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하나님의 거룩한 자
본문 : 누가복음 4장 31~37절
설교자 : 이병권
31 갈릴리의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32 그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위가 있음이러라
33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34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35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36 다 놀라 서로 말하여 이르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위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
37 이에 예수의 소문이 그 근처 사방에 퍼지니라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에서 제일 처음으로 소개되는 예수님의 이적입니다. 특별히 두 번에 걸쳐서 사람들의 반응이 나오는데 저는 이 두 번의 반응에 따라 본문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32절과 36절에 나오는 두 반응은 기본적으로 같은 반응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놀라는 것입니다. 32절에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놀랍니다. 그리고 36절에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적에 대해서 놀랍니다. 귀신을 쫓아내신 그 능력을 보고 놀란 것입니다. 사람들의 놀라는 반응이 두 번에 걸쳐서 표현되지만 놀라는 이유는 결국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권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에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회당에 있었던 사람들을 놀라게 만든 예수님, 그리고 그분의 말씀! 오늘 이 시간에는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와 능력에 대해서 살펴보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함께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럼 먼저 첫 번째 장면 속으로 들어가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지난 누가복음 시간에 예수님은 자신의 고향인 나사렛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예수님은 나사렛을 떠나 가버나움에 가셨습니다. 31절에 “내려오사”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가버나움은 나사렛보다 더 낮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나사렛은 언덕지대에 있었고 가버나움은 갈릴리 해변의 도시입니다. 가버나움은 나사렛으로부터 북동쪽으로 약 30킬로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고, 갈릴리 북부 지역의 중심지였습니다. 농업과 어업이 번성했으며, 다른 지역과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로마 군대가 가버나움에 본부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각 지역으로부터 여러 다른 종교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가버나움은 예수님이 갈릴리 지역에 계시는 동안에 본부와 같은 곳으로, 중심이 되었던 곳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가버나움에 있는 회당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님은 늘 하시던 대로 안식일에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예수님의 그 가르침에 놀랍니다. “그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위가 있음이러라”(32) 회당에서 말씀을 듣던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그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권위”가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누가가 사용한 단어는 ‘자유롭게 선택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왕이나 재판관의 주권적인 결정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권위가 있다는 것은 자유롭게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그 말씀이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 말씀에 권위가 있었습니다.
권위가 있다는 이 말씀의 의미를 좀 더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가복음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 마가는 동일한 사건을 두고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막 1:22) 백성들이 놀랐던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그동안 들어왔었던 서기관들의 가르침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권위 있는 예수님의 말씀에 놀랐던 것입니다.
당시 율법학자들은 유대교의 전승에 근거해서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보통 유명한 랍비들의 말을 인용하거나, 그 랍비들의 견해를 가지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가르칠 때마다 랍비들의 말을 가지고, 그 권위를 세웠습니다. 안식일마다 사람들은 이런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아무개 랍비가 말한 바에 의하면….” “이것에 대해서 아무개 랍비는 말하기를…” 이런 식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자신의 권위가 아니라 위임받은 권위였습니다. 앞선 랍비들의 권위를 가지고 와서, 그것에 따라 가르쳤던 것입니다.
제가 학교에서 과제를 낼 때, 그 과제가 통과되게 하려면, 제가 쓴 글에 대해서 항상 그 근거를 제시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는 일이 권위 있는 학자들의 자료를 인용하는 것입니다. 그 출처를 밝혀서, 근거로 제시합니다. 그렇게 했을 때 제가 하는 말이 힘이 있게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근거 없이 말하면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이런 일은 우리 일상에서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뉴스를 보면 어떤 내용을 전달할 때, 꼭 그 분야의 전문가가 나와서 그것에 대해서 한마디 합니다. 제 딸들이 뭔가를 할 때 자주 내세우는 말이 있습니다. “아빠가 해도 된다고 했어”, “엄마가 먹어도 된대” 자기보다 높은 권위에 있는 사람의 힘을 빌려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정당함을 밝히는 것! 아이들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우리도 자주 그러지 않습니까? “목사님이 하라고 그러셨어요” 사람들은 자신보다 더 높은 권위를 빌려와서, 자신의 권위를 내세웁니다.
당시 서기관들이 그런 방식으로 백성들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닙니다. 이런 방식으로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에서 이사야 말씀을 찾으시고,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어떤 랍비들도 할 수 없는 말을 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직접 다루시며 자신의 권위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서기관들과 어떻게 다른지 마태복음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5:21-22)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5:27-28)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5:31-32)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5:33-34)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5:38-39)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5:43-44)
계속 반복되는 것이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의 권위가 아닌, 자신의 권위를 가지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말씀을 기록한 후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28-29절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예수님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뒷받침해 줄 아무런 권위도 필요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가르침을 세우기 위한 누군가의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바로 자신이 그리스도, 메시아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자신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가르침에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자로서 말씀하십니다. 기록된 구약의 참 뜻을 알려주셨기에 그 말씀에 권위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성경의 저자가 말하듯이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은 사람들은 그동안 자신이 들어왔었던 가르침과 뚜렷하게 구별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놀랐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 놀랐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놀랐던 것은 이 뿐만이 아닙니다. 이어서 사람들이 또 놀라게 되는데,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와 능력을 봤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권위 있는 말씀을 듣고 놀랐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예수님의 권위 있는 말씀을 ‘보고’ 놀라게 됩니다.
