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하나님은 부재하시는가?
본문: 사사기 9장 1절 ~ 57절
설교자: 이병권
여러분, 하나님이 부재하실까요? 하나님이 너무 바빠서 혹은 특별한 일이 생겨서 자리를 비우는 경우가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 모두가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달리 부재중일 때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존재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문제는 하나님이 부재하시는 것처럼 생각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론으로 배우는 것과 실제로 경험하는 것이 다를 때가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현존하신다는 것을 알고 그렇게 믿고 있지만, 체험적으로는 그렇지 않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잠시 자리를 비우고 다른 곳으로 출장가신 것처럼, 하나님이 하실 일들을 미뤄두고 잠시 쉬고 계신 것처럼, 하나님이 다른 일에 바쁘셔서 내 삶에 벌어지는 일에는 무관심한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이 부재하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지? 어떻게 하나님이 이런 일을 그냥 두고 보실 수 있을까? 세상에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서 이런 의문이 들 때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 그런 의문을 가질만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 사람은 기드온의 막내아들 요담입니다. 요담은 70명이나 되는 자신의 형제들을 하루아침에 모두 잃어버립니다. 자신만 살아남았고 집을 떠나 도망가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런 끔찍한 일을 당한 요담이라면 충분히 이 질문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럼 이 질문을 잠시 마음에 담아두고 요담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그 일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떻게 역사하셨는지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에 대한 교훈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여룹바알의 아들 아비멜렉이 세겜에 가서 그의 어머니의 형제에게 이르러 그들과 그의 외조부의 집의 온 가족에게 말하여 이르되”(1) 기드온이 첩에게서 낳은 아들, 오늘 본문의 중심인물이 되는 아비멜렉이 등장합니다. 아비멜렉은 외가친척들이 있는 세겜으로 가는데, 세겜은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와서 처음 하나님께 제단을 쌓은 곳이고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축복과 저주를 선포했던 곳입니다. 세겜은 역사적으로도 의미 있는 곳이고 지리적으로도 중요한 곳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들은 이 세겜에서 벌어집니다.
아비멜렉이 세겜에 있는 외가친척들에게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청하노니 너희는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라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이 다 너희를 다스림과 한 사람이 너희를 다스림이 어느 것이 너희에게 나으냐 또 나는 너희와 골육임을 기억하라 하니”(2) 아비멜렉은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합니다. 그래서 먼저 세겜 사람들의 마음을 얻으려고 친척들의 도움을 구합니다. ‘너희가 기드온의 아들 칠십 명으로부터 다스림을 받는 것보다 너희와 피를 나눈 내가 너희를 다스리는 것이 낫지 않냐‘하고 제안합니다. 자신이 혈연관계임을 부각시키면서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백성의 입장에서 자신을 다스리는 사람이 여러 명으로 있는 것보다 한 명인 것이 더 나은 일입니다. 그래서 아비멜렉의 외가친척들은 그의 말을 따릅니다. 그리고 아비멜렉을 왕으로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먼저 세력을 얻기 위해 세겜의 모든 사람들에게 아비멜렉을 말하며 그들의 마음이 아비멜렉을 향하도록 합니다.
마치 선거 유세를 하는 것처럼 아비멜렉을 지지하도록 만드는 겁니다. 친척들을 동원해서 자신의 출신지역에서 근거지를 마련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인맥이라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만약에 제가 정치를 한다고 선거에 나간다면 여러분은 저를 뽑지 않겠습니까? 제가 정치에 대해서 어떤 견해를 가지든 어떤 공약을 말하든 우선 아는 사람이니까 저를 지지하지 않겠습니까?
어쨌든 아비멜렉과 그의 친척들의 전략은 성공적이었습니다. 그 결과 세겜 사람들은 아비멜렉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우리 형제라’ 그리고 세겜 사람들은 아비멜렉을 왕으로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아비멜렉은 외가친척의 도움을 입어 세겜 사람들의 마음을 얻습니다. 그런 후에 아비멜렉은 자신에게 방해가 되는 자들을 제거합니다.
