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행복의 조건
본문: 시편 23편 1~6절
설교자: 이병권
오늘은 새해를 맞아서 행복에 대해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행복을 추구합니다. 어떤 형태로든 자신이 생각하는 행복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겁니다. 그럼 행복은 뭘까요? 사전을 찾아보니 행복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욕구가 충족되어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는 상태” 또 다른 사전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사람이 생활 속에서 기쁘고 즐겁고 만족을 느끼는 상태에 있는 것”
쉽게 생각하면, 행복이란 기쁨과 만족을 느끼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행복하다’는 것은 ‘기쁨과 만족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저마다 자신이 생각하는 기쁨과 만족을 얻으려고 노력합니다. 기쁘고 만족스러울 때 행복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있습니다. 행복의 조건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이 있는 것입니다.
먹는 것이 행복의 조건이 됩니다. 맛있는 것을 먹을 때 행복합니다. 먹으면 기쁘고 배가 부르면 만족합니다. 그리고 먹는 것뿐만 아니라 사람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욕구들이 충족되었을 때 행복합니다. 기쁨과 만족을 느끼는 것입니다. 또한 행복을 주는 것이 돈이나 물질적인 소유가 될 수도 있습니다. 가진 것으로 행복을 느끼는 겁니다. 더 가질수록 더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물질적인 행복을 좇아서 더 가지기 위해 수고합니다. 뿐만 아니라 무언가를 성취하거나 업적을 통해 행복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목표나 꿈을 이루었을 때 만족을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공하는 것을 행복의 조건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좀 더 나아가 이타적인 것으로 행복을 찾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한 봉사나 선행을 행복의 조건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행복의 조건으로 생각하십니까? 무엇보다 여러분은 행복하십니까? 말씀을 준비하면서 행복에 대한 이런 저런 자료를 찾아봤는데 행복에 관한 연구가 참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제목들이 있습니다. “행복한 사람들의 22가지 긍정적인 습관”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는 7가지 기술” “행복한 삶을 사는 9가지 방법” “행복을 위해 필요한 7가지 재료” “행복해지는 6가지 법칙” 습관, 기술, 방법, 재료, 법칙 등등 이들이 비슷하게 말하는 것은 행복을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생각과 태도, 좋은 습관을 기르면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기에 그만큼 오해하기도 쉬운 말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노력만으로 행복할 수 있을까요?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의 조건을 갖추면 행복할까요? 만약 노력만으로 행복을 얻는다면 그 행복은 일시적인 감정일 뿐입니다. 진짜 행복은 나의 노력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행복은 자기 최면이 아닙니다. ‘난 행복해,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난 괜찮을 거야!’ 이러는 게 아닙니다. 진짜 행복은 현실을 초월하지만 현실을 무시하지도 않습니다. 진짜 행복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기뻐하고 만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그러한 행복이 있으십니까?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행복하다고 느끼십니까? 아니면 무엇 때문에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십니까? 여러분은 어디에서 기쁨과 만족이 얻고 계십니까? 우리는 무엇으로 만족할 수 있을까요? 세상이 아니라 우리가 행복의 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행복의 조건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기를 원합니다.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1) 부족함이 없다고 말합니다. 좀 더 친근하게 이렇게 번역한 성경도 있습니다. “아쉬울 것 없어라” 나의 환경과 형편과 상관없이 아쉬울 것 없다고 만족한다고 고백합니다.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어떻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을까요?
