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마스길,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에돔인 도엑이 사울에게 이르러 다윗이 아히멜렉의 집에 왔다고 그에게 말하던 때에”

기록 배경이 기록된 시편. “말하던 때에”라고 바로 그 순간에 시를 지었다는 느낌이 들지만, 그렇다기 보다는 그 상황을 회상하며 기록한 시편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낫다.

삼상 22장

다윗은 요나단과 눈물의 작별을 한 후 본격적으로 사울로부터 도망하는 생활을 시작한다(삼상 20장). 먼저 다윗은 놉에 있는 제사장 아히멜렉을 찾아가서 먹을 것과 골리앗의 칼을 얻는다. 성경은 그 곳에 사울의 목자장인 에돔사람 도엑이 있었다고 짧게 언급한다. 그 후 다윗은 가드 왕에게로 도망했는데 그곳 사람들이 다윗을 알아보자 다윗은 미친 체를 하여 도망하게 된다(21장). 그리고 다윗은 헤렛 수풀에 숨어있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사울은 그 신하들을 불러 모아 놓고 이렇게 말한다.

삼상 22:7-8 [7] 사울이 곁에 선 신하들에게 이르되 너희 베냐민 사람들아 들으라 이새의 아들이 너희에게 각기 밭과 포도원을 주며 너희를 천부장, 백부장을 삼겠느냐 [8] 너희가 다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며 내 아들이 이새의 아들과 맹약하였으되 내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고 나를 위하여 슬퍼하거나 내 아들이 내 신하를 선동하여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려 하는 것을 내게 알리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하니

먼저 사울은 신하들을 “베냐민 사람들아”라고 부른다. 자신과의 혈연 관계를 강조한 것이다. 그러면서 신하들에게 당근과 채찍을 내놓는다. 그들이 자신에게 충성스럽지 못함을 지적하면서 동시에 그들이 다윗이 아닌 자신에게 충성한다면 밭과 포도원으로 대표되는 부와 천부장, 백부장으로 대표되는 명예와 지위를 주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이 말을 듣고 가장 빠르게 반응한 사람이 바로 에돔 사람 도엑이었다. 도엑은 다윗이 놉에서 제사장 아히멜렉을 만났고 아히멜렉이 그에게 골리앗의 칼을 준 사실을 말한다. 그는 베냐민 사람도 아니었다. 그가 원했던 것은 재물과 명예였고 그것을 위해 그는 무고한 자를 고발했다. 시편 52편에서 다윗은 바로 이 때를 기억하고 있다.

사실 더 기억에 남을만한 일은 그 뒤에 벌어진다. 사울은 제사장 아히멜렉을 불러 그를 추궁한 후 일방적으로 그를 반역자로 몰아 사형을 선고한다. 하지만 아무도 이 무고한 제사장을 죽이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사울은 최초 신고자인 도엑에게 사형을 집행할 것을 명했고 도엑은 아히멜렉과 다른 제사장들 85명을 죽이고 제사장 성읍이었던 놉의 민간인들과 가축을 도륙했다. 그 살육의 현장에서 피신한 아비아달은 다윗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다윗은 그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며 아비아달을 보호해줄 것을 약속한다.

그런데 다윗이 시편 52편에서 이런 대량학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가 더욱 주목하는 것은 그 모든 것을 시작한 도엑의 악한 말, 더 근본적으로 도엑의 악한 마음이다. 사무엘상의 기록에서는 다 드러나지 않았지만 3절에서 다윗이 말하는 것처럼 도엑은 선보다 악을, 의보다 거짓을 사랑했다. 그는 하나님보다 재물을 의지했다. 그런 도엑의 악함을 다윗은 기억하며 이 시를 기록했다.