누가 방해가 될까요? 아비멜렉의 이복형제들, 어머니는 다르지만 같은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은 70명의 형제들이 있습니다. 아비멜렉은 첩의 자녀이기 때문에 출신의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형제들을 모두 죽이려고 합니다. 혼자서 이 일을 할 수 없기에 사람들을 모으는데 우상에게 바쳐진 재물, 은 칠십을 얻어서 방탕하고 경박한 사람들을 용병으로 삽니다. 쉽게 생각하면 돈을 주고 불량배들을 고용한 것입니다. 돈의 출처도 문제이고 그 돈으로 하는 일도 문제입니다. 아비멜렉은 더러운 돈으로 더러운 사람을 사서 더러운 일을 하고 있습니다.
“오브라에 있는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가서 여룹바알의 아들 곧 자기 형제 칠십 명을 한 바위 위에서 죽였으되 다만 여룹바알의 막내 아들 요담은 스스로 숨었으므로 남으니라”(5) 아비멜렉의 악함을 잘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는 자신의 형제들을 모두 죽입니다. 그 중에 막내 혼자만 숨어서 목숨을 구하지만, 다른 형제들은 모두 한 바위 위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모두 한 바위 위에서 죽었다는 것은 형제들이 아비멜렉을 반대하면서 싸우다가 죽거나, 혹은 도망가는 중에 죽임을 당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비멜렉은 자신의 형제들을 붙잡아 특별한 곳으로 끌고 가서, 그곳에서 그 모두를 처형한 것입니다.
기드온은 자기 동족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였지만,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은 더 나아가 자기 형제들까지 잔인하게 죽입니다. 이렇게 아비멜렉은 형제들의 피를 흘림으로 왕이 되었고, 세겜 사람들은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았습니다.
한 공동체를 이끄는 리더가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리더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그 공동체의 미래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자격 없는 사람이 리더가 되었을 때는 공동체 전체에게 고통스러운 결과가 주어집니다. 그래서 리더를 세우는 일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세겜 사람들은 아비멜렉을 왕으로 세웠습니다. 괜찮을까요? 아비멜렉은 왕이 될 만한 사람일까요? 스스로 왕이 되려는 욕심에 사로잡혀 형제들을 잔인하게 죽이는 모습에서 우리는 아비멜렉이 어떤 사람인지 그의 자질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본문을 통해 아비멜렉이 왕이 될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본문에서 살아남은 기드온의 막내아들 요담이 나오는데, 그는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은 세겜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높여 외칩니다. 먼저 세겜 사람들의 모습을 나무에 빗대어서 우화로 말하는데, 아비멜렉을 왕으로 세운 일이 얼마나 황당한 일인지 꼬집어 말한 것입니다.
우화의 내용은 나무들이 자신의 왕을 세우려고 왕이 될 만한 나무들을 찾는 이야기입니다. 먼저 세 종류의 나무가 나오는데, 이스라엘에 재배되는 주된 나무들입니다. 감람나무와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입니다. 이 세 나무는 모두 자신에게 주어진 본분이 있기에 그것을 버리고 나무들 위에 우쭐댈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나무들은 가시나무에게 가서 왕이 되어달라고 합니다. 가시나무는 다른 나무들과 달리 사람에게 유익을 줄 수 없는 무가치한 나무였습니다. 30에서 60센티 정도 자라는 나무였기에 기본적인 그늘조차도 줄 수 없었고, 불에도 잘 붙어서 다른 나무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위험한 나무였습니다.
그런데 나무들은 이러한 가시나무에게 왕이 되어 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요담이 말하는 나무 이야기에서 아비멜렉이 가시나무와 같은 자입니다. 그리고 요담은 나무 이야기를 하는 이유를 말하는데, 정리하면 이러합니다.
‘만일 아비멜렉을 너희 왕으로 삼은 것이 잘한 일이라면 너희가 아비멜렉의 통치로 복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너희가 잘한 일이 아니라면 너희와 아비멜렉은 마땅한 보응을 받을 것이다. 너희는 그에 의해 불탈 것이요, 그는 너희에 의해 불탈 것이다.‘
요담은 이렇게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을 저주하고 도망갑니다. 지금 같으면 스마트 폰으로 글을 올리며 비난할 텐데 이때는 그렇게 할 수 없어서 큰소리로 직접 말하고 얼른 도망가야 했습니다.
