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하나님의 복음
본문: 로마서 1장 18절 외
설교자: 최종혁
바울은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편지하면서(롬 1:7), 그들에게 “복음 전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롬 1:15). ‘성도에게 복음 전하기를 원한다’는 말은 한편으로는 이상하게 들린다. 이미 복음을 듣고 구원 받은 사람들이 성도이기 때문이다. 그럼 바울은 실제로는 이들이 구원 받지 못했다고 생각해서 이런 말을 한 것일까? 그들이 잘못된 복음을 듣고 구원 받았다고 착각하고 있어서 그들에게 제대로 된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걸까?
그렇지는 않다. 로마서 어디에서도 그런 암시를 찾아볼 수 없다. 특히 16장의 마지막 인사를 보면 바울은 이 교회의 많은 성도들을 잘 알고 있었고 그들이 참된 하나님의 일꾼들임을 말하고 있다. 또한 15장에서 말하는 것처럼 로마서를 기록한 또 하나의 이유는 서바나(스페인)로 가려는 자신의 계획을 그들에게 알려서 도움을 받기 위한 것도 있었다. 만약 로마 교회가 잘못된 복음에 오염되어 있었다면, 로마서의 복음은 (갈라디아서가 그런 것처럼) 지금의 모습과 꽤나 다른 방식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복음 전하기”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전도’로 이해할 수는 없다. 바울은 로마 교회에 복음을 ‘가르치기’ 원했다고 이해하는 것이 맞다. 직접 가서 하고 싶지만 상황이 되지 않아 이렇게 편지를 기록한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런 모든 상황들을 사용하셔서 오늘날 우리에게 ‘복음의 정수’라 불리는 로마서를 읽을 수 있게 주신 것이다. 로마서는 구원을 찾는 자들에게 길이 되기도 하지만, 구원을 찾은 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길이 된다. 복음을 제대로 알아야 복음에 따라 제대로 살 수 있고 또한 복음을 제대로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으로 몇 시간에 걸쳐 로마서의 몇 말씀을 통해 성경이 말하는 복음의 핵심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기 원한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고 살게하는, 우리가 믿은 복음이 무엇인지 되짚어보길 원한다. 오늘은 <하나님의 복음>이라는 제목으로 복음의 주체가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심에 대해서 함께 나누기 원한다.
바울은 로마서의 시작에서 이 “하나님의 복음”이란 표현을 사용하였다.
롬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바울은 계속해서 여러 곳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많은 핍박과 환난을 당했다. 사람들에게 맞아서 거의 죽게 되었던 때도 있고, 배가 파선해서 죽을 뻔 했던 때도 있다. 감옥에도 여러 차례 갇혔었다. 유대교에서 성공 가도를 달릴 수 있었던 그가 이런 삶을 살게 된 이유는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만든 복음이나 어떤 다른 사람의 복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했다.
롬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그 복음으로 사람을 구원하시는 것이다. 그러면서 18절부터 바울은 바로 그 구원하는 능력의 복음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한다.
롬 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로마서가 성경이 말하는 복음에 대해서 가장 잘 말해준다는 말을 듣고 로마서부터 읽기 시작한 사람에게는 참 당황스러운 말씀이다. ‘좋은 소식’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고, 오히려 ‘나쁜 소식’처럼 들린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진노하신다는 말씀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난 그런 하나님이 있는지도 몰랐다. 하나님이 있다고 해도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이 있을 줄 알았는데, 진노하고 심판하는 하나님이라니, 뭔가 잘못된 것 같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로마서 1:18은 정확히 왜 우리에게 복음이 필요한지를 말해주고 있다. 우리에게 복음이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우리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간에 있는 “불의”에 대한 부분은 다음에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지금 우리가 주목할 것은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에게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우리에게 복음이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노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복음이 필요한 가장 직접적인 이유다. 우리가 죽고 나서 편안하고 좋은 곳에 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인 직접적인 이유가 아닌 것이다. 우리가 더 즐겁고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직접적인 이유가 아닌 것이다. 힘든 세상에서 위로 받고 의지할 곳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도 우리에게 복음이 필요한 직접적인 이유가 아닌 것이다. 건강이나 부, 인기, 좋은 인간 관계, 행복한 가정 등 우리 삶에 결여되어 있어서 내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복음이 필요한 직접적인 이유가 아닌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나쁜 것이고 복음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가 불행하고 가난하고 외롭고 괴로운 삶을 살든 말든 아무 관심도 없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그 반대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사는지에 아주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삶을 누리며 살기를 원하신다. 처음 창조하셨을 때부터 그러셨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단순히 우리가 그것을 가지게 되는 것이 구원이 아니고, 그것을 얻게 하는 것이 복음이 아니라는 말이다. 궁극적으로 우리가(모든 인류가) 직면한 가장 궁극적인 문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노하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인 것이 문제다. 우리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난 것이 문제다. 즉, 복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회복하신 것이다.
