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본문: 누가복음 18장 15~17절
설교자: 조정의
혹시 “자소서”가 뭔지 아십니까? “자기소개서”의 줄임말입니다. 126만 5천 명이 실업자인 지금(2018년 2월 통계청 자료), 자소서의 비중이 높아진 채용 전형 탓에 잘 쓴 자소서 한 장이면 열 스펙 부럽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취업준비생들은 신중하게 자소서를 작성합니다.
특히 회사가 특정 사원을 우대 모집하는 경우, 자소서엔 그 내용이 꼭 들어가는 것이 좋습니다. 예를 들어, “경력 사원 우대 모집”, 이렇게 구인란에 쓰여 있을 때, 자기 직무 경험을 상세히 기술하면 회사에 들어갈 확률이 높아집니다. 그래서 간절히 입사하고 싶은 회사가 있다면 그 회사가 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필수 조건을 공개하셨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7절에도,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것은 우대조건이 아니라 필수조건입니다. 어린아이 같은 자, 어린아이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자, 그런 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성경학자들은 본문에서 말하는 “어린아이 같음”을 연구하여 그 의미를 설명하려고 애씁니다.
①어린아이는 속일 줄 모른다. ②무력하다. ③잘 믿는다. ④잘 용서한다. ⑤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다. ⑥자기가 받아들여지는지 아닌지를 놓고 안달하지 않는다. ⑦신선하다. ⑧죄나 의심이 없다. ⑨따뜻하게 사랑한다. ⑩업적을 주장하지 않는다. ⑪사회적으로 낮은 신분이고 비주류다. ⑫물질적 혹은 부모의 관심을 끊임없이 필요로 한다. ⑬겸손하다 등 많은 설명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과연 어떤 의미로 “어린아이와 같은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이것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필수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태와 마가도 예수님의 수많은 가르침과 기적을 기록하면서 이 장면을 놓치지 않았습니다(마 19:13~15; 막 10:13~16).
오늘은 본문 말씀을 통해 하나님 나라 왕으로 백성을 선택하시는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을 그 나라에 들어가게 하시는지 알아보겠습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과연 “어린아이와 같은 자”라고 자기를 소개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1. 어린아이 같은 자를 거부(15절)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어린 아이를 위해 축복을 구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오래된 관습이었습니다.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머리에 손을 펴서 얹고 하나님께 축복을 구하는 기도를 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창 48:14~15). 예수님 당시에도 어머니들이 첫 생일을 맞은 어린아이를 유명한 랍비에게 데리고 가서 축복을 받는 관습이 있었습니다(바클레이, 309p). 많은 사람이 그 관습에 따라 예수님께 어린아이를 데리고 와서 그들에게 안수하고 축복 기도를 해주기를 바랐습니다(마 19:13; 막 10:16). 특별히 누가는 “어린 아기”(브레포스)라고 표현했는데, 주로 갓난아기를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 앞에 데리고 온 아기가 모두 갓난아기였던 것은 아닙니다. 아장아장 걷는 아이부터 말을 알아듣는 아이까지(파이디온) 다양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아이를 데리고 예수님께 왔기 때문에 아마도 줄이 길게 늘어섰을 것입니다. 모두 예수님의 축복을 기대하며 기뻐했지만, 제자들은 마냥 기뻐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중요한 가르침과 특별한 사역을 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란데, 별로 중요하지 않은 아이들에게 시간을 많이 빼앗기는 것은 낭비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에 유대인 가정에서 서열상 1위는 아버지, 2위는 어머니, 3위는 자녀였습니다. 아이는 가장 낮은 서열이었습니다. 또한, 아이는 자라서 가정에 보탬이 되기 전까지는 거의 기여하지 않는 존재라서, 그렇게까지 중요한 존재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아이를 하나하나 안고서 머리에 안수하고 축복기도 하는 수고에서 예수님을 해방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줄지어 선 그들을 보고 꾸짖었습니다. 귀찮은 존재를 내쫓듯이, 우리 선생님께서 이런 보잘것없는 아이들까지 다 용납하여야겠냐며 막아섰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2. 어린아이 같은 자의 특징1(16절)
“예수께서 그 어린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예수님은 그들을 귀찮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어린아이를 불러 자기 앞으로 오게 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라”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두 번 말씀하셨는데, 사실 같은 내용입니다. 한 번은 긍정으로,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라”고 하셨고, 바로 이어 부정으로,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두 번 반복하여 제자들이 어린아이들을 막는 것을 강하게 꾸짖으셨습니다. 마가는 예수께서 “노하시며 말씀하셨”다고 말합니다(막 10:14). 예수님은 왜 화가 나셨을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이 어린아이를 하찮게 여기고 용납하지 않는 것에 대해 노하셨습니다. 어떤 면에서 제자들은 교만한 생각을 품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에 비해 자신들이 높다는 생각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저 낮고 천한 존재보다는 우리가 합당하다고 여기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 속 바리새인과 같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눅 18:11).