‘에이 다윗 정도면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왕이잖아!’ 다윗이 이 시편을 언제 썼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의 삶을 생각해볼 때 그가 왕이었기에 어려움이 없었기에 이런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윗은 왕이 되기 전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왕이 된 후에도 그러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4)와 “내 원수의 목전”(5)이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다윗에게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부족함이 없다는 다윗의 고백은 어려운 상황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자신의 형편과 상관없이 만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진짜 행복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찾을 수 없고 세상에서 얻을 수 없고 세상이 줄 수 없는 행복입니다. 다윗은 차원이 다른 행복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할 수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윗은 행복의 조건이라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조건을 말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1) 행복의 조건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입니다. 다윗은 행복의 조건이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님을 알려줍니다. 다윗이 행복할 수 있는 것, 그가 만족할 수 있는 것, 나에게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 되시기에 내가 만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다윗은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목자와 양의 관계로 비유합니다. 다윗은 양을 돌보는 목자였습니다. 그래서 목자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양에게 어떤 특징이 있는지 양에게 목자가 어떤 존재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다윗이, 목자였던 다윗이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시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다윗은 이 시를 노래하면서 특별히 “나”라는 표현을 계속 반복합니다. 우리 성경에 14번이 나오는데 원문으로 보면 17번이나 나옵니다. 여섯 구절의 짧은 시에서 “나”라는 표현이 이렇게 많이 반복되는 것을 통해 이 시가 개인의 경험에서 나오는 고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나의 삶을 두고, 내가 경험한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목자와 같은 분이십니다’ 다윗의 고백입니다. 그리고 다윗의 이 고백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스펄전은 시편 23편을 “시편의 진주”라고 말했습니다. 이 시편이 주는 위로와 은혜가 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시편을 사랑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시편을 읽고 노래하고 암송합니다. 특별히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분들에게 이 시편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사람이 줄 수 없는 위로와 힘을 줍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이 시편이 필요합니다. 이 시편의 말씀으로 힘을 얻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 시편을 노래하며 기뻐하고 만족하기를 원합니다. 새해에도 목자 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다윗의 고백이 어떤 의미인지, 목자 되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통해 그 고백의 의미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셨기에 하나님을 목자라고 고백할까요? 다윗이 하나님을 목자라고 부르는 이유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목자 되시는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시는지, 세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다윗의 목자이신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십니까? 첫째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목자로서 다윗을 인도하셨습니다.
시 23: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23: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우리가 양의 특징을 알면 이 시편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양은 지독한 근시입니다. 앞에 있는 것만 봅니다. 멀리 있는 것은 잘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 풀이 있는 곳, 물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스스로 찾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방향감각이 없어서 쉽게 길을 잃어버립니다. 길 잃은 양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목자 없는 양은 먹을 것을 찾을 수 없고 쉴 곳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인생이 그러합니다. 목자 없는 양과 같습니다.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가야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런 다윗에게 하나님이 목자가 되셔서 인도하십니다.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귀한 가르침으로 여러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고 있는 탁월한 성경교사 최종혁은 그의 책, 『마음의 전쟁, 시편』에서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가에 대해서 ‘안식’이라고 요약해서 말합니다. 목자이신 하나님은 다윗을 안식으로 인도하십니다.
특별히 여기 말씀에서 ‘누이신다’는 표현을 주목해 볼 수 있습니다. 사실 누워있는 양을 보는 것은 아주 드문 일입니다. 양은 여간해서는 잘 눕지 않기 때문입니다. 필립 켈러는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현지 목자들을 보면서 자랐고 실제로 양을 치는 목자가 되어 8년이라는 시간을 보냅니다. 그리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양과 목자』라는 책을 썼는데 그 책에 보면 양이 눕기 위해서는 4가지 조건이 만족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첫째, 양에게 두려움이 없어야 합니다. 맹수의 위협이나 안전하지 못하다고 느끼면 양은 절대로 눕지 않습니다. 둘째, 해충의 괴로움이 없어야 합니다. 털이 많은 양에게 파리나 진드기와 같은 벌레들은 아주 성가신 존재입니다. 셋째, 양들끼리 다툼이 없어야 합니다. 보통 양을 온순한 동물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양들끼리 서열 다툼을 위해 싸우는 일이 많다고 합니다. 넷째, 배고픔이 없어야 합니다. 배가 불러야 눕는 것입니다. 위협과 해충과 다툼과 배고픔이 없어야 합니다. 이 네 가지가 없을 때 양은 누울 수 있습니다. 목자 되신 하나님이 다윗을 인도하시기에 다윗은 푸른 풀밭에 누워서 안식할 수 있습니다. 아무런 걱정 없이 쉼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다윗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곳으로 하나를 더 말합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양은 가는 길에서 쉽게 이탈합니다. 딴 길로 갑니다. 바른 길에서 떠나 자기 마음대로 방황하는 것이 양의 특징적인 모습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양의 이런 특징을 사용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사53:6).
