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자하나님의 능력에 믿음이 있게 하라
본문: 고린도전서 2장 1-5절
설교자: 조정의
고린도 교회 가운데 일어난 분쟁은 성도들이 세상의 지혜와 세상에 속한 것들을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보다 중요하게 여긴 것이 주원인이었다. 바울은 십자가 복음이 세상 지혜를 미련하게 하고,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세상에 속한 것들을 자랑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만들기 때문에, 오직 주 안에서 자랑할 것을 강력하게 권면했다. 그리고 이어진 본문을 통하여 바울 자신도 그들에게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성령의 나타나심을 구했다고 고백한다. 그렇게 해서 그들의 믿음이 바울의 지혜, 언변, 화려하고 풍부한 지식에 있는 게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고 한 것이다.
말씀을 듣는 성도들만 그런 게 아니라, 말씀을 전하는 자도 세상 지혜를 추구하고 싶은 유혹을 강하게 받는다. 좋은 대학, 직장, 출신, 배경을 가지면 회중이 더 메시지를 권위 있게 받고 쉽게 받아들이며, 설교자가 더 큰 영향력을 갖게 되고, 강단에 능력이 배가될 것이라고 쉽게 믿는다. 때로는 메시지 자체가 세상의 지혜로는 한없이 미련해 보인다. 그럴 때,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분명하지만, 회중이 과연 받아들일 것인지 확신이 없어 설교자는 마음이 흔들리고 약해진다. 메시지가 잘 전달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은 모든 자원을 최대한 동원하고 싶은 욕구가 치솟는다.
하지만, 사람의 지혜를 추구하는 설교자는 결국 성도의 믿음을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의 지혜에 두게 만든다. 말씀을 전하는 자와 듣는 자 모두, 그리스도와 십자가 복음에 믿음을 두어야만 하나님의 능력을 온전히 누릴 수 있다. 그리스도 중심적인 말씀 선포와 말씀 듣기가 무엇이며 왜 중요한지 본문을 통해 알아보자. 그래서 우리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여 그 능력으로 견고하게 함께 지어져 가기를 바란다.
1. 사람의 지혜에 믿음이 있게 하지 말라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 하였나니(1절). 바울은 지금 고린도 교회를 개척하여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을 양육했을 때를 회상하게 한다(행 18장). 그때 바울은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지 않았다. 말은 전달하는 기술(웅변술, 언변), 지혜는 전달되는 내용(지식)을 각각 가리키는데, 어떻게 하면 탁월하고 풍부하게 회중을 감동시킬 내용과 전달 방식을 갖출까 고민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4절에서도 바울은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라고 했다. 여기서도 말의 전달 방식과 메시지를 각각 언급하면서 그것을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않았다고 단언했다.
어떤 사람은 바울이 지금 왜 이렇게 말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고려하지 않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라는 비판과 관련지어(고후 10:10), 실제로 바울이 말주변이 없어 설득력이 떨어지고, 회중을 감탄하게 할 만큼 뛰어난 지혜도 없었을 것이라고 섣불리 추측한다. 하지만, 베스도는 바울의 지혜에 놀라며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고 했고(행 26:24), 그가 쓴 서신서를 읽어보면 굉장한 논리와 설득력을 갖추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고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에게 말씀을 전할 때, 일부러 비논리적이고 반이성적인 내용과 방식을 채택했다고 말하기는 더더욱 힘들다. 바울은 지금 말과 지혜가 쓸데없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그것이 도구로 활용될 수도 있지만, 전심으로 추구한 것은 오직 2절에 나오는 이것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싶은 것이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2절). 당시엔 소피스트라고 불리는 지식인 집단이 있었는데, 여러 분야에 탁월한 지식을 자랑할 뿐만 아니라 화려한 언변으로 상대방을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없도록 만드는 대단한 설득력으로 대중의 인기를 얻고 명성과 부를 쌓는 이들이었다. 바울은 그들의 방식대로 말하고 그들처럼 지혜를 자랑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면 그걸로 충분했고(빌 1:20), 오직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과 그 의미만 전달되면 그걸로 충분했다(빌 1:18). 여기서 ‘말하지 않기로 작정했다’라고 하지 않고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한 것은 그만큼 바울이 입 밖으로 내는 것뿐만 아니라 속으로 생각하는 것까지도 온통 그리스도와 십자가 복음 중심이 되길 간절히 바랐다는 것을 말해준다. 바울은 주님만 알고 주님만 전하길 원했다.
