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하나님 마음에 합한자 다윗(2)
본문: 사무엘상 17,24장
설교자: 최종혁
누군가의 마음에 합한다는 말의 의미 – 요나단의 병기든 자의 예. 요나단이 하고자 하는대로 마음을 같이 하여 따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지 않은 사울 –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은혜 얻기를 원함. 하나님께서 드러내신 뜻보다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더 따랐다. 하나님의 마음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이 자신의 마음을 따라주기를 바랐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마음을 두신 곳에 나의 마음을 둔다는 의미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추구하고 그 마음을 따르는 사람이다. 성경은 그랬던 사람의 예로서 다윗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다윗
다윗은 참 여러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용맹한 군인이었고 존경받는 왕이었다. 그 전에 그는 성실한 목동이기도 했다. 그러면서 수 많은 시를 짓고 노래를 만든, 그리고 악기도 잘 다루었던 음악가였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실 때 외모를 보시지는 않으셨지만, 실제로 다윗은 외모도 빼어났던 사람이었다(삼상 16:12, “그는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다윗이 기록한 시편을 보면 그는 그의 내면에 있는 보이지 않는 부분이 겉으로 보이는 그의 능력이나 외모보다 위대했던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했고 항상 더 사랑하기 원했던 사람이었다. 하나님이 높임 받으시지 못함에 분노했다. 또한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자신을 내려 놓을 줄 알았던 사람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 마음에 어려움이 있든 기쁨이 있든 그것을 하나님께 가져올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군인으로서 하나님을 의지하여 전쟁에 나섰고, 왕으로서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가 세상 속에 제대로 나타나기를 소원했던 사람이 다윗이었다. 그의 예술적 재눙은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게 하는데 사용되었다. 이런 다윗을 하나님은 그 마음에 합한 자라고 표현하셨다.
다윗의 삶에서 이런 모습이 잘 드러났던 3개의 사건을 살펴보자.
- 골리앗 – 하나님의 이름을 우선시한다. 내 생명보다
- 사울 – 하나님의 명령을 우선시한다. 내 생각보다.
- 밧세바 –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선시한다. 그 누구보다
하나님의 이름을 우선시한다. 내 생명보다 (삼상 17장)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전투 상황이다.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이쪽과 저쪽 산에서 대치하고 있었다(삼상 17:3). 그 때 골리앗이라는 장수가 블레셋 진영에서 나와서 싸움을 돋운다(4절). 사무엘상의 저자는 이 골리앗에 대해서 아주 상세하게 기록한다. 성격이나 그런 보이지 않는 부분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부분을 기록한다. 골리앗은 거인이었고 강력한 방어구를 갖추고 공격 무기로는 거대한 창을 들고 있었다. 그런 골리앗이 골짜기로 내려와서 싸움을 걸고 있었다. 그가 한 말을 보라.
삼상 17:8-10 [8] 그가 서서 이스라엘 군대를 향하여 외쳐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서 전열을 벌였느냐 나는 블레셋 사람이 아니며 너희는 사울의 신복이 아니냐 너희는 한 사람을 택하여 내게로 내려보내라 [9] 그가 나와 싸워서 나를 죽이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겠고 만일 내가 이겨 그를 죽이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어 우리를 섬길 것이니라 [10] 그 블레셋 사람이 또 이르되 내가 오늘 이스라엘의 군대를 모욕하였으니 사람을 보내어 나와 더불어 싸우게 하라 한지라
단순히 전면전은 서로 부담스러우니 대표자 간 일대일 싸움으로 대체하는게 어떠냐고 제안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골리앗 자신이 말한 것처럼 그는 “이스라엘의 군대를 모욕”하고 있었다. 이런 나를 보고도 너희가 싸울 수 있다면 싸워봐라. 아니면 빨리 항복해서 우리 종이 되어 우리를 섬겨라. 이스라엘 사람들도 자신들이 모욕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25절). 하지만 누구 하나 나서서 싸우려고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키가 컸던 사울도 마찬가지였다.