이와 유사한 사건이 마태복음 18장에 기록되었는데, 그 때 제자들은 대놓고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마 18:1)
서로 큰 자가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 가운데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세우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3~4)
제자들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따 놓은 당상처럼 여기고 거기서 누가 크냐고 질문했지만, 예수님은 그런 생각을 가지고서는 천국에 들어가지도 못한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돌이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교만에서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자기를 낮추라”고 하셨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자는 “자기를 낮추는 자”, “겸손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이 겸손히 자기를 돌아보고 가슴을 치며 죄 용서를 구한 세리였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교만한 바리새인의 기도는 하나님이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가르침을 실제로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Object lesson)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습니다. 천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마 5:3). 자기 영혼의 가난함을 아는 자, 하나님 앞에서 너무나 모자라고 완전히 궁핍한 영혼의 상태를 철저히 깨닫는 자, 그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이 천국을 주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첫 번째 “어린아이 같은 자”의 특징입니다. 부모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가진 것 없고, 그래서 생존 자체가 힘들어지는 철저하게 부모에게 의존적인 어린아이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 즉 겸손한 사람입니다.
이제 “어린아이 같은 자”의 두 번째 특징을 살펴보겠습니다.
3. 어린아이 같은 자의 특징2(17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이어서 또 다른 강조법을 사용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표현은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진리를 가르치실 때 항상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정말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아주 무서운 판결문처럼 단호하게 말씀하심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갖춰야 할 자세를 강조하여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여러 가지 추측이 가능하지만, 저는 다윗이 기록한 이 시편이 큰 힌트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시편 131편입니다(899p).
“1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2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3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이 시편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존전에 나아가 하나님과 함께 하기를 기뻐하며 지은 시입니다. 그러면서 1절에 다윗은 자신을 겸손히 낮춥니다. 마음의 교만을 제하고, 눈에 오만을 빼냅니다. 자신이 이룬 큰 일, 업적을 내세우는 등 자신을 높이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방금 배운 “어린아이와 같은 겸손”입니다.
2절에서 다윗은 어린아이같이 하나님을 받아들이기 원합니다. 젖 뗀 아이가 어머니 품에서 어머니를 완전히 믿고 의지하여 고요와 평안을 누리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자기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고 철저히 그분을 믿어 그 안에서 평안을 누립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모습입니다.
톰 라이트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은 엄마 젖을 먹고, 엄마와 눈을 맞추면서 환하게 웃는 법을 배우는 것과 같다’(톰 라이트, 308)
다윗은 3절에 이스라엘 모든 백성을 불러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라라”고 권면합니다. “바라다”(이헬)는 “기다리다”, “소망하다”의 의미를 갖는데, 여호와께 믿음을 두고 그가 이루어실 것을 확신하며 기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시편에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다”(시 42편)라고 표현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에게 반드시 요구되는 자세입니다. 그분에 대한 온전한 신뢰입니다. 젖 뗀 아이가 어머니를 신뢰하여 그 안에서 온전한 평안을 누리듯,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비유 속 과부와 같습니다. 불의한 재판장에게라도 끊임없이 구하면 결국 원하는 것을 얻는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은 하물며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의 부르짖음을 듣지 않으시겠냐고 책망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라고 하신 것입니다(눅 18:7-8).
오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도 이와 같습니다.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의 나라, 그 나라의 왕이신 하나님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믿고 바라라! 그렇게 믿는 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
예수님은 결국 앞에서 하신 두 비유의 핵심인 믿음과 겸손을 이 사건 하나로 재차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아이들을 귀찮은 존재로 여기고 예수님께 나오지 못하게 막자, 그 일어난 일을 사용하여 전에 가르쳐주신 겸손과 믿음을 그들에게 다시 알려주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을 믿고 바라는 자에게 주어진다.