회당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전해지고 있을 때 한 남자가 등장합니다. 그의 등장은 아주 요란합니다. 예수님을 향해 크게 소리를 지르며, 소란스럽게 떠드는 겁니다. 누가는 이 사람에 대해서,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 사람은 더러운 귀신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귀신에게 속박되어 있습니다. 사악한 힘이 이 사람에게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회당의 모든 사람들이 이 귀신 들린 사람을 주목하며 어떤 일이 벌어질지 숨죽이며 지켜봤을 것입니다.
더러운 귀신은 예수님께 적대감을 나타냅니다. 자신이 위험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가만히 내버려 두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임재는 귀신으로 하여금 두려움에 떨게 합니다. 더러운 귀신은 예수님을 통해 공의가 실현된다는 것을 알고, 자신이 겪게 될 일을 생각하며, 두려워 떨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안감을 느끼며 어찌할 수 없는 압박감 속에서 큰 소리로 외칩니다.
34절에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이 질문은 관용적인 표현입니다. 이 표현은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 당신은 우리를 간섭하십니까?” “왜 당신은 우리를 괴롭게 하십니까?” 그래서 이 말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상투적인 말로 볼 수 있습니다. 귀신은 자신이 두려워하고 있는 그 이유를 스스로 말합니다.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귀신이 나사렛 예수라고 부르고 있는 이 분은 악한 세력을 모두 멸하시고, 그들을 전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 모든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고 통치하실 분이십니다. 귀신이 한 이 말은 예수님의 권위를 제시함은 물론이고, 자신도 예수님의 권위에 굴복할 수밖에 없음을 알려줍니다.
이에 덧붙여서 귀신은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재미있는 상황입니다. 귀신을 통해, 귀신 들린 사람의 입술을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증거 되고 있습니다. 누가는 지금까지 다양한 대상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계속해서 증거 했습니다. 천사들을 통해, 여러 사람들을 통해, 아버지 하나님의 소리로, 그리고 지금은 귀신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는 칭호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 메시아와 연결되는 표현입니다. 구약에서 거룩한 자라는 표현이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제사장 아론(시 106:16)에게, 그리고 기름부음을 받은 선지자 엘리사(왕하 4:9)에게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 다시 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으신 그리스도, 메시아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렛 회당에서 선포하신 말씀이 그것을 알게 합니다. 이사야에 예언된 말씀을 읽으시고, 이 말씀의 성취됨을 선포하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눅 4:18)
예수님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성령이 임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지니고 있는 분,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분, 성령의 충만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에 영적인 존재에 의해 지배를 받는 두 사람이 나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 대조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누구입니까? 더러운 영을 지닌 자와 거룩한 영을 지닌 자입니다. 더러운 귀신에게 붙들린 사람과 거룩한 성령이 임한 예수님이 대조됩니다. 누가는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 회당에서 벌어진 사건, 이 양극단에서 대조되는 두 사람의 만남을 통해서 예수님의 권위와 능력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약에 제가 여러분의 집에 아무 연락도 없이 찾아가서 갑자기 지금 집에서 나오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타당한 이유를 알기 전까지는 제 말이 잘 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아니라, 만약에 대통령이 와서 지금 당장 집에서 나오라고 말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여러분의 반응이 다르겠죠? 그 사람이 가지는 권위에 따라 다르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어떠합니까? 예수님이 나오라 말씀하시자 귀신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잠잠케 하시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하시자 귀신이 떠나갑니다. 그렇게 소리를 질러대면서 시끄럽게 했던 귀신이 예수님의 권위 앞에서는 아무런 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명령하셨고 귀신은 순종했습니다. 귀신이 떠나가자 귀신 들렸던 사람은 즉각적으로 회복됩니다. 귀신은 사람에게서 나갔고 그 사람은 상처를 입지 않았습니다. 악한 세력은 패했고 귀신 들렸던 사람은 안전하게 보호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악한 세력을 이깁니다. 악한 세력과의 싸움에서 예수님은 언제나 승리하십니다.
