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하나님께서 보시는 사람

본문: 이사야 66장 1-4절

설교자: 최종혁

 

그동안 우리는 <너희 하나님을 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이사야의 몇 말씀을 통해서 살펴봤다. 결국 우리 지금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인데, 그 관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되어 있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생을 지금 이 땅에서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 반대로 우리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바르게 바라본다면, 지금의 상황이 어떻게 달라지더라도 우리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영생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관계”라면 일방적일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즉,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한만큼 (실상은 그 이상으로)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느냐가 중요하다. 그래서 시리즈의 마지막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는 것에 대해서 나누기 원한다. 첫째로는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시는지가 중요하다는 사실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다음으로는 하나님께서 나를 보시는 기준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것이다. 그리고 끝으로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생각해 볼 것이다.

사실: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이 표현에서 강조되는 것은 “그 사람”이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잠시 후에 살펴볼 것이다. 그 전에 하나님께서 “돌본다고” 하시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야한다. 다른 번역들을 보면 좋아하다, 굽어 살피다, 보살피다 등으로 번역되었다. 이 단어는 단순히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본다’는 의미로 사용될 때도 있지만, 오늘 본문 같은 맥락에서는 ‘주목해서 보다’는 의미로 사용될 때가 많다. 즉, 여럿 중에 하나님께서 특별히 주목해서 이 사람을 보신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시편에서 하나님께 왜 얼굴을 숨기고 보지 않으십니까라고 탄식하면서 하나님께 저를 좀 봐주십시오라고 기도할 때 의도하는 바로 그 의미다. 제사장의 축복 기도에서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가 바로 그 의미다(민 6:25). 단순히 눈으로 보는 것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호의를 가지고 보는 것을 의미한다. 은혜를 베푸시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는 “그 사람에게 내가 은혜를 베풀려니와”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그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나누면서 하나님의 사랑 혹은 은혜가 크게 두 종류가 있다는 얘기를 했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일반적으로 베푸시는 은혜가 있고 하나님께서 특정한 사람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있다. 이 중 구원하시는 사랑(은혜)은 모두에게 똑같이 베풀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그 뜻에 따라서 미워할 자를 미워하시고 사랑할 자를 사랑하신다. 누구도 이런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에 의문을 제기할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과 이런 사랑의 관계에 들어온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믿고 구원 받은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는 것이다. 영생을 얻은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는 것이다. 성경은 이 구분을 모호하게 하지 않는다.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은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모든 사람이 영생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는다. 분명히 믿는 자만이 영생을 얻는다고 말한다. 즉 이들만이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안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이들이 하나님께서 특별히 보시는 사람이다.

그럼, 여기서 한가지 질문을 할 수 있다. 영생을 얻은 자, 즉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안에 들어온 사람들은 다 똑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까?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로마서 8장이 선포하는 것처럼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동일하다. 허물과 죄로 죽었다가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신 사람이 다시 죽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한번 영생을 얻었던 자가 어떤 일로 인해서 영생을 잃게 되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모두에게 동일하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친밀하게 경험하는 것은 조금 다른 얘기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15:10–11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예수님께서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이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내 사랑에서 끊어질 것이다”는 의미를 내포하진 않는다. 예수님은 계명을 지키는 자가 참된 제자이고 그들이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한다고 말씀하셨을 뿐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유추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계명을 온전히 지키셨기 때문에 그의 사랑 안에 온전히 거하셨다. 예수님의 인성의 측면에서 봤을 때 예수님은 사람이 하나님과 누릴 수 있는 가장 친밀한 관계를 누리셨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다르게 말하면 죄의 문제라고도 할 수 있다. 이사야 59:2는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라고 말한다. 즉, 하나님과 사람 사이 관계의 문제를 만드는 것이 죄라는 말이다. 시편 25:14은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나님을 경외하여 순종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자신을 더 나타내신다는 말이다.

이런 말씀들을 종합해보면, 결국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느냐에 따라 혹은 반대로 말하면 얼마나 죄에서 멀어졌느냐에 따라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 차이가 있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 사실 너무 당연한 얘기다. 요한일서에서 요한이 밝히는 것처럼 하나님은 빛이시고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는데, 우리가 어둠 가운데 행하면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거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요일 1:5-6). 죄에 가까운 만큼 하나님에게서는 멀어진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서 멀어진다.