이 당시 다윗의 상황을 생각해 보자. 다윗은 왕으로 기름부으심을 받았다. 하지만 바로 왕이 되지 않았다. 골리앗과의 싸움을 계기로 백성들의 칭송을 받고 신망을 얻었지만, 왕인 사울에게는 오히려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었다. 다윗 자신은 사울을 대적하는 어떤 일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충성했지만 어느덧 그는 사울의 정적이 되어 있었다. 그런 다윗을 사울의 아들인 요나단은 최선을 다해 도우려 했지만, 이미 사울은 다윗을 죽이기로 굳게 결심한 상태였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던 다윗이 이제 할 수 있는 일은 사울을 피해 도망하는 것 뿐이었다.

그렇게 시작되는 피난 생활이었다. 그 자체로도 억울한 마음이 있었을 것이고 그런 상황을 그냥 지켜만보는 하나님에 대한 약간의 원망도 있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 시작에서 끔찍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자신을 도와 주었던 제사장과 그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 다윗은 이 일에 대해 자신의 책임을 인정했지만 동시에 도엑이 주도적으로 벌인 이 악한 일에 대한 생각도 접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일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도엑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지금 우리가 살펴본 부분이 전부이기 때문에 이후 도엑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다만 시편 52편의 표현들에 따르면 그는 스스로 자랑할 정도(1절), 자기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할 정도는 되었던 것 같다(7절). 어느 정도 자기가 원했던 것을 이룬 것이다. 그에 반해 의인들이라고 할 수 있는 제사장들은 그의 손에 죽임을 당했고 다윗 자신도 그저 도망자 신세일 뿐이었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사실 세상 속에서 우린 이런 일들을 많이 보고 또 직접 경험하기도 한다. 어렸을 때는 세상은 그래도 진심이 통하고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렇지 않은 일들이 많고 오히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용만 당할 때가 많은 것을 보게 된다. 평소에는 괜찮은데 중요한 순간에 그렇다. 그래서 속상하고 더 나아가면 억울하다. 때로는 분노하게 된다. 나는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믿는데, 실제로 내 삶에서 하나님은 성경과 다른 분 같기도 하다. 그래서 내 믿음이 그저 맹목적인 것인가, 세뇌된 것인가 하는 의심에 빠지기도 한다. 뭐가 잘못된 것일까? 비판하는 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사랑이 없거나, 힘이 없는 분이신가? 아니면 그냥 없는 분이신가?

다윗도 도엑과 관련된 이 사건을 경험하면서 이런 질문을 했을지 모르겠다. 하나님은 정말 언약을 지키시는가? 하나님은 정말 하나님의 편에 선 자들을 보호하시고 구원하시는가? 그리고 시편 52편은 이 질문에 대한 다윗의 답이자 성경의 답이다.

먼저 다윗은 악인의 악함에 대해서 말한다.

 

I. 악인의 악함(1-4절)

“포악한 자여 네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가”(1절)

포악한 자는 이 본문의 문맥에 따라 약간 의역한 것이고 문자적인 의미는 강한 자, 용사를 의미한다. 도엑이 굉장한 용사는 아니었을 것이다. 어쩌면 다윗은 약간은 비꼬는 어조로 이런 표현을 사용했는지 모른다. 도엑은 약한 자들을 살해하여 강한 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가 행한 악한 일들에 대해서 자랑했다. 아마 스스로 정말 자랑스러웠을 것이다. 우연히 도망하는 다윗을 목격한 것에서 시작하여서 그는 사울의 가장 충성스러운 부하가 되었기 때문이다.

정말 진심어린 왕과 나라에 대한 충성심은 당연히 아니었다. 만약 그러했다면 그는 먼저 사울에게 다윗이 도망한 사실을 알릴 수도 있었다. 그는 사울의 목자장이었고 사울이 소집한 신하들 중에 있었다. 이방인이었지만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그에게 재물과 명예가 약속되었을 때 재빠르게 움직였다. 악한 일을 계획하고 실행하는데 서슴지 않았다.

이 일에 대해 그는 스스로 자랑스러워했고 어쩌면 주변의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떠벌이고 다녔을지 모른다. 어떤 식으로 자랑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후회하거나 죄책감을 가지기 보다 오히려 자신이 그렇게 할 수 있었다는 것에 만족하며 자랑했다.

