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하나님께 하는 거짓말
본문: 사도행전 5장 1절 ~11절
설교자: 조정의

1. 배경(5:1-2)

아나니아와 그의 아내 삽비라가 오늘의 주인공입니다. 아마 이 부부의 이름이 익숙하신 분들은 이름을 듣자마자 부정적인 생각이 드실지도 모릅니다. 이 부부는 남편 그리고 아내 순서대로 한 날 한 장소에서 교회에서 헌금을 하다가 그 자리에서 즉사한 인물입니다. 어떻게 이런 괴상하고 무서운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히브리어로 아나니아의 이름 뜻은 “하나님은 자비롭다”(God is merciful), 아람어로 삽비라의 이름 뜻은 “아름답다”(beautiful)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마지막 모습은 자비롭지도 아름답지도 않았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1절을 보시면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함께 소유를 팔았습니다. 그 재산이 무엇인지 3절에 나오는데 바로 “땅”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땅을 판 돈의 일부를 떼어 자기 것으로 숨겨 두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를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와 바쳤습니다. 아내 삽비라 역시 이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나중에 그녀의 죽음에 이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2절에 누가가 사용한 표현 중 한 가지 거슬리는 표현이 있습니다. 바로 “감추다”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종종 재산을 팔고 그 일부를 헌금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럴 때 돈의 일부를 자기 것으로 “감추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재산을 팔아 그 중 일부를 하나님께 드렸다고 말합니다. 판 것의 일부를 드리는 것엔 문제가 없습니다. 헌금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즐겨 내는 것”(고후 9:7)이지 “무조건 판 것의 전부”가 아닙니다.

그런데 왜 누가는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라는 표현을 썼을까요? 특별히 이 표현은 70인역 성경에서 여호수아 7장에 사용된 표현입니다. 이스라엘 유다 지파 아간이 하나님께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졌다(감췄다)”라고 기록할 때 사용되었습니다(수 7:1).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의 첫 성 여리고를 쳤을 때, 하나님은 그 성에 속한 모든 것을 여호와께 온전히 바치고 그 바친 것 중에서 어떤 것이든지 취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하지만 아간은 그 명령을 어기고 재물의 일부를 취하여 자기 장막 밑에 감췄습니다. 그 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작은 성 아이를 칠 때 패배하게 하셨고 36명의 백성이 도망치다 죽임을 당했습니다. 

여리고 전쟁의 대승으로 백성의 기세가 등등하고 군사의 사기가 절정에 올랐을 그 때 한 사람의 범죄가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위기로 몰았습니다.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가 백성 전체에게 쏟아졌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아간과 그 아들, 딸들, 가축들,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아골 골짜기에서 돌로 쳐 죽였습니다. 범죄자가 제거됐을 때, 그제서야 여호와의 맹렬한 진노가 멈췄습니다(수 7:26).

누가는 아간의 사건이 지금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과 유사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를 치기 전에 길갈에 서 하나님의 백성, 언약의 백성의 징표인 할례를 받은 것처럼,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날 예루살렘에 있던 성도들이 성령의 강림하심을 받고 하나님의 교회로 세워졌습니다. 그날 더해진 성도만 삼천명이었습니다(행 2:41).

그 후 베드로가 예루살렘 성정 솔로몬 행각에서 복음을 선포했는데, 남자만 오천 명이 구원을 받았습니다(행 4:4). 하나님의 나라가 점점 확장되는 신나고 흥분되는 일이었습니다.

성도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있었는데, 아마 어떤 성도는 유대교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이유로 집과 회당에서 쫓겨나 경제적으로 궁핍한 상태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뒷짐지고 가만히 이를 지켜보지 않았습니다. 

4장 32절을 보시면 그들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했습니다. 네 물건 내 물건 하는 것 없이 그리 했습니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예수의 부활을 증언했을 때 성도들이 큰 은혜를 받고 밭과 집을 팔아 그 판 것을 사도들 발 앞에 두었습니다. 그러면 사도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었습니다. 요셉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한 대표적인 사람이었는데 그는 밭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행 4:32-37). 사도들은 그의 이름을 바나바, 위로의 아들이라 불렀습니다.