그럼 이제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요담이 세겜과 아비멜렉을 저주한 결과 큰 재앙이 찾아왔을까요? 하나님이 이 악한 일에 대해서 심판을 시작하셨을까요? 아닙니다. 당장이라도 큰 일이 생길 거 같았지만 아무 일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악에 대해서 그냥 침묵하시는 것 같습니다. 특별한 일 없이 시간은 흘러갑니다. 아비멜렉은 문제없이 잘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납니다. 그리고 그때서야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아비멜렉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삼 년에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영을 보내시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였으니“(22-23) 하나님이 악한 영을 사용하셔서 세겜 사람들과 아비멜렉 사이를 갈라놓습니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고 다른 사람을 따릅니다.
가알이라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는데(26) 세겜 사람들이 가알을 신뢰하여 그를 따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가알은 대놓고 아비멜렉을 저주하며 자신이 아비멜렉과 싸우겠다고 허세를 부립니다. 그가 술에 취해서 하는 말입니다. “이 백성이 내 수하에 있었더라면 내가 아비멜렉을 제거하였으리라 하고 아비멜렉에게 이르되 네 군대를 증원해서 나오라 하니라”(29)아비멜렉이 없는 자리에서 아비멜렉을 부르며 군대를 모아서 오라고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술에 취해서 정신 못 차리는 한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아비멜렉의 신복인 스불은 이 모든 일들을 아비멜렉에게 보고 합니다. 아비멜렉은 스불이 알려준 대로 군사들을 데리고 매복해 있다가 아침 해가 뜰 때 일어나 가알을 공격합니다. 결국 허세를 부리던 가알은 패하여 세겜에 쫓겨났고, 아비멜렉은 세겜 성읍으로 쳐들어가 백성들을 죽이며 그 성을 헐고 밭에 소금을 뿌립니다. 소금을 뿌리는 것은 다시 작물을 심을 수 없도록 저주하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세겜 사람들에게 자신을 배신한 대가를 단단히 치르게 합니다.
또한 아비멜렉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세겜 망대에 있던 사람들이 우상의 신전으로 몸을 피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갑니다.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군사들을 명하여 나뭇가지를 가지고 오도록 합니다. 그리고 그 신전에 불을 지릅니다. 그렇게 해서 죽은 사람이 천 명이 됩니다. 아비멜렉의 잔인함을 또 다시 잘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런 후에 아비멜렉은 세겜 가까이 있는 데베스라는 곳으로 갑니다. 그리고 똑같은 방법으로 사람들을 불에 태워서 죽이려 합니다. 사람들이 망대로 몸을 피하고 있을 때, 그곳에 불을 지르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때 망대 위에 있던 한 여인이 맷돌 윗짝을 던졌고, 아비멜렉은 그 맷돌에 맞아 머리가 깨집니다.
장난하는 것처럼 사람의 목숨을 빼앗던 아비멜렉, 그도 같은 처지가 되었습니다. 장난하는 것처럼 한 여인이 던진 맷돌에 맞아 인생을 마치게 된 것입니다.
그의 최후입니다. “아비멜렉이 자기의 무기를 든 청년을 급히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너는 칼을 빼어 나를 죽이라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이르기를 여자가 그를 죽였다 할까 하노라 하니 그 청년이 그를 찌르매 그가 죽은지라“(54) 여자의 손에 의해 죽는 것을 수치로 여겨 무기든 자에게 자신을 죽이도록 했지만, 그의 의도와는 달리 모든 사람이 아비멜렉의 죽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여인의 손에 죽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었고 오늘날 우리도 그의 죽음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한다‘(마26:52)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비멜렉은 자신이 왕이 되기 위해 형제들을 죽이는 악을 행했고, 그 결과 자신도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에 결론입니다. “아비멜렉이 그의 형제 칠십 명을 죽여 자기 아버지에게 행한 악행을 하나님이 이같이 갚으셨고 또 세겜 사람들의 모든 악행을 하나님이 그들의 머리에 갚으셨으니 여룹바알의 아들 요담의 저주가 그들에게 응하니라“(56-57)
하나님이 아비멜렉이 행한 악행을 심판하셨고, 또 세겜 사람들의 모든 악행을 심판하셨습니다.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심판의 도구가 된 것입니다. 요담의 저주처럼 아비멜렉에게서 나온 불이 세겜을 태웠고, 반대로 세겜에서 나온 불이 아비멜렉을 태워버렸습니다.