즉, 이 말은 하나님께서 나를 보셔서(은혜를 베푸셔서) 내가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었다고 해도 계속해서 내가 하나님께서 보시는 사람이 되어야 그 영생의 삶을 제대로 누리며 살아갈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영생을 얻었다고 해서 다 똑같은 은혜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닌 것이다. 애초에 사람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한도를 다르게 설정해 두셨다는 말이 아니라, 한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어떤 사람은 1%도 안되게 경험하고, 어떤 사람은 훨씬 더 많이 경험할 수 있다는 말이다.

죄로 인해 끊어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뿐 아니라 그 관계가 더욱 깊어져야 한다. 둘 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즉 “그 사람에게 내가 은혜를 베풀려니와”라고 말씀하실 때, 결국 우리는 지금 나와 하나님의 관계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끊어진 관계에 있다면 회복을 생각해야 하고, 이미 회복된 관계에 있다면 더 깊은 관계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 어떤 사람에게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 보이실 것인지를 말씀하고 계신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저는 이런 사람이 좋아요”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잘 듣고 그런 사람이 되려고 할 것이다. 지금 이 말씀은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한 말씀이다. 우리 삶에 있어 하나님의 은혜만큼 중요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귀 기울여서 이 말씀을 들어야 한다.

기준: 겉이 아닌 안의 문제

66:2 …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하나님은 직접 세 가지를 말씀하셨다.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하나님 말씀을 듣고 떠는 자가 바로 하나님이 보시는 사람, 은혜를 베푸시는 사람이다.

가장 먼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겸손’의 성경적 표현이다. 겸손이라고 할 때 우리는 자신을 드러내어 자랑하지 않고 낮추는 것만 생각하지만, 성경은 그보다 더 본질적인 것을 말한다. 겸손한 사람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다. 우리가 55장에서 살펴봤었던 “돈 없는” 사람인 것이다. 스스로 무언가를 가졌다고 생각하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아무 것도 없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심령이 가난한 자”도 정확히 이런 사람이다. 영적으로 파산한 자이고 스스로 그 사실을 알고 인정하는 자다.

하나님은 이사야 57:15에서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라고 이미 말씀하셨다. 잠언 3:34는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라고 말한다. 마음이 가난한 자, 겸손한 자를 하나님은 보신다. 그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다.

오해하지 말아야할 것은 이것은 가장 기본적으로 ‘마음의 태도’다. 정말로 그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지 그런 척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선거 때마다 정치인들은 구멍난 신발을 신고 헤어진 양복을 입는다. 지하철을 타고 시장에 가서 떡볶이와 어묵을 먹는다. 그러면서 자신의 검소하고 소박하고 겸손한 이미지를 어필하려고 한다. 그런 건 그런 척하는 것일 뿐이다. 그 마음에 진심은 없다.

성경이 말하는 겸손도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보면서 그 사람이 자기 옷을 더럽히면서 남을 도와주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을 겸손하다고 하시고 그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사람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높이기 위해 스스로 낮추는 일도 많이 한다. “아유, 목사님이 왜 이런 일을 하려고 하세요”라는 말을 듣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에게는 겸손처럼 보이겠지만, 하나님은 그런 것에 속지 않으신다. 

겸손은 그 마음이 정말 가난한 것이다.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낮아져 있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진 것이 없고 드릴 것이 없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선도 행할 수 없음을 아는 것이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은 보신다.

다음으로 심령에 통회하는 사람이다. 여기서 “통회한다”는 단어의 어원적 의미는 “불구가 되다”다. 그래서 므비보셋이 다리를 “절었다”고 말할 때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따라서 문자적으로 번역을 하자면 심령에 통회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불구가 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표현은 마음이 가난한 것에서 더 나아가서 자신의 상태를 더욱 절망적으로 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누군가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을 인지하는 상태다. 신약의 복음서에서 우리는 종종 이런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그들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구걸하는 것 뿐이다. 즉, 남의 도움을 받는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대부분 그렇게 구걸을 하러 가는 것조차도 스스로 할 수 없어서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즉,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생존도 할 수 없는 절대적으로 의존적인 상태가 이 표현에서는 강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 심령에 통회하는 것이다.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비유에서 성전에 올라갔던 바리새인과 세리의 모습이 이 차이를 가장 잘 보여준다.