삼상 17:11 사울과 온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의 이 말을 듣고 놀라 크게 두려워하니라
골리앗은 계속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욕했다(16절). 사람들은 그런 골리앗을 보고 두려워하여 도망했다(24절).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들을 보러 왔던 다윗은 이 모습을 보고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삼상 17:26 …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이것에 성경에 기록된 다윗의 첫번째 말이다. 많은 나이는 아니었지만, 다윗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 크신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두고 함께 하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욕하는 말을 들은 것이다. 다윗은 골리앗이 하는 그 모욕의 말과 그 말에 대해서 사람들이 보이고 있는 반응, 둘 다가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의 군대를 향해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나님의 군대는 그런 말을 듣고 도망할 수 있는지 다윗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모든 사람이 골리앗의 키와 무기를 보고 있을 때, 다윗은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골리앗의 위협적인 모습을 보고 놀라 두려워 도망 했지만, 다윗은 오히려 나가서 싸우겠다고 한다.
삼상 17:32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그로 말미암아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 하니
전쟁에 참가한 군인들 중에서 누구도 나가서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하지 않았다. 사울도 누구든 그렇게 해서 골리앗을 죽이기만 하면 재물과 명예를 주겠다고 약속하기만 했지 자신이 나가서 싸우겠다고 하지는 않았다. 모두다 누군가가 나서주기만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다윗이 나서고 있다. 마치 그게 뭐 별일이냐는 듯이 걱정 말라면서 자기가 나가서 싸우겠다고 말한다.
다윗의 말을 들은 사울은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젊은 사람이 객기로 인생 망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을 했을지 모르겠다. 사울은 분명하게 다윗에게 말한다.
삼상 17:33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울 수 없으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
절대 못이긴다는 것이다. 저 골리앗은 지금 네 나이때부터 전쟁에서 실전 훈련을 쌓은 용사라고 한다. 이에 대해 다윗도 분명하게 말한다.
삼상 17:34-36 [34]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35]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36]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37] 또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다윗은 자신의 경험을 말하고 그에 기초한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 단지 잘 몰라서 아무 생각없이 객기를 부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다윗이 다른 모든 사람들과 다르게 “내가 나가서 싸우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가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알기 때문이고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한 것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다윗이 알았던 것은 하나님은 구원하기에 능하신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었다(37절). 그는 지식으로 또한 경험으로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곰이나 사자를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힘이 대단하거나 운이 좋아서 그랬던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음을 다윗은 알고 있었다.
그런 다윗이 보았던 것은 바로 그 능력있고 살아계신 하나님이 모욕 당하시는 모습이었다(36절). 앞에서도 사람들은 단지 골리앗이 ‘이스라엘’을 모욕했다고 말했지만(25절), 다윗은 그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했다고 말한다(26절).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많은 민족들 중에서 선택하시고 그들과 특별한 언약을 맺으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컫는 백성이라 부르셨다(대하 7:14). 하나님은 성전에 자기의 이름을 두셨다. 하나님의 백성을 모욕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다윗에게는 중요했다. 모두가 두려워 하는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말한 이유는 다른게 아니었다.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이 모욕 당하고 있는 상황을 그가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다윗의 이런 동기는 그가 골리앗에게로 물매와 돌을 가지고 전진하며 하는 말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삼상 17:45-47 [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46]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다윗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골리앗과 싸운다. 그의 승리를 통해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온 땅이 알고 또한 그의 승리가 자신의 어떠함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임을 알게 되기를 원했다.
이것이 본문에서 핵심적으로 다루고 있는 주제다. 하나님의 이름, 즉 명예다. 골리앗은 자신이 이스라엘의 군대를 모욕했다고 직접적으로 말했다(10절). 이스라엘 사람들도 자신들이 모욕당했다고 말했다(25절). 다윗은 이 모욕이 단지 사람을 모욕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모욕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지금까지 상황은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 같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은 것처럼, 골리앗의 도발에 그들은 침묵과 두려움으로 답했다. 그들이 믿고 섬기는 하나님은 골리앗이 섬기는 신과 다를바가 전혀 없었다.
