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하나님을 낯설게 만드는 것
본문: 사사기 10장 1절 ~ 18절
설교자: 이병권
여러분은 누군가의 예상하지 못한 모습을 보고 놀랐던 적이 있으십니까?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서 정말 색다른 모습을 보는 겁니다. ‘와! 낯설다 저 사람이 내가 알고 있는 그 사람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 때, 때로는 충격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뜻밖에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주석가는 오늘 본문을 두고 성경 전체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그 정도는 아닌 거 같다고 생각하지만, 그만큼 낯선 하나님의 모습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대체 하나님의 어떤 모습을 보고 그런 말을 한 걸까요?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니 그러므로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리라”(13)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어떤 백성입니까?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은 백성입니다. 하나님은 크신 능력으로 그들과 함께 하셨고 인도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 종으로 살고 있을 때 하나님이 그들을 구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먹이시고 입히시고 보호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까? ‘나는 더 이상 너희를 구원하지 않겠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기를 이제는 그만두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금 이 말씀을 하시는 하나님이 낯설게 느껴집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기대하는 하나님의 모습과 다릅니다. 하나님 성품에 어울리지 않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하나님이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을 겁주려고 그냥 하신 말씀일까요?
그런데 하나님은 이 말씀을 이스라엘이 죄를 자백한 후에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의미를 더 주의 깊게 생각하게 만듭니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말했습니까?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들을 섬김으로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10) 이스라엘이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며 하나님께 죄를 범했음을 인정합니다.
첫 사람 아담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우리가 자주 그러는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죄의 원인을 돌리고 핑계를 늘어놓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용서를 구하는 이스라엘에게 왜 이런 말씀을 하실까요? 이스라엘에 대해서 오래 참으시고 인자하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이 이제는 그들을 포기하겠다니! 하나님이 변하셨나요?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하나님도 참을 만큼 참았고, 그 한계가 있으니 더 이상은 힘들다’ 혹은 ‘이스라엘처럼 하면 우리도 하나님을 변하게 만들 수 있다’ 이런 걸까요? 마치 아이를 키우면서 엄마들의 성격이 변하는 것처럼, 그동안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돌보시면서 참다 참다 폭발하신 걸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자비하시고 인자하시고 오래 참으시고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그의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물론 맞습니다. 하나님은 긍휼과 사랑이 무한하신 분이십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전부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자와 자비가 영원하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늘 용서만 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원하는 측면만 생각하고 하나님을 제한하거나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때로 우리는 기대하지 않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고 놀랄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그 모습이 하나님이 아니거나 하나님이 변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선되는 진리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상황을 그 진리 안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변하실까요? 아니요! 하나님은 변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변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하나님이 변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신실하지 못함에 대한 반응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이십니다. 사람이 만든 거짓 신들, 우상이 아닙니다. 살아계신 분이시기에 이스라엘과 맺으신 그 관계 안에서 반응하십니다. 우상이라면 이스라엘이 어떤 일을 하더라도 반응이 없겠지만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는 분이시기에 그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하나님도 그에 따른 태도를 달리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말씀을 볼 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지?’ 라고 생각하기보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했기에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의 원인은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본문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문제가 무엇인지 살펴보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아비멜렉 후에 있었던 두 명의 사사가 짧게 언급됩니다. 돌라와 야일인데, 각각 23년과 22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사사기의 반복되는 주기대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과 아스다롯과 아람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자손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들의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리고 그를 섬기지 아니하므로”(6)
이스라엘이 무엇을 했습니까? 다시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합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깁니다. 이제는 이스라엘의 이와 같은 악이 새롭지도 않고 놀랍지도 않습니다. 또 다시 이스라엘은 그들이 했던 잘못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계속 반복되는 일이지만 이번에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사사기의 저자는 일곱 이라는 숫자에 맞추어서 신들을 나열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일곱은 많다는 의미로 사용할 때가 있는데 오늘 본문이 그런 경우입니다.
이스라엘이 섬기는 이방 신들을 보십시오. 참 많습니다. 아스다롯을 제외하고는 모두 복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욕심도 많아서 사방팔방에 신이라는 신들은 다 섬긴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렇게 많은 이방민족들의 신들을 섬기고 살아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렸습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이러한 악을 계속 반복해서 행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떠합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이방민족들의 신들을 따르며 우상들을 섬길 때 그들의 형편이 나아졌을까요? 그들이 기대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형편은 더 나빠졌고 삶은 더 어려워졌습니다.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더 잘 살기 위해서 우상을 섬기지만, 그 우상을 섬기는 결과로 돌아오는 것은 더 큰 문제들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만족이 있을 수 없고 행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상은 우리 인생에게 어떠한 만족도 어떠한 행복도 가져다 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속아 살기 때문에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우상숭배로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 때문에 더 우상에게 빠집니다. 삶에 벌어지는 문제의 원인을 우상숭배로 보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 원인을 우상숭배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오해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 돈이 하나님 자리에 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만족과 행복을 위해 돈을 섬기게 됩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생기는 삶의 문제를 돈이 충분하지 않아서 생기는 거라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돈에 매달리게 됩니다. 돈을 더 섬기게 되고 그 결과 문제는 더 커지고 더 악화됩니다.