이런 모습은 바로 앞서 기록된 시편 51편의 죄인과는 전혀 다르다. 51편의 죄인은 회개하는 죄인이었다. 지금 여기서 다윗이 말하는 포악한 자는 회개하지 않는 죄인다. 그는 자신의 악한 생각과 계획을 오히려 지혜와 분별력, 기지라고 말하며 자랑한다.

“네 혀가 심한 악을 꾀하여 날카로운 삭도 같이 간사를 행하는도다”(2절)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다윗은 그가 손으로 행한 일보다 그 모든 일의 시작이 된 말에 더 집중한다. 도엑은 단순히 악을 행한 것이 아니라 그 입으로 악을 꾀했다. 즉,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계획적이었다는 말이다. 그가 한 일은 간사한 일, 즉 속이는 일이었다. 사울에게는 사실을 전달했지만 다윗은 속였다. 다 알수는 없지만 놉에서 다윗을 만났을 때 그 사실을 발설하지 않기로 약속을 했을 수도 있다. 그의 말은 마치 날카로운 칼과 같아서 수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 넣었다. 비유적으로 그랬던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러했다. 제사장들과 남녀, 아이들, 젖 먹이들이 그 대상이었다. 그가 가지고 있었던 약간의 힘으로 그는 무고하고 힘 없는 자들을 살육했다.

4절에서도 다윗은 도엑에 대하여 같은 말을 한다.

“간사한 혀여 너는 남을 해치는 모든 말을 좋아하는도다”(4절)

1절의 강한 자가 여기서는 간사한 혀로 불리고 있다. “해치다”는 삼킨다는 의미가 있다. 즉, 다윗은 여기서 강한 자가 그 입을 벌려 다른 사람을 잔인하게 잡아 먹는데 그의 말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다른 사람을 무너뜨리고 파멸시키는 힘은 팔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혀에도 가공할 힘이 있다. 우리는 이미 야고보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그리고 많은 시편을 통해 이를 알고 있다. 혀, 즉 말로 우리는 다른 사람을 쉽게 세워줄 수도 있고 무너뜨릴 수도 있다. 마음에 상처를 가하는 것도 가능하고 그 상처를 치유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런데 이 말씀을 보면 혀는 단순히 정신적인 데미지만 가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이런 물리적인 데미지까지 가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도엑의 악한 계획은 말로 표현되었고 결국 많은 사람의 생명을 빼앗아 갔다.

“네가 선보다 악을 사랑하며 의를 말함보다 거짓을 사랑하는도다 (셀라)”(3절)

도엑이 보인 그런 잔인하고 포악한 모습의 원인은 다른데 있지 않았다. 그에게 어떤 안타까운 사연, 이를테면 어렸을 때 부모에게 학대를 당했다던가 하는 것이 근본적인 원인이 아니다. 악을 행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선보다 악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도엑만 그런 것이 아니라 악을 행하고 회개하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는, 안타깝지만 사람이 선보다 악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보다 사탄의 거짓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셀라”가 있으니 잠시 멈추고 생각해 보자. 이것이 참 흥미롭다.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라. 선을 좋아하는지, 악을 좋아하는지. 의를 좋아하는지 거짓을 좋아하는지. 상식적인 선에서 사람들은 선을 좋아하고 의를 좋아한다고 대답할 것이다.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우리도 악보다 선을, 거짓보다 의를 좋아한다. 하지만 그것을 실제로 선택하는 것은 조금은 다른 문제다. 우리는 나에게 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선과 의를 지지한다. 다르게 말하면 우리는 나에게 이익이 되는 쪽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이런 선택 자체를 죄라고 말한다.

오해하지 않게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 나의 이익, 유익,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죄이고 악한 일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하나님 안에서 올바른 우선순위를 두고 추구하느냐의 문제다. 이것을 다르게 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느냐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에 따른 선택을 하는 것과 나를 사랑하여 그에 따른 선택을 하는 것은 다르다.