설교자는 때로 메시지와 그것을 전달하는 방식에 적절성과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 그리스도와 복음 중심적인 설교를 희생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선포하면 받게 될 반대, 판단, 원망 등이 두려워서, 청중이 쉽게 받을 수 있는 내용으로 수정, 포장하거나 그냥 넘어가고 싶을 때가 있다. 담대하게 진리를 선포하기보다 빙빙 우회하며 핵심을 거의 다루지 않고 주변만 맴돌다가 끝나기도 한다. 확실한 관심을 끌기 위해 설교와 함께 효과적인 이미지나 영상을 사용하기도 하고, 화려한 프레젠테이션이나 연극적인 요소를 가미하기도 한다.
진리를 더욱 생생하게 전달하여 청중을 더 강력하게 설득할 수 있다면, 뭐라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렇게 하는 게 문제가 되는가? 그런데 고린도 교회 가운데 거할 때 바울은 많은 설교자가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이 부분을 부차적인 것으로 여겼다. 그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따로 있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3절).
그들에게 말씀을 선포할 때, 바울은 약하였다. 어떤 주석가는 바울이 실제로 눈병이나 만성 편두통, 간질 같은 질병에 걸려 병약한 상태로 말씀을 전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하지만 문맥 안에서 바울이 말한 약함은 십자가 복음에 관한 청중의 어그러지고 완고한 반응이다(1:25,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바울은 충분히 예상했다. 십자가 복음이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으로 여겨질 것이며 많은 조롱과 배척과 비방을 받을 것이란 걸. 설교자는 자신이 전달할 메시지가 이런 취급을 받을 것이 뻔할 때, 한없이 약하고 두렵고 떨린다.
그런데 바울이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울을 전도하라고 부르신 그리스도와 그를 보내신 분,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전파하라’는 명령을 엄히 받았기 때문이다. 바울은 후에 디모데에게 “말씀을 전파하라”는 명령을 전수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 4:1-2).
좋은 설교자는 청중이 메시지를 어떻게 받을지 염려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의 가려운 귀를 긁어주기 위해 메시지를 각색하거나 변개하지 않는다. 1세기 청중을 설득하기 위해서 화려한 언변과 탁월한 지혜를 뽐내는 소피스트들의 방법이나 21세기 청중을 매료시키고 현혹하는 미디어와 기술을 활용하기보다는 하나님 앞과 그리스도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담대히 말씀을 전파한다. 반대와 비방과 무관심과 적대심이 청중 가운데 노골적으로 드러나도 아랑곳하지 않고 신실하게 그리스도와 십자가 복음을 외친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확신한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그랬다. 그는 억양과 목소리 크기를 과장하지 않고 손으로 설교문을 짚어가며 진중하게 메시지를 전달했다. 마틴 로이드 존스도 마찬가지다. 탁월한 메시지와 설득력 있는 목소리를 가진 그는 설교에 지나치게 많은 예화를 사용하는 것을 가리켜 말씀의 진리가 아닌 사람이 만든 이야기로 청중의 마음을 사고 만족감을 주려고 하는 ‘간음’이라고까지 했다. 바울도 그랬다. 당시 유명한 연설가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추종했던 방식에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만을 두렵고 떨림으로 전파했다. 왜 그랬을까?
2. 하나님의 능력에 믿음이 있게 하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4-5절). 재차 말하지만, 바울은 여기서 일부러 설득력도 떨어지고 지혜 없는 말만 골라서 전도했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그는 지혜롭게 말하고 설득력 있게 전도했다. 다만 바울은 그들이 매력적으로 여기고 감탄하는 사람의 지혜와 설득하는 기술을 내세우지 않고 다만 성령께서 그들 가운데 역사하시고 능력을 행하시기를 간절히 구하였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의 믿음이 혹 바울이 구사한 화려한 언변이나 그가 쏟아내는 풍성한 지식에 있는 게 아니라 말씀을 통해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에만 있게 하려는 것이다.