스스로는 자신이 돈을 숭배한다고 생각하지 않겠지만 삶의 목표와 우선순위가 돈에 맞춰지고 더 모으고 더 많이 가지는 것을 행복으로 알고, 돈을 위해 살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하나님 자리에 두면 그것은 우상이 되고 사람은 그 우상에게 매이게 됩니다. 결국 그 우상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돈의 노예가 되고 쾌락의 노예가 되고 성공과 명예의 노예가 됩니다. 사람의 인정과 인기에 노예가 되고 학력과 외모에 노예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 외적인 것들로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낫다는 것을 알리고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며 인정을 받으려고 헛된 수고를 하는 겁니다. 참으로 불쌍한 인생입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잘 살기 위해서 더 행복해지려고 고생은 고생대로 하는데 번지수가 틀렸습니다. 엉뚱한 곳에서 헛된 것을 좇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섬기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충분히 섬기지 않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 자리에 다른 것을 두는 것이 문제의 원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렸을 때 그들은 자유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하나님의 진노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사사기는 반복해서 이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는지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블레셋 사람들의 손과 암몬 자손의 손에 그들을 파시매”(7)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이방민족들의 손에 이스라엘을 넘겨주십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보호하시기를 멈추셨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어떤 결과가 나왔습니까? “그 해에 그들이 요단 강 저쪽 길르앗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땅에 있는 모든 이스라엘 자손을 쳤으며 열여덟 해 동안 억압하였더라”(8)
길르앗은 요단강 동편에 있는 지역입니다. 이방 민족들, 특히 암몬 자손이 그 지역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칩니다. 여기서 친다는 말은 쳐서 부순다는 의미인데 강한 표현입니다. 그렇게 18년 동안 이스라엘은 억압을 당합니다. 암몬이 이스라엘을 짓누릅니다.
뿐만 아니라 암몬 자손은 요단을 건너 유다와 베냐민과 에브라임과 싸웠고, 요단강 양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 모두를 괴롭힙니다. 이스라엘이 당하는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방민족이 이스라엘을 지배하도록 내버려두셨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스라엘은 늘 했던 대로 또 다시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은 그 부르짖음에 응답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시되 내가 애굽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암몬 자손과 블레셋 사람에게서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였느냐 또 시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마온 사람이 너희를 압제할 때에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므로 내가 너희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였거늘“(11-12)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과거의 일을 말씀하십니다. 재미있는 것이 여기서 언급이 되는 이방민족의 수도 일곱입니다. 이스라엘이 섬긴 이방 신들 일곱에 대응하듯이 이방민족의 수도 일곱에 맞추어 말씀하십니다.
그런 후에 하나님이 이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니 그러므로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가서 너희가 택한 신들에게 부르짖어 너희의 환난 때에 그들이 너희를 구원하게 하라 하신지라“(13-14)
하나님은 거듭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거듭해서 다른 신을 섬겼습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을 버리고 그래서 어려움을 만나면 하나님을 찾고 다시 형편이 좋아지면 또 다시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따릅니다. 이런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더 이상 나에게 이야기하지 말고 네가 따르는 그 신들에게 부르짖어보아라’ ‘네가 나 외에 다른 신을 그렇게 원하고 따르니 네가 원하는 대로 그 신들이 너를 구원하도록 해라‘ 우리 식으로 하면 어떤 말입니까? ‘그만 됐으니 딴 데 가서 알아봐라!’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그래도 하나님이 심한 말씀을 하신 걸까요? 진짜 심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입니다. 정말 징그럽게 말을 안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판기가 아닙니다. 동전을 넣으면 원하는 물품이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께 회개라는 동전을 넣으면 용서라는 물품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절대로 이런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께 진심으로 나의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은 용서하십니다. 하지만 이것은 내가 동전을 넣었기 때문에 내가 회개했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맺어진 인격적인 관계로 누리는 은혜입니다.
한 번 생각해볼까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 중에서 회개를 잘 보여주는 비유가 있습니다. 탕자의 비유, 기다리는 아버지에 대한 비유입니다.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이 회개하여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받아주었고, 크게 기뻐하며 잔치를 벌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 아들이 또 아버지 재산을 가지고 집을 나가면 어떨까요?