혹,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해도 결국 인간의 도움 없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는 없는 신처럼 보여지게 만들고 있었다. 그들도 다윗처럼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사람들이었다. 아마 율법에 따라 제사도 드리고 했을 것이다. 하나님께 기도하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들은 마치 하나님이 구원할 능력이 없는 것처럼 보여지게 만들고 있었다. 골리앗이 하나님을 그렇게 모욕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에 대항하지 못함으로 하나님이 그렇게 보여지게 만들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정말 그런 분이신가? 하나님은 여러 신들 중 하나일 뿐인가?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결정하고 행하실 수 있는 분이 아니라, 인간의 도움을 받아야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분이신가? 그렇지 않다. 그런데 지금 이 전장에서 하나님이 그런 분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모욕이다. 단지 골리앗 만이 하나님을 모욕했던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사실은 그렇게 하나님을 모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다윗의 말이 이렇다.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고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가 알게 하리라”(46-47절). 이 승리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제대로 선포하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다윗에게 있어 하나님이 모욕 당하시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이 사건에서 다윗은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했다. 그의 형이 그랬고, 사울도 그랬고, 골리앗도 그랬다. 하지만 그것을 다윗은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을 바로 잡으려고 골리앗에게 도전하지 않았다. 골리앗을 이겨서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모욕 당하시는 것이 더 크게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마치 율법에 따라 하나님을 모욕한 자를 돌로 치는 것처럼 물매돌로 골리앗을 죽였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에게서 볼 수 있는 첫번째 특징이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는 자신보다 하나님의 이름, 명예를 먼저 생각한다. 하나님이 어떤 분으로서 보여지는지를 우선시한다.
사울을 보면 그에게는 하나님보다는 자신의 명예가 중요했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이 사건 전에 아말렉을 쳐서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아말렉을 치지만 그 중에 좋은 것들은 남긴다. 이에 사무엘은 설령 좋은 의도로 그렇게 한다고 해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책망한다.
이에 사울은 자신이 범죄했다고 하면서 이제 용서하고 같이 돌아가서 하나님께 경배할 수 있게 해달라고 사무엘에게 구하지만 사무엘은 거절한다. 그러자 사울은 자신의 본심을 말한다.
삼상 15:30 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이제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더라
결국 사울이 궁극적으로 원했던 것은 죄로 인한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그저 자신이 사람들 앞에서 높임을 받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그것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다윗이 골리앗과의 전투를 기점으로 사람들의 인정을 받게 되자 사울은 그것을 불쾌하게 생각하고 분노했다. 그리고 그 후로 다윗을 주목하여 보면서 그를 죽이려고 했다.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자신의 이름, 명예, 명성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는 죽을 때도 이방인에게 모욕 당하기를 원하지 않아서 자살을 택했다.
무엇이 나에게 더 중요한가? 무엇이 나의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켜야 할 가치인가? 나의 이름, 명예, 평판인가? 내가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보여지고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느냐가 중요한가? 물론 그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단지 그것이 중요하지는 않다. 나를 통해 하나님이 어떻게 보여지시느냐가 중요하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에게는 그것이 더 중요한 문제다. 다윗은 자신의 목숨을 건 싸움을 했다.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싸움을 왜 하고 있는가? 우리가 악을 행하지 않고 선을 행하기 위해 치열한 삶을 사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을 올바르게 세상 속에서 드러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 나로 인해 하나님이 모욕당하시지 않는 것, 대신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추구해야 할 가치다.
하나님의 명령을 우선시한다. 내 생각보다 (삼상 24장)
사울이 하나님의 명령보다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앞서서 이미 살펴 봤다. 그렇다면 다윗은 어떨까? 사울과 관련된 하나의 사건을 보자.
사울은 다윗을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강력한 세력으로 보고 다윗을 잡아 죽이려 했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을 피해 도망다녔는데, 그러던 중 엔게디로 가게 된다. 엔게디는 사해의 서쪽에 있는 오아시스 지대다. 샘이 많고 포도원으로 유명하다. 석회암 지대로서 동굴이 많아 다윗이 도망자로서 지내기에는 좋은 곳이었다. 그곳에서 다윗은 굴 깊은 곳에 숨어 있었는데, 마침 사울이 그 굴로 들어왔다(24:3).
사울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지만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이 상황을 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웠겠지만, 곧 이 상황이 기회임을 알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윗을 부추긴다. “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4절)
다윗과 함께 했던 사람들은 의심의 여지 없이 이 상황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주어진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말을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이런 기회를 주실 것으로 예언의 말씀을 하셨던 것 같은데, 이 예언의 진위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알 수 없다. 또한 이 예언이 참된 선지자의 말인지 거짓 선지자의 말인지도 알 수 없다. 이어지는 다윗의 말과 행동을 보면,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이런 말씀을 다윗에게 하시지는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다윗의 사람들이 이 상황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확신 가운데 했던 말인 듯하다.
사람들의 성화에 다윗은 사울에게로 갔지만 그를 죽일 수는 없었다. 그래서 겉옷 자락을 베어온다. 하지만 그조차도 다윗은 양심의 가책이 되었다. 자신의 행동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에 대한 반역과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사울을 죽이지 못하게 한다.