이 때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이런 교회의 자발적인 헌신과 섬김에 동참하고 싶었습니다. 자기 소유를 팔아 전부 사도들 발 앞에 바친 이들처럼 자신들도 그런 평가를 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바나바처럼 “위로의 아들”이란 말을 듣고 싶었을 것입니다. 자기들 이름의 뜻처럼 “아나니아, 당신은 참 자비롭습니다”, “삽비라, 당신은 참 아름답습니다”라는 평가를 받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그런 평가를 받되 땅을 판 값을 다 드리고 싶진 않았습니다. 땅 판 값의 일부만 드리되 사람들로부터는 모든 돈을 다 바친 자비롭고 아름다운 사람으로 대우받고 싶었습니다.

두 사람만이 이 일을 알고 있기에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속일 수 있지만 하나님은 속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도 베드로를 통해 이 일을 드러내셨습니다.

2. 아나니아의 죽음(5:3-5)

베드로가 아나니아에게 묻습니다.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3-4절)

베드로의 말을 잘 살펴보면 절대로 땅을 판 것과 그 일부를 하나님께 드린 점을 문제 삼지 않습니다. 땅을 팔기 전에도, 팔고 나서도 네 마음대로 할 수 있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아나니아가 자기 뜻대로 땅을 팔 수도 있고, 판 값을 자기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아나니아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무슨 거짓말이죠? 자기가 땅을 판 값의 전부를 하나님께 바쳤다고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아나니아의 마음에 사탄이 가득합니다. 사탄은 거짓의 아비요 속이는 자입니다(요 844). 아나니아의 마음에 속이려는 욕구가 가득하여 성도들을 속인 것입니다. 일부를 하나님께 드렸지만 전부를 바친것처럼 속인 것입니다. 베드로는 “너는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라 생각할지 몰라도 사실은 하나님께 거짓말 한 것이다”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리고 무서운 심판이 일어납니다.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즉시 그 자리에서 엎드러져 혼이 떠났습니다. 쓰러져 죽었습니다. 그 자리엔 사람들이 있었는데 얼마나 놀랐을까요? 아나니아는 잠시 기절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확실히 죽었습니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서 그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를 지냈습니다.

여러분, 주일 말씀이 끝나고 이곳을 빠져나가면서 저랑 악수하고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데 어떤 사람이 저랑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쓰러져 죽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참 기괴하고 무서운일 아닙니까? 

왜 죽었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지? 라고 물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지 못한 행동, 거짓된 행동을 해서 죽었다는 것을 알게되면 무서운 마음이 들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함부로 행동하지 말아야겠다. 하나님을 감히 속이려 들지 말아야겠다” 그런 경고를 받을 것입니다. 

아나니아의 이야기를 들은 모든 사람은 그런 경각심을 가졌습니다. 하나님 앞에 경건하고 정직해야겠다는 교훈을 확실히 받았습니다. 이런 일 이후에 그 누가 사도들 발 앞에 나와 거짓을 말하겠습니까? 하지만 여기 이 일을 듣지 못한 사람이 있으니 그녀는 바로 아나니아의 아내, 함께 돈을 감췄던 여인, 삽비라였습니다.

3. 삽비라의 죽음(5:7-11)

세 시간이었습니다. 남편이 죽은지 겨우 세 시간이 흘렀습니다. 어쩌면 아나니아는 아직 땅에 묻히기 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삽비라는 아무것도 모른채 들어왔습니다.

베드로가 그녀에게 묻습니다.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목숨이 달린 예/아니오 질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선한 양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남편과 합심하여 일부를 감추었다 할지라도 이 직접적인 질문에 양심이 찔려, “사실은 아닙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남편과 다를바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사탄이 그녀의 마음도 거짓으로 사로잡았습니다. “네 이것뿐입니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이렇게 판결을 내렸습니다.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9절)

너도 똑같구나? 너도 다 알고 의도적으로 속인 것이구나? 남편이 그리할지라도 아내가 말리고, 아내가 그리할지라도 남편이 말려야 할 것을, 서로 하나가 되어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하나님도 모르시겠지…하고 주의 영을 시험한 것. 그 대가로 베드로는 너도 곧 죽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9절)

남편을 묻은 사람들이 문 앞에 왔는데 곧 너도 죽어서 너의 시신을 그들이 메어 내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신기하죠? 문 앞에 젊은 이들이 왔다는 것도 베드로는 알았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말처럼 삽비라는 그 자리에서 엎드러져 혼이 떠났습니다. 남편처럼 쓰러져 죽은 것입니다. 베드로의 말처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그녀의 시신을 보고 메어다가 남편의 곁에 장사지냈습니다.