하지만 목자이신 하나님은 탈선한 양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다시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소생”입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3) 소생시킨다는 말은 원래 상태로 되돌린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돌아오게 하다’, ‘회복시키다’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목자가 하는 일이 그러합니다. 양이 잘못된 길을 갈 때 돌아오게 합니다. 방황하여 지친 양을 회복시키고 다시 “의의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목자는 자기 이름을 위해 이 일을 합니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3)
어린 아이가 꼬질꼬질한 얼굴로 위험한 곳에서 방치되어 뛰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 아이를 본다면 먼저 누구를 생각하게 될까요? 아이의 부모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부모는 어디 있지? 아이를 저렇게 내버려두면 어떡하지?’ 걱정합니다. 아이를 보고 부모를 생각하는 것처럼, 양을 볼 때는 목자를 생각합니다. 양에게는 목자의 이름이 걸려있습니다. 양을 보면 목자를 알 수 있습니다. 엉망인 상태로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는 양을 보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목자가 누구지?’
뛰어난 장인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심혈을 기울여 작품을 만드는 것처럼 목자이신 하나님도 그러합니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양을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걸려있기에 끝까지 책임지고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이 뜻하신 곳으로 다윗을 인도하십니다. 참된 안식과 영원한 의로움이 있는 그곳으로 인도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기에 다윗은 행복합니다.
다음으로 다윗의 목자이신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십니까? 둘째로 함께하십니다. 하나님은 목자로서 다윗과 함께하셨습니다.
시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양은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수단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적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높이 뛰거나 빠르게 달릴 수 있는 다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몸집이 크거나 단단한 피부를 가진 것도 아닙니다. 싸울 수 있는 뿔이나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것도 아닙니다. 재빠르게 몸을 피하거나 숨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사나운 짐승을 만나면 쉽게 먹이가 되는 것입니다. 목자가 없다면 말입니다. 이렇게 철저하게 연약하고 무능한 양이지만 목자와 함께 있으면 어떻습니까? 든든한 목자가 곁에 있으면 양은 안전합니다.
유대광야에는 험난한 골짜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골짜기는 좁은 길로 이어져있고 그 깊이가 깊어서 아주 위험합니다. 자칫 잘못하여 발을 헛디디면 낭떠러지로 떨어져 목숨을 잃을 수 있습니다. 갑자기 불어온 바람이나 쏟아지는 비로 인해 아래로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또한 골짜기 아래는 맹수들이 숨어서 지내는 은신처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골짜기 아래에는 햇빛이 잘 들지 않기 때문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고 부르는 것이 너무도 잘 어울립니다. 양에게는 정말 두려운 곳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 하더라도 두렵지 않은 것은 목자가 나와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어디에 있느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누구와 있느냐’입니다. 골짜기에 있더라도 그곳이 어두워서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가는 길이 힘들고 괴롭고 이 길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면 두렵지 않은 것입니다. 비록 인생의 길이 어려움의 연속이라 하더라도 때로 원하지 않는 음침한 골짜기를 지난다 하더라도 그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에 만족할 수 있습니다. 그 어려움 속에서 더 빛나고 값진 행복을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4절부터는 분위기가 달라지면서 목자에 대한 표현이 바뀝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그”라는 표현에서 “주”라는 표현으로 바뀝니다. 우리 성경은 “주”라고 번역을 했는데 원래 표현은 ‘당신’입니다. ‘그’보다 ‘당신’이 더 가깝고 더 친근하게 느껴집니다. 다윗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 인생이 항상 푸른 풀밭, 쉴만한 물가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에도 당신이 나와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행복합니다.’
하나님은 다윗과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다윗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지팡이와 막대기를 든 목자의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여기서 지팡이는 맹수로부터 양을 보호하는 용도로 씁니다. 그리고 막대기는 끝이 휘어져 있는데, 양에게 방향을 제시할 때나 방황하는 양을 바로 잡을 때 구덩이에 빠져 있는 양을 구조할 때 길을 가는데 방해가 되는 것들을 제거할 때 다양한 용도로 사용합니다.
