동안 그들이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어려운 사람을 보고 외면할 리가 없습니다.
딸이 어린이집을 운영합니다. 아이를 데려올 때 어떤 엄마는 어린이집 차량을 이용하기보다 자신이 아이를 직접 데려와야 한다고 여기고 손을 잡고 데려오는 엄마가 있습니다. 한 할머니가 계셨는데 본인이 똑바로 설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유모차를 잡아야 걸어오실 수 있습니다. 그분이 손녀를 데려오시는데 그 모습이 참 예뻐 보였습니다. 걷기도 힘드신데 할머니의 눈은 잠시도 손녀에서 떨어지는 일이 없습니다. 뛰지 말아라, 그쪽으로 가지 말아라, 같이 가자 등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손녀가 느끼는 것은 다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는 할머니는 손녀를 끔찍이 생각하시는 분입니다. 저도 어릴 때 어머니의 말씀이 잔소리 같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제가 생각하는 것은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어제는 손주의 돌이라 가족들이 모여 식사를 했습니다. 아들이 직장생활을 하다 보니 손주를 쉬는 날 잠시 몇 시간만 봅니다. 잠깐 보면서 온 종일 본 것처럼 표현합니다. 아들에게 한 마디 하라고 했더니 ‘우리 아들이 벌써 첫돌’이라고 하면서 울컥했습니다. 그 속에는 오랜 시간 아기를 못 봐도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어디에 가면 아이를 위해 뭔가를 사주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다 아는 것입니다.
제 딸이 하는 어린이집에 소아마비를 앓는 할머니가 계십니다. 5살짜리 손주가 할머니에게 업어달라고 합니다. 절뚝거리면서 어린이집으로 아이를 업고 오십니다. 그 할머니가 어디서 그런 힘이 날까요? 손녀가 사랑스러우니 자신이 좀 아파도 된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까? 사랑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그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참 이기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나밖에 모릅니다. 내 식구밖에 모릅니다. 그런 사람들이 어떤 사랑을 안 것입니까? 원수처럼 행했던 나, 하나님 앞에 부끄러워 나올 수 없었던 나,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도 없었던 나를 먼저 사랑하셔서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그 사랑을 알려주셨습니다. 깨달아 믿게 해주셨습니다. 이제는 날더러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십니다.
사랑 없이도 별일을 다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보시겠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1-2)” 놀라운 말씀들,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 없이 훌륭하게 말씀을 전할 수 있고, 믿음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사랑 없이 구제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고 말합니다. 12장까지 은사에 대해 말씀하시다가 그 은사를 사용할 때 특별히 무엇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사랑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3장 이후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들은 유언과 같은 말씀들입니다. 십자가를 목전에 두고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고 하면서 34-35절에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론적으로 모르기에 형제사랑을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속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적은 것입니다. 형편없는 사람이 더 주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내가 형편없을수록 주님 사랑이 더 놀라우니 더욱 주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메시지 성경 속의 형제사랑에 대한 부분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희생하신 것을 보고 우리는 사랑을 이해하고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자기 자신만 위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동료들을 위해 희생하며 살아야합니다. 곤경에 처한 형제나 자매를 보면서 도울 능력이 있는 여러분이 그들을 냉대하고 아무것도 도와주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어찌 되겠습니까?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을 사라지게 한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를 사랑합니다. 남들이 내 자식에 대해 잘못되었다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남들이 ‘저 아이는 틀렸어, 잘못됐어’라고 말하고 포기할 때에도 부모의 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이 내 자녀를 포기해도 부모는 그 자녀에게 포기라는 단어를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끝까지 기대하고 참아주고 믿어주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사랑을 입은 한 가족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다른 사람이 내 옆에 있는 어떤 형제를 손가락질 하고 힐난을 한다 해도 누가 참고 기대해줘야 할까요? 내 옆에 있는 형제를 모든 사람이 포기하고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말할 그 때에도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슨 소리야,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죽으신 형제야. 내가 그를 기대하지 않고 참아주지 않으면 누가 참아주겠어” 우리 마음 가운데 이러한 마음이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