이것은 나사렛 회당에서 예수님의 선포의 말씀이 참으로 그러하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입니다.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4:18-19)
주의 성령이 임한, 하나님의 거룩한 자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참 자유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귀신에게 매인, 포로 된 자에게 예수님은 자유를 허락하십니다. 누가는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예수님의 첫 번째 이적으로 소개하면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 이사야 말씀의 성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본 사람들은 놀라며 이렇게 서로 말합니다. “이 어떠한 말씀인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능력을 본 사람은 놀람을 감추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악한 세력이 그 말씀에 굴복하는 것을 눈으로 봅니다. 회당에 있던 사람들은 또 다시 예수님의 권위에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악한 세력을 압도합니다. 회당에 있는 사람들은 지금까지 많은 가르침을 들어 왔습니다. 여러 선생으로부터 들어왔었는데, 지금 이 분은 다릅니다. 이 분에게는 다른 선생에게는 없는 권위가 있습니다. 그 말씀에 권위가 있습니다. 그 말씀에 능력이 있습니다. 악의 세력을 몰아내는 능력이, 그러한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 회당에서 가르쳤던 사람들은 악에 대해서 말할 수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분은 악에게 명령하고, 악을 쫓아내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로서 그 말씀에 권위와 능력이 있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권위와 그것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결정에 따라, 그 결정을 성취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이 일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곧바로 “그 근처 사방에” 퍼져 나갑니다. ‘그 근처 사방은’ 갈릴리 지역을 가리키는데,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갈릴리 지역의 모든 곳으로 퍼져 갔다는 것입니다.
더러운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신 예수님의 권위와 능력에 대한 소문은, 예수님께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게 만듭니다. 그리고 이 소문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누구시냐는 질문을 하게 만듭니다. 또한, 한편으로 예수님이 귀신들린 자를 고치신 것은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안식일 규정에 대한 논쟁거리를 만들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가버나움 회당에서 귀신을 쫓아내신 이적은 예수님의 이적 사역의 시작일 뿐입니다. 앞으로 누가복음에서 계속 이러한 이적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여러 측면에서 배우게 될 것입니다. 기대가 되십니까? 어쩌면, 우리는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들이 너무나 친숙하기 때문에, 사실 이런 이적들을 읽어도 별로 놀랍지 않습니다.
하지만 회당에서 이 광경을 직접 봤던 사람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그 회당에 같이 있다고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자! 상상해봅니다. 여러분이 가버나움에 살고 있는 유대인입니다.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 말씀을 듣기 위해 갑니다. 그런데 그날은 한 젊은 선생이 와서 말씀을 가르칩니다. 근데 들어보니 “와! 정말 놀랍습니다.” 그 가르침이 다릅니다. 권위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이 귀신 들린 자를 고칩니다. 귀신에게 명령합니다. 그러자, 그 명령대로 귀신이 순종하는 겁니다.
여러분, 지금 어떤 반응이 나오겠습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그 능력을 보면, 누구든 그 권위에 놀라게 됩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이십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로서 예수님은 절대적 권위와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분의 능력은 보이지 않는 영적인 존재에 이르기까지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세력을 다스릴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권위와 능력은 악한 세력에 매여 있는 자들에게 기쁨의 소식이며, 잡힌 자들에게 은혜의 소식입니다. 예수님은 그 악한 세력으로부터 포로 된 자들을 구할 수 있습니다. 자유를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직접 귀신을 들린 자를 치유하심으로, 자신의 권위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여러분에게 질문합니다. 여러분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여러분이 권위를 인정하며, 하는 말을 받아들이는 대상이 누구입니까? 악한 세력은 나름의 권위를 가지고 세상을 흔들며 힘을 떨치고 있습니다. 악하고 타락한 세상을 보면, 그들의 힘이 정말 강력한 것처럼 보입니다.
뿐만 아니라 살다보면, 때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의 권위가 대단하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가끔 그런 경험들을 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 돈 많은 사람들이 더 권위가 있는 것 같고, 사회적으로 잘 나가는 사람에게 권위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보는 그 모든 권위는 예수님 손 안에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력까지도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면 모두 굴복합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 권위를 예수님께 맡기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누구를 두려워해야 하는지, 누구의 말을 듣고 따라야 하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마치 회당 안에서 예수님을 봤던 사람들처럼 예수님의 권위와 능력을 본 사람입니다. 비록 실제로 눈으로 예수님을 본 적은 없지만, 그분의 권위와 능력을 우리의 구원과 삶을 통해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주목하며 그 권위에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혹시 여러분의 삶에서 예수님의 권위에 순종하지 않는 부분은 없습니까? 계속 고집을 부리며 권위에 굴복하지 않는 부분은 없습니까? 여러분, 스스로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자로서, 그 권위대로 말씀하고 행하는 분이심을 가르쳐줍니다. 예수님은 그 선포하신 말씀대로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억압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악한 영들, 우리를 끈질기게 잡아 붙들고, 괴롭히는 죄들, 그것에서 참된 자유를 선포하시고 우리를 구원 하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러니 이 예수님에게, 그분의 권위 앞에 참으로 엎드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