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본문: 누가복음 2장 8~20절
설교자: 이병권
이틀 후면 크리스마스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올해는 코로나로 인해 예년과 같은 크리스마스는 아닌 것 같습니다. 조금 특별한 크리스마스 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크리스마스의 의미가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중요함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상황과 상관없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은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정말로 놀랍고 복된 소식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대로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그럼 여러분에게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소식, 2천 년 전에 있었던 사건이 정말로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되십니까? 혹시 너무 익숙해져서 그냥 크리스마스가 되었나보다 하며 별 느낌 없이 별다른 생각 없이 그렇게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고 계신 것은 아닙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이 여러분에게 큰 기쁨이 되는지요?
어쩌면 지금 우리의 상황이나 계속 듣는 소식이 안 좋은 소식들이라 코로나로 인해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고 있어서 크리스마스를 생각할 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코로나 때문에 기뻐하기 어렵다 말하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때일수록 더 분명해지는 것은 ‘무엇이 참된 기쁨이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정말 기쁨이 되는 것이 무엇일까요? 어려운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 기쁨을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코로나 백신이 기쁨의 소식이 될까요? 그럴 수도 있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때일수록 더욱더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왜 예수님의 오심이 우리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되는지 알아야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계속해서 크리스마스를 다른 날로 바꾸려고 애쓰기 때문입니다. 연인들이 데이트하는 날, 밤을 지새우며 노는 날, 선물을 주고받는 날, 루돌프와 산타, 화이트 크리스마스, 뭔가 특별한 이벤트와 볼거리를 만들고 사람들이 크리스마스의 참 의미를 생각하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 마음을 빼앗고 우리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하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를 통해 누려야 할 참 기쁨을 다른 기쁨으로 일시적이고 낮은 차원의 기쁨으로 대체하려고 합니다.
마치 이런 겁니다. 정말 놀랍고 아름다운 광경을 보고 사람들이 손짓합니다. ‘저기를 보세요. 저 아름다운 모습을 주목해보세요. 놀랍지 않나요?’ 그런데 사람들은 정작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보지는 않고 손가락만 보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가 의미하는 것을 보라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보라고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오셨는지 예수님의 오심이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예수님을 가리키는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지 않고 손가락만 봅니다. 이런 상황이기에 우리는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손가락이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크리스마스가 왜 우리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되는지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최초의 크리스마스, 누가가 기록한 목자들이 경험한 첫 번째 크리스마스를 살펴보면서 크리스마스가 왜 우리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인지 생각해보고 그에 대한 교훈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 땅에서의 첫 번째 크리스마스를 맞이한 목자들을 만나보겠습니다.
눅 2:8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그 지역이라는 것은 이전 단락에서 언급했던 베들레헴을 말합니다. 목자들은 밤중에 베들레헴 근처 어느 들에서 양 떼를 돌보고 있었습니다. 목자들이 몇 명이었는지 누구였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다른 정보는 없습니다. 다만, 목자들이 한 명이 아니라는 사실만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였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첫 번째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으로 선택하신 목자들은 여느 때와 같이 밤중에 들짐승이나 도적으로부터 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천사가 그들 가까이 그 곁에 나타난 것입니다.
눅 2: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만약에 여러분이 이런 일을 겪는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어느 날 밤에 천사가 눈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어떨까요? 캄캄한 밤에 갑자기 주위가 환하게 밝아지면서 누군가가 곁에 서있습니다. 정말 심장이 내려앉는 것처럼 깜짝 놀라며 주저앉지 않을까요? 비명을 지르며 사람들을 부르지 않을까요? 아마 목자들도 그런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목자들도 크게 무서워합니다. 이 일은 정말 무서워할 수밖에 없는 초자연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경험한 적도 없고 다시 경험할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천사는 이렇게 무서워하고 있는 목자들을 진정시키면서 자신이 그들에게 온 목적을 알려줍니다.