18:11–12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바리새인을 보라. 그는 하나님 앞에 자신이 가진 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고 하나님께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남들과 같은 죄를 범하지 않았고 오히려 금식도 하고 십일조도 잘 드린다. 하나님의 은혜 받기에 자신은 충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 마음이 가난하지 않고 심령에 통회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세리를 보라.

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세리는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한다. 고개를 들어 하나님을 볼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도에서도 그는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을 구한다. 하나님, 저에게 이것만 해주시면 제가 이렇게 하겠습니다라는 식으로도 말하지 않는 것이다. 온전히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무엇을 해주셔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영적으로 자신이 불구인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심령에 통회하는 모습이다.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알고 온전히 하나님께 의존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바로 이 세리를 보셨다고 말씀하셨다.

18: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내가 할 수 없음을 알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전적으로 구하는 사람을 보시고 은혜를 베푸신다.

셋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떠는 사람이다. 하나님 말씀에 떤다는 것은 곧 순종을 의미한다. 말씀에 따르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강조되고 있는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순종보다 그 마음에 있는 떨림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그 태도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는 곧 하나님에 대한 태도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말씀으로 자신을 드러내시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관심이 없으면서 하나님과 좋은 관계 속에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마음이 가난한 것, 심령에 통회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에 떠는 것은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3-4절을 보면 하나님은 말씀에 순종하지는 않으면서 무언가 다른 것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은 것처럼 포장하려는 사람들, 하나님에게서 은혜를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66:3–4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이 하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이 하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이 하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행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4나 또한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듣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며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라 하시니라

4절을 보면 이 사람들은 하나님이 보시는 사람들이 아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호의를 보이지 않으신다. 은혜를 주시지 않으신다. 4절에서 “유혹”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유혹보다는 ‘변덕’이나 ‘심판’을 의미한다. 아마 예기치 않은 심판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즉, 3-4절에서 언급되는 사람들은 그래도 자신들이 했던 어떤 일들을 통해 무언가 좋은 것을 하나님께 기대했겠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이 임하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께 잘못된 예배를 드리거나 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하나님의 길이 아닌 자기의 길을 택하고 그 마음이 선한 것이 아니라 가증한 것을 기뻐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악을 행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을 택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떨지 않았다. 순종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소를 잡아 하나님께 드렸다. 어린 양으로 제사를 드렸다. 예물을 바쳤다. 분향했다. 이 모든 예배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다시 들어보라.

66:3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이 하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이 하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이 하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행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마음이 가난하지 않고, 심령에 통회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떨지 않으면서 이렇게 하나님을 예배했던 모든 것이 하나님께는 가증한 행위였던 것이다. 

사람들은 여러 생각을 가지고 이렇게 했을 것이다. 그냥 아무 생각없이 예배를 드린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어쨌든 이렇게 예배를 드리니까 그렇게 하지 않는 것보다는 하나님이 기뻐하실 거라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드린 예배로 인해 하나님께서 복주실 것을 기대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혹은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없고 그저 이렇게 예배하는 것을 통해 사람들이 자기를 잘 봐주기를 기대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사람들은 이들의 예배를 보면서 이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건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판단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보시는지, 하나님이 무엇을 보시는지, 그래서 나와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남이 나를 봐주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나를 보고 있는지, 그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를 중요하게 여긴다. 사실 과거에도 그렇긴 했다. 좋은 것은 없어도 있는 척, 나쁜 것은 있어도 없는 척하며 남에게 잘 보이는데 신경을 썼다. 지금은 그렇게 하는 것이 훨씬 쉬워졌을 뿐이다. 디지털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진과 영상으로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줄 수 있다. 필터와 보정을 통해 최대한 내가 원하는 모습을 남에게 보여줄 수 있다. 그것이 실제 내 모습이 아니라고 해도 상관하지 않는다. 잘 보여질 수 있으면 그만이고, 그것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고 좋아요만 눌러주면 그만이다.