부부가 세 시간 간격으로 죽어 나간 이 교회, 무섭지 않습니까? 금실 좋은 부부가 서로 한 날 한 시에 죽자고 말하는데, 이런 죽음을 함께 맞이하고 싶은 부부는 없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었던 온 교회 그리고 교회 밖 사람들은 다 크게 두려워합니다(11절).

하나님 앞에서 정직, 하나님을 속이지 않는 정결한 마음, 선한 양심,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이 일을 들은 사람은 모두 확실하게 알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어쩌면 이 사건을 보면서 베드로가 좀 너무하다는 생각을 하실지 모릅니다. 자기도 세 번 주를 부인하는 크나큰 죄를 저질렀지만 주의 자비로 회복을 했던 사람인데, 두 부부를, 물론 잘못은 했지만, 회개할 기회 없이 그 자리에서 죽게 한 것이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아간이 금 한덩이와 은, 외투 한 벌을 감춘 대가로 온 가족의 목숨을 내놓아야 했던 것이 지나친 형벌이란 생각이 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의 이해하지 못할 사건을 볼 때 사도 바울과 같은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라는 자세입니다(롬 15:4). 바울은 과거에 기록된 사건을 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고전 10:9).

이것이 오늘 사건을 바라보는 우리가 품어야 할 마음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교훈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하나님을 시험하다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하나님은 교회의 정직을 원하십니다. 거룩하고 정결한 교회를 원하십니다. 수천명의 성도가 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서로 헌신하고 봉사하고 구제하기에 힘쓸 때 그 교회 한 부부가 하나님을 시험하는 죄를 범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두 사람을 제거하여 모든 교회를 두렵게 함으로 교회의 거룩, 교회의 정직을 지키십니다.

교회의 정직이 지켜졌을 때, 사도행전 5장 12-16절의 기록을 보면 어떤 일이 일어났나요? 사도들의 손을 통해 표적과 기사가 일어났고, 믿는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모였으며, 백성의 칭송을 받았습니다. 믿고 주께로 나오는 무리가 많아지고 큰 무리가 되었습니다. 질병을 가졌던 이들이 사도들 앞에 나와 고침을 받았습니다. 교회가 계속해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한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여러분 가운데 한 사람도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분이 없기를 원합니다. 아간과 같은 사람이 없기를 원합니다. 성도들에겐 정직하고 좋아보이는 성도이지만, 실상은 거짓으로 하나님과 성도를 속이고 있는 분이 없기를 원합니다. 부정직은 정직한 크리스천 공동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무서운 죄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절대 하나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거짓을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교회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거짓된 이들을 드러내어 꾸짖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직하시기 바랍니다. 교회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여러분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하는 거짓의 아비 사탄의 목소리에 귀를 막으십시오. 사람에게 좋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좋게 하는 정직한 크리스천이 되시기 바랍니다. 

가끔 저는 죄의 유혹을 받을 때 이런 생각으로 죄를 물리칩니다. 유평교회 귀한 성도들을 섬기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내가 이런 죄를 선택하고 즐긴다면 하나님은 분명 나 뿐만 아니라 우리 성도들에게 내 죄의 결과를 물게 하실 거야. 그러면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다윗이 인구조사를 하고 나서 그 죄의 결과로 백성이 고통받을 때 심히 괴로워했던 것처럼 우리는 이런 건강한 두려움을 가져야 합니다. 나의 부정직함으로 교회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속이는 죄, 하나님을 시험하는 죄, 정직하지 못한 죄를 강력하게 거부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거룩한 영광을 깨끗한 교회를 통해 세상에 선포하기 원하십니다. 세상이 그 부도덕함을 염려하는 교회들이 무수히 넘치는 세상에서, 우리 유평교회가 그 하나님의 영광을 찬란하게 드러내는 정직한 교회가 되는 데 우리 모두 한 마음이 되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