목자는 지팡이와 막대기를 사용해서 양을 지키고 양과 함께 합니다. 사나운 짐승들로부터 양을 지키기 위해 힘을 다해 싸웁니다. 다윗이 목동이었을 때 그렇게 양을 지키기 위해 수고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기 전에 사울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삼상 17:34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삼상 17:35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다윗은 이렇게 목자로서 사자나 곰으로부터 양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돌이켜 생각해보니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으로 나를 지키고 나를 보호하셨습니다. 사자의 입과 같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나를 건져내셨습니다. 곰의 발톱과 같은 원수가 나를 위협할 때에도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전하게 지켜주셨습니다.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있기에 다윗은 행복합니다.
마지막으로, 다윗의 목자이신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십니까? 셋째로 공급하십니다. 하나님은 목자로서 다윗에게 공급하셨습니다.
시 23: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다윗은 또 한 번 장소를 이동합니다. 푸른 풀밭에서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 이제는 잔치가 벌어진 집입니다. 다윗은 잔치에 초대를 받아 주인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풍성한 잔칫상이 다윗을 위해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주인이 다윗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주십니다. 손님에게 기름을 붓는 것은 주인의 의무이자 기쁨입니다. 주인의 기쁨일 뿐만 아니라 손님에게도 기쁨이 됩니다. 특히 땡볕에서 모래를 헤치고 걸어온 손님에게 기름은 큰 기쁨을 줍니다. 지금 우리로 치면 로션을 바르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기름은 상한 피부를 진정시키고 지친 마음을 회복시켜 줍니다.
시편 104:15에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이렇게 말합니다.
시 104:15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사람의 얼굴을 윤택하게 하는 기름과 사람의 마음을 힘있게 하는 양식을 주셨도다
지금 하나님이 다윗에게 이와 같은 일을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상을 차려주셔서 양식을 주시고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주시고 잔을 채워주십니다. 그리고 그로인해 따라오는 기쁨과 만족을 얻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공급하심이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 확장됩니다. 하나님의 공급하심이 물질적인 가치에서 영적인 가치로 커져갑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1차적인 양식과 기름을 공급하셨고 다윗은 그로 인해 2차적인 기쁨과 만족까지도 공급받습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다윗에게 행복을 공급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낌없이 풍성하게 공급하십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5) 다윗의 잔은 가득합니다. 부족함 없이 하나님이 공급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삶을 가치 있는 좋은 것들로 가득 채우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내 원수의 목전”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그대로 가져와서 생각하면, 식사 자리에 왜 원수가 있는 거지?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이 장면을 생각하면, 손님을 초대한 주인의 어떠함을 알 수 있습니다. 원수가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손님이 편하게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주인이 원수보다 더 강하다는 것입니다. 주인 앞에서 원수는 무력합니다. 주인이 있을 때 원수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이빨 빠진 사자처럼 원수는 주인의 보호하심 안에서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원수가 앞에 있다는 것은 손님에게 있어서 오히려 기쁨이 됩니다. 원수가 더 이상 다윗에게 어려움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원수를 잡아두고 승전가를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더 강한 주인이 손님을 보호하고 있기에 원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원수가 아무리 크고 강하고 무섭다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가장 강한 자가 나를 지키시면 다른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먹을 것과 마실 것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실 뿐만 아니라 원수 앞에서도 그러한 위험에서도 평안할 수 있도록 안전을 공급하십니다.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셔서 그 필요를 공급하시는 하나님은 손님을 초대한 주인처럼 손님을 위해 수고하고 필요를 채우십니다. 목자가 양의 필요를 알고 성실하게 그 필요를 공급했던 것처럼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다윗의 필요를 채워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급하심이 있기에 다윗은 행복합니다.
정리하면, 다윗의 목자이신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다윗을 인도하심으로 다윗의 인도자가 되셨고 하나님은 다윗과 함께하심으로 다윗의 보호자가 되셨고 하나님은 다윗에게 공급하심으로 다윗의 공급자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의 목자가 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다윗의 인도자이며 보호자이며 공급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목자이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이렇게 다짐합니다.
시 23: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평생에 걸쳐서 다윗과 함께 할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하겠다고 다짐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확신에 찬 다짐으로 이 시편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시편은 다윗의 행복 이야기로 이렇게 끝나는 걸까요? 다시 말해 우리도 다윗과 같은 고백과 다짐을 할 수 있을까요?