기독교를 사칭하는 많은 사이비 종교 지도자들의 특징은 대부분 현란한 말솜씨와 엄청난 카리스마를 가졌다는 것이다. 셀 수 없이 많은 청중이 성경을 악용한 허무맹랑한 거짓 교리를 듣고도 감격하고 감탄하고 눈물을 흘릴 뿐만 아니라 자기 삶과 재물을 다 그 거짓 종교에 바치는 것을 보면 정말로 어리석고 무섭기까지 하다. 거짓의 아비 사탄이 그 배후에 있다. 그런데 정통 기독교 그것도 보수적인 교회 안에서도 유사한 문제가 일어날 수 있다. 설교자 개인의 매력이나 설교 기술, 풍부한 지식과 뛰어난 언변 등으로 성도의 믿음을 산다면. 어떤 경우는 좋은 설교자가 신실하게 말씀을 선포해도 청중이 전파된 말씀이 나타내는 하나님께 믿음을 두기보다 그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에게 믿음을 두려고 한다. 굉장히 위험한 일이다(“나는 아볼로에게”, 1:12).
말씀을 전하는 자가 사람의 지혜나 말의 설득력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을 구해야 하는 것처럼, 말씀을 듣는 자도 세상의 지혜나 설득력 있는 전달 방식이 아닌 말씀을 통해 나타나는 성령의 능력을 간절히 구해야 한다. 전하는 자뿐만 아니라 듣는 자도 그리스도와 십자가 복음만 알기 위해 힘써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바울이 가졌던 두려움과 떨림이 있어야 한다. 전파되는 메시지가 세상의 지혜로 볼 때 미련하고 약하고 시대착오적인 견해로 느껴질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과연 성경이 그러하다면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말씀을 들을 때, ‘나에게 어떻게 들리는가?’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내용인가?’를 살피지 말고, ‘성경이 그렇게 말하는 것이 확실한가?’를 묻고 만일, 그렇다면 아무리 내 이성과 상식을 벗어나도, 세상의 견해와 다를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조롱받고 비판받고 손가락질받을지라도 그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결단을 해야 한다.
말씀을 전하는 자는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신대로 말씀을 전파하고, 말씀을 듣는 자도 그 똑같은 엄중함 가운데 두렵고 떨림으로 말씀을 듣는 것이다. 전하는 사람과 개인적으로 친밀하거나 그의 전달 방식을 선호해서가 아니고, 그가 가진 배경, 지식, 언변에 매료되어서가 아니라, 그 부정한 입술을 통해 자기의 영광스러운 진리를 계시하는 것을 기뻐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나타나심과 그분의 능력이 모든 말씀을 듣는 자에게 그에 합당한 자세를 요구한다.
오늘 말씀이 은사 없는 설교자나 게으르고 나태한 설교자의 허물을 덮어준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정반대다. 말씀 앞에 두려워하고 심히 떠는 자가 어떻게 함부로 말씀을 대할 수 있겠는가? 간절히 성령 하나님의 나타나심과 능력을 구하고, 최선을 다해 연구하고 준비하는 것이 마땅하다.
한편, 말씀을 듣는 자에게도 마땅한 자세를 요구한다. 아무리 은사가 없는 설교자가 설교 해도(그것이 현재 주님이 허락하신 상황이라면) 주께서 말씀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더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전달력이 떨어지고 단순한 내용을 반복하여 지루하게 느껴진다고 해도, 하나님은 어린아이의 어리숙한 말을 통해서도 그분의 전능하심을 나타내시는 분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지혜와 설득력이 대단하여 설교의 황제라고 불린 스펄전은 작은 시골 교회에 참석하여 폭우로 불참한 설교자 대신 더듬거리며 설교했던 사회자의 입술에서 나온 말씀으로 회심을 경험했다. 설교자가 아니라 그를 사용하여 자기의 뜻을 나타내시는 그리스도와 십자가 복음만을 알기 위해 힘써라.
우리가 함께 지어져 결국 이루고자 하는 교회는 ‘성경적인 교회’이다. 성경적인 교회의 가장 단순한 정의는 ‘성도 모두가 성경 앞에 두려워 떠는 교회’라고 말할 수 있다. 교회 안에 세상의 지혜나 세상에 속한 그 무엇도 권위를 가질 수 없지만, 말씀은 절대적인 권위를 갖는 교회다. 각자 기호와 성향이 다르고 의견 차이도 있지만, 말씀 앞에서는 모두 경외함으로 두려워 떨며 기쁨으로 순종하는 교회다. 하나님은 그런 교회를 통하여 당신의 영광과 능력과 지혜를 나타내신다. 성경적인 교회로 함께 지어져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