눅 2: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목자들은 천사를 보고 무서워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 앞에 있는 천사는 목자들이 봐야하는 것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입니다. 목자들은 봐야하는 것은 천사가 아닙니다. 그래서 천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이런 말입니다. ‘나를 보고 무서워말고 내가 전하는 소식을 보라’
천사가 전하는 소식은 두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천사가 전한 소식은 큰 기쁨의 소식입니다. 이 소식은 모든 사람에게 놀랍고 큰 기쁨을 주는 소식입니다. 물론,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소식들은 많이 있습니다. 크고 작게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작은 것입니다. 지금 천사가 전하는 소식은 그와 비교할 수 없는 큰 기쁨입니다. 영원한 기쁨을 주는 소식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천사가 전한 소식은 좋은 소식입니다. 천사가 전한 소식은 큰 기쁨의 소식일 뿐만 아니라 좋은 소식입니다. 사실, 우리에게 기쁨을 주기는 하지만 우리에게 좋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기쁨을 주지만 실제로는 해로운 것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소식은 큰 기쁨이 될 뿐만 아니라 좋은 것입니다. 사람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가장 중요한 필요를 채우는 소식입니다. 참된 복이 무엇인지 알고 누리게 하는 좋은 소식입니다. 복음입니다.
천사가 전하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바로 이것입니다.
눅 2: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다시 네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때와 장소, 그리고 대상과 내용입니다.
첫째, 때에 대해서 언제입니까? “오늘”입니다. 오늘 이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동안의 오랜 기다림이 모두 끝이 났습니다. 드디어 오늘 이 일이 성취되었습니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이미 이루어진 일입니다.
둘째, 장소에 대해서, 어디입니까? “다윗의 동네”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일은 다윗의 자손을 통해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에서 성취된 일입니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약속대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셋째, 대상에 대해서, 누구를 위한 소식입니까? “너희를 위하여”입니다. 이 일은 너희를 위한 일입니다. 이 소식을 듣는 목자들을 위해, 뿐만 아니라 “온 백성”을 위해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미치는 일입니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우리를 위해 이루어진 일입니다.
넷째, 내용에 대해서, 어떤 소식입니까?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천사가 전한 소식의 핵심입니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구주, 다시 말해 구원자가 나셨다는 소식입니다. 천사는 구주에 대해서 그리스도와 주라는 호칭을 덧붙입니다. 이 땅에 태어나신 구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또한 이 땅에 태어나신 구주는 주이십니다. 주권자 되시는 주님,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이신 구주가 나신 일입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태어난 아기는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구원자입니다.
이어서 천사는 태어난 아기에 대한 중요한 사실을 알려줍니다.
눅 2: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목자들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표적이 됩니다. 이것이 표적이 되는 것은 구유 때문입니다. 태어난 아기가 강보, 쉽게 말해 포대기에 싸여 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태어난 아기가 구유에 뉘어 있는 것은 아주 이상한 일입니다. 구유는 짐승의 여물통입니다. 갓 태어난 아기를 둘 만한 곳이 아닙니다. 그런데 다윗의 자손으로 이 땅에 오신 구주 예수님은 짐승을 위한 장소에 태어나셨고 여물통에 누워계셨습니다. 사람이 되신 하나님은 너무도 초라하고 어울리지 않는 곳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표적이 되는 것입니다. 특별한 사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천사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목자들에게 전했을 때 수많은 하늘 군대와 천사들이 이 소식에 대해서 응답합니다. 이 소식에 대한 하늘의 반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눅 2:13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수를 알 수 없는 수많은 하늘의 군대와 천사들이 함께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그들이 함께 부른 찬송은 이러합니다.
눅 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예수님이 아기로 태어나신 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사람이 되셔서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셨고 그 모든 약속을 성취하심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늘은 이 소식이 하나님께 영광이 됨을 찬송합니다. 그리고 땅에서는 이 소식으로 인해 사람들이 평화를 누립니다. 여기서 말하는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그런 평화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평화를 말합니다. 회복된 관계를 말합니다. 이 평화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에게 임하게 될 것입니다.
천사가 전한 소식에 대해서 하늘이 반응했고 이어서 땅이 반응합니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들은 목자들이 움직입니다.
눅 2:15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목자들은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자신들이 들은 것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 하며 가서 보자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알려주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직접 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목자들은 아기를 찾으려고 재빠르게 움직입니다. 아기를 만나기 위해 빨리 갑니다. 그리고 아기를 찾았고 천사가 말한 그대로 구유에 있는 아기를 봅니다.
눅 2:16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눅 2:17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전하니
아기를 만난 목자들은 이 아기를 찾아오게 된 이유를 사람들에게 전합니다. 그리고 목자들이 전한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또 다른 사람들의 반응으로 이어집니다.
눅 2:18 듣는 자가 다 목자들이 그들에게 말한 것들을 놀랍게 여기되
여기 말씀에 듣는 자는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듣는 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요셉과 마리아 외에 다른 사람들도 이 소식을 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목자들의 전하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놀람으로 반응합니다. “놀랍게 여기되” 이 놀람은 단순히 한 번 놀라움을 보였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마리아의 반응과 대조됩니다.