성경의 원리는 역설적이게도 이렇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곧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에 제 목숨을 얻는 길이다. 반대로 나를 사랑하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길이다. 내 안에 있는 근본적인 문제, 나를 사랑하는 마음은 결국은 악을 사랑하고 거짓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어지고 그것은 말로, 행동으로 더 구체적인 악으로 드러난다. 도엑이 그 좋은 예가 되었고, 사실 지금 우리는 그 많은 예를 보며 살고 있고 때론 우리도 그 많은 예 중의 하나다. 시편 53편은 바로 그런 우리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다시 1절로 돌아가보자. 이런 도엑에게, 그리고 오늘날의 도엑들에게 다윗은 “어찌하여” 즉 “왜” 그렇게 하는지를 묻는다. 왜 악한 생각을 스스로 자랑하느냐고 묻는다. 궁금해서는 아니고 수사적 질문이다. 다윗의 입장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자랑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1절)

강자의 자기 자랑이 이해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에 대한 변하지 않는 사랑이 항상 있다. 그리고 이것이 세상에 만연한 이해할 수 없는 악과 악인의 성행을 바라보는 다윗의 시각의 기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반대로 접근한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도 그렇다. 지금 이 세상에 이해할 수 없는 악과 악인의 성행이 있으니 사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도 없고 세상을 주관하는 하나님도 없고 세상을 심판할 하나님도 없다. 그러니 자기가 만든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이상할 것이 전혀 없다. 하나님의 인자하심보다는 당장의 현실이 눈 앞에 있고 당장의 유익이 눈 앞에 있으니 그것을 얻으면 나에게 좋은 것이고 얻지 못하면 나쁜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결국 나에게 좋은 것이 선이고 그렇지 못한 것을 악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선과 악을 무너뜨리고 자신이 행한 일을 자랑한다. 결국 악을 자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없다면 세상을 이렇게 보고 살아가는 것은 문제될 것이 없다. 어쩌면 정말 자랑할 만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다. 우리가 그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이런 일들을 보면서 이 시편에서의 다윗과 같이 반응하는 것이 맞다. 하나님을 향해 “어찌하여”, “왜”라고 묻는 것이 아니라 악을 행하는 자들을 향해서 그렇게 묻는 것이다. 그들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항상 있는데 어떻게 그렇지 않은 듯이 말하고 행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야 한다. 그래도 그것이 세상 사는 지혜가 아닐까 주위를 서성이며 둘러보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멀어져야 한다. 시편 1편이 그런 내용이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

지금 우리 눈에 어떻게 보이든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단 한순간도 멈추지 않는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변하지 않는 사랑을 나타내 보이신다. 이것이 우리가 삶의 어느 순간에도 의심하지 말아야할 진리다. 그리고 언젠가는 우리 눈으로 그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가져올 악인의 악함에 대한 결말을 보게 될 것이다.

II. 악함의 결말(5-7절)

먼저 다윗은 도엑으로 대표되는 회개하지 않는 악인들의 결말을 강력한 표현들로 묘사한다.

“그런즉 하나님이 영원히 너를 멸하심이여 너를 붙잡아 네 장막에서 뽑아 내며 살아 있는 땅에서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 (셀라)”(5절)

여기서 다윗이 생생한 표현들을 사용하고 있다. 멸한다는 말은 건물이나 벽을 무너뜨리는 것을 말한다. 붙잡는 것은 불 속에서 숯 같은 것을 끄집어내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하면 숯은 곧 사그러든다. 장막에서 뽑아내는 것은 터전을 잃고 방랑하게 하는 것을 의미하고 뿌리를 빼는 것은 말 그대로 식물을 뿌리채 뽑아 내어 살 수 없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악한 자들은 때로 견고한 건물과 같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무너뜨릴 것이다. 그들은 함께 꺼지지 않는 숯불 같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하나하나 재로 바꾸실 것이다. 그들의 터전은 흔들리지 않을 것 같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유랑하게 하실 것이고 그들은 든든한 나무와 같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마르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항상 있으니 결국 악행하는 악인에 대한 심판도 영원하다. 심판의 때, 심판의 방법은 다르겠지만 결국 하나님은 그들의 악을 심판하실 것이고 그 심판은 절대 거둬지지 않는다. 악을 행했던 누구도 그 심판 중에서 “그래도 한 때는 내가 잘 나갔었으니까 후회는 없어”라고 말할 수 없다. 모두가 가능하기만 하다면 시간을 돌리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기대어 살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이런 하나님의 심판은 의인들에게 두려움과 안도를 동시에 가져온다.