삼상 24:6-7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다윗이 이 말로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니라
다윗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통곡할 노릇이다. 이 상황은 누가봐도 명백한 기회다. 나를 죽이려고 쫓아다니던 사람이 제 발로 내가 숨어 있는 곳으로 아무런 방비도 없이 들어와서 쉬고 있다. 하나님도 다윗이 결국 왕이 될 것을 약속하신 마당에 주저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다윗은 겨우 그 옷자락 하나를 베어서 왔고 그조차도 양심에 가책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아무도 사울을 건드리지 말라고 말한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아마 다윗도 똑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자기의 현재 상황을 생각해 보면 더욱 그렇다.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고 사울과 백성들에게 인정받아 군대 장관으로 승승장구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다. 여기서 사울을 죽이면 모든 고생이 끝난다. 주변에 사람들도 다 그렇게 말한다.
그런데 다윗은 뜻밖의 선택을 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사울이 측은해서가 아니다. 사울이 그의 친구 요나단의 아버지였기 때문도 아니다. 이유는 사울은 하나님께서 기름부어서 세운 하나님의 왕이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다윗 위에 두신 지도력, 권세가 사울이었다. 비록 그가 하나님께 불순종하기도 하고 지금은 자신을 죽이려고 쫓아다니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세우셨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구별하여 세우신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였다. 따라서 다윗은 사울을 대항해서 손을 들 수 없었다. 그를 반역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지도자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이다. 이 상황이 다윗도 억울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께 맡겼다(15절). 그리고 자신은 하나님의 뜻에 따랐다.
하나님은 분명히 다윗이 왕이 될 것에 대해서 약속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이 상황은 더욱 하나님께서 섭리 가운데 인도하신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더 중요하고 분명한 것이 있다. 하나님께서 이미 나타내신 뜻이다. 다윗은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울의 옷자락을 잘라낸 것만으로도 마음에 찔림이 있었다. 하나님의 뜻이 지도자를 반역하지 않는 것이라면, 지도자를 반역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없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 한번 더 벌어진다(26장). 사울이 광야에서 진을 치고 잠들어 있을 때, 다윗은 아비새와 함께 사울에게로 갔다. 그 때 아비새가 말한다.
삼상 26:8 아비새가 다윗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오늘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넘기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내가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 하니
이번에는 아비새가 자신이 직접 사울을 죽이겠다고 한다. 어려울 것도 없다. 그냥 창으로 단번에 사울을 죽일 수 있다고 한다. 다윗 자신이 사울을 죽이는 것도 아니다. 아비새가 알아서 다 하겠다고 한다. 지난 번에 이어 두번째다. 상황은 더 좋다. 어쩌면 지난 번에 내가 하나님의 뜻을 잘못 분별해서 하나님께서 이런 상황으로 다시 인도하셨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하겠는가?
다윗의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변하지 않으시고 그분의 명령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삼상 26:9, 11 [9]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하고 [11]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하고
옆에서 보면 참 답답하고 고지식한 선택을 다윗이 한 것같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선택을 했던 것이다. 자신의 생각, 판단, 안위보다 하나님의 명령을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를 왕으로 세우셨지 반역자로 세우지 않으셨다. 다윗은 자신의 생각보다 하나님의 명령을 우선시했다. 불순종으로 얻을 수 있는 평안한 삶을 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순종하는 괴로운 삶을 선택했다. 순종하면 항상 괴롭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는 결과에 관계 없이 하나님의 뜻에 따르기를 선택한다는 말이다.
두 사건의 교훈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는 표현은 참 낭만적으로 들린다. 감성적이고 이상적이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푸른 풀밭에 누워서 고백하는 다윗의 모습이 떠오를지도 모른다. 그럴 때도 있을 것이다. 그 때도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그렇게 하기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내 삶에서 내가 아니라 하나님을 가장 중요한 위치에 두고 실제로 그렇게 사는 것이다. 다윗은 그것을 위해 자신의 안위를 포기하기도 했고 목숨을 걸고 싸우기도 했다. 그런 치열함이 있었다. 싫은데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했던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정말 그가 원했던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하나님이 마음에 합한 자였다.
죽기보다 더 싫은 것이 하나님께서 모욕당하시는 일인가? 그래야 한다. 내 마음, 내 생각, 내 평안보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따르기를 원하는가? 그래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의 모습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