롬 5:10–11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11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벧전 3:18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것이 구원이 가져오는 결과로서 우리가 가장 기대해야하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구원을 통해 우리가 가장 원하는 것은 하나님 자체여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 하나님의 진노가 나에게 가장 직접적인 문제가 되는 것이다.
남편과 아내가 있다. 어느날 남편이 아내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다. 100% 남편의 잘못이다. 그래서 두 사람의 관계가 크게 틀어졌다. 그래서 아내가 집을 나갔다. 처음에는 남편도 화가 나서 그게 편했다. 대충 먹고 자고 하는 것이 아무렇지 않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 아내가 해주던 밥이 그리워졌다. 매번 나가서 사먹거나 뭔가를 시켜 먹는 것이 귀찮아 진 것이다. 뭐라도 직접 해먹어볼까하고 시도해 봤는데, 그건 더 귀찮고 결과적으로 내가 만드는 것은 음식이 아니라 음식물 쓰레기라는 사실만 알게 됐다. 잠자리도 전에는 아내가 침구류도 항상 깨끗하게 세탁하고 정리해둬서 포근하고 아늑했었는데, 지금은 쉰내가 나고 뭔가 축축한 것 같다.
그래서 남편이 아내를 찾아간다. 가서 용서를 구한다. 다른 이유는 없다. 맛 있는 음식이 먹고 싶고 깨끗하고 포근한 잠자리를 원해서다. 이런 진심을 아내가 알고 있다면 뭐라고 하겠는가. 남편이 원하는 것은 아내인가, 아니면 가정부인가.
남편이 정말로 원하는 것은 아내여야 했다. 아내와의 관계 회복을 원해야 했다. 질이 떨어진 음식과 잠자리를 통해서 생각해야 할 것은 질 좋은 음식과 잠자리가 아닌 것이다. 그 좋은 것을 나에게 주었던 아내와의 관계를 생각했어야 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가 정확히 그렇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좋은 것들을 우리가 누릴 수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의 즐거움을 누리가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복음이 필요한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없기 때문인 것이지, 하나님께서 주시는 좋은 것들이 없기 때문이 아닌 것이다.
이런 면에서 오늘날의 복음은 정말 크게 왜곡되어 있다. 핀트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어 있다. 사실 복음은 항상 공격을 받아왔다. 유다서를 기록한 유다도 본래는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편지를 쓰려다가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 때문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성도를 권하여야할 필요를 느꼈다고 말했다(유 1:3-4). 그 때도 그리고 그 후로도 계속해서 성경의 복음은 여러 면에서 공격을 받아왔다. 복음 자체가 공격을 받았던 때도 있고, 복음의 내용을 비틀려는 공격을 받았던 때도 있다. 지금 세상을 봐도 그렇다. 복음 자체가 탄압을 받는 곳도 있고 복음의 내용이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는 곳도 있다. 사탄은 방법은 신경쓰지 않는다. 어떻게든 사람들이 성경의 복음을 듣지 못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아직 우리나라는 복음 자체가 탄압을 받고 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 이미 어떤 면에서는 이런 탄압도 시작되고 있긴 하다. 지금도 유튜브 등에 동성애나 낙태, 남자와 여자의 역할 등에 대한 비판적인 영상이나 글을 올리면 자체 검열이 되는 경우가 있다. 성경이 말하는 죄를 죄라고 말하는데 제약이 생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부분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것은 복음에 대한 왜곡이다. 복음의 내용에 대한 아주 심각한 왜곡이고, 어쩌면 복음 자체를 부정하는 것보다 더 끔찍한 결과를 만들어 내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왜곡된 복음의 문제는 한마디로 그 복음의 끝에 하나님이 아닌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사람 중심의 복음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신본주의복음이 아니라 인본주의복음이 전파되고 있다.
처음 교회가 시작되었을 때 교회는 유대교의 영향력(유대주의)과 싸워 복음을 지켜야 했었다. 이방인이 유대인이 되지 않고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개념을 유대인들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지는 않으면서, 그래도 이방인이 할례는 받고 유대인과 같이 절기를 지키기는 해야한다는 식의 주장을 했다. 어떻게 보면 적절한 절충을 이룬 것 같이 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분명하게 이렇게 선포했다.
