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평강을 맛보려면
본문: 요한이서
설교자: 조정의
요한삼서에 이어 요한이서를 본문으로 택한 이유가 있다. 헬라어로 300자가 되지 않는 이 짧은 서신이 코로나 19로 흩어져 있는 성도를 바라보는 심정을 잘 담아내기 때문이다. 자신을 “장로”로 소개한 사도 요한은 칭찬과 격려와 권면이 필요한 성도를 돌아보기 위해 이 편지를 썼다.
이 편지가 쓰인 90-95년, 요한이 에베소에서 사역할 때, 그리스도의 교회는 외부로부터는 비방과 박해를, 내부에선 거짓 교훈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거짓 교사는 건전한 복음 사역자와 더불어 곳곳을 돌아다니며 강력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고, 요한은 복음의 사역자를 거절하는 교만한 성도를 요한삼서에서 꾸짖고, 요한이서에서는 거짓 교훈을 가르치는 자를 경계하라고 권면했다.
직접 대면하여 말할 수 없는 상황, 충만한 기쁨으로 교제하며 격려하고 붙들어주기 어려운 상황, 게다가 언제라도 거짓 교사가 성도의 집마다 찾아가 삶을 망쳐놓을 수 있는 상황,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과 같다.
그런 상황에 꼭 필요한 진리를 성령께서 요한을 통해 이 짧은 편지에 기록하셨다면, 이 편지를 본문으로 선포하는 한 편의 설교를 통해 성령 하나님께서 같은 상황을 겪고 있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진리를 강력하게 선포하시리라 믿는다
1. 세 가지 권면(1-11절)
요한이 편지를 쓴 대상은 부녀와 그의 자녀들이다(1절). 아마도 한 지역교회에 구성원이었던 여성도(택하심을 받은, 1절)와 그 자녀들로, 순회 사역자에게 호의를 많이 베푼 성도였을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이들을 기억하여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들이라 불렀고 자기뿐 아니라 모든 자가 그들을 사랑한다고 했다(1절).
1) 진리를 행하라(4절)
구원받고 성실히 섬기던 그리스도인 가정에 요한은 세 가지 권면을 확실하게 당부한다. 각각의 권면은 서로 깊은 연관을 갖는다. 첫 번째 권면은 칭찬 속에서 발견된다.
너의 자녀들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를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4절)
성도를 돌아볼 책임이 있던 장로 요한이 가장 기뻐했던 일은 바로 그 성도가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을 보고 듣는 것이었다. 여성도의 자녀들 중 진리를 행하는 자를 보고 요한은 심히 기뻐했다(“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 요삼 4). 왜 그런가? 하나님께서 진리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빛이시고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요일 1:5). 진리이신 하나님께 거짓이 조금도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분과 사귐이 있는 자라면 반드시 진리를 행해야 한다. 요한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않는 것이라 했다(요일 1:6).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님을 믿는 자는 반드시 진리를 행해야 한다(요 1:9).
“진리를 행하라”는 권면은 두 번째 권면인 “서로 사랑하라”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성도의 사랑이 바로 이 진리에서 시작하고 진리 위에 자란다. 요한의 사랑이 바로 그 진리에 근거했다. 1절에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라는 표현은 우리말 성경에서 번역한 것처럼 “나는 진리 안에서 여러분을 사랑합니다”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요한뿐만 아니라 그들을 사랑하는 모든 자는 “진리를 아는 자”였다(1절). 성도의 친밀한 사랑은 2절에 나오는 것처럼 그들 안에 거하여 영원히 그들과 함께 할 진리로 말미암았다.
진리가 무엇인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말씀대로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고 순종하며 사는 것, 그것이 모든 하나님의 자녀가 순종해야 할 명령이다. 진리를 행하는 삶은 다른 성도의 마음을 진심으로 기쁘게 한다. 성도를 향한 사랑을 더욱더 깊게 만든다.
2) 서로 사랑하라
두 번째 명령은 직접적인 권면에서 찾을 수 있다. 5절.
부녀여,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 이는 새 계명 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따라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5-6절)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은 요한이 만들어낸 새로운 계명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처음부터 “서로 사랑하라”는 그분의 계명을 가졌다(요 13:34). 또한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은 혈연, 지연, 학연 등으로 생긴 친밀감이나 뜨거운 감정이 아니다. 사랑은 순종이다.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에 따라 행하는 것이 사랑이다. 이런 측면에서 사랑하는 것은 진리를 행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특별히 요한이 이 편지를 통해 권하고 있는 사랑의 행위는 접대와 섬김이다. 복음 사역자들이 거리에서 머물 곳을 찾거나 먹을 것을 찾을 때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여 사랑을 베푸는 것. 그것이 요한삼서에 따르면 성도가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자가 되는 실질적인 사랑의 행위였다(요삼 8). 하나님의 말씀엔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롬 12:13),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히 13:2),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라)”(벧전 4:9) 등의 계명이 있다. 이 말씀에 따라 행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많은 사람이 코로나 19속에서 점점 신앙이 나태해진다고 고백한다. 성도와 교제가 멀어져 힘들다고 말한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권면을 성령께서 이 편지를 통해 하신다. 진리를 행하라. 그것이 주님과 성도의 기쁨을 충만하게 할 것이다. 서로 사랑하라. 말이나 감정이 아닌 행함으로 사랑하라. 그것이 우리가 진리를 따라 행하고 진리를 위해 함께 일한다는 확신과 만족을 줄 것이다.