하나님 나라는 겸손히 자신을 낮추는 자에게 주어진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①먼저, 우리는 우리가 겸손한 사람인지 돌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인지, 마음에 조금이라도 교만이 섞여 있지 않은지, 오만한 눈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지, 내가 한 일을 내세우고 있지 않은지 점검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다면 거기서 돌이켜 어린아이같이 자신을 낮춰야 합니다.
②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점검해야 합니다. 가장 쉬운 방법은 내가 주 안에서 고요하고 평온한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 속에서, 갈등 속에서, 질병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믿고 그분이 이루실 약속을 신뢰하여 기다리고 있는지, 어머니 품에 있는 젖 뗀 아이처럼 하나님을 영원히 바라고 있는지 내 영혼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내 안에 불안과 염려가 있다면, “하물며 하나님께서 너희를 듣지 않겠냐”고 물으신 예수님의 질문을 내 영혼에게 다시 한 번 던져야 합니다.
③우리는 또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를 거절하지 않고 기뻐 받으신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 눈에 보기에 하찮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사람, 상종하기 싫은 사람, 낮고 천해 보이는 사람도 주님이 받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너는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1-32)
예수님이 죄인을 거절하지 않고 가까이 불러 만져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의로운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런 은혜를 입은 자라면 마땅히 우리도 예수님처럼 죄인을 불러 회개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혹시 우리는 바리새인처럼 죄인과 멀리 떨어져 그들과 상종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6월 23~24일(토, 일) 복음집회가 있는데, 막상 우리가 초대할 사람이 하나도 없다면, 어쩌면 그것은 우리가 죄인과 세리와 함께 먹고 마시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요? 그들이 예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 그 은혜의 축복을 얻을 수 있도록 그들을 용납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마 18:5).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8:14).
예수님을 영접하듯 이웃을 영접하십시오. 그들 중 하나라도 잃는 것을 주님이 원하지 않으십니다.
“청년의사”라는 신문사에서 “의사들은 ~하는 환자가 가장 좋다/싫다”라는 제목으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의사들은 어떤 환자를 제일 좋아하거나 싫어할까요? 결과는 간단하고 당연했습니다. 설문조사 결과를 다룬 기사에 따르면 “의사들은 자신을 믿고 따라주는 환자를 제일 좋아하고, 의사를 믿지 않고 멋대로 하는 환자를 가장 싫어했다”라고 합니다.
“자세히 물어보는 것은 좋은데 불가능한 부분을 얘기해주면 실력이 없어서 그런 것 아니냐, 다른 병원에 가면 되는 거 아니냐고” 따지고,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멋대로 하다가 낫지 않는다며 불평불만을 터뜨리는 사람, 설명을 듣지도 않고 화만 내는 사람…” 이런 사람이 싫다고 합니다.
반면, 의사가 가장 좋아하는 환자는 다음과 같습니다. 작은 배려에도 고마워하며 치료에 대해 절대적으로 신뢰를 보내는 환자, 의사가 자기를 위해 일할 거라 믿는 환자, 호전이 더뎌도 기다려 주는 환자, 웃으며 고맙다고 하고 빈말이라도 선생님 때문에 지금까지 잘 지낸다고 하는 환자.
질문을 이렇게 바꿔도 비슷한 대답을 얻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제일 좋아하는 사람/싫어하는 사람은?”
하나님은 자기를 불신하고 제멋대로 하는 사람을 제일 싫어하십니다. 뭔가 맘에 안 드는 일이 일어나면, 하나님이 능력이 없는 게 아니냐? 사랑이 부족한 게 아니냐, 하나님 말고 다른 신을 찾아가면 해결되는 거 아니냐? 따지는 사람,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고 멋대로 하다가 삶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 불평불만을 터뜨리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도 않고 화만 내는 사람… 이런 사람을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자기를 믿고 따르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바라고, 겸손히 그분을 따르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은혜에 고마워하며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절대적으로 신뢰를 보내는 자,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일할 거라 믿는 자, 지금 내 상황이 더디고 어려워 보여도 기다리는 자, 웃으며 감사하고 하나님 때문에 지금까지 잘 지낸다고 하는 자…
심령이 가난하고 어미 품에 안긴, 젖 뗀 아기처럼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어 평안을 누리는 자, 그가 하나님이 가장 좋아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이런 자”이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