뉴스에 이 사건이 보도된다면 이런 제목으로 기사가 날 것 같습니다. ‘은혜를 저버린 돌탕, 다시 집을 나가다!’ 이 기사에 어떤 댓글이 달릴까요? 여러분은 어떤 댓글을 달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라 다시 집을 나가 방탕하게 살던 아들이 또다시 돌아오면 어떨까요? 그래도 아버지는 받아줍니다. 그리고 아들은 다시 집을 나갑니다. 이 일이 계속해서 반복된다면 아들이 돌아왔을 때 죄를 자백하고 뉘우치는 것이 진정성 있을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습관적인 회개일 뿐입니다.
반복되는 죄와 습관적인 회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치명적인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낯설게 만듭니다. 우리는 이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죄에 대해서 가볍게 생각하고 습관적으로 반복하고 있지는 않은지 정신을 차리고 깨어서 경계하고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회개라고 말하지만 애통하는 마음과 진실 된 뉘우침 없이 그냥 입술의 고백으로 끝나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 나에게 반복되는 죄가 있다면,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회개가 반복된다면 우리는 뜻밖에 하나님, 낯선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낯설게 느껴질 것입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누리는 친밀함과 은혜를 경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서 오는 만족과 기쁨은 하나님을 온전한 마음으로 섬기고 순종할 때 경험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 해결되지 않은 죄의 문제가 있다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온전한 기쁨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자신을 살피고 스스로를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그 누구보다 친밀할 수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망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낯설게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주님 안에서 누릴 수 있는 하나님과의 친밀함, 그 놀라운 특권을 다른 쓸데없는 것들과 바꾸지 마십시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우상과 바꾸었습니다. 택함 받은 민족으로 누릴 수 있는 놀라운 특권들을 깎아 만든 거짓 신들에게 바치고 낯선 하나님을 만나 괴로워합니다. 계속해서 죄를 반복했고 습관적인 회개를 통해 용서를 얻으려고 했지만, 결국 이러한 태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시기를 그만두셨습니다.
그럼 이제 이스라엘에게 구원의 희망은 없는 걸까요? 하나님이 거절하셨는데 어떻게 되는 걸까요?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되 우리가 범죄하였사오니 주께서 보시기에 좋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니와 오직 주께 구하옵나니 오늘 우리를 건져내옵소서 하고 자기 가운데에서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로 말미암아 마음에 근심하시니라“(15-16)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다시 회개합니다. 자기 가운데 있는 이방 신들을 제거하고 하나님을 섬깁니다. 여기 16절은 사사기에 나오는 가장 강력한 이스라엘의 회개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수고와 당하는 고통으로 인해 하나님은 근심하십니다. 하나님이 근심하셨다는 것은 하나님 대해서 인간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문자적으로는 마음이 짧아졌다는 것인데 더 이상 뭔가를 하지 않고 가만히 있기 어려운 상태, 무언가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말하는 것입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반복해서 죄를 범하고 또 습관적인 회개를 거듭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죄를 버리고 돌이키며 하나님께 돌아왔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반복되는 죄와 습관적인 회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망가뜨립니다. 치명적인 결과를 낳습니다. 하지만 참으로 감사한 것은 그렇다고 해서 그 관계가 끊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끊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하나님이고 회복케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회복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볼 수 있는 놀라운 일은 정말 악한 자라도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리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칠 때 하나님은 그런 자에게도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을 우상숭배에 빠뜨리고 우상숭배를 활성화시키는데 큰 업적을 세운 북이스라엘 최악의 왕이라 할 수 있는 아합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아합이 엘리야가 전한 하나님 말씀을 듣고 겸손히 자신을 낮추며 돌이켰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악한 니느웨 백성들이 요나가 전한 경고를 듣고 회개했을 때 하나님은 그 뜻을 돌이키셨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긴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하나님의 자비하심 사이에 어느 하나 조금이라도 타협할 수 없는 팽팽한 긴장이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서로 만날 수 없는 평행선과 같은 서로 반대되는 진리입니다.
그런데 평행선과 같은 이 두 진리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곳이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십자가에서 우리 주 예수님이 이루신 그 십자가에서 우리가 다 헤아릴 수 없는 사랑과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공의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의 구원이 십자가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의 사랑으로 거룩함을 입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자격 없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 맺어진 새로운 관계 안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십자가로 맺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시고 그 안에서 누리는 기쁨과 만족을 다른 것으로 바꾸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방해가 되는 것들, 그 관계에 걸림이 되는 것들, 그런 우상들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그 관계를 위해 하나님을 낯설게 만드는 죄를 멀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그 관계 안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그 일을 위해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니 그 관계를 위해 수고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내 욕심대로 다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도 좋을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마십니다. 그 관계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축복을 놓치지 않기 위해 결단하고, 순종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