3) 거짓을 경계하라(7-11절)
진리와 사랑을 실천하는 것과 함께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꼭 필요한 권면이 있다. 그것은 요한이 부녀와 그 자녀들에게 이어서 권면했던 것 곧 거짓 교훈을 경계하고 멀리하는 것이다. 왜? 거짓 교훈이 진리와 사랑을 실천하는 걸 방해하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이 이 편지를 쓸 당시에 성도를 미혹하는 거짓 교훈은 영지주의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교리였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초월적인 분이시니 더러운 육신을 입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요한은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라고 말했다(7절).
교회를 미혹하고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 적그리스도는 단지 영지주의자만을 가르키는 게 아니었다. 그런 자들이 세상에 많이 나왔다(7절). 요한은 지나쳐(벗어나)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한다고 분명히 말했다(9절). 그리스도의 교훈 밖으로 벗어난 모든 자, 그 교훈 안에 거하지 않는 모든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다. 성경 해석의 견해가 다른 성도를 말하는 게 아니다. 명백히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거짓 교훈을 고집스럽게 주장하고 퍼뜨리는 자를 말한다.
진리와 사랑을 실천하는 성도는 누구를 영접하고 거절할 것인지 분명히 해야 한다. 8절에 요한이 경계한 것처럼, 스스로 삼가야 한다(경계하고 조심하여 살펴보라). 결코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아야 할 대상은 그리스도의 교훈을 가지지 않은 자 곧 거짓 교훈으로 성도를 미혹하게 하는 자다(10절).
만일 거짓 교사를 영접하고 대접한다면 결국 그가 행하는 일 곧 교회를 미혹하고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요한은 11절에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라고 말했다.
그리스도의 교훈에서 벗어난 것을 가르치는 사람, 책, 미디어, SNS, 기타 모든 것에서 스스로 삼가라. 경계하라. 집 안에 들이지 말고 반갑게 맞이하지 말라. 진리와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 큰 장애물이 된다.
수십 년간 벌어 모은 돈을 한순간 사기로 몽땅 잃어버리면 얼마나 허탈하고 참담하겠는가? 마찬가지로 8절에 나오는 것처럼 당신이 진리와 사랑으로 열심히 일한 것을 거짓에 미혹되어 잃어버리지 말라. 당신이 모시는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온전한 상을 받기 원한다면 당신은 반드시 바른 교훈 안에 거하기를 힘써야 한다. 따라서 거짓 교훈을 경계하고 멀리해야 한다.
2. 그 이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평강을 맛보려면…(3절)
편지의 끝 인사를 보면, 요한은 진리와 사랑 가운데 행하는 부녀와 그 자녀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내가 너희에게 쓸 것이 많으나, 12절). 하지만 그는 종이와 먹으로 쓰기보다 오히려 직접 그들에게 가서 대면하여 말하기 원했다.
직접 만나서 마음 속에 있는 모든 이야기를 함께 나누면 그들의 기쁨이 충만해 질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편지를 받는 대상인 여성도에겐 믿음 안에 있는 여자 형제들이 있었는데, 그 자녀들도 요한의 편지를 통해 인사를 전했다(13절).
요한은 직접 만나 교제하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이 짧은 편지를 통해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되는 권면을 긴급하게 전달하여 당부하기 원했다. 진리를 행하라, 서로 사랑하라, 거짓 교훈을 경계하라.
우리는 거의 매주 설교 시간에 이와 같은 가르침을 받는다. 말씀을 가까이 두고 진리의 말씀대로 행하라는 권면, 서로 뜨겁게 사랑하라는 권면, 거짓 가르침에 속지 말고 멀리하라는 권면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들었다.
그런데 왜? 왜 그래야 하는가? 때로 우리는 아무런 목적이나 이유 없이 말씀을 읽고 순종해야 한다는 막연한 의무감을 갖는다.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어렴풋한 책임감을 갖는다. 왜 그래야 하는가? 왜 우리는 진리와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가? 진리에서 멀어지게 하는 거짓 교훈을 경계해야 하는가? 3절을 주목하여 보자. 이것이 오늘 말씀의 핵심이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3절)
소망을 빌고 있는 게 아니다. 기도를 올리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며 선포하고 있다. 무엇을 선포하는가?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우리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진리를 선포한다. 그런데 성부 성자 하나님의 은혜, 긍휼, 평강이 무엇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는가? 진리와 사랑이다.
진리를 행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평강을 맛본다. 성도를 사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평강을 맛본다. 그래서 진리를 행하고 서로 사랑하며 거짓 교훈을 멀리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가까이 대하고 그분의 넘치는 은혜와 긍휼과 평강을 경험하기 위해서. 이것을 맛보지 않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무슨 힘으로 지속할 수 있겠는가?
특별히 은혜-긍휼(자비)-평강은 하나님 쪽에서 우리에게 점점 다가오는 사랑의 경로를 보여준다. 자격 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는 우리에게 긍휼로 부어지고 그것을 맛볼 때 우리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나님의 평강을 누린다. 우리가 진리를 행할 때,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의 은혜-긍휼-평강을 맛볼 수 있다.
삶이 평탄하고 여유로울 때 우리는 진리와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그럴 때일수록 나태함을 타고 거짓 교훈이 우리를 죄로 이끌 좋은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고전 10:12; 엡 4:27-“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삶이 험난하고 어렵고 고달플 때 우리는 진리와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환경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평강을 맛보는 것만이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하고도 넉넉한 힘이 되기 때문이다(빌 4:7).
신약 성경의 편지 마다 ‘은혜와 평강이 있을 지어다’라는 축복으로 끝을 맺는다. 왜 그런가? 그리스도인의 삶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절대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맛보지 않으면 우리는 나태해지고 멀어진다. 진리를 행하라. 서로 사랑하라. 거짓을 경계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