눅 2:19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
원래 19절은 ‘그러나’로 시작됩니다. 소식을 듣고 놀라기는 했지만 그것으로 끝났던 사람들과는 달리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합니다. 전해들은 말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지속적으로 생각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식의 대한 반응은 다시 목자에게로 이어집니다.
눅 2:20 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목자들은 천사를 통해 들은 모든 것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보았습니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직접 확인했고 그 소식을 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목자들은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송했고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갑니다. 천사가 목자들에게 전한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사람들 마음에 역사했고 전달되었으며 사람들의 반응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렇게 본문을 살펴보았습니다. 천사가 목자들에게 전한 소식, 예수님이 이 땅에 나셨다는 소식이 왜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너무도 분명하고 확실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 아기로 태어나신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며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누구도 예외 없이 구주가 필요합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모든 사람이 구주가 필요한데 그런데 구주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중에는 그 누구도 구주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이 되셨고 우리를 위한 구주가 되셨습니다. 구주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그 일이 하나님께 영광이고 우리에게 평화입니다. 하나님의 원수였던 우리가 평화를 누립니다. 물론, 여전히 우리는 죄 가운데 싸우고 있고 치열한 전쟁 중에 있지만 예수님이 이미 승리하셨기에 우리는 그 안에서 평안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오심이 우리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 소식이 모두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소식을 들은 사람의 대조되는 두 반응이 있었던 것처럼 그리고 실제로 우리의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의 반응처럼 모든 사람이 복음을 듣고 받아들이고 합당하게 반응하는 것은 아닙니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복음이 전해졌을 때 사람들은 다양하게 반응합니다. 어떤 사람은 듣지 않습니다. 관심이 없습니다. 딴 생각을 합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립니다. 그냥 멍하니 있는 겁니다. 이런 모습은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 교회 밖에서만 볼 수 있는 일일까요? 안타까운 사실은 이런 태도를 교회 안에서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전해졌을 때 교회에서도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들을 볼 수 있습니다. 열심히 말씀을 듣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냥 그 자리에서 자신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때때로 말씀을 듣고 놀라기는 하지만 잠깐 반응하기도 하지만 그것으로 끝입니다. 말씀으로 인해 삶이 변하거나 내 생각이나 행동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말씀은 말씀이고 나는 나입니다. 나는 말씀과 별개로 살아가는 겁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목자들의 소식을 들은 사람들처럼 말씀을 듣고 놀랍게 여기지만 그것으로 멈춥니다. 선을 긋고 더 나아가지 않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해야 할 반응은 단순히 놀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마리아가 그랬던 것처럼 들은 말씀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간직하고 다시 되새기며 이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들은 말씀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더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으로 달라질 수 있습니다. 말씀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가 자주 범하는 실수가 있습니다. 천사가 전한 큰 기쁨의 좋은 소식과 목자들이 전한 큰 기쁨의 좋은 소식, 서로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두 소식이 다를까요? 내용은 같습니다. 다를 바 없습니다. 하지만 소식을 듣는 사람은 어떻게 느낄까요?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천사가 전하면 사람들은 다르게 듣게 됩니다. 목자가 전하는 소식보다 훨씬 더 놀랍게 듣고 더 권위 있게 듣습니다. 전하는 사람이 누구냐 하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요소이긴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필요이상으로 전하는 사람에게 주목하느라 함정에 빠져서 말씀을 놓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전하는 사람을 보고 말씀에 대한 태도를 달리하여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천사가 전한 소식을 들은 목자들은 놀라움으로 듣고 합당하게 반응합니다. 하지만 목자들이 전한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놀라움으로 듣지만 끝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누가 전하느냐가 아니라 전달되는 그 메시지입니다. 천사가 전하든 이름 없는 목자가 전하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마리아처럼 이름 없는 목자가 전한 소식이라 하더라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듣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정말 우리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듣고 믿어 하나님이 허락하신 복을 누리는 것처럼 계속해서 우리에게 전해지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수많은 은혜들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는 손가락일 뿐입니다. 그러니 손가락을 보지 말고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을 보십시오. 저를 보지 마시고 제가 전하는 메시지, 그 말씀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에 집중하시고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이 강단에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진리를 선포한다면 마음을 열고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에 집중하시고 반응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영적인 건강을 지키고 성장으로 인도할 것입니다.