이런 세상에 살면서 우리가 쉽게 빠질 수 있는 두 가지 어리석음이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관심과 좋아요보다 사람의 관심과 좋아요를 중요하게 여기는 어리석음이다. 사실 하나님의 어떤 분이신지 안다면 하나님 한 분의 관심과 평가가 세상 모든 사람들의 관심과 평가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주권자이시고 심판자이시기 때문이다. 올림픽에서 아무리 많은 관중이 10점을 줘도 심판이 0점을 주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시느냐가 중요하다. 이것을 반대로 생각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다른 어리석음은 필터와 보정을 통해 만들어진 내 모습을 진짜 내 모습으로 착각하는 어리석음이다. 겉으로 보이는 무언가를 가지고 실체를 감추어 두고는 본인 조차도 보이는 그것을 실체로 착각하고, 하나님도 그렇게 보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착각이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과 생각을 모두 보실 수 있는 분이시다. 내가 원하는 것만 하나님께 보여드릴 수 없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신다.

3-4절에서 하나님께서 묘사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 둘 중 하나 혹은 둘 다의 어리석음에 빠져있었다. 우리도 그럴 수 있다. 하나님보다 사람을 중요하게 여기며 예배할 수 있다. 마치 하나님이 내 마음과 상관 없이 내가 하는 일을 통해서 기뻐하실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 그들의 예배는 살육의 현장으로 보였다. 그들이 드리는 아무리 좋은 제물도 더러운 것으로 보셨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는 우상 숭배였다. 이 말은 우리에게 대해서도 하나님은 똑같은 평가를 하실 수도 있으시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이런 예배를 정말로 싫어하신다.

6:6–8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7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8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말라기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헛되게 드려지는 예배를 막기 위해서 누가 성전 문을 닫았으면 좋겠다고 한탄하기도 하셨다(말 1:10).

소를 잡아 드리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그들의 마음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양을 드리고 다른 제물을 드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이 아닌 자기 길을 택하면서 마치 그렇지 않은 듯 드리는 모든 예배를 기뻐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미워하셨던 것이다. 끔찍한 일로 여기셨던 것이다. 역겨워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가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드러냈고, 그것이 곧 하나님과 그 사람의 관계를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여전히 자기 길을 내려놓지 않고 고집한다면, 그 사람이 겉보기에 얼마나 대단한 예배를 드리고, 얼마나 대단한 것을 하나님게 바칠지라도 아무 의미가 없다. 실제로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66:1–2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2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

이게 무슨 말씀인가? 하나님은 이미 모든 것을 가진 분이시라는 말이다. 따라서 아무리 대단한 것을 하나님께 바쳐도 하나님께서 이미 가지고 계신 것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우리는 잘못한 것에 대해서 ‘보상(배상)’을 한다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 잘못한 것은 어떻게 되돌리거나 할 수 없을 때 다른 것으로 보상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피해자에게 필요한 것으로 보상을 해야 한다. 일반적인 상황에서 돈이 보상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정말로 돈이 많은 사람 혹은 돈을 의미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돈으로 보상할 수 없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있어서 우리가 잘못한 것에 대해서 우리는 ‘보상’할 수 없다. 하나님 제가 이런 죄를 지었으니 이번에는 헌금을 두 배로 하겠습니다라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으니 교회에서 봉사를 더 많이하겠습니다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무엇도 부족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그 어떤 것으로도 보상할 수 없다. 죄는 회개 외에는 어떤 해결책도 없다. 가난한 마음으로 통회하는 심령으로 하나님 말씀 앞에 떠는 것 외에 다른 무엇도 할 수 없다.

모든 것을 가지신 하나님께 겨우 뭐 하나 드렸다고, 어떤 봉사 하나 했다고, 그것이 하나님께 무슨 대단한 보탬이라도 된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내가 아니면 우리 교회에 큰 일 날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 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다. 다만 하나님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마음을 그렇게 표현하라고 하셨던 것 뿐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우리의 마음을 그렇게 표현할 수 있게 하셨을 뿐이다. 하나님께서 보기 원하시는 것은 바로 그 마음이다. 따라서 그런 마음 없이 하는 모든 예배와 봉사는 그야말로 아무 의미 없는 일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시는 기준은 겉이 아니라 안이다. 사울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중심을 보신다. 겉으로 어차피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에게 이는 좋은 소식일 것이다. 반대로 할 줄 아는 것은 겉을 꾸미는 것 밖에 없었던 사람에게는 나쁜 소식일 것이다. 어느 쪽이든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내가 무엇을 해서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내가 받은 은혜가 있다면 그것도 내가 무엇을 해서 받은 것이 아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내가 은혜 받기에 합당하지 않음을 알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떨고 순종하며 사는 자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고 영생의 참 즐거움을 누리게 하신다.