갈 2: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은혜의 복음에 조금이라도 율법(행위)이 기여한다고 말하면 그 즉시 하나님의 은혜는 폐하여지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는 말이다.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이루신 속죄에 그 무엇도 더할 수 없다. 오직 우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에 사람의 무엇을 더하여 구원을 얻으려는 시도는 계속해서 있어왔다. 오늘날에도 모습은 다르지만 여전히 이런 모습으로 왜곡된 복음이 있다. 그런데 이것과는 다른 양상으로 복음을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복음을 통해 얻게 되는 구원의 의미를 바꾼다. 복음이 가져오는 궁극적인 결과를 바꾸는 것이다.
이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영적인 의미에서의 구원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들이 정말 강조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구원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다. 그것이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가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이 어떤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것일 수도 있다. 아프지 않고 건강한 것일 수도 있다. 많은 부를 누리는 것일 수도 있다. 세상에서 큰 성공을 거두는 것, 인기를 얻는 것일 수도 있다.
흔히 말하는 기복신앙 혹은 번영복음이다. 이들은 하나님 믿으면 다 잘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잘 된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일들이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왜곡된 복음을 전하는 거짓 전도자들은 심지어 가난과 질병은 하나님의 저주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와 건강만을 주기 원하시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섬기지 않아서 가난하고 병에 걸린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들이 말하는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섬기는 것”은 특히 헌금을 잘하고 기도 열심히 하고 목사말을 잘 듣는 것인 경우가 많다.
안타깝지만 사람들은 이런 복음에 쉽게 혹한다. 건강하고 부자되게 해준다는데 싫어할 이유가 없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를 위하고, 나에게 복을 주게 만들 수 있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이런 거짓 복음에 기초한 이단들이 많이 생겨나는 것이다. 사람들을 미혹하여 자기 배를 불리려는 사람들에게 번영복음은 너무 좋은 수단이다.
그런데 이단까지는 아니어도, 같은 맥락에서 왜곡된 복음을 말하는 교회들도 너무 많다. 때로는 정말 미묘한 차이처럼 느껴지지만, 결국 복음의 끝에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있는 복음이 정말 많다. 분명 성경적인 복음을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서 말하고 영원한 삶에 대해서 말한다. 그 모든 것들을 어떤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 얻는 것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면 복음이 결국 나를 하나님께로 이끈다는 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내가 뭔가 좋은 것을 얻는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로를 원하는 것 같다. 평안을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평안을 원하는 것 같다. 다만 그런 것들이 너무 물질적인 것은 아니기에 큰 문제는 없는 것처럼 들릴 수 있지만, 결국 ‘내가 원하는 무언가’를 복음의 궁극적인 목적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앞서 말한 이단과 다르지 않다. 결국 내가 원하는 것은 세상에서의 위로인데 그것을 그냥 하나님이라는 존재 안에서 찾은 것이다. 그래서 그 위로가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오지 않으면 하나님을 떠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위로하시는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위로나 그게 그거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 수 있지만, 그 미묘한 차이를 조심해야 한다. 앞서 살펴본 예에서 남편이 원했던 것은 결국 아내가 아니라 아내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좋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다면, 아내보다 더 요리를 잘 해줄 수 있고 집안일을 잘 해줄 수 있는 다른 사람이 있다면, 남편은 그 사람을 원하게 될 것이다. 궁극적으로 원하고 있는 것이 아내가 아니라 아내의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좋은 것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같은 맥락에서 실제로 신앙 생활에 큰 차이를 만든다.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님을 다르게 보게 된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원하고 내가 경험하고 싶은 하나님만을 찾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면 점점 하나님에게서 멀어진다. 다른 데서 내가 원하는 것을 찾기 시작하는 것이다.
당연히 하나님과 하나님의 위로는 함께 간다. 하지만 내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위로가 아니라 하나님이셔야 한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복음의 핵심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위로가 함께 있으니 하나님 옆의 ‘위로’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 왜곡된 복음인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하나님께 사람을 가까이 이끌 수 있으면 된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실제로 그런 효과가 있기도 하다. 선교지에서 먹을 것이나 어떤 사업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도 좋은 전략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복음이 말하는 복(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게 해야하고 그렇게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좋으신 하나님이 주시는 그 ‘좋은 것’에 집중하게 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하면 결국 그 좋은 것이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오지 않으면 하나님도 왜곡하여 바라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예전에 조정의 목사님이 설교하시면서 우리들에게 있어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이 언제인지에 대해서 말하신 적이 있다. 우리가 주님께 “잘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말씀을 듣는 순간, 주님께서 우리에게 영광의 면류관을 주시는 순간이 우리에게 분명 영광스러운 순간이지만,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은 주께서 주신 그 영광의 면류관을 벗어서 주 앞에 드리며 주님을 예배하는 순간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참된 복음이다. 복음의 끝에, 그 중심에 하나님이 계신 것이다. 주님께 칭찬을 받고 상을 받는 것, 모두 좋은 것이지만 결국 그것이 최종 목적지가 아니다. 그것이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은 하나님 자체여야한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복음의 근간에 있는 것이고 궁극적인 목적이다.