요담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이 부재하시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저주에 대해서 침묵하시는 것 같았고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 모든 자들을 심판하셨습니다.
우리도 때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악에 대해서 가만히 계시는 걸까? 왜 심판하지 않으실까? 하나님이 이 악에 대해서 모르고 계신 것처럼 생각될 때가 있고, 악에 대해서 그냥 눈 감아 주시는 것처럼 생각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 눈에는 하나님이 부재하시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은 그 뜻대로 역사하시며 악에 대해서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악에 대해서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아비멜렉이 악을 행하고 왕이 되어 잘 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도와 악을 행했고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거리낌 없이 악을 행하고 반복해서 악을 행할 수 있는 것은 그 악에 대해서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을 때입니다. 하지만 악에 대해서 무시무시한 심판이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악을 행한 후의 결과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악을 멈출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악에 대해서 심판이 있다는 것을 기억할 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두 가지 유익이 있습니다. 하나는 나에 대해서, 나 스스로를 살피며 죄에 대해서 경계할 수 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세상에 대해서,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기대하며 내가 원수 갚으려는 욕심과 정죄하려는 태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심판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죄에 대해서, 세상의 모든 악에 대해서 복수하려는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때로 나에 대해서 악을 행한 사람들을 향해 내가 그 악을 갚기보다 하나님의 손에 맡길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에 대해서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답답하게 느끼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심판에 대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시간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때에 이루어집니다.
요담은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을 저주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나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3년의 기다림 후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악에 대해서 당장 심판이 임하기를 바라고 당장 뭔가 바뀌고 정리되고 공의가 이루어지고 선이 이기는 것을, 그런 결과를 보기 원합니다. 기다리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뜻을 행하시면서 늘 기다림을 경험하도록 하십니다. 우리에게 인내를 요구하십니다. 믿음으로 기다리고 참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때를 우직하게 기다리고 하나님을 신뢰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다리며 인내한다면 하나님이 부재하시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역사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음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 각자에 대해서 하나님이 기다리지 않으시고 바로바로 심판하셨다면 우리가 이 자리에까지 올 수 있었을까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셨기 때문에 오늘의 내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때로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그분의 때를 위해 침묵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침묵이 하나님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임재하시고 하나님은 알고 계시고 하나님은 그 선하신 뜻에 따라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보는 눈이 필요하고, 믿음으로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을 생각해보십시오. 믿음 없이 이 이야기를 본다면 어떨까요? 아비멜렉이 권력에 눈이 멀어 세겜 사람과 연합했다가 그 연합이 깨져서 결국 서로 다투다가 비참한 결과를 맞은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운이 없어서, 흔한 말로 재수가 없어서 어떤 여자가 던진 맷돌에 우연히 맞은 것뿐입니다.
하지만 다행히 오늘 말씀에는 그런 오해가 없도록 하나님이 가려진 커튼을 활짝 열어주셨습니다. 누가 이 일을 하셨습니까? 성경은 분명하게 하나님이 이 일을 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23-24, 56-57).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들 속에서, 일련의 연속되는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은 그 뜻에 따라 심판을 행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심판하시기 위해 하늘에 벼락이 떨어지게 하지는 않으셨지만, 한 여인을 통해 하늘에 맷돌이 떨어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 가운데 역사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커튼에 가려진 것처럼 믿음이 없어서 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갈 때가 많지만,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그 뜻을 이루어 가시며 하나님의 심판을 행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 모든 악에 대해서 온전히 심판하실 것입니다. 훗날 그 앞에서 어떤 악도 변명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심판자로서 완벽하게 심판하시고 모든 악은 그 앞에 굴복하며 떨며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감사하게도 우리는 그 심판에서 건짐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가 잘한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그 무서운 심판에서, 그 영원한 심판에서 무죄를 선고 받았습니다. 세상 끝 날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심판에서 우리는 구원받은 자들입니다. 그 은혜를 기억할 때 은혜를 받은 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여러분, 하나님은 반드시 악에 대해서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어떤 모양이든지 악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때로 하나님이 부재하시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인내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복수하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행하십시오.
그러면 주님이 여러분의 그 마음을 아십니다. 주님이 위로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으로 주님께 맡기고 무엇보다 주님의 위로를 사모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