“의인이 보고 두려워하며 또 그를 비웃어 말하기를”(6절)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을 더욱 경외하게 될 것이고 악인들의 삶에 대해서는 이렇게 평하게 될 것이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자기의 악으로 스스로 든든하게 하던 자라 하리로다”(7절)

우리도 그렇지만 이 시점에서 다윗은 도엑 뿐 아니라 모든 그런 회개하지 않는 악인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 결국 하나님의 앞에서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았느냐 아니면 재물과 같은 다른 것을 의지했느냐다. 하나님의 집에 거했느냐 아니면 자기가 만든 집에 거했느냐다.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아니했다는 말은 반대로 말하면 그렇게 할 수도 있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보다 재물을 의지하고 자신을 의지하고 그것을 자랑한 것이다. 도엑이 사울이 약속한 그것을 추구했을 때 그는 어느 정도 그것을 얻었을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자랑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마치 어린 아이들이 장난감 로보트를 가지고 서로 자랑하는 것과 같다. 의미 없는 자랑이다. 어른들이 자기 자동차 가지고 자랑하는 것은 의미가 있을까? 자기 재물을 자랑하고 지위를 자랑하는 것은 의미가 있을까? 의미 없는 자랑이다. 중요하지 않다. 오직 주 안에서 자랑하는 것이 의미 있다.

이 모든 일에 대한 교훈으로 다윗은 8절과 9절의 말씀을 기록했다.

III. 결말의 교훈(8-9절)

“그러나 나는”(8절)

7절에 나오는 사람과는 전혀 다르다는 말이다. 무엇이 다를까?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항상 있으니, 결론은 이래야 한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해야 한다. 사람이 의지하는 모든 것들은 언젠가 무너진다. 하나님께서 무너뜨리신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영원히 의지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다윗은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에 비유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감람나무 자체보다 그 나무가 어디에 있느냐다. 그 나무는 하나님의 집에 있다. 안전하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돌보신다는 말이다. 그러니 푸르고 열매를 맺는다.

다윗이 이 시편을 기록한 상황은 전혀 이렇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항상 있다는 말씀을 믿고 있다면 어떤 상황이든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난 상황이 없으니 그 하나님을 의지하고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결국을 불쌍히 여기며 그들의 현재의 악행을 경고하고 그들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그 삶은 이렇다.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원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하시므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사모하리이다”(9절)

감사하고 사모하는 즉 기다리는 삶이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 그리고 행하실 일들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이다. 5-7절의 말씀은 미래에 일어날 일이고 우리 눈에 지금 보이는 것은 1-4절인 경우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선하시기 때문에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신뢰하며 기다릴 수 있다. 기대할 수 있다. 오늘을 포기하고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푸른 감람나무와 같은 삶을 살며 기다릴 수 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 돌보심 안에서 열매 맺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 수 있다.

도전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는가”에 무엇이라 답하겠는가? 그 답이 어떤 상황에서든 변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 답이 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기다리며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다. 세상의 좋아 보이는 것들을 따르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의 삶으로 정말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증명해내면서 정말 좋으신 하나님을,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그 변하지 않는 사랑을 세상 가운데 선포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혹 여러 상황들 속에서 불평이나 원망이 있다면 그것을 멈추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항상 있다는 이 성경의 진리를 다시 기억하고 그 하나님을 힘으로 삼고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기다리라. 그것이 지금 살아있는 예배이며 간증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