이런 면에서 과감한 번영복음이든 미묘한 번영복음이든 치명적인 문제를 드러낸다. 결국 하나님을 복음의 최종 목적에 두지 않으면 그 복음은 전혀 복음이 아니다. 그 복음은 결국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구원 받지 않은 사람도 똑같이 원하는 것들을 원하면서 단지 그 수단에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둔다고 복음이 아니다.
미묘한 번영복음은 슬쩍 하나님의 자리에 내가 원하는 어떤 것을 둔다. 그 자체로는 나쁘지 않은 ‘어떤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얼마나 좋은 것이든, 중요한 것은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내가 이해하고 있는 복음, 내가 믿고 살아가고 있는 복음이 이렇다면, 촛점이 잘못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성경은 복음을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 복음은 사람의 복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이다. 하나님이 복음의 핵심이다. 복음의 의미인 ‘좋은 소식’에서 하나님이 바로 그 “좋음”인 것이다. 하나님이 복음이시다.
이 사실을 제대로 이해해야 로마서 1:18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롬 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누군가의 진노가 나하고 아무런 관계가 없을 수도 있다. 지구 건너편에 사는 어떤 아저씨가 화를 낸다고 해서 내가 그것을 신경 쓸 이유는 딱히 없다. 하지만 그 아저씨가 도널드 트럼프라면 좀 얘기가 달라질 것이다. 직간접적으로 우리 나라에 주는 영향이 있을 것이고 그 중 내가 받을 영향도 있을 수 있다.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때문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한 유일한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피조물이다.
창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 1:27–28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이미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 관계의 중요한 특징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신 분으로서 우리에 대한 ‘주권’을 가지고 계신다. 이것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물건을 만들면 그 동작 원리와 쓰임새를 결정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서 그런 권리를 가지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이제부터 너희 살고 싶은대로 살아라라고 하지 않으셨다. 그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셨다. 이것은 삶에 대한 가이드나 지침이 아니다. 이렇게 해보면 좋을거야가 아니라 이렇게 하라는 명령이다. 이 앞까지 하나님은 계속해서 창조주 주권자로서 말씀하셨고, 그것은 명령이었다. 그래서 그 모든 것들은 그대로 되었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다. 그런 하나님께서 사람도 창조하셨고 그들에게도 명령하신 것이다. 그런데 그 명령에 대해서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복을 주신 것”으로 표현한다. 사람에게 가장 좋은 것을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사람에 대한 주권을 가지고 계시면서 또한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은 이어지는 2장의 기록에서도 증명된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땅의 모든 생물을 다스릴 권세를 주셨지만, 여전히 그가 하나님과 같은 주권자는 아님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는 명령을 주심으로 상기하게 하셨다(창 2:17). 또한 하나님은 사람에게 ‘좋지 않은 부분’이 있음을 보셨다. 그가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았고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돕는 배필을 만들고 그에게로 이끌어 오셨다. 그렇게 아담은 하와를 만나게 되고 인류 최초의 시를 지어서 그 기쁨을 표현했다.
이것이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였다. 하나님은 사람을 인격체로 창조하시고 그들과 교제하셨지만, 여전히 하나님은 창조주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계신다. 또한 하나님은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시고 좋은 것을 주기 원하신다. 사람에게 있어 가장 좋은 것은 바로 그런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이었다.
그럼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뭘까? 이랬던 하나님이 어느날 갑자기 기분이 나빠서 혹은 너무 지루해서 이유없이 사람에게 진노를 하시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진노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것이 창세기 3장에 기록된 인간의 타락이다.
이 이야기는 익숙하다. 사람이 뱀의 유혹에 넘어가서 하나님께서 절대 먹지 말라고 명령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다. 이것으로 창세기 2장까지 이어져왔던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좋은 관계가 사람에 의해서 깨어졌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분명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이 좋은 것을 판단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권자로서 주신 명령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스스로 더 좋은 것을 찾은 것이다. 하나님을 자신의 주권자로서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은 자신에게 있어 가장 좋지 않다고 선포한 것이다. 이것이 죄이고 하나님은 이 죄로 인해서 진노하신다.