이 시편은 다윗의 개인적인 고백입니다. 우리는 다윗과 같은 것을 경험하지 않았습니다. 양을 키운 적도 없고 목자가 어떤 일을 하는지 경험한 적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자이신 하나님의 인도하심, 함께하심, 공급하심,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의 이야기로 생각할 수 있을까요?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의 목자이신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다윗에게 하셨던 일들을 하십니다. 아니, 사실 하나님은 나를 위해서 더 큰 일을 하셨습니다. 다윗이 경험하지 못한 일을 우리는 경험했습니다. 다윗이 경험한 것과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이 나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우리는 그 최대치를 경험했고 우리가 그 절정을 맛보았습니다. 선한 목자 되시는 우리 주님께서 나를 위해 그 일을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요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선한 목자 되신 주님께서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양의 행복은 목자에게 달려있습니다. 어떤 목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양의 행복이 달라집니다. 선한 목자를 만나면 행복하지만, 악한 목자를 만나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어떤 목자를 만나느냐 하는 것이 행복의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선한 목자를 만났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행복한 것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어느 신부의 결혼식 이야기’로 마치려고 합니다. 결혼식을 앞둔 신부는 일찍부터 일어나 오랜 시간동안 치장을 해야 했고 이것저것 챙길 것이 많아서 정신없이 준비하다보니 아무것도 먹지 못합니다. 이제 결혼식을 시작할 시간이 거의 다 되었고 아버지와 신부 입장을 준비하기 위해 장소를 이동하는데 마침, 피로연을 위한 마련된 테이블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너무 배가 고팠던 그녀는 테이블에 있는 음식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허겁지겁 음식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디저트 케이크와 쿠키, 아몬드, 초코볼, 소시지, 새우베이컨말이, 블루베리 등등 눈에 들어오는 대로 이것저것 폭풍흡입을 합니다. 그리고 입을 헹구려고 샴페인 한 잔을 들이키고 신부 입장을 위해 출입문 앞에 서서 대기합니다. 잠시 후, 신부가 입장하는데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습니다. 사람의 주목을 받은 것은 신부의 드레스가 아니라 신부의 얼굴이었습니다. 그녀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했고 불편해보였습니다. 긴장한 상태에서 너무 급하게 이것저것 먹느라 급체했던 것입니다. 신부는 안전핀이 뽑힌 수류탄처럼 언제 터질지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간신히 신랑 있는 곳, 가까이 걸어갔지만 그리고 나서 모든 것을 토해냅니다. 신부의 입에서는 급하게 넣었던 온갖 것들이 다 쏟아져 나왔습니다. 갖가지 색깔의 내용물들이 사방으로 튀었습니다. 사람들은 놀라며 소리를 질렀고 신부는 당황하며 어쩔 줄을 몰라 합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오물이 튀었고 이 모든 일이 순식간에 벌어졌습니다.
이 결혼식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대로 엉망진창으로 끝이 났을까요? 그런데 놀랍게도 이 결혼식은 오히려 더 즐겁고 감동적으로 끝났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신랑 때문이었습니다. 신랑은 재빨리 그 상황을 수습하며 결혼식 내내 자신의 신부를 돌봅니다. 어떤 사람도 그렇게 할 수 없을 만큼 극진히 신부를 챙깁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쏟아냈던 그녀의 입에 다정히 입을 맞춥니다. 사람들은 그 부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으며 축복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 잘못된 상황에서 이 황당하고 어려운 상황에서 어떻게 그 상황이 모두에게 기쁨과 만족을 주는 상황으로 바뀌었습니까? 신랑 때문입니다. 온통 엉망인 결혼식이라 하더라도 신부에게는 신랑이 있었기 때문에 행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합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신랑이 계십니다. 온 몸으로 더러운 죄를 쏟아내는 우리지만 주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창피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손을 잡아주시고 우리를 품어주십니다. 우리에게 입맞춰주십니다. 우리를 이해하시고 우리 가까이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분이 나의 손을 잡아주시고 인도하시기에 그분이 나의 필요를 아시고 공급하시기에 그분이 고통 가득한 이 세상에서 우리를 보호하고 계시기에 우리가 행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 때문에 행복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유일한 행복의 조건이 되시기에 우리가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올 한해도 우리 행복의 조건이 되시는 주님만을 바라보시고 주님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 안에서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