적용: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실 가장 어려운 질문이다. 차라리 안이 아니라 밖이 문제라고 하면 어떤 면에서는 쉬워진다. 무엇을 해야할지 명확해지기 때문이다. 1억을 헌금하라고 하면 그렇게 하면 된다. 물론 진짜 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못할 사람이 있지만, 했는지 안했는지 모호하지는 않다. 매주 빠지지 않고 교회에 나오면 하나님께 은혜 입는 자가 된다면 가능성 여부를 떠나 명확하다. 그런 면에서 적용은 쉬워진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근본적으로 밖이 아니라 안이다.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왜 하느냐다. 마음을 보신다. 어떻게 해야할까? 어떻게 마음이 가난해지고 심령에 통회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떨 수 있을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보시는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내가 절실히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의 눈으로 바라봐주지 않으시면 정말로 내 삶이 파멸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지금 내 삶이 괜찮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말이다. 하나님 없어도 충분히 잘 살고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나서 생각해 보라. 어떻게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바라봐 주시게 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내가 입을 자격을 갖출 수 있을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라.

이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내가 어떤 존재인지 제대로 알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늘을 보좌로 삼고 땅을 발판으로 삼으시는 분이시다. 내가 아무리 대단한 어떤 일을 해도 하나님께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고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럼,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자격을 갖출 수는 없다. 그럼 남은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 때 하나님은 말씀하실 것이다.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하나님은 겸손의 왕이신 예수님을 보여 주신다. 그럼 예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11:28–29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님이 바로 온전히 겸손하고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며 순종하신 유일한 분이시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 사랑하고 기뻐하시는 아들이시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음을 알고 바로 이 예수님을 의지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다.

성경의 놀라운 역설이 여기에 있다.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하지만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절대 할 수 없었던 그 일을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해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 절대로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고 구원을 받을 수 없던 내가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겸손히 통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한다면 그리고 믿음으로 그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인 예수님을 받아들인다면, 나의 죄는 예수님의 것이 되고 예수님의 의로운 행위가 나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기꺼이 그렇게 하겠느냐는 것이다. 기꺼이 내가 지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더 중요함을 받아들이겠냐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생을 얻기 위해, 그 은혜를 얻기 위해,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기꺼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겠느냐는 것이다. 거기에 나의 삶과 운명이 달려있다.

내가 구원을 받았다는 말은 내가 기꺼이 그렇게 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래서 잊지 말아야할 것은) 그것이 단회적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사람이다. 그래서 계속해서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하나님을 말씀을 듣고 떨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여전히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계속해서 봐야 한다.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지를 보지 않으면 나의 작음을 제대로 볼 수 없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하신다는 사실을 제대로 보지 않으면,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도 제대로 보지 못한다. 결국 하나님께서 보시는 사람이 되려면 나는 계속해서 하나님을 봐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이런 약속을 주셨다.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주시는 이 모든 것으로 우리는 영생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다. 그래서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 것이다. 지금도 충분히 괜찮다는 생각을 버리고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라. 하나님 앞에서 더욱 낮아지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라. 항상 말씀에 두려워 떨며 순종하라. 그리고 그런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라. 그러기 위해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라.

도전

지난 몇 주간 우리는 하나님을 봐야한다는 사실을 이사야의 말씀을 통해 배웠다. 사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이 조금은 막연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나님은 우리 눈으로 보이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시지만, 그렇다고 숨어계시지도 않으신다.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내시는 분이시다. 

65:1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막연할 수 있고, 당장에 어떤 결과가 드러나지 않을 수 있지만, 계속해서 하나님을 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계속해서 배우고, 그 말씀에 순종하면서 하나님을 경험해야 하는 것이다. 확신 가운데 그렇게 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보이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렇게 하나님을 보는 자를 하나님이 보시겠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주실 은혜를 기대하며, 하나님과 함께 사는 그 삶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