과일 하나 먹지 말라고 한 것 먹은 것 가지고 너무 확대해석하는 것 아닌가하는 의문이 생길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 그것으로 결국 인간의 본성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단지 죄를 한번 지은 것이 아니라 죄인이 되었다. 아담 이후로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그래서 죄인으로 태어난다.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고 각자 원하는 삶을 산다. ‘좋은 것’을 찾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스스로의 삶을 망가뜨려왔다. 하나님은 이런 삶을 사는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렘 2: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다른 것으로 대체한 것이다. 놀라우신 하나님을 하찮은 것들로 대체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어리석음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롬 1: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하나님은 이런 우리의 죄에 대하여 우리에게 진노하신다. 그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에게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다. 이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에게 복음이 필요한 가장 직접적인 이유다. 우리에게 복음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이유는 부차적이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을 추구하고 누려봤던 솔로몬은 이렇게 말했다.
전 11:9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전 12:1–2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2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우리는 누구도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다. 따라서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다가 가면 끝이 아니다. 하나님이 계시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계시다. 그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중요하다. 나에게 있어 하나님이 가장 중요한 분이셔야 한다.
다 좋은데, 어쨌든 하나님은 지금 나에게 진노하고 계시는데 어떻게 해야할까라는 생각이 든다면 이 말씀을 기억하라.
사 55:1–2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2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하나님은 삐쳐계신 것이 아니다. 그냥 마음이 상해서 우리에게 등을 돌리고 계신 것이 아니다. 여전히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기 원하시는 분이시다. 그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면 하나님은 언제나 받아 주신다. 그 진노를 거두신다. 그러니 걱정 말고 하나님께로 나와 하나님과 함께 참된 삶의 기쁨을 누리라.
오늘 이 말씀은 로마서에서 바울이 그랬듯, 특별히 이미 하나님께로 돌아왔다고 고백하는 성도들에게 더 도전하기 원한다.
구원 간증을 들어보면 하나님은 참 여러가지 모습으로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천국에 가고 싶어서, 어떤 사람은 지옥에 가기 싫어서 믿고 구원 받았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무너져 내린 삶에서 위로를 찾다가 구원 받았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잘 따져보니 진화론보다 창조론이 훨씬 합리적이고 논리적이어서 구원 받았다고 말한다. 심지어 남자 친구나 여자 친구 만나려고 교회 왔다고 구원 받는 사람들도 있다.
어떻게 복음을 듣게 되었는지, 무엇이 그 마음을 움직였는지는 다양할 수 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참된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은 것이라면 그 모든 것들이 복음의 궁극적인 목적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처음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때는 이유가 있지만, 일단 사랑하고 나면 이유는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무엇 때문에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좋은 것을 사랑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주시니까 사랑하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궁극에 가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존 파이퍼는 이렇게 묻는다. 내가 원하는 모든 좋은 것이 있고 다만 그리스도만 없는 천국에 갈 수 있다면, 그곳에 가고 싶은가? 그곳에는 아픔도 없고 질병도 없다. 내가 사랑했던 모든 사람이 그곳에 있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도 모두 먹을 수 있다. 내가 좋아했던 일들도 다 할 수 있다. 자연 재해도 없고 삶 사이의 갈등도 없다. 다만 그리스도만 계시지 않다. 그런 천국에 가고 싶은가?
바로 ‘아니요’라고 답을 해야할 것 같은데 그렇게 답이 안나온다. 이유 중 하나는 그리스도와 그 다른 모든 좋은 것들을 따로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일 수도 있다. 그런데, 어쩌면 그리스도가 아니어도 그 모든 좋은 것이 있다면 문제될게 있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 일 수도 있다. 만약 그런 생각이 든다면, 내가 복음을 성경에서 제시하고 있는대로 제대로 바라보고 있지 않음을 인정해야 한다. 아직 복음의 끝까지 제대로 가지 않은 것이다. 내가 계속해서 바라 봐야 할 것, 내가 계속해서 원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시지 하나님께서 주시는 좋은 것이 아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람이 있는 곳에 가고 싶은 경험을 한번쯤 해봤을 것이다. 그곳에 내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 100명이 있어도 그 한 사람 때문에 그곳에 가고 싶다. 복음은 결국 하나님에 대한 이런 사랑의 회복을 말한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 절대 이 사실이 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가 항상 가장 바라는 것은 하나님이셔야 한다. 천국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천국이다. 우리가 정말 바라는 것이 그런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으로 내가 만족하고 기뻐할 때, 우리는 참된 복음을 